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가치혼란의 상황에서 가치주입에 대한 반성

① 가치교육의 핵심 문제로서 가치혼란

Rath 등이 주목했던 것은 1960년대를 전후로 미국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가치혼란의 문제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압력과 어지러운 변화 속에서 복잡한 결정에 마주하고 있었다(Rath et al., 1978: 17). 이 런 상황이 나타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가치혼란의 상황을 초래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매우 다양한 생활양식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통 사회에서 개인이 접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이나 외부 자원은 상당한 공간적 제약 하에 놓여 있었 다. 이는 한 개인이 한 사회 내에서 단일한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그 범위 내에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통 과 통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다른 사회의 문화와 가치를 마주하는 것 이 평범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새로운 매체들의 급습 은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생활양식을 보여 주는 것”(Rath et al., 1978:

35)이고, 더 이상 아이들은 단순히 주어진 가치관을 수용하는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즉, 가치혼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가치혼란은 현대 사회의 빠른 변화 속도로 인해 더욱 심 화되고 있다. 즉,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조차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의 빠 른 발전 속도는 일상생활 영역이나 학문 영역의 많은 부분을 급격하게 변 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과거에 진리처럼 여겨지던 필수 지식들이 오늘날

에 와서는 유용성을 상실하거나 구시대의 잘못된 이해나 편견으로 받아들 여지기도 한다. 비교적 객관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이론적 합의는 물론이고 그 기초가 되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나 사실 관 계의 재구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물며 이러한 내용을 기초로 인 간과 사회의 결정이나 판단에 대해 논의하는 인문사회 영역에서 올바른 선택이라는 것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것은 “전에 옳 았던 것들이 사실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Rath et al., 1978: 36)을 갖게 하며 동시에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처럼 과거에 비해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하고 심지어 선택지의 옳고 그름이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 개인의 가치 선택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틀림없다. 구체적으로 Rath 등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수많은 불확실 성과 모순의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가치혼란을 초래한다고 지적한다(Rath et al., 1978: 39-40). 특히 가치를 둘러싼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면서 이러한 혼란은 더욱 심해진다. 즉, 오늘날 우리는 평화의 소중 함에 대해 배우면서도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시대상에 직면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라는 도덕적 이상은 소수 집단 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이 나타나는 현실과 공존하고 있다. 사회 적 협력의 중요성을 배우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에게 가치혼란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지나치게 혼란스럽고 다양한 선택지 앞에 무방비로 노출 되는 것이 아이들의 가치 함양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Rath 등이 보기에 당시 아이들은 분명한 목적도 가지지 못했고, 스스로가 어디 로 가고 있는지, 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Rath et al., 1978: 29-30). 특히 아이들은 혼동된 생각 속에서 옳고 그 름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판단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있었다(Rath et al., 1978: 35). 게다가 이런 학생들을 도와야 할 학교 역시 도덕적 논쟁 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도덕적, 윤리적, 미적 가치들에 관 한 교육에서 한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Rath et al., 1978: 38).

그래서 Rath 등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치교육이 절실하다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가치혼란과 이로 인해 초래된 가치선택 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가치교육의 핵심과제라는 것이다(Rath et al., 1978: 21).

② 가치주입 및 교화에 대한 반대

그렇다면 가치혼란의 상황에서 교육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해 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가치교육에서는 가치주입식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해왔다. 가치주입식 교육이란 말 그대로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를 불어넣어주는 방식의 교육을 의미한다. 이 때 올바른 가치란 바로 어른들의 가치를 말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해준 목표를 따르 고, 어른들과 동일한 경험과 감정,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어른들 은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규칙을 정하고, 특정한 행동 유형을 강요 했다. 종교적·문화적 사실에 의존하고 양심에 호소하면서 아이들에게 특정 한 가치와 그에 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옳은 가치를 미리 결정해 둔 상태에서 이를 학생들에게 교화, 강요, 설득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가치명료화 이론은 가치주입 형태의 전통적인 가치교육 방법이 가치혼란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사실상 가치명료화 이론은 이러한 기존의 가치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으로 제시된 가치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Rath et al., 1978: 41-42, 63-65, 70-71). Rath 등이 가치주입식 교육을 반대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가치주입식 교육은 말 그대로 가치를 주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 치혼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혼란을 더욱 심하게 만든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수많은 다양한 가치 속에 둘 러싸여 있으며 이는 가치혼란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 에서 어른들에 의한 가치주입은 “이미 아이에게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신문, 잡지, 교과서,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이 강요한 명령에다 더 보태고 있는 것”(Rath et al., 1978: 41-42)에 불과하다. 사실상 중요한 것은 “아

이들의 머릿속에 이미 생긴 혼동을 아이들이 정리할 수 있도록”(Rath et al., 1978: 42) 돕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치주입 그 자체는 이 러한 도움과 관련된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가치명료 화 접근은 가치주입식 교육이 오늘날의 가치혼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치교육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둘째, 가치주입과 같은 전통적인 형태의 가치교육 방법은 효과적이지 않 다(Rath et al., 1978: 70-72). 실제로 어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모범을 보이거나, 특정한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교묘하게 설득해왔다. 또한 특정한 가치에 부합하는 감정이나 행동 유형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통해 길러진 아이들은 정작 그러한 가치를 진정으로 따르기보다는 “단지 믿는 척하는 방법만 아는 어른이 된다.”(Rath et al., 1978: 71). 즉, 권위 있는 상대방이 특정한 가치를 강요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치에 따르고 있다는 외양이다. 가치주입을 받는 학생들은 가치를 진정으로 내면화하기보다는 겉으로만 이러한 가치를 따르고 있음을 보이 는 데 주력한다. 이런 점에서 가치주입식 교육은 가치교육으로서 효과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가치주입식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사실상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데 있다. 가치주입이나 교화의 바탕에는 근본적으로 어른들에 대한 존경과 아이들에 대한 비하의 관점이 자리하고 있다(Rath et al., 1978: 42). 즉, 가치주입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목표를 따르게 하고, 어른들과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말한다. 이는 가치 선택에 있어서 아이들의 자율적인 판단을 믿 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수많은 사회의 변화와 지식의 발전에도 불구 하고 어른들의 믿음은 변화되어서는 안 되며 이 믿음이 그대로 아이들에 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속에서 어른들의 관점은 절대적인 것이 되는 반면 아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된 인격체로 인 정받을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이 사람이 아니라고 생 각”(Rath et al., 1978: 42)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