IV. 近代 春香敍事의 脫歷史化
2) 사랑과 저항의 私事化
신분제를 후경화하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의 성취로 주제를 집중한 근 대 춘향서사는 춘향과 이도령의 관계를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에 비해 수평 적인 관계로 형상화한다. 이는 우선 춘향의 양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통해 확인된다.
옥중화는 춘향을 성참판의 딸로 설정하고 근대이행기 비기생계 춘향 서사의 특징적 면모를 여러 측면에서 계승한다. 그러나 양반이라는 신분 에 대한 의식은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와 비교할 때 다르게 형상화된다. 이 는 이도령의 부름에 응할 것인가를 두고 방자와 춘향이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양반이 부르시는데 천연(天然)히 못간다 하야?”
“이 녀석 도령님만 양반이요, 나는 양반이 아니냐?”
“너도 양반이로되 너는 절름발이 양반이라 쓸 데 없는 말이니 어서 바삐 건너가자.”27)
옥중화의 춘향은 자신의 신분을 양반으로 인식한다. 반면 방자는 춘 향의 부친이 양반이나 모친이 기생이라는 점을 들어 춘향을 ‘절름발이 양 반’이라 지칭한다. 춘향의 신분을 두고 춘향과 방자 사이에 인식의 상충 이 일어나고는 있으나, 양자 모두 춘향의 신분을 양반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긴다. 옥중화의 춘향은 기생 아닌 여염 여성을 넘어 양반의 범주에 속하는 인물이 된다.28) 우리들전과 도상 옥중화 역시 해당
27) 옥중화, 11면.
28) 옥중화의 춘향이 스스로 양반이라 주장하며 여염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에 대해, 이는 옥중화가 연재된 매일신보에서 풍속 개량을 추구한 사실 및 관기제도의 폐지와 유관하다는 견해가 있다.(이지영, 「<옥중화>를 통해 본 20세 기 초 ‘춘향 형상’의 변화」,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2,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장면을 옥중화와 흡사하게 서술하며 춘향의 신분을 양반에 속하는 것으 로 인식하는 바, 이는 근대 춘향서사에 보이는 공통적 면모라 할 수 있 다.
「희곡 춘향전」에는 양반이 더 이상 절대적인 권위를 갖지 못하는 신분 이라는 점이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춘향이 이도령의 부름에 응할지를 두고 방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희곡 춘향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방자: “양반이 부르시는데도 못 가? 원 큰 일 날 소리지.”
춘향: “남의 여자를 꼬이는 것이 양반이야? 양반이 부르셔도 못 갈 데는 못 가지.”29)
「희곡 춘향전」에서 춘향은 양반의 부름도 그것이 부당하다고 판단된다 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근대 춘향서사는 양반이 라는 신분이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주며 신분제를 다만 서사 구성상의 배경으로 후경화한다.
춘향의 신분이 양반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격상되면서, 근대 춘향서 사에서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은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에 비해 더욱 대등한 관계에서의 애정으로 형상화된다. 이는 이도령이 춘향에게 써 준 불망기 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옥중화, 일설 춘향전, 도상 옥중화
, 「희곡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춘향에게 써 준 불망기는 다음과 같다.
“천장지구(天長地久)에 해고석란(海枯石爛)이라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공증차맹(公證此盟)이라.”30)
우리들전의 불망기는 “천장지구에 해고석란이라 상제일월이 공증차맹 이라”로 되어 있는데, ‘천지신명’이 ‘상제일월’(上帝日月)로 대체된 것뿐이 어서 유의할 만한 변모는 없다. 오작교의 불망기는 행문이 다소 상이하 나, 춘향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면 천지신명께 벌을 당하리라는 내용으로
29) 「희곡 춘향전」(6), 조선일보, 1936. 2. 7.
30) 옥중화, 30면.
구성되어 있다.31) 근대 춘향서사에서 이도령의 불망기는 영원한 사랑의 맹서를 천지신명이 보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반면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의 불망기에는 대개 사랑의 약속을 어기는 폐단이 있으면 이 문 서를 가지고 관아에 변정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11년에 필사된 김동욱 소장 75장본 춘향전의 불망기에도 “일후 약유타설(若有他說) 즉 이차문기(以此文記)로 고관변정사(告官辨正事)라”라는 문구가 포함되 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춘향서사의 불망기에는 ‘고관변정’이라는 근 대이행기의 제도가 등장하지 않는바, 불망기의 내용에 근대이행기의 제도 는 영향을 행사하지 않는다.32) 이는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에 형상화된 춘 향과 이도령의 사랑에 근대이행기의 제도인 신분제의 영향이 축소되고 있 으며, 따라서 춘향과 이도령이 보다 대등한 관계에서 결연하고 있음을 보 여준다.
근대 춘향서사에서 춘향의 사랑에 신분제의 영향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 은 이도령의 부모가 춘향에게 자신의 아들과 결연한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옥중화에서 이도령의 부모는 춘향을 외방(外方)의 천첩(賤妾)으로 여기면서도, 상경하기에 앞서 춘향에게 돈 과 패물 등을 보낸다.
그 후 사또께옵서 부인과 수작하시고 춘향 불러 보시려다 다시 생각하 니 도령님의 장습(藏習)도 될 터이오, 하인소시에 아니 되어 은근히 방자 불러 돈 삼천 냥 내어주며
“이것 갖다 춘향모를 주고 이것이 약소하나 가용에 보태 쓰고 도령님이 급제하면 장차 데려 갈 터이니 모녀 간 설워 말고 부디 잘 있으래라.”
(…중략…)
대부인이 이방 불러 백미 백 석, 의차(衣次) 얹어 순금 삼작(三作) 넣어 주며
“이것 갖다 춘향 주고 나 차던 노리개니 나 본 듯이 저 가지고 수이 데
31) “경성 삼청동 거하는 이몽룡은 남원부중에 거하는 여자 성춘향과 아름다운 인연 을 맺은 후에 만일 언약을 저버려 가솔로 데려가지 아니하면 천지신명께 벌역을 당하여지이다.”(오작교, 춘향전전집 17, 149면)
32) 우리들전에서는 “여유시비 쟁탈지단이어든 이차문기로 고관변정사라”는 문구가 포함된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의 불망기를 ‘희극의 잡담’이라 평하고 있다.
려갈 것이니 설워 말고 안보(安保)하래라.”
이방이 영을 듣고 방자 시켜 즉시 전곡(錢穀)‧필목과 패물을 갖다 주며 사또 말씀 대부인 말씀을 전하니 춘향모 사례하며 차례로 받아 놓으니 도 령님 생각 더욱 간절하더라.33)
옥중화에서 이도령의 부모는 춘향에게 이도령이 급제하면 데려가겠다 는 약속과 함께 금전 등을 보낸다. 이도령이 떠난 뒤에도 생활의 궁핍함 이 없도록 금전을 제공하며 이도령의 부모는 춘향에게 이도령과 결연한 첩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여준다.34) 이도령의 부모는 춘향의 이도령 에 대한 수절을 상정하였기에 금전을 하사하였으리라 판단된다. 옥중화
에서 춘향의 수절은 이도령의 부모가 기대할 만큼의 당위가 되고 있는 것 이다.
오작교에서 이도령의 모친은 상경하는 길에 이도령을 미혹시킨 춘향 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춘향을 불러보고, 춘향의 미색과 태도에 내심 감탄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애야, 네가 내 아들과 언약이 있다 하니 네 마음만 변치 않거든 얼 마든지 기다려 보아라. 도령님이 필경은 너를 찾는 날이 있으리라.”35)
이도령의 모친은 또한 이방에게 분부하여 춘향에서 의차(衣次)와 식료 (食料)를 선사한다. 이에 춘향은 이도령을 따라가는 것이나 진배없는 감
33) 옥중화, 59면.
34) 이도령의 모친이 춘향에게 며느리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면모는 1911년에 필 사된 기생계 춘향서사인 김종철 소장 56장본 춘향전에도 보인다.(김종철, 「옥 중화 연구-이해조 개작에 대한 재론-」, 관악어문연구 20, 서울대학교 국어국 문학과, 1995, 191~192면 참조) 김종철 소장 56장본 춘향전에서는 이도령의 간청으로 모친이 춘향을 며느리로 인정하는 차이를 보이는바, 해당 장면은 다음과 같다: “내아로 들어가 대부인을 어찌 졸랐던지 무매독자뿐 아니라 춘향 정지가 가 긍하여 춘향모 불러들이어 ‘자네 딸이 나의 며느리 되었으니 피차 우리 사돈일세.
상면 못한 며느리를 이번에는 못 데려가겠으니 자네가 늙어 괴로워도 병나잖게 추 동하여 잘 있으면 수이 데려감세.’ 돈 삼백 냥을 사또 모르게 주며 ‘이게 약소하나 며느린 줄 아는 신표니 그리 아소.’”(김종철 소장 56장본 춘향전, 춘향전전집
14, 334면) 35) 오작교, 162면.
격을 느낀다. 춘향은 이도령의 모친이 자신을 이도령과 결연한 여성으로 인정하여, 미래의 재회를 상정할 수 있게 되었기에 감격하였을 것이다.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에서 춘향이 이도령의 부모로부터 첩의 지위조차 인 정받지 못하였던 것에 비하면, 근대 춘향서사에서 춘향의 지위는 상대적 으로 상승해 있다.36)
이상을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근대 춘향서사에서는 춘향과 이도령의 신분적 격차가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에 비해 축소된다. 이는 춘향과 이도 령의 사랑에 질적 변화가 발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근대 춘향서사에서 는 신분제라는 근대이행기의 제도가 후경화되며,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이전의 춘향서사에서보다 대등한 사회적 지위에서의 사랑으로 형상화된 다. 춘향이 이도령의 첩이라는 지위를 확보하고 있음이 이러한 판단의 근 거가 된다. 근대 춘향서사는 춘향의 부친을 양반으로 설정하는 등 비기생 계 춘향서사의 면모를 계승하면서도, 춘향의 신분에 대한 의식과 사랑에 있어서는 전변의 양상을 보인다.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에 있어 신분제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요컨대 근대 춘향서사는 신분제를 후경화하며 춘향과 이도령의 대등한 지위에서의 사 랑을 주제로 하는 서사로 전변한다. 근대이행기 춘향서사는 춘향과 이도 령의 사랑에 신분의 문제를 결부하여 역사 현실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의 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춘향서사에 이르러 근대이행기 춘향 서사가 지니고 있었던 문제성은 굴절된다.
근대 춘향서사에서는 춘향의 사랑에 내포된 의미가 변화함에 따라 춘향 의 저항에 내재된 의미 역시 변화한다. 근대 춘향서사에서 춘향의 신관 사또에 대한 저항은 사랑의 성취를 위한 저항으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근대이행기 춘향서사에서 신관 사또는 백성을 수탈하고 송사를 천단(擅 斷)하며 호색한 탐관으로 형상화되었다. 반면 옥중화에서 신관의 악정
36) 옥중화에서 이도령의 부모가 춘향을 장차 데려갈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은 춘 향과 이도령의 사랑에서 신분적 갈등이 축소되고 이들의 애정이 남녀평등이라는 근대적 의식에 접근하고 있음을 뜻한다는 해석이 제기된 바 있다. 이 연구는 옥 중화에서 춘향서사에 나타난 신분해방의 의미는 애정 문제로 국한되고 있다고 주 장하였다.(권순긍, 「판소리 개작소설 「옥중화」의 근대성」, 반교어문연구 2, 반교 어문학회, 1990, 240~250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