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교육에 관한 현재의 논의가 민주시민교육으로서 사회과교육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치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
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가치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가치교육 이 목표로 하는 시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면서,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가치 방향을 설정하고 결정을 내리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가치명료화 접근에 대해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즉, 이미 강조한 것처럼 외부의 개입을 차단한 채 개인의 사고와 경험 내에서 이루어지는 가치화 과정은 개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존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반드시 고려한다고 보기 어렵다. 즉, 가치명료화 접근의 결과로 나타나는 개인이 단순히 개인으로 머물면서 내가 아닌 타자에 대해, 그리 고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이러한 모습은 최소한으로라도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민의 모습으로 보기 어 렵다. 적어도 시민이라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려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여기서는 기존에 가치명료화 접근에 대해 쏟아진 여러 가지 비판을 보다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사회 적 기본가치 학습에 있어서 가치명료화 접근의 한계를 분명히 하도록 하 겠다.
① 탈도덕적 가치와 비도덕적 가치의 명료화 문제
앞서 윤리적 상대주의라는 혐의를 통해 가치명료화 접근에 가해진 비판 의 중요한 부분은 가치명료화 접근에서의 가치교육이 순수하게 개인적 차 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존중 해야 한다는 가치명료화 접근의 기본적인 생각은 가치화 과정에서 사회적 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을 위험을 초래한다.
이 같은 우려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볼 수 있 다. 즉, 가치명료화 이론에 대한 주된 비판 중 하나는 이 이론이 도덕적 가치(moral value)와 탈도덕적 가치(non-moral value) 혹은 비도덕적
가치(immoral value)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정호범, 2014: 63). 이 때 탈도덕적 가치는 개인의 취미나 기호 등 도덕과 무관한 가치를 말하고, 비도덕적 가치는 도덕에 어긋나서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가치를 말한다. 그렇다면 가치명료화 접근에서는 탈도덕적 가치와 비도덕적 가치 를 명료화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먼저 탈도덕적 가치를 명료화하는 것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분명 가치명 료화 이론에서 명료화되는 가치는 자신과 타인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이익으로서 도덕적 가치와 자신의 선호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탈도덕적 가치를 모두 포함한다. 특히 가치명료화가 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도덕적 가치를 주로 다루는 다른 가치교육 방법에 비해 가치화 과정에서 탈도덕적 가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 로 높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가치명료화 접근의 비판자들은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개인이 명료화하는 가치라는 것이 단순한 개인의 취향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에 서 일반적인 도덕적 가치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가치명료화 방법은 단순한 취미에 불과한 사소한 질문과 중요한 윤리적 가치를 담은 질문을 혼동하고 있다(이병호, 1999: 249; Lickona, 1991:
23). Hersh et al.(1980: 147-149) 또한 도덕적 가치와 도덕과 무관한 가 치 간의 구별 결여를 가치명료화 이론의 중요한 문제로 지적한다.
이러한 비판은 탈도덕적 가치에 비해 도덕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전 제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전제를 가치 논의의 기반으로 수 용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어떤 개인이 프라모델 조립이라는 취미를 갖 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개인은 프라모델 조립을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 각해서 다른 도덕적 가치, 예를 들면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프라모델을 구입 하기로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치명료화 접근은 이 개인의 가치 선택 을 지지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선택에 대해 비판자들은 도 덕적 가치가 탈도덕적 가치와 같은 수준에서 논의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도덕적 가치는 탈도덕적 가치에 비해 반드
시 우위에 놓여야 할까? 현재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라모델 조립과 같은 취미활동은 제3세계 국가에서 기아로 고통 받는 어린이를 돕는 것보 다 무가치한 것일까? 본 연구자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도덕적 가치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가치 논의는 아마도 우리 삶의 많 은 부분을 도덕적인 것으로만 채워버릴 가능성이 높다. 즉, 우리는 도덕적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개인을 설득할 수 있지만 그것과 비교 하여 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탈도덕적 가치가 중요하지 않다고 설득하 기는 어려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가치교육의 과정에서 탈도덕적 가치가 많이 다뤄지는 것 자체를 문제로 볼 수는 없다. 바람직한 삶은 도덕적인 삶의 개념보다 광범 위하며 도덕적 요소와 탈도덕적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Kekes, 1993:
10-11; 정호범, 2014: 21). 또한 가치명료화 모형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결국 가치에 대한 개인의 선택과 그것에 대한 존중이 중요하다면 이러한 선택과 존중의 영역은 단순히 도덕적 영역에만 국한될 이유는 없다. 교육 의 목적으로서 자율성은 도덕적 영역과 탈도덕적 영역을 포함하는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에 걸쳐 적용되어야 한다(Dearden, 1972). 따라서 탈도 덕적 가치에 대한 개인의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탈도덕적 가치와 달리 비도덕적 가치를 명료화하는 경우라 면 어떨까? 개인이 비도덕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경우 이것 역시 가치 명료화 접근에서는 가치 선택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이것 은 분명 앞서 탈도덕적 가치에 대한 논의와는 다른 문제이다. 우선 비도덕 적 가치라는 용어 자체의 의미가 불명료하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즉, 단순히 비도덕적이기만 한 행위의 ‘가치’란 무엇일까? 가치명료화 접근의 취지처럼 ‘가치’의 의미를 정해진 것이 아닌 개인적인 차원에서 가치화 과 정의 소산으로 본다고 할 때 개인이 비도덕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선택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본 연구자는 단순히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한 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개인이 비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그
행위가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의 가치를 띠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거짓말을 하는 비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경우를 생 각해보자. 이 경우 A가 거짓말하는 행위를 선택한 것은 이 행위가 비도덕 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통해 다른 이익, 예를 들자면 경제적 이익을 얻기에 유리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비도덕적 행 위를 선택하고 비도덕적 가치를 명료화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이라는 탈도덕적 가치를 정직이라는 도덕적 가치보다 우위에 둔 것이다. 사람들이 비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은 많은 부분 이렇게 해석될 때 더욱 현실적 적 합성을 띠기 마련이다. 즉, 단순히 비도덕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비 도덕적인 것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선택하는 경우는 사이코패스나 정신분 열증 상태에 있는 사람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을 가정하지 않고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사실상 사이코패스가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에도 대체로 다른 육체적·정신적 쾌락을 위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비도덕적 가치를 그 자체로 선택하는 경우는 논의에서 배제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도덕적 가치를 명료화하여 비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개인이 탈도덕적 가치를 중시 하면서 도덕적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고 그 결과 비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 로 비도덕적 행위가 일어나는 문제 상황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 고 비판자들이 보기에 가치명료화의 결과가 어쨌든 비도덕적 행위로 나타 난다면 이것이 올바른 가치교육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Kohlberg(1981: 49-50)는 가치명료화 이론에서 학습 자가 부적절한 가치를 형성하거나 이를 정당화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 인가에 관한 문제를 제시한다. 가치명료화 접근의 경우 교사는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가치인지 제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결국 학생들이 비도덕 적 행위를 선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Damon(1990: 243-244)은 가치명료화 접근에서 교사가 부정직과 정직 중 우선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제시하지 않을 경우 학습자는 자신의 부정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