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참여자 중에서 류수란과 장강하는 후베이성 봉쇄로 인해 2020년 1 학기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유학생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전 염병이 처음으로 터진 곳에서 이도 저도 못하게 된 후베이성 유학생들이 경험했던 생생한 현장을 전달한다.
장강하는 우한시 사람으로, 1월 10일에 한국에서 우한에 들어간 후 우 한시가 봉쇄됨에 따라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반면에, 류수란의 집은 우한 시에서 고속철도로 1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우한시가 봉쇄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류수란의 도시에도 봉쇄 조치가 내려졌다.
예견된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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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KBS 뉴스, 2020.02.24.., "中 유학생 안내 창구 인천공항에 설치," <http://news.kbs.c o.kr/news/view.do?ncd=4387636&ref=A>.
류수란: 그때 [확진자] 수가 매일 배로 증가했어요. 매일 일어나자마자 뉴 스를 봤어요. 매일 배로 증가하는데 우리 아빠, 엄마 그리고 저 우리 세 식구는 그냥 집에 있었죠. (웃음) 제 인생에서 진짜 특 별한 경험이었어요. 초이튿날 저녁에 제가 열이 났어요. 저녁 먹 고 엄마한테 나 너무 어지럽다고 했어요. 엄마가 체온을 쟀는데 37도였어요. 막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병원에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그때 병원이 이미 매우 위험해졌으니까. 우리 집은 작은 마을에 있는데 그래도 좋은 병원이 있었어요. [중략] 저녁 에 집에서 차를 몰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다행히 갔을 때 8시 반쯤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아마 5, 6명 정도? 목 검사를 했는데, 그때는 아직 핵산검사가 없으니까, 우한만 핵산 검사를 할 수 있었어요. 선별진료만 할 수 있었어요. 의심 케이 스로 볼 수 있지만 확진은 할 수 없는 거였죠. 목 검사 하고 피 뽑고 CT 찍고, 8시쯤부터 12시까지 검사했어요. 결과는 감기 걸 린 거고 그건[코로나] 아니라고 했어요. 병균이 아니라 세균 감 염으로 보인다고. 병원에서 체온 재니까 37.8도까지 올라가서 엄 마한테 나랑 접촉하지 말라고(웃음), 나 혼자 방에 있겠다고. 근 데 그때 의사선생님이 확실하게 아니라고 해서 좀 안심이 됐어 요. 다행히 그날 약 먹고 다음날에 나았어요. [중략] 진짜 운이 없다고 생각됐어요. 학업도, 그때 학교에서 아직 인터넷 강의할 지 말지 정하지 않았고, 기숙사에서는 만약 제가 기숙사에 살지 못한다면 짐을 다 빼야 한다고 통지했어요. 제가 진짜, 기숙사에 서 저를 찾지, 학업에서는 도대체 휴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하지 못했고 휴학하면 비자가 효력을 잃으니까 다시 신청해야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 그리고 일자리도 잃었죠, 집에서도 봉쇄했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죠.
그때는 정말로 짜증났어요. 왜 이렇게 됐지? 왜 나한테만 이러 지? 이런 느낌이었어요.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숙사 측에서는 류수란에게 임시퇴거 방식 으로 방과 짐을 그대로 둘 수 있게 방침을 변경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짐 문제가 해결되어 한 시름 놓게 되었을 때 또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마
침 학교에서 인터넷 강의를 한다고 통지하면서 학업에 대한 걱정도 잠시 내려놓게 되었다. 류수란은 어쨌든 학업을 중단할 생각이 없었고 학과 교수님들께서 감사하게 학기의 수업을 완수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해주 셔서 나머지 시간은 안심하고 집에서 보내자고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베이성이 봉쇄된 후 류수란은 매일 불행과 행운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류수란: 저는 행운인 편이었죠. 가족들이 감염되지도 않았고 우한의 친구 들처럼 가족이 돌아가시거나 병원에 갔는데 자리가 없다거나 하 는 패닉을 겪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의료자원도 부족하지 않았고 요.
장강하의 경우에는, 필요한 수업은 모두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류수란 과 같은 휴학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휴학을 하면 비자 등 서류 변경이 복잡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장강하는 집에서 자 료를 찾아가며 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쉽지만은 않 은 일이었다.
장강하: 교수님께서 괜찮다고, 중국에서 수업 보면 된다고 해주셨어요. 대 학논문 연구 수업 자체가 [인터넷 강의랑] 상관없이 교수님께 보 고서를 제출하면 되는 거니까 크게 문제될 건 없었죠. [중략] 한 국의 7,80년대 조서들은 볼 수 없으니까, 도서관에 있으니까 학 술지 같은 거 찾아보고 다른 영어 참고문헌 찾아보고 [불편한 점도 당연히 있었죠] …
후베이성과 우한의 봉쇄가 해제됨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도 점차 일상 으로 복귀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야지 유학길이 정상화 되는 중국인 유학생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앞에 는 새로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이 후베이성에 대한 입국금지를 8월 10일에 해지하였는데59), 이는 제일 마지막에 봉쇄가 해제된 우한의
4월 8일보다 4개월 후에 내려진 조치였기 때문이다.
장강하: 그때 제일 길어서 4월, 5월에는 다 괜찮아져서 한국에 다시 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한국에서 8월이 돼서야 후베이성에 대한 [입국금지를] 해제할 줄 몰랐어요. 네, 몰랐어요.
류수란: 저로서는 무조건 돌아와야 했어요. 그래서 기말리포트 제출하고 나서 방법을 찾기 시작했죠. 수없이 검색하고 찾아서 결국 방법 을 찾아냈어요. 여권을 바꿀 수 있는 거예요. 후베이성에서 발급 받은 여권을 보지 호구[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중국의 신분증]60)를 보는 게 아니었거든요. 방법을 찾고 엄청 흥분했어요.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찾아왔죠. 어디에 가서 여권을 바꿔야 하나? 여러 도시들을 물어봤는데 대부분 도시에서는 임시거주증명(暂住证) 이 있어야 하고 그 도시에서 반년 이상 생활 했어야 여권을 발 급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또 자료를 막 찾았죠. 그러다 광둥 성! 외지 인원이 많은 이 큰 성의 정책은 아주 개방적이란 걸 알게 됐어요.
9월 가을학기 류수란은 논문자격시험을 치르고 논문 관련 발표를 해야 하는 등 중요한 업무들이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기숙사에서의 정책이 갑자기 바뀌어 원래 방에 있던 짐을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보를 입수한 류수란은 망설임 없이 광둥성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많 은 후베이성 유학생들이 이 같은 방법으로 새로 여권을 발급받았다고 했 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교 행정처에 문의해 받은 증명과 지도교수의 인장까지 모두 준비해 광둥성으로 향했는데 광둥성에서는 이에 대해 별 다른 요구 없이 여권을 발급해줬다. 류수란은 7월 6일에 도착해서 8일에 여권을 신청하였고 일주일 만에 새로운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59)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2020.08.10., “후베이성 관련 외국인의 사증 발급 및 입국 제한 해제,” <https://www.immigration.go.kr/immigration/1473/subview.do>.
60) 호구에는 출생지와 가족관계가 적혀 있다.
장강하도 류수란과 비슷한 방법을 모색했다. 당시 어차피 우한시에서 비행기를 탈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다른 도시에서 14일 정도 머물다 출국하는 비행기를 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장강하는 7월 중순쯤에 친척이 살고 있는 다른 도시로 향해 그 곳에서 새로 여권을 발 급 받았다. 후베이성에 대한 제한이 풀린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여름 방학이 되 기도 전부터 한국으로의 입국을 준비하였다.
장강하: 5, 6월부터 우한이 기본상 괜찮아져서 한국에 돌아올 생각을 하 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까지 한국에서 후베이성에 대해 개방하 지 않아서… [중략] 저는 베이징시에서 떠나는 9월 11일의 표를 구매했어요. 6월 말에 표를 샀는데 그때 9월 11일의 표밖에 없었 어요.
류수란: 7월 초였는데 9월의 표를 예매해야 했어요. 그것도 9월 25일의 표를 구매할 수 있어서 그러면 일단 사, 먼저 사고 나중에 다른 날짜 있으면 변경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죠. 그래서 후에 변경 하고 변경해서 9월 11일로 됐어요. 모든 게 준비됐어요. 이제 한 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어요."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들어갈 날만 세고 있던 류수 란에게 또 새로운 문제가 들이닥쳤다. 중국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은 지정 기관에서 48시간 이내에 받은, 영어 또는 한국어로 작성된 핵산검사 결 과지를 제출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류수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름동안 뛰어다녔다. 그런데 8월에 한국에서 후베이성 입국금지를 풀면 서 이 같은 입국 조건도 같이 취소되었다. 중국의 형세가 안정적이니 핵 산검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과 정력과 비용을 지출하였지만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류수란은 상당한 허 탈함을 느꼈지만 결코 마음을 놓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또 다시 한국 입국 후 격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란 새로운 고민을 해결해야 했다.
류수란: 에어비앤비 민박집에 하나하나 연락해서 물어봤어요. 자가격리해 도 되는지요. 한 집이 가능하다고 해서 거기서 머물기로 결정했 죠. 주인도 좋았어요. Ok, 그럼 이제 비행기표도 있고 여권도 괜 찮아졌고 집도 찾았으니 돌아올 준비를 했죠. 되게 행운스럽게도 비행기표가 또 앞당겨져서 9월 4일로 됐어요. 논자시가 9월 말이 었는데 다행이었죠. 무엇보다 외국인등록증이 9월 30일까지여서 (웃음). 그날 오전 9시 비행기였는데 아침 5시에 나갔어요. 우한 은 여전히 안 돼서 상하이에서 비행기를 타야 해서 전날에 미리 가서 공항 근처에 머물었어요. 그리고 공항에서 각종 동의서 작 성하고 앱 다운하고, 12시 반에 인천에 착륙했는데 3시 반이 돼 서야 공항에서 나왔어요. (웃음) 그때도 진짜 불안했어요. 방역 고글 쓰고 긴팔, 긴 바지 입고, 엄청 많은 사람들이 방호복 입었 었어요. 그리고 저녁 6시 반쯤 돼서 격리할 집에 도착했어요.
2020년 여름방학에도 기숙사에서는 격리 시설을 운행하였었다. 초기와 마찬가지로 906동과 호암교수회관을 격리 시설로 선정하였다. 류수란에 게 왜 기숙사 시설에서 격리하지 않았냐고 여쭤보니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고 답했다. 학교 시설은 8월 말까지 운영하는데 그러려면 늦어도 8월 중순에는 한국에 입국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가 한국에 입국한 9월 4일도 수차례의 변경 끝에 제일 빠른 날짜로 잡은 것이기에 학교에서 운 영하는 시기에 맞춰서 들어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정부 측에서도 격리 시설을 제공해주고 있었지만 문제는 가격이 었다. 류수란은 한국에 먼저 들어온 친구들과의 정보교류를 통해 정부 측에서의 격리 비용은 대략 140만원에서 210만원까지 든다는 사실을 알 았고 그러면 민박집에서 격리를 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실제로 그녀는 15날의 민박집 비용으로 62만원을 지불하였다. 더욱이 종량제 봉투나 비누 같은 필요한 생활용품은 다 마련되어 있는 가정집 같은 원룸이었기 때문에 집을 나갈 수 없다는 것 외에는 불편한 것 없이 편안하게 지냈다고 하였다. 물론 배달도 가능했고 말이다. 장강하의 상황 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