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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적 고찰

Ⅱ. 이론적 배경

3)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적 고찰

초대교회의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이 마음속에 여 전히 살아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한 예수의 재림(parousia)을 기다리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재림이었음으로 모든 것을 쉽게 포기, 즉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삶 또한 금욕주의적인 생활로 이어 지면서 애덕의 생활을 중시하였고 가장 위대한 애덕 행위와 가장 완전한 예수의 모방은 순교(martyria)라고 인식하였다(Aumann, 1998).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팔레스티나 지방을 벗어나 로마제국으로 확산되고 헬레 니즘 문화권에 들어가면서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세상을 단지 한 공간이요 장소에 불과하며 의미 있는 일이란 일어날 수 없는 곳 으로 이해하는 이원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유다인들의 하나의 유의미적 역사가 있었던 것과 달리 시간과 공간이 분 리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에 대한 이방인들의 오해와 공격, 비 난에 대해 신앙의 합리성을 논증하고 변론하기 위해 그리스인의 사고방식, 비유, 개념, 방법 등을 동원해 그리스도교를 소개하였다. 이 시기에 교회 내에 등장한 것이 그리스인들의 이원론에 물든 영지(靈智, Gnosis)주의 이단이었다. 영지주의 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위협적이어서 교부들이 영지주의 이단에 반박하여 자신의 고유한 신앙을 수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준 으로 세움으로서 세속과 구별 짓게 된다. 그 결과 완덕은 가능한 한 하느님처럼 되는데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영혼은 점차 현세를 초탈하고 욕망과 욕정을 정복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이영준, 2004).

(2) 교부시대의 영성

초세기 그리스도교 최상의 증거는 순교였으나 그리스도교가 합법적 종교(콘스 탄니누스 대제, 313년)가 되고 공식종교(테오도시우스 1세, 391년)가 됨에 따라 박해가 종식되었다. 이에 순교에 대한 열정은 제2의 순교라 할 수 있는 수도생활 에로 귀결되기 시작했다. 수도생활이 보통 신자들에게 하나의 이상으로 받아들여 진 사실은 초세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하나의 영성만이 있었음을 의 미한다. 곧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으로서의 수도생활이었다. 이들이 염원했던 것은 육체적 쾌락을 단념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를 완전히 모방하는 것이 었다(Aumann, 1998).

수도생활에 표현된 그리스도교 영성은 위(僞) 디오니시우스, 에바그리우스, 알 렉산드리아의 마카리오와 더불어 동방에서 최고도로 발전하였다. 이들의 내면화 된 수도생활이 완전한 정통이기는 하였으나 수도생활에 있어서 기도와 신비주의 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멧사리아니즘(Messalianism)의 이단 운동의 근거 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면화된 수도생활의 극단적 모습들은 이후 중세에서 도 나타나게 된다. 4-5세기 서방교회에서는 동방교회의 독거생활의 형태보다는 공동체생활이 애호되었고 이러한 수도생활은 활동보다는 관상에 우위를 두게 된 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세에서의 관상생활 및 활동생활에 대한 가르침에서 어떤 사람도 전적으로 활동적이나 관상적일 수도 없고 오직 이 두 행위의 형태 가 개인생활에 번갈아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활동생활과 관상생활 을 비교하여 서슴지 않고 관상생활을 우위에 두었다(Aumann, 1998).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도 관상이 더 훌륭하다는 관점이었다. 그는 현세적인 것들과 세상에 가치를 두지 말고 내세의 삶을 사랑하라고 권고하였다. 이러한 세 상의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는 대략 12세기까지 세속을 떠남과 수도생활을 특징 으로 하는 관상수도회를 통해 명확하게 나타났다(방효익, 2001).

(3) 중세의 영성

12세기부터 그리스도교 내에서는 마니교(Manichaismus)의 영향으로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대비해서 보는 이원론적 경향이 다시금 나타났고 본격적으로 는 중세 말 후기 스콜라 철학의 오캄의 유명론이 그리스도교 철학에 주류를 이 루면서 대두되었다. 그 후 ‘영적인’ 또는 ‘영성’이라는 단어는 강한 감정적인 의미 를 내포한 내면생활에 국한된 말로 사용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장 제르송은 자신 의 저서를 통해 영성은 신학적인 사고와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이 유로 분리시키고 있다. 곧 영적인 접근법은 궁극적인 선으로 인식된 하느님의 일 치에 해당되는 것이며, 반대로 신학적인 접근법은 궁극적인 진리로 인식된 하느 님과의 일치에 국한된다는 분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까지 이어졌으며 하느님이 인간의 이성적 진리와 관계없는 현실 밖에 존재하시 는 분으로 이해되었다(Downey, 2001).

14세기의 영성은 위(僞)디오니시우스의 신비적이고 관상적인 영성을 향하게 되 는데 이는 아우구스티노적 영성인 신플라톤 사상의 부흥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성적 유산을 이어받은 14세기 독일의 지성주의자들은 사색 적 신비신학을 주장, 이 사색적 신비의 선구자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인간적인 노 력보다는 고상한 목적을 위한 관상 안에 감관(感官)들을 멀리할 수 있을 때 영적 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방효익, 2001).

또한 당대의 가장 훌륭한 영성 작품이며 부정적 신비신학의 탁월한 실례가 되 는 「무지의 구름」에서처럼 모든 실천적 목적을 위해 영혼을 하느님과 구별할 수 없게 하는 ‘신성화’(Divinization)에 관심을 두었다(Aumann, 1998).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영육의 이원론적 구분과 인간과 현세생활의 부정적 판단은 그리스 도교 영성의 역사에 있어 끊임없이 내려오는 공통된 관점이며 이는 중세의 시기 를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이영준, 2004).

(4) 근대의 영성

중세 말의 탈권위적이고 윤리적 타락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현세 초 탈의 영성에 의지해야 했고 체계적인 묵상기도와 영성훈련이 점점 더 많은 평신 도들에 의해 실천되었다. 이 시기에 뚜렷이 나타난 현상이 인본주의와 문예부흥 이었다. 인본주의자로 대표되는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은 세속 악마와

우리 자신의 욕정을 거슬러 끊임없이 싸우는 생활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기도인데 기도는 의지와 지식을 강하게 하고 지성을 길러주기 때문에 기 도를 실천하려면 세속을 피해서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Aumann, 1998).

한편 15-16세기 스페인에서는 로욜라의 이냐시오, 예수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 한 등과 같은 위대한 영성가들로 인하여 상징적, 신비적, 실천적인 영성으로 변 화되었다. 이들의 개혁적으로 관상수도회들은 자신들 스스로 이룩한 교회 안으로 부터의 개혁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움직임이 일어났고 예술, 학문 등 문예부흥의 영향이 영성 분야에 긍정적으로 도입되면서 신비신학적인 영성적 흐름을 이어가 게 되었다. 17세기에 프랑스에서는 두 개의 극단 ‘얀세니즘’(Jansenism)과 ‘정적 주의’(Quietism)에 의해 격동을 겪게 된다. 이 시기에 ‘영성’은 후에 영성생활과 그 실행에 있어서 보다 균형 잡히고 건전한 접근법으로 여겨졌던 ‘경 건’(devotion)이라는 말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영성을 내면적인 생활, 완전 함의 추구, 소수의 사람들만이 은총을 통해서 부르심을 받은 생활로 이해하였다.

예외적으로 세상 속에 있는 평신도들에게 영성생활이 소개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더 높은 소명의 덕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의 한 부분 에 불과했다(방효익, 2001).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영성은 시대적인 흐름과 환경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유다이즘의 토양 아래 시작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삶의 전체적인 차 원을 포괄하는 통합된 영성을 추구(사도 2, 44-47)하였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 인들의 이원론적 사고에 영향을 받으면서 교회의 영성은 역사 안에서 세상과는 별개의 것으로 이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다. 물론 관상과 활동의 조화를 이루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 인 흐름은 관상을 우위에 두었고 그것에 초점(Aumann, 1998)이 맞추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