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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전제로서 다원주의

앞선 논의에 의거할 때 민주시민교육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의 개념이 공동체를 전제한다는 것은 비교적 명확하다. 하지만 또 다른 한 축 으로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무척 복합적이고 난해한 개념으로 사실상 현 재 논의의 범위를 제한하는 데 어려움을 야기한다. 즉, 민주주의를 가르쳐

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사회과 가치교육의 방향을 분명히 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것은 특히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다양한 규범적 함축을 갖는 가치 개념이라는 데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이나 개념으로 구성되 는 지식교육이나 기능교육과 달리 가치교육은 그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문제에 주목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가치교육에서 다루는 내용이나 개념은 사실이나 기능 개념보다 훨씬 더 추상적이어서 하나의 의미로 확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문적 지식으로서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가르치는 것과 바람직한 기업가의 태도로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는 것을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비교적 분명한 해석이 가능한 가치 개념이라고 해도 이 가치에 대한 태도는 관점에 따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교육의 방향 을 합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기업가 정신’이 라는 가치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입장에 따라 이 가치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특정 입장을 바탕으로 가치교육이 이뤄진 다면 분명 다른 입장을 취하는 측으로부터 반발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사실상 규범윤리학 내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나름의 근거를 통해 대립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하나의 입장을 가르치는 것은 분명 다수 사람들 의 동의를 받기 어렵다(정원규, 2011: 94-95).

이런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할 때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둘러싼 사회과 가 치교육 논의는 상대적으로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가치 입장에 좌우되지 않는 전제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양립할 수 없는 합당한 포괄적인 교리들로 이루어지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정의의 원 칙을 구성하기 위한 공적 근거를 탐색했던 Rawls의 작업을 떠올리게 한 다. Rawls(1993)는 포괄적 교리들 간의 화해불가능한 잠재적 갈등의 절대 적 깊이를 인정하면서 이 속에서 합당한 해결의 기반으로 중첩적 합의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다양한 종교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 입장의 차 이는 있지만 모두 종교의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

다. 같은 맥락에서 다양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중 첩적 합의에 해당하는 내용을 탐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가치 개념에 해당하는 것들의 후보로 가장 먼저 떠 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일컬어지는 ‘인간존중(인간 의 존엄성), 자유, 평등’이다. 이런 가치들은 흔히 민주주의의 기초이자 민 주주의의 본질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핵심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가치들이 다양한 해석과 관점을 허용하는 가장 논쟁적인 개념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자유’만 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자유주의 에서 말하는 ‘자유’와 공화주의에서 말하는 ‘자유’, 그리고 공동체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각 사상을 특징지을 만큼 그 의미가 크게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가치 입장에 좌우되지 않는 가치 개념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민주주의의 전제에 해 당하는 개념으로서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다른 가치에 우선하는 어떤 특별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 하에 상대방을 상호 인정하는 태도(허라금, 2001: 276)를 말한다. 즉, 이것은 가치판단에 있어서 어떤 것이 궁극적으 로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지배로 정 의되는 것은 바로 다수의 사람들 각각이 가진 생각과 주장을 인정해야 한 다는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다원주의가 가치에 있어서 상대주의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흔히 일상적으로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혼용되고 있으나 다원주의는 “다원성 그 자체를 거부하는 입 장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와 구별된다”(정원규, 2011: 97).

특히 다원주의는 그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앞서 언급한 다른 민주주 의 가치에 비해 특정한 가치입장에 상대적으로 독립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양한 생각과 주장을 존중한다는 다원주의의 정의 자체는 특정 입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다른 가치 개념과 달리 비교적 단일 하게 이해될 수 있다.8) 더욱이 다원주의는 다원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 8) 여기에 대해서 다원주의 개념 역시 소극적 다원주의와 적극적 다원주의, 약한 다원

주의와 강한 다원주의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대체로 규범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다원성의 정도에 대한

않는 이상은 어떤 특정한 입장을 취하더라도 그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롤즈가 말한 중첩적 합의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하더라도 다른 사람 의 사상과 의견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바탕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 교육에서 다원주의는 민주주 의 교육이 추구하는 가치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 전제로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과 가치교육 방안에 관한 논의는 다원주의를 수용 하는 바탕에서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