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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에 관한 의료인류학적 연구

전염병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건강을 사회와 문화의 맥락에서 논의 하는 의료인류학적 영역에서 진행되어 왔다(Merrill Singer 2015: 20). 의 료인류학자 메릴 싱어(Merrill Singer 2015: 20-24)의 서술에 의하면 전 염병에 대한 의료인류학적 연구 계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1950년대 생의학(biomedicine)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연구를 시작으로 한다. 당시 개발도상국들을 서방 국가 및 일본 만큼의 국제적 발전을 이루게 만드는 것이 선진국들의 목적이 되면서 위생 관념에서 서방 의학 모델인 생의학 이 주요한 기준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류학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의학에 익숙하지 않은 현지에서 생의학적 이상을 전파하 는 것은 결코 계획만큼 실천되는 일이 아님을 발견하면서 인류학자들은 마땅히 현지 사람들의 사고 논리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

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른바 국제보건시대(the Era of International Health)라 일컬어지는 시대에 들어선 후 세계보건기구 (WHO)가 국제적 건강 발전을 도모하는 리더로 부상하는데, WHO가 1970년대에 열대 질병 연구 프로젝트(Tropical Disease Research program: TDR)를 개설하면서 보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전염병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전염성 질병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 로 진행되면서 빈곤한 자와 약자들의 질병 해결이 강조되고, 건강에 대 한 인류학의 생물문화적(biocultural) 견해와 질병과 사회는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논의들이 확장되었다. 1978년 WHO의 회원국들의 알마아타선 언(Alma Ata Declaration) 이후 건강이 중요한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는 질병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비록 얼마 안 가 WHO는 다시 기존의 원초적 건강 돌봄 전략으로 회귀하였지만, 이 시기 인류학자들이 자신들의 생물문화적 접근과 전문가적 네트워크를 강화한 덕분에 오늘날 세계의 인류학자들이 곳곳에서 전염병에 대해 연 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고 싱어는 기술하였다(ibid: 20-24).

이와 같은 역사적 시기를 거치면서 전염병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의 범 주도 점차 확대되었는데, 메릴 싱어(2015: 37)가 제시한 도표에 의하면 전염병 인류학은 1) 병원균(pathogens), 인간 면역 체계, 병원균과 숙주 사이의 상호작용 등 생물학적 요인, 2) 음식과 생수의 이용가능성, 기온 및 날씨가 속하는 환경적 요인, 3) 질병에 대한 이해와 대처를 구성하는 지식체계, 환경에 영향 주는 역학적 체계, 사회적 관계 등을 구성하는 역 사적 요인, 세계화 등이 속하는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구성되었다. 무엇보 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서로 작용하고, 환경적 요인과 사회문화적 요인이 또 서로 작용하여, 결국 세 가지 요인 모두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릴 싱어(2015)의 주장은 전염성 질병에 대한 인류학적 연 구는 응당 생물문화적(biocultural) 또는 생물사회적(biosocial) 개념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인류는 줄곧 병원균(pathogens)이

서식하는 세계에서 진화하여 왔고 전염병은 병원성 감염이란 필수적이고 즉각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병한다는 측면에서 전염병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는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환경 맥락에서의 문화적, 사회적 요 인들이 인간에게 미치는 감염원(infectious agents)의 영향을 유의미하게 조정한다는 측면에서 전염병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연구도 결코 간과될 수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싱어는 비록 19세기 후반 “미생물의 원 인설(germ theory)”의 부상으로 전염성 질병 영역에서의 생의학의 위치 가 지배적이지만, 인간의 생물학적 삶은 결코 사회문화적 삶과 분리하여 존재할 수 없기에 건강 내지 전염병 연구에 인류학은 생물문화적 또는 생물사회적 접근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메릴 싱어의 논의는 생의학적 접근으로부터 사회문화적 접근까지의 역 사적 흐름을 보여주며 전염병 연구에서 의료인류학의 전개 과정을 자세 하게 기록해주었다. 특히 생물학적 접근과 사회문화적 접근 사이의 연결 고리들을 제시하며, 두 측면의 대립이 아닌 조화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료인류학적 전염병 연구에 보다 넓은 이론적 틀과 사고확장의 가능성 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싱어의 논의는 전염병 발생 요인과 전염 요인에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전염병은 질병으로서의 발병 이유와 전파 과정도 중요하지만, 전염병 이 기폭제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각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 작용 및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측면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예컨대, 코로나19가 발생한 후 세계는 ‘뉴노멀(New Normal)’

또는 ‘포스트 코로나19(Post-COVID 19)’ 패러다임을 주장할 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큰 혼란과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시국에서의 중국인 혐오는 전염병이 기폭제 요인이 되어 중국과 중국인 집단에 대한 제노포피아(또는 외국인 혐오: xenophobia)적 태도를 주저 없이 드러내며 중국인 내지 아시아인을 비난하고 배제하며 낙인을 찍었 다(Higgins et al. 2020; Tessler et al. 2020). 이처럼 전염병이 트리거가 되어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측면으로 행해지는 영향도 마땅히 전염병 에 대한 의료인류학적 연구로써 다뤄져야 하는 것이다.

전염병의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측면이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전염병이 범유행하면서 질병의 예방과 확산 방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 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에 새로 나타난 HIV 감염 성 바이러스에 의한 신종 전염병 에이즈(AIDS)를 들 수 있다. 인류학에 서의 전염병 연구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고 획기적인 평을 받는 인혼 과 브라운(Inhorn & Brown 1990: 90)의 “전염병 문제는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이며, 역사적이고 근대적이며, 동시에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다.”라 는 주장 역시 에이즈가 치명적인 범유행병으로 전개되면서 제시된 것이 었다.

의료인류학자 세실 헬만(Cecil G. Helman)은 에이즈는 그 자체로도 위 험한데 다른 질병을 야기해 합병증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특히나 위험하 고 또한 감염자 중 일부는 합병증이 나타난 후에야 감염 여부를 알게 된 다는 초기 치료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어 에이즈에 대한 생물학적 요인의 특이성이 연구되어 왔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에이즈는 인간의 행동 양상, 그중에서도 성행위와 관련하여 확산되는 사회문화적 특징이 있어 질병의 예방과 확산 방지를 위해서는 에이즈의 사회문화적 요인에 대한 연구 역시 중요하게 요구되어 왔음을 밝혔다(세실 G. 헬만 2007: 375).

예컨대, 에이즈의 사회문화적 요인에 대한 연구에는, 에이즈의 부정적 인 은유에 따른 감염자 낙인화, 에이즈의 예방을 저해하는 성 관습, 토속 적 믿음과 결부된 에이즈 개념의 변화, 이주노동자에 의한 감염 확산, 사 회경제적으로 주변화 된 집단들의 성인식, 감염자들을 ‘사회적 죽음’까지 내모는 차별과 편견 등등이 있다(Carrier 1989; Clatts & Mutchler 1989;

Farmer 1990; Lyttleton 1994; Whitehead 1997; Stanley 1999; 수전 손택 2002[2001]). 특히 에이즈의 연구에서부터 사회적 불평등이 중요한 관점 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는바, 의료인류학자 디디에 파생(Didier Fassin 2 003)은 에이즈가 서아프리카에서 처음에는 백인을 중심으로 전염되었지 만 인종분리주의 정책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이유로 나중에 흑인들이 더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사실을 서술하며, 계층(hierarchies)과

불평등(inequalities)으로 특징지어진 사회 질서(social order)가 사람들을 공통된 고통으로 단합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에 대한 노출과 치료 에 대한 접근, 문제에 맞설 능력, 존엄성 있게 죽을 기회 등 측면에서 사 람들을 분리시키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아메리카의 국가 아이티에서 몇 년 동안 에이즈를 부추기는 사회경 제적 불평등에 대해서 연구한 의료인류학자 폴 파머(Paul Farmer) 역시, 페리그레 분지에 거주하는 에이즈 감염자 중 대다수는 매춘, 불법 약물 복용, 섹스 파트너의 경험이 많지 않음에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 칠수록 그리고 성적 결합, 전쟁 등 정치적 혼란, 공공의료의 접근성 등 구조적인 측면에서 낮은 층위에 있을수록 에이즈 감염에 더 많이 노출되 었음을 밝히며 빈곤과 불평등이 전염성을 확산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 였다(폴 파머 2010[1999]). 폴 파머는 이러한 연구의 연장선에서 정부의 쿠데타로 난민이 된 아이티인들이 에이즈 감염으로 인해 쿠바섬의 미군 기지 관타나모의 격리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어야 했던 사실, 소비에트 붕 괴 이후 수감자가 두 배 이상 증가한 러시아 교도소에서 정치경제적 혼 란으로 인한 의약품 재고 고갈, 교도관들 임금 미지급, 결핵 관리 체계의 급격한 악화로 수감자들의 결핵 감염이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서술 하며 구조적 폭력을 전염병 확산의 요인으로 주장하였다(폴 파머 2009[2 004]). 이 지점에서 제기된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에 대해 폴 파머는 빈곤, 인종주의, 젠더 불평등, 제도화된 폭력들을 예시하며 “구조 적 폭력은 특정 사회 질서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조직적, 간접적으 로 행사되는 폭력으로, 도덕 경제(moral economy) 속에서 구조적 폭력 에 의한 불편함은 여전히 개인 행위자들에게 칭찬이나 비난을 가하는 것 으로 조정된다.”라고 개념화 하였다(Farmer 2004: 307).

에이즈를 대표적 예시로 본 이상의 논의들은 대체로 전염병의 발생과 전파 과정 그리고 전염병의 예방과 확산 방지를 저해하는 사회문화적 요 인들에 대한 고찰이었다. 이러한 논의들의 특징은 연구대상이 전염병 감 염에 취약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 전염병의 특이성과 연관되는 집단들은, 예컨대 에이즈가 성행위로 전염된다고 했을 때 동성애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