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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의 소통에 있어서의 제약

가치교육의 목적으로서 가치성찰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오늘날 사회에는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 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나의 가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가진 가치에도 관심을 갖고 이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만약 이러한 소 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지속적인 가치갈등을 제대 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성장을 위한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안적인 가치교육은 타자와 소통하 면서 사회적 가치갈등을 해결하고 합의로 나아갈 수 있는 이론적‧실천적 가능성을 포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 측면에서 가치명료화 접근이 문제가 있다 는 점은 오랜 기간 지적된 사실이다. 즉, 가치명료화 접근은 개인의 자율 적인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이러한 개인들 간의 소통 측면을 제대 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은 가치명료화 접근이 갖 고 있는 상대주의적 성격을 공격했다. 특히 가치명료화 접근에 대한 윤리 적 상대주의 혐의는 사실상 가치명료화 접근이 도덕적 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명료화 접근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 남아 있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기존의 논의를 좀 더 자세히 검토하면서 타자와의 소통에 있어 가치명료화 접근이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보다 분 명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① 윤리적 상대주의로 인한 도덕적 논의의 불가능성 문제

이미 살펴본 것처럼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개인은 자신의 생각과 관점, 경험에 의거해 자신의 가치를 명료화하게 된다. 이 점에서 가치명료화 접 근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확증 모형이다(Fraenkel, 1977: 71). 물론 앞 서 논의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스스로의 가치탐색과 자율적인 선택을 돕는 것은 가치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다만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가치명료화 접근의 가치화 과정이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탐색 과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떤 가치판단이나 가치 주장의 타 당성이 전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개인과 그 주장이 만들어지는 특수 한 상황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가치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며, 세상에는 어떤 ‘올바른’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Simon, 1973: 239; Boyd & Bogdan, 1984: 292에서 재인용)고 여겨진다. Rath 등 역시 자신의 글에서 이러한 생각을 드러낸다.

“가치란 개인적인 경험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그것들은 참이나 거짓의 문제가 아니다.”(Rath et al., 1978: 56)

“우리는 가치를 경험으로부터 발전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상이한 경 험은 상이한 가치를 낳고, 어떤 한 사람의 가치는 경험들이 누적되고 변함 에 따라 변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Rath et al., 1978: 44)

“교사로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의 가치는 이것이어야 한다고 명령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환경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든지 또한 학생들은 어떤 경험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명령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Rath et al., 1978: 57)

이런 점을 근거로 다수의 학자들은 가치명료화 접근이 윤리적 상대주의 를 함축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가치 있음’이 개인에 따라 달라진 다면 가치에 대해 어떤 것이 옳고 나쁘다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래서 가치명료화 접근은 구체적인 전략 면에서 윤리적 가치의 보편적 성격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정호범, 2014: 69), 전체적으로 윤 리적 상대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정호범, 2014: 69; 정호 범, 1997b: 58-59).

특히 이러한 윤리적 상대주의의 입장은 크게 보면 윤리학 내에서 이모 우티비즘(emotivism)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어 있다(정호범, 1997b:

64-67). 이모우티비즘은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의 분석적인 방법론을 윤리학 내지 가치론에 적용함으로써 생긴 메타 학설”(김태길, 2006: 211)로서 가치나 도덕에 대한 판단은 학문적으로 연구될 수 있는

의미 있는 발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고통 을 주는 것은 잘못이다.”, “정직해야 한다.” 등의 발언은 단지 화자의 감 정을 표명하거나 청자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주장한 다(김태길, 2006: 211-214).

그런데 이렇게 가치명료화 접근이 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하고 이모우 티비즘의 입장을 취한다면 이는 결국 가치에 대한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 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가치라는 단어는 결국 ‘어떤 것이 더 좋 다, 옳다, 바람직하다’ 등의 평가를 담고 있는 개념이며, 따라서 가치교육 에서 더 옳은 것, 더 바람직한 것에 대한 평가와 선택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상대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보편적인 ‘진리’나

‘객관성’은 결국 인간의 관습의 문제에 불과한데 다양한 사회에 다양한 관 습 체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관습 체 계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를 비교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정호범, 1997b:

58-59). 이것은 결국 한쪽에서는 어떤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도 다른 쪽에 서는 옳지 않다고 하는 식으로 규범적 원칙의 기본 조건인 일관성과 보편 화 가능성 자체를 무시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이모우티비즘의 입장 에 따를 때 가치에 관한 논의는 개인들이 자신의 가치를 마구잡이로 펼쳐 내는 상황에 불과하다. 분명 가치에 관한 소통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면 진지한 도덕적 논의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윤리적 상 대주의를 근거로 한 비판은 무척 공고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본 연구자는 가치명료화 접근이 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하며 그래서 도 덕적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식의 비판이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본 연구자가 판단하기에 가치명료화 접근은 윤리적 상대주 의를 필연적으로 함축하지 않으며, 또 극단적 상대주의를 가정하지 않을 경우 이 접근에서 도덕적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본 연구자가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가치명료화 접근이 일반적으로 윤리적 상대주의라는 혐의를 받는 것과 달리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여러 가지 행동이 있다. 즉, 가치명료화 접근이 ‘가치에서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단지 교사

가 학생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며 실상 가치 명료화 접근은 사고, 감정, 선택, 소통, 행위를 더 잘 하는 것에 대해 가치 를 부여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Kirschenbaum, 1975: 104).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가치명료화 접근이 개인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치명료화 접근을 윤리적 상대주의와 구분 짓는 중요한 특징이 될 수 있다. Rath 등 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경험과, 그 사람이 가치를 위해 자신의 경험을 검사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관점과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교사는 당연히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자유 사회의 주춧돌이 아닐까?”(Rath et al., 1978: 57)

“이것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결정 내리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민주주의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또한 인간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또한 이것은 가치란 개인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 다. 즉, 가치가 자유로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면 결코 개인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Rath et al., 1978: 60)

즉, 가치명료화 접근은 개인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에 기초하고 있 다. 특히 가치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권리와 관점의 자유에 대한 존 중, 모든 사람(관점)을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 개인에 근거한 인간성의 존 중 등은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러한 가치에 대한 침해가 발생한다면 가치명료화 접근을 주 장하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강하게 반대할 것이다. 따라서 가치명료화 접근 이 가치 일반에 대해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둘째, 가치명료화 접근이 반드시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굳이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선택을 존중 하고자 하는 가치명료화 접근의 기본 취지는 손상되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은 다른 가치징표를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하며, 그들의 입장은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윤리적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하나의 참인 종 교, 하나의 참인 도덕, 하나의 참인 정치 제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 우리 는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의 믿음, 목표, 태도가 다른 믿음, 목표, 태도와 마찬가지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Rath et al., 1978: 머리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윤리적 상대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가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 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의 입장과는 먼 것이다. 우리는 가치를 명료화할 수 있고, 인식과 반성적 사고를 통하여 사람들이 믿음, 감정, 활동, 목표 등을 더 잘 통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Rath et al., 1978: 398)

“우리는 보편적으로 절대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기준이 존재할 수 없다거나, 또는 ‘어떤 것이라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좋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Rath et al., 1978: 399)

Rath 등의 이러한 진술은 가치명료화 접근이 모든 가치를 다 허용하는 윤리적 상대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개 인의 다양한 입장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나 모든 입장이 “‘마찬가지로 좋 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가치명료화 접근의 목적이 가치혼란의 해 결이라는 점만 떠올려 보아도 알 수 있다. 상대주의적 결론이라면 어떤 것 이 옳은지를 스스로도 말할 수 없는 상태인데 이러한 가치혼란의 상태는 적어도 가치명료화 접근이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 상황 그 자체이기 때문 이다. 가치명료화 접근이 상대주의에 기반한다면 이런 가치교육을 통해서 는 통합된 자아라는 가치명료화의 중요한 목표가 달성되지 못할 것이 분 명하다.

이렇게 상대주의가 아니라면 가치명료화 접근의 윤리학적 기반으로 가 능한 것은 무엇일까? 실제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다 양한 개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형태의 윤리적 기반으로는 다원주의가 있다.

정원규(2011: 97)는 “실질적으로 상대성을 허용하면서도 비상대주의적 입 장을 고수할 수 있는 가치교육 원리로 다원주의”를 제안한다. 상대주의는 모든 주장의 객관적 타당성을 거부하는 반면 다원주의는 적어도 다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