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가 과거에 비해 더욱 민주화되었고 개인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미투(Me Too) 운동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전히 우리 사회 면면을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잘못된 관행이나 실천을 반복하고 재생산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치 측면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성찰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와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문화가 작동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굳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Arendt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12) Rath 등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가치명료화 접근 이론가들의 연구들이나 국내에서 가치명료화 접근을 도입해 그 효과를 확인했던 연구들은 대부분 가치명료화 접근의 경험적 효과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Lockwood(1978: 344)와 Leming(1981: 150)의 경우 가치명료화 접근의 효과를 다룬 논문들에 대한 리뷰를 통해 이들 논문들이 효과를 검증하기에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다만 Lockwood의 경우에는 가치명료화 접근이 적어도 교사들의 지각과 관찰가능한 행 동 척도의 기반에서는 학생들의 교실 행동(Classroom behavior)에 긍정적인 효과 가 있다고 주장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대해 성찰할 수 있다면 이러한 잘못된 관행이나 실천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가치교육은 개인이 다양한 사회적 맥락 내에 위치 하더라도 스스로가 추구하는 가치와 그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자율성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바로 이점에서 가치교육 방법으로서 가치명료화 접근의 등장은 무척 획 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치명료화 접근은 학생들의 자율적인 선택을 존중하고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탐색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본 연구자 역시 가치명료화 접근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탐색하고 자율적인 선택을 존중하는 것을 의도했다 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가치명료화 접근의 방법론적 함의가 그러한 의 도를 잘 구현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좀 더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① ‘공언하기’ 단계의 자율성 침해 문제
가치명료화 접근에 대해 쏟아진 여러 비판들 중 하나는 Rath 등이 제시 한 가치화 과정 중에서 ‘공언하기’ 단계가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 다는 것이다. 가치화 과정에 따르면 ‘공언하기’ 단계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게 된다.
“... 누가 그것에 대해 물어 봤을 때 그 선택을 공언하기를 바라는 경향 이 있다. 우리는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가치를 알린다. 그러나, 만 약에 우리가 선택한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아무도 그것을 전혀 모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치로서 긍정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다 른 어떤 것으로 취급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공언하기를 꺼려하는 그러 한 선택들은 ‘가치’라는 용어에서 제외시키도록 한다.”(Rath et al., 1978:
47)
그러나 많은 이들은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말하는 ‘공언하기’가 학생들의 개인적 자유는 물론이고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즉, 가치 명료화 접근을 수행하는 교사는 가치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가치를 공언하도록 ‘강제’해야 하며, 이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이 밝히고 싶지 않은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해야 하는 ‘부담’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차경수·모경 환, 2008: 320). 학생의 입장에서 스스로가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 공개하는 것은 명백히 개인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이다. 또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도록 강 제하는 것 자체가 자율성에 위배된다. 더욱이 Rath 등의 주장에 따르면 가치는 개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치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 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은 가치의 개인 중심성을 손상시킨다는 비판도 가능하다(추정훈, 1998: 238).
이와 관련하여 본 연구자는 가치명료화 접근의 ‘공언하기’를 둘러싼 개 인적 자유 침해 주장은 가치명료화 접근의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못하는 다소 초점이 어긋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우선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공언하기’가 개인의 자유를 가장 심각 하게 침해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는 개인의 사적 영역 중에서도 특히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이 가치 논의의 주제로 들어올 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생활 문제가 다뤄지고 개인이 자신의 민감한 부분을 드러내야 하 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가치명료화 접근에 대한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만 한 것이 된다. 하지만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이러한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 를 반드시 다루어야 할 필수적이고 급박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 은 가치명료화 접근의 주장자들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다.
“가치 이론이 그런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첫째,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또는 저속하다고 느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야 한다. 가치에 대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생활상의 문제들이 얼마든지 많 이 있다.”(Rath et al., 1978: 332)
즉, Rath 등 가치명료화 접근 이론가들은 개인의 사적 영역에 해당하는 문제를 굳이 가치교육의 장에 가져오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또한 그러 한 의도와는 별개로 가치명료화 접근을 취하면서도 사생활의 문제를 다루 지 않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가치명료화 접근이 학생들의 삶과 경험을
중시한다는 것은 가치교육이 학생들 스스로 관심을 갖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자원으로 사용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여기에 사 생활을 침해하는 내용을 포함할 이유는 없다. 가치명료화 접근의 초점은 순수하게 사적인 내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논의할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 삶과 경험 내에는 이런 의미에서 가치명료 화 접근이 다룰 수 있는 자원이 충분히 풍부하다.
둘째, 그렇다면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과 관련된 문제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언하기를 원하지 않는 학생이 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이러한 가정은 순전히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다. 실제 우리 주변에는 정치적 견해 를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 현상에 대해 굳이 자신의 의견이나 색채를 드러 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류에 속하 는 학생들에게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스스로의 생각을 ‘공언하기’를 통해 명료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개인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와 관련해서도 Rath 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생들이 곤란해 하거나 걱정스러워하는 신호를 보일 때는 언제나 가치 명료화 활동을 즉시 중지하도록 한다. ... 교사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감 정적인 반응은 필시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는 신호이다.”(Rath et al., 1978: 332)
즉, 가치명료화 접근은 학생 스스로가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가치를 명료화하도록 강제하지 않는다. 애초에 Rath 등이 ‘공언하기’ 단계를 가치 화 과정에 포함한 것은 이러한 공언이야말로 스스로의 선택을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Rath 등이 보기에 만약 공언 을 할 수 없다면 이는 자신의 선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 다면 ‘공언하기’는 자신의 선택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즉, 학생들이 다수 사람들 앞에서 공언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가치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진정으 로 가치가 내면화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가치명료화 접 근의 관점을 취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가치는 자신의 삶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개인의 가치판단은 그에 따른 말과 행동 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에 대한 생각이 개인의 말과 행동으로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면 과연 이런 생각을 가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은 Rath 등의 지적처럼 “필시 어떤 것 이 잘못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잘못’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 나는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공언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스스로의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충분한 고려가 부족하여 아직 옳다는 믿음이 들지 않는 상황이라면 다수 사람들에게 자 신의 견해를 공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Rath 등이 가치명료화 접근을 고안할 때 생각했던 바로 그 지점이다. 즉, 이런 이유로 공언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직 가치라고 여길 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가치라고 생각될 수 없는 것을 강제로 말하도록 하는 것이 가치명 료화 접근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가치명료화 접근의 취지를 고려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강제적인 공언 요구가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이다. 학생들이 어떤 가치징표를 표현했을 때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그게 네 생각이니?”, “진정으로 네가 원하는 게 그것이니?”라 고 묻는 것은 바로 불확실한 부분에 대한 스스로의 탐구를 촉진하고 지원 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Rath 등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생 각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할 때 그러한 불완전한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공언하도록 하는 것도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 직 불확실한 생각이어서 명료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불확실 성 자체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즉, 어 떤 불확실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안에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있음을 의미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또 그 생각을 완전히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