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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0년 2월 박사학위 논문

자본주의 욕망과 탈주로서의 몸의 표현 연구

- 연구자 작품을 중심으로 -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서 현 호

(3)

자본주의 욕망과 탈주로서의 몸의 표현 연구

- 연구자 작품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Expression of Body as Capitalistic Desire and Escape - Focused on the researcher's work -

2020년 2월 25일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서 현 호

(4)

자본주의 욕망과 탈주로서의 몸의 표현 연구

- 연구자 작품을 중심으로 -

지도교수 김 유 섭

이 논문을 미술학 박사학위 신청논문으로 제출함

2019년 10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서 현 호

(5)

서현호의 박사학위논문을 인준함

2019년 12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6)

목 차

제1장 서론

... 1

제1절 연구 배경과 목적 ... 1

제2절 연구 접근 방식과 개요 ... 3

제3절 연구의 특성과 몇 가지 한계성 ... 5

제2장 자본주의와 인간의 욕망

... 9

제1절 자본주의와 인간 ........ 9

2.

신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 9

3. 호모 사케르

... 13

4. 규율사회와 성과 사회

... 13

5. 경쟁사회와 성격 없는 자아

... 17

제2절 들뢰즈 인간 이해와 욕망

... 24

1. 들뢰즈 존재론 ... 24

가. 들뢰즈 철학의 출발 ... 24

나. 존재의 일의성 ... 26

2

.

생산적이고 전복적인 욕망의 힘 ... 33

가. 욕망하는 기계 ... 34

. 매끈한 공간과 되기(

Becoming)

... 39

다. 노마드의 삶 ... 42

(7)

제3장 선행작가 몸 표현 연구

제1절 기관 없는 신체 ... 46

제2절 선행 작가의 몸 표현 연구... 46

1. 춤사위로 표출된 힘( 吳潤) ......... 49

2. 인간존재에 대한 관심(Lucian Frued)... 53

3. 감각의 논리 (Francis Bacon )... 58

4

. 신체의 표현성

... 64

제4장 연구자 작품의 실제 분석

........ 73

제1절 구상에서 표현까지 ............ 75

제2절 연구자 작품 표현의 특징 ....... 78

1. 색채의 원시성....... 74

2. 신체 동선의 반영으로서 선....... 82

가. 유동하는 선 ... 82

. 발화하는 몸짓 ... 80

제3절 자본주의 우울과 욕망 ... 90

1. 시대 체험적 미술의 구현 ... 90

2. 현대인과 분열증 ... 95

3. 자본주의적 욕망 ...102

제4절

노마디즘과 춤

... 114

1. 감각의 구현과 춤 ... 114

2. 노마디즘과 춤 ... 117

제5장 결론

...,,,,,... 123

(8)

참고 도판 ... 129 참고 문헌 ... 131

(9)

ABSTRACT

A Study on the Expression of Body as Capitalistic Desire and Escape

- Focused on the researcher's work - Seo Hyun-ho

Adviser : Professer Kim Yu-sueb, Ph.D Department of Fine Arts,

Graduate School of Chosun University

In normal, morden art can no longer be explained by any aesthetic ideology as in modernism era. This can be implicitly explained as ‘end of art’, as Arthur C. Danto said. Or we can comprehend through pluralism that all forms of free acceptance and borrowing is almost limitlessly tolerated. However, rather than focusing on the conceptual establishment of this modern art, with emphasizing that art has an existential position in our lives with relationship, and that art cannot be independent of social phenomena, and that the artist's existential position cannot be separated from the social conditions, we can take a clue from the origin and function of art. Of course, instead of asking the existential question, ‘what is art?’, I rather wanted to think deeper about the practical meaning of the art that the I have. Already, philosophers like Gilles Deleuze claimed that practice precedes existence. I also believe that art and artists, to put it roughly, are existence increase the value of their lives through practices in their own way, not practices in their conception.

In this thesis, I emphasize that there is something in art more than just a low level of personal indulgence that comes from the fulfillment of desire through self-consciousness of an individual or encouraged by capital logic. As a starting point of this perception, it starts with a review of how art has been organized in the development of modern Korean art. In this process, I made an overview of the history of reality-oriented art in Korea and analyzed its limitations and achievements. I will also examine the typical social character

(10)

represented by real capitalism through consideration of the reality that the new capitalist system dominates our lives, and look at the flow of capital and human desire in it. It is hard to deny that there is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human desires and capitalism. It is also hard to deny that the laws of the market are all over modern society like the will of God. Human desire is no exception, so I tried to explain the idea of Gilles Deleuze that the source of capitalism rolling is based on human desire, and that the resolution of various contradictions derived from it can also be found within this desire of capitalism. That is the ‘creating desire’ of Gilles Deleuze. Also the basis for this desire and the dwelling can eventually be linked to the body’s discourse.

Maurice Merleau-Ponty emphasizes that the body’s emphasis on reason, which used to be a modern Western idea, connects with the world through the perception of the body. The body emphasizes that the subject and the world have no choice but to have meaning in life through the encounter of ‘assimilation’.

Furthermore, this body philosophy led to M. Johnson’s Empiricism. In Empiricism, we find the main core of human conceptual system in language, emphasizing that the core begins with the ‘metaphorical projection’ of our bodies. Based on these theories, the subject of ‘dancing’ in my work was intended to explain what the message was. I wanted to analyze the dance shown in my work as an expression of physical and language, the meaning as body’s experience, and the ‘pure energy’ that the body exudes before it was created, or the power of real human beings.

(11)

국문초록

현대미술은 더 이상 지난 모더니즘 시대와 같이 어떤 미적 이데올로기로 접근해 설 명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 접근이다. 물론 이 말이 아서 단토의 주장처럼 ‘예술의 종 말’로 함축해 설명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형식의 자유로운 수용과 차용 등이 거 의 무제한적으로 용인된 다원주의를 빌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 러한 현대미술에 대한 개념적 확립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과연 예술이 우리 삶과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적 위치를 가지는지. 그리고 예술 역시 사회적 제 현상과 독립적일 수 없으며, 예술가의 존재적 위치 또한 결국 그가 속한 사회적 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 는 점을 강조해 예술의 기원과 기능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잡아가고자 했다. 물론 이는

‘예술이 무엇인가?’ 라는 존재론적 질문 대신 오히려 연구자가 가진 예술의 실천적 의미에 대해 더 깊은 고민하고 싶었다. 이미 들뢰즈 같은 철학자는 존재보다 실천이 앞선다고 주장했다. 연구자 또한 거칠게 표현하지면 예술이나 예술가 또한 관념 속에 서의 실천이 아닌, 나름대로의 예술실천을 통해 자기 삶의 가치를 높여가는 존재라 믿 는다.

본 논문에서 연구자는 예술에는 단지 개인의 자의식을 통한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자기도취라거나 자본 논리에 휘둘려 부추김 당하는 저열한 개인적 탐닉 수준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인식의 출발로서 우선 한국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에서 미술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해 왔는가에 대한 검토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에서 현실지향적 미술의 역사를 일별하며 그 한계와 성과를 분석했다.

또한 신자본주의 체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해 현실자본주의에 서 대변되는 대표적인 사회적 성격을 검토하고, 그 속에서 자본과 인간의 욕망의 흐름 을 살펴볼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와는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 렵다. 시장의 법칙이 마치 신의 의지처럼 현대사회 전면에 포진해 있음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의 욕망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원천이 곧 인간의 욕 망에 기초해 있다는 점과 아울러 이로 인해 파생된 여러 모순들의 해결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의 욕망 내에서 찾을 수 있다는 들뢰즈의 사상을 빌어 설명하고자 했다. 그것 이 바로 들뢰즈의 ‘생성하는 욕망’이다.

또한 이러한 욕망의 근거이자 거처는 결국 몸의 담론과 연결 지을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근대 서구 중심사상이었던 이성에 대한 몸의 강조로 몸의 지각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몸이란 주체와 세계가 ‘동화’라는 만남을 통해 삶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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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아가 이러한 몸철학은 존슨의 체험 주의로까지 이어져 설명하고자 했다. 체험주의에서는 인간의 개념체계를 이루는 주요 핵심을 언어에서 찾으면서, 바로 그 핵심은 우리 시체의 ‘은유적 투사’에서 시작된 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이론들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작품에 나타나는

‘춤’이라는 소재를 통해 연구자가 하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했다.

연구자는 몸의 체험으로서 가장 몸과 언어, 몸의 체험으로서 의미, 생성 이전의 몸 자 체가 발산하는 ‘순수한 에너지’의 표현, 즉 실재하는 인간존재의 힘의 표현으로서 연구자의 작품에 나타난 춤을 분석하고자 했다.

(13)

제1장 서 론

제1절 연구의 배경과 목적

오늘날 미술은 어떤 지침이나 선언문, 그리고 예술이 나아가야 할 미적 이데올로기 를 제시하던 지난 모더니즘과는 확실히 다른 지점에 있다.1) 아서 단토(Arthur C.

Danto)는 ‘예술의 종말 그 이후’에서 이러한 의미의 압축으로 예술의 종말을 이야 기 한 바 있다. 그가 말한 예술의 종말 의미란 바로 예술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 하고 예술이 더 이상 나아가야 할 특정한 내적인 방향의 믿음 체계가 없다는 주장이 다.2) 또한 아서 단토는 이러한 믿음체계가 무너졌다는 의미를 거대 서사의 종말로 함축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거대 서사의 종말이란 곧 세계에 대한 모방을 본질로 여겼던 바사리(Giorgio Vasari) 서사와, 더 이상 사물에 대한 외관의 정복이 미술의 목표가 될 수 없다며 모더니즘의 길을 열어 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등이 가졌던 거대 서사를 말함이다. 바로 이것은 미술사에서의 거대 서사가 앤디워홀 의 부릴로 박스(Brillo boxes)등장과 함께 끝났다는 이야기와 통한다. 어쩌면 아서 단 토의 이러한 주장은 현대 미술이 지닌 특성을 가장 명료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말한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이 된, 예술의 본질에 대 한 탐구는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엔디 워홀(Andy Warhol)의 브릴 로 박스 이후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의 관계는 모호해 졌기 때문이다.3) 과연 상점에 진열된 브릴로 상자와 워홀의 상자가 외관상 차이가 없다면 이 둘 사이를 규정 하는 조건이란 무엇일까. 단토는 이 질문에 ‘의미와 구현’ 즉, 예술작품이란 하나의

‘구현된 의미’로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답한다. 물론 연구자는 컨템퍼러리아트에서 이러한 예술 조건의 확인 역시 중요한 논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1) 이는 현대 미술을 개념 짓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문제의식을 제공한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아서 단토 (Arthur C. Danto)의 주장이기도 하다.

2) 장민한, <아서 단토>,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p.38. 참조.

3) ARTHUR C. DANTO.2012, What art is, Yale UNIVERSITY PRESS, 2000, pp.49~5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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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규정하기 위한 하나의 개념적 확립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어느 것이 예술 이냐 아니냐의 문제 이전에 과연 예술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더 논의의 초점을 맞추려 한다. 연구자는 삶과 예술 사이에서 예술가의 존재적 고민이 란 결국 그가 속한 사회적 조건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가진다. 따 라서 본 연구의 배경에는 작가이기도 한 연구자가 속한 사회 제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의 작품을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의 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현대미술의 조건에서 ‘모든 것은 다 예술이 될 수 있다’라는 전제가 가능하다는 말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현대미술에서는 모든 형식의 자유로운 수용과 차용, 장르 라는 경계마저 무의미한 것으로 변해버린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것 이 다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 미술에서는 탈역사적 지평 위에 어느 때보다도 예술가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단토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한편 단토의 주장처럼 다원주의적 미술계는 다원주의적 미술비평을 요구한다.4) 언급한 것처럼 현대 예술가에게는 작품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 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에게는 자기 작품에 대한 의미에 대해 어느 시기보다도 더 깊 이 있는 성찰이 요구되어지는 때가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 혹자는 현대 미술의 특징을 한마디로 ‘형식의 빈곤과 관념의 과잉’으로 압축 표현하기도 한다. 이 또한 그만큼 동시대 미술에서 작품에 대한 작가적 사유가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음을 역설적으 로 보여준다 하겠다.

본 논문은 이러한 현대미술 요구에 부합하면서 연구자 작품이 가진 의미와 그 의미 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려 한다. 그리고 본 논문에 서 언급하는 여러 학술적 개념의 인용이나 도입의 시도는 결국 본인 작품에서의 ‘의 미’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함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를 통해 그동안 진행 되어 온 연구자 작업에 대한 위치를 가늠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시 도가 앞으로의 연구자 작업 방향에 새로운 탐색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4) Arthur C. Danto,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김광우 옮김, 미술문화, 2012, p.281. 참조.

(15)

제2절 연구 접근 방식과 개요

연구자 작품의 주요 중심 주제는 인간과 인간의 삶에 얽힌 사건의 장에 있다. 여기 서 인간이란 동시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내적 감정을 가진 개체이자, 동시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연구자의 작품 주제로 자 주 등장하는 현대인의 소외와 신자본주의의 전개과정 속에 더욱 심화되고 있는 부의 불평등, 사회적 공동체의 급격한 퇴락으로 빚어진 불안, 무한한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던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나타난 인간 욕망에 대한 분열적인 사태 등 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일찍이 들뢰즈는 자본주의를 편집증과 분열증 사이를 요동하는 체제로 진단한 바 있 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이해는 연구자의 작품에서 여러 형태의 인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다는 전제하의 모든 것을 자 본의 가치로 환원해 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인간마저 상품화의 대상으 로 치환해 버리는 막강한 힘 앞에 대중은 분열증에 빠지기 쉬울 수밖에 없다. 그동안 연구자가 주로 다루었던 인간상은 바로 이러한 물적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의 이해 없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현대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통제 관리한 다고 볼 수 있는 자본주의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치경제학적 접근 보다는 사회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 되는 데는 그 하부구조에 욕망이라는 무의식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들뢰즈의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의 분열적 현상을 오히려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들뢰즈 욕망론에 기댄 바 없지 않 다고 본다.

이렇듯 본 논문에서는 자본주의의 이해에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강력한 하부구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욕망의 이해까지 들뢰즈의 사상과 연관성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 을 것이다. 들뢰즈는 자본주의의 분열적 요소를 진단하며, 기존 사회가 가질 수 있는 억압의 기저로서의 영토화와 코드화를 넘어 설 수 있는 탈주에 대해 이야기 한 바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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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연구자는 이러한 들뢰즈의 주장에 공감하며 연구자 작품과의 관련성을 설명해 나 갈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 내포된 수많은 문제들은 탈영토화와 탈코드화를 지 향하려는 인간 본성을 어떻게 억압하고 조정하며, 이를 통해 다시 재영토화 재코드화 해 나아가는지에 대한 들뢰즈의 분석이 연구자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봐 서 그의 존재론적 근거들을 개략할 것이다. 그동안 들뢰즈가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인간 본성회복에 관한 여러 논의는 바로 연구자가 지향하는 예술적 가치와 맥을 같이 한다.

바로 이 점 또한 들뢰즈가 본 논문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들뢰즈가 자본주의에 내포된 분열적 힘을 자본주의 모순 해결을 위한 혁명적인 힘으로 받아들이는 지점에서 들뢰즈의‘생성하는 욕망’개념이 동원될 것이다. 연구자 의 작품에 등장한 ‘춤’소재 또한 들뢰즈가 언급한 노마디즘의 개념과 상치(相値)되 는 면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분열적 힘의 이면에는 욕망이 있음이다. 그 리고 작품에 나타난 춤은 순수한 감각의 발현으로 욕망의 본성을 현현하고 있다는 점 에서 그렇다. 아무튼 본 논문에서 거론되는 주된 이론적 토대는 들뢰즈로부터 시작해 들뢰즈로 끝난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들뢰즈 철학이 내포하는 바 가 광대해서 그럴 수도 있고, 연구자의 작품이 가지는 지향성이 본 논문에서 언급하는 들뢰즈의 개념들과 유사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 논문의 접근방식은 자연스럽게 연구자의 작품 분석에 유용할 들뢰 즈의 기본 개념들을 먼저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 작품에 내포된 의미를 이와 대응해 보는 방식으로 전개할 것이다. 이 점은 본 논문이 들뢰즈 사상을 기반으로 상 호 연관을 맺으며 진행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런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 담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면 본 논문은 철학적 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인용된 개념들은 단지 연구자 작품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시키는데 일조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연구자는 생각한다. 아무튼 본 논문의 전반부는 주로 들뢰즈의 사상에 기대 연구자 작품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데 필요한 개념들을 정리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기초는 연구자 작품이 내포 한 의미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후반부에 분석하게 될 작품의 형식적 부 분에 대해서도 그 유용성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7)

마지막으로 본 논문에서는 연구자가 예술을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언급할 것이 다. 이를 미리 말하자면 한마디로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라 할 것이다. 초기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안겨줄 것처럼 비쳤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인간을 인간본성으로부터 더 멀게 하였으며 인간을 소외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구자의 예술적 지향은 자본주의의 부정성에 더 주목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지향 점은 때로 작품의 내용적인 면에 역점을 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바로 이러 한 연유로 본 논문에서는 그동안 다소 소홀했을지 모를 작품에서의 형식미에 대해 또 한 고민해 보는 기회를 삼고자 한다. 연구자의 이러한 태도는 본 논문에서 선행 작가 작품 연구를 통해 보다 구체화 될 것이다. 더불어 연구자 작품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 특성들을 파악해 보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특 히 연구자는 루시앙 프로이드 후기 작품에 나타난 물감의 물성을 살리는데 많은 관심 을 가지고 있다. 이와 함께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하는데 이번 연구가 기폭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제3절 연구의 특성과 몇 가지 한계성

단토가 주장하는 것처럼 컨템퍼러리 아트에서는 더 이상 미술 역사에서 경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특질을 가진다.5) 그야말로 현대예술의 다원주의가 어쩌면 예술 창조의 완전한 관용의 시대를 열어젖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예 술가가 될 수 있고, 또한 그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의 미는 단토의 주장처럼 이러한 현상이 더 이상 예술이 예술로 존재 할 근거가 무너져, 소위 더 이상 예술의 존재가치가 사라졌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5)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p.9~10 참조.

(18)

컨템퍼러리 미술에는 과거의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 같은 것이 없으며, 과거라는 것이 그에 대항 해서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없고, 심지어 자신이 미술로서 일반적으로 모던 미술하고도 다르다는 의식도 없다. 컨템퍼러리 미술을 정의하는 부분적인 특징은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이 과거의 미술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미 술이 제작되었던 바로 그 정신이다.6)

여기서 강조되는 바는 바로 예술에 내포된 정신이라 볼 수 있다. 즉 현재 우리가 모 든 예술 영역으로부터 완전한 관용을 얻었다지만, 그 대신 이전 특정한 방식 그대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고 마는 셈이다. 따라서 혹자는 현 대 철학가들이 예술에 빚진 바가 크다고도 말한다. 또한 반대로 예술가 입장에서 생각 해 볼 때, 예술가 역시 현대 철학의 흐름이나 인접 학문적 이론에 빚진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연구자 또한 자신의 작업 세계를 설명하고 분석하는 데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현대철학이나 정신분석학, 혹은 사회학의 영역들이 이전 어느 때보 다 예술의 영역과 밀접해진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본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인용되는 개별 개념들 또한 방대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그리고 엄격하게 말하 자면 추상적 개념을 가진 이러한 언어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되는 회화의 의미 를 분석하려는 시도가 과연 가능할지도 의문일 수 있다. 즉 시각적 요소를 빌어 인간 감성과 관계된 정서와의 교감을 통해 세계를 표현하려는 작가의 태도나 정서를 과연 논리적 언어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본질적인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본 논문에 대한 실제적인 한계 또한 명백하다. 우선 본 논문은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연구자 본인의 작업적 성과를 중심 으로 그동안 연구자가 추구해 왔던 작품 저변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를 얼마만큼 합리 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로 설명해 내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당연히 여기에 인용된 철학적 개념이나 이론들은 그 자체의 비판이나 새로운 이론적 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분석이 아니다. 단지 이들은 연구자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는 판단 아래 빌어다 쓴 셈일 뿐이다.

컨템퍼러리 미술의 속성이 그러하듯 동시대 작가는 자신의 의도와 기질에 맞도록 그 어떤 작업 방식이든 자유롭게 취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작가가 자신의 작 품을 분석하는데 어떠한 이론적 바탕이나 주관적 개념들을 마구잡이로 덧붙여 쓸 수는

6) Arthur C. Danto, 앞의 책, pp.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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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최대한 동시대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회자되는 담론 이나 개념들을 개략적이나마 객관적인 근거에 입각해 설명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러나 거듭 언급 했듯이 본 논문의 성격상 철학적 혹은 미학적 고찰 자체에 의의가 있다기보 다는 자신의 작품 배경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이 앞선다는 판단 아래, 이 또한 어쩌 면 예견된 연구의 한계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약 하자면 본 연구는 일반 학술연구와는 다른 몇 가지 특성을 가진다. 우선 연구 자는 일반적으로 예술계라고 하는 총체적 위계 안에 속해있는 미술가로서, 작품을 통 해 자신의 내면가치나 감성 그밖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주로 시각적 요소를 빌어 소통하는데 익숙한 자이다. 물론 소통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고 그 방식의 차이7)가 장르의 차이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림 또한 하나의 표현 양식이자 소통하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하나의 작품 안에 앞에 언급한 범주의 제요소들 이 혼재해 있을 수도 있고, 그 중 일정한 부분을 선택해 나타낼 수 있음 또한 당연하 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예시한 작품들을 통해 그 속에 의도된 작가의 의미전달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려는 과정으로 진행되었음을 밝힌다. 언급한 소통의 여러 범주가 혼재되어 표현된 작품을 통해 작가의 내면 심리나 작품이 지닌 숨은 의미나 의도를 파 악하고자 하는 시도 또한 결국 다른 매체(언어)의 힘을 빌려 이를 완전히 해석해 내기 란 애초 불가능하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일반적인 어려움 은 차치하더라도 본 논문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성은 이해해야만 할 것 이다.

우선 하나의 작품이란 그 작품 자체로 완전한 기표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미 완성된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한 어느 이론체계나 개념체계도 이를 완벽 히 짚어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전재를 깔고 보다 근접한 해석의 결과를 위해 주변 학문적 연구 성과를 인용한 것일 뿐이다. 본 논문 역시 여기에서 인용한 선 행 이론이나 개념들이란 어쩌면 그 본래 연구의 취지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다소 벗어 난 면 또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본 논문은 하나의 주의 주장을 인용

7) 현대 언어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의 기호체계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눈다. 우선 도상이다.

도상이란 곧 그것이 표현하는 기호와 의미가 바로 동일시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예를 들자면 남녀 화장에 입구에 놓인 간략화 된 그림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음으로 상징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쓰는 언어를 생각하면 된다. 언어란 지칭하는 기표와 그것이 의미하는 기의가 전혀 연관 없이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그 의 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상이 있다. 도상이란 나타내는 기호체계와 뜻하는 의미사 이의 인과성을 염두에 두면 된다. 예를 들어 산자락 너머에서 연기가 나고 있고 작은 계곡에서 동자승이 물 놀이를 하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하자. 우리는 그 그림을 보고 곧 절 그림이 보이지 않아도 바로 산자락 너머 절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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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그 주장 자체를 비판하거나 혹은 그것을 통해 새로운 논설을 펼치기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단지 작가의 작품을 검토하는데 필요한 단편적인 개념들의 차용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인용한 부분이 그 이론이나 주장하는 자의 전체적 맥락과 궤를 같이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연구자의 작품 해설과 견주어 인용된 부분 부 분의 내용이 전체 맥락에서 논리적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아무튼 이 밖에도 본 논문에서의 한계성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한계성이란 연구자의 또 다른 표현인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앞으로 계속 보충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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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자본주의와 인간의 욕망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많은 물질적 풍요와 개성적인 자유를 누리며 산 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 속의 삶이 인류 어느 시기보다 풍족한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기도 한다. 유럽에서 처음 자본주의가 태동했을 당시 역시 많은 사람들 은 자본주의에 대해 이것이 가져다줄 적극적인 자유에 대한 기대와 물질에 대한 풍요, 불평등의 해소에 대한 대안으로서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인류에게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심지어 는 비관적인 전망 속에서조차 자본주의 근간에 대하여 만큼은 크게 부정하는 사람 또 한 드물다. 또한 삶의 양식을 고려할 때 경제적인 부분은 현대인의 삶을 구속하고 결 정짓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이해는 중요하다.8) 그 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흐름은 그 자체가 욕망이 되어 현대인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이처럼 욕망과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해오고 있다. 따라서 자본 주의 문제를 진단하기 위해서 욕망의 개념은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것이다. 바로 이번 장에서는 이러한 자본주의와 욕망의 문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제1절 자본주의와 인간

1. 신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초기 자본주의 성장 과정에서는 분명히 당시 사회 제도적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 을 가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이상에 대한 믿음이 어느 시기보다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라 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잘 실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 졌을 때 쉽게 결론 내기는 어렵다. 자본주의에 대한 확신은 적극적으로 확대된 자유 속에서 개별 주체는 자아를 보다 능동적으로 이끌며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자아로 만

8) 소근주 ‘문화연구와 노동-욕망의 복합체로서 자본주의 비판. 마르크스와 들뢰즈를 중심으로’, 한양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9. p.1~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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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과 경제법칙이 지배한 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들을 쉽게 이뤄 내리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니었을까. 사람 대신 시장과 경제가 지배하는 경제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란 얼핏 인간의 적극적인 자유 를 최대한 넓혀주는 주요한 토대가 되는 것처럼 비친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에서 신흥 자본가 계급은 당시 낡은 봉건제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마침내 시민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신흥 자본가 계급으로 부상한 중산계급은 이러한 정치적 승리를 기반으로 그동안 왕이나 귀족들이 갖던 외부의 권위와 특권을 부수고 그 자리에 인간의 내적 충 동에 의해 (자기스스로 자유의지에 의해) 무엇이든 원하는 일을 하고, 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초기 자본주의의 하에서의 민중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정치세력으로부터 받은 권위 와 폭압으로부터는 해방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상품화 되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품화의 과정이 일반화 되면서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에 따라 가치평가는 왜곡되어 간다. 또한 상품화 과정에서 매개로 작동되는 화폐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 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만능과 황금만능의 세계관 확산으로 나아 간다. 어쩌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경제 우선주의나 돈 중심의 세계관을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기본 관념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결국 모든 것을 상품화 시키는 자본주의에서만 주어지는 고유 관념인지 모른다. 그리 고 이러한 모든 것의 상품화라는 이슈의 최대 재앙은 곧 ‘인간의 상품화’라는 형태 로까지 번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건강한 존재로서의 인간 삶을 위협하는 또 다른 기제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상품화 될 수 있고, 모든 상품은 상품화를 통해 서 시장에 유통되는 귀결로 시장 만능주의를 가져온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시장과 경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경제가 사람을” 지배하며, “사 람은 시장의 노예, 경제 법칙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9)

자본주의는 모든 걸 시장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게 유도한다. 여기서는 사람도 예외 는 아니다. 시장 만능주의 뿐 아니라 사람을 비인격적 메커니즘에 따라 개별화 해 나 간다. 사람이 시장을 통해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의

9) 김태형 지음. 싸우는 심리학, 서해문집, 2014, p.16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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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편화된 개인주의는 주체의 자유를 확대하는데 이바지하기보다는 시장에서 높은 가치로 팔릴 수 있도록 자신을 부추기는 상품화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여 개별 자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위해 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형으로 바뀌어 간 다. 이러한 여건에서의 개인주의란 인류의 의미 있는 번영과는 거리가 있다. 공동체의 연대와 사랑을 품어 존재를 고양시킴으로서 행복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이란 결국 스스로를 상품화 해 이를 바탕으로 삶 자체를 수단화하거나 도구 화해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이란 스스로를 상품으로 내몰 뿐 아니라 이를 장려 하기까지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시장이라는 장을 통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경쟁 할 수 있다는 그럴싸한 경제 논리를 바탕으로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긴다. 타자와의 극 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외로운 고투로 늘 불안하고 고독한 삶의 연속으로 인해 현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부정할 수 없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란 이러한 극한의 경쟁 속에서는 언제나 사회로부터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우울 해지기 쉽다. 또한 승자독식의 시장체제는 시장에서의 실패를 곧 사회로부터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내몬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의 경험들이 공유되면서 불안한 자아는 자신을 주체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보다 큰 힘과 권위에 의존하게 되고, 의존은 스스 로의 존재에 점점 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10) 결국 무력감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 는 기재로 작동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의 현대인의 심리는 쉽게 기성의 권위와 위압 에 복종하게 만드는 경향성을 띤다. 연구자는 바로 이 점이 현대인에게 잠재한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20세기 후반부터 신자본주의 체제로 이행 되면서 이전 어느 시기보다 더 치열한 경쟁에 빠지게 되었다. 결과 더 많은 자본가가 파산에 이르는 경험을 했고, 치 열한 경쟁에서 살아 난 자본은 그 덩치를 키우며 거대 자본으로 몸집을 부풀리게 된 다. 공룡화한 거대 자본의 힘은 마침내 국가권력의 싱크 탱크에까지 절대적 힘을 발휘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겉으로는 물질문명의 급속한 번영과 표면적인 정치적 자유의 몫을 증진시킨 것처럼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표면적인 화려

10) 최상선,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인간소외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P.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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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의 부의 불균형은 심각할 정도로 왜곡되었으며, 이로 인해 현대인의 정신은 더욱 황폐화 되어가는 것도 현실이다. 신자본주의 역시 모든 정 치적 자유와 경제적 행위에 있어서 민주적 절차를 표방하지만 이 또한 들여다보자면 겉과는 다른 현실적 문제가 산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예는 우리 사회에서 얼 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대기업의 주식을 살 수 있지만, 그렇다고 대기업의 경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실에서의 상황은 다수가 보유 한 대주주의 몫이 아니다. 몇몇 대주주의 재벌일가들이 대를 이어 실질적인 주인행사 를 한다. 정치 현실 또한 이와 유사하다. 국가 역시 비록 국가권력기관을 국민의 손에 의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 결정과 실행에 있어서 실 제적인 힘을 가진 집단은 소수의 지배계층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세력에 의해 좌 지우지 되는 예가 허다하다. 합리적인 질서 속에 민중의 이익을 담보해 내기란 쉬운 현실이 아니다.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 또한 국가 발전이나 인간의 보편 행복을 저해하는 요 소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파생된 승자독식과 부의 불균형은 사회 양극 화를 심화시켜 사회적 불안과 개개인의 정신 불안을 가중시킨다. 빈부격차는 필연적으 로 일반 다수인 대중의 소비를 위축시켜 구매력을 떨어뜨리게 한다. 바로 이러한 모순 을 일시적으로 해결해보고자 조작된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2008년 미국 월가의 금융위기11)로부터 몰려왔던 독점자본의 파국을 돌파하기 위해, 독점자본가들은 이전보다 더 센 강도로 대중을 착취할 수 있도 록 구상된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무제한의 경쟁을 자유로이 받아들이도록 만든 점이다. 이제 우리사회는 신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가 사회 전반의 실제적인 지배 구조로 자리 잡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결과 부의 불균형은 점점 더 심화되었고, 이에 따른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증은 심각할 정도에 이 르러 급기야 세계 자살률 1위라는 오명까지 얻게 되었다. 이렇듯 신자본주의체제는 겉 으로는 무한한 민주주의적 자유를 표방하는 것처럼 비치지만 실제로는 극소수의 독점 자본과 정치적 지배집단에 의해 움직이는 불행한 사회로 내몰리고 있음을 염려하지 않 을 수 없다.

11) 2007년 여름 미국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대공황 시기에도 버텼던 월가 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2008년 9월 파산을 신청했다. 세계 최대 보험회사인 AIG가 파산 위 기에 처하자 미 금융당국은 구제금융을 투입했다. 출처: https://chogija.com/1466 [조기자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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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왔지만, 그 과정에서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업무 강도 또한 악명이 높다. 이제 한국 사회는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룬 경제 강국인 동시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독과 절망의 좌절을 안겨다 줬다. 겉으 로 물질적인 풍요가 넘치지만 정신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가고 있다. 예전의 공동체 전 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내지 못한 채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한 불행한 나라가 되 었다. 이 극단적인 모호함은 현대사회 역사상 최고의 성공 신화로 손꼽히는 이미지를 뒤흔든다. 이것이 성공은 맞지만 과연 성공일까?12)

2.

호모 사케르

한국 경제의 양적 성과는 우리 사회에 괄목상대한 변화를 이끌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을 피상적 성과에 대한 집착으로 몰고 간 신자본주의 경쟁체계는 인간의 삶을 극단적인 허무로 이끌기 쉽다. 이러한 결과는 자연스럽게 인간 존재의 결핍으로 이어져 불안과 초조를 재생산해 내기 마련이다. 이때 개별 자아는 공동체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감정에 휩싸이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다시 호모 사케르보다 더 두려운 삶을 우리에게 안겨주기도 한다. 호모 사케르란 원래 어떠어떠한 범죄로 인해 그가 소속한 사회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고 추방당함을 의미한다. 결국 현재 파 국적인 신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된 현대인들은 이미 부지불식간에 호모 사케르라는 공 포에서 자유롭다고 보기는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이러한 사태는 자본주의 가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던 자유로부터도 오히려 멀어져 온 셈이다. 신자본주의가 우 리에게 주어진 세계는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만드는 그러한 신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유연한 태도는 인간에게 새로운 강제를 안겨준 것이다.

자본주의체계가 요구하는 인간형은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만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에 익숙해진다. 이러한 탓에 인간은 그가 속한 사회공동체로부터 점점 유리되어 원자

12) 슬라보에 지젝 지음,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박준형 옮김, 2017, 문학사상, p.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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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되고 파편화 되어 갈 수밖에 없는 구조에 빠진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사회 적 존재로서의 인간본성을 찾아가기란 점점 요원해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진정한 인간 적 유대를 통한 건강한 사회로의 진입은 멀어져 보인다. 이렇게 인간적 유대가 약회되 면서 겪는 소외감과 인간적 좌절은 급기야 무기력과 불안한 감정을 키우기 마련이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 내면의 불안은 커져가고, 결국 그 강도는 언젠가는 더 이상 그가 속한 사회공동체로로부터 완전히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되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불안 심리는 그 어떤 불 안보다도 강력한 자기 부정 감정을 동반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적 낙오자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날마다 뉴스 사회면 한 귀 퉁이를 차지하는 사회적 범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승자독식의 정글 같은 사회에 서 한 번 낙오된 인간이 다시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신을 세우기는 너무나 버거운 세상이 된 것이다. 낙오돼 완전히 무기력해진 인간은 쉽게 우울증에 빠진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생산성의 관점에서만 인간관계를 바라보려는 자본주의적 시선에 경도된 탓일 것이다. 결국 이런 탓에 인간은 사회공동체로부터 점점 유리되어 원자화 되고 파 편화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무너진 공동체는 호모 사케르의 불안을 안아주기보다는 부 지불식간에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내는데 동조하는 사람으로 길들여지고 있는지도 모 른다. 건강한 사회란 진정한 인간적 유대를 통한 사랑과 연대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 본주의적 환상에만 매몰돼 개인의 성취만을 쫓는 사회에서 인간적 유대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또한 공동체적 유대가 멀어지면서 겪는 소외감과 인간적 좌절은 현대인들에게 자신 또한 언젠가 사회의 일원으로부터 완전히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만드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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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규율사회와 성과 사회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자본주의적 인간형은 바뀌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초기 산업사회에서의 생산관계는 통제와 억압의 시스템이 작동으로 이뤄진 관계라면, 신자 본주의 하의 자본주의 스스로 자기를 통제하여 과도한 성과에 집착하는 인간형을 양산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구조에서는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하며 착 취는 시스템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로서 사회는 고전적 지배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착 취가 가능해진 것이다. 사회학자 한병직은 이러한 현상을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라는 개 념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그가 분석한 성과사회의 특징은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긍정 성의 과잉으로 특징지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현대인을 피로사회로 이끄는 동력으 로 작동한다. 이때 피로사회란 “한스케가‘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 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13) 성과 사회의 피로란 바로 사람을 파편화 하여 공동체 사회로부터 고립시켜 고독에 빠뜨린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일상에 깊이 파고든 대부분의 우울증이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타난 하나의 표상일 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러한 모든 피로는 여러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는 점이다.

건전한 사회란 공동체 내의 과도한 경쟁을 기반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모든 경쟁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좋은 경쟁이란 항상 공동체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 에 승자에게는 자부심이 생겨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고, 패자에게는 건전한 자기노력을 향한 다짐을 부른다. 이때 경쟁이란 불평등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 리 사회에 심각해진 현재의 불평등 구조란 모든 인간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연 적인 격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개인의 실제 능력이 아닌 부정행위를 조 장하는 비뚤어진 경제 및 정치제도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불평등을 가리킨다.14) 그런 데 신자본주의 체제는 결코 전체 인류의 발전과는 괴리된 경쟁을 극단까지 부추기는 형국이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양 축으로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구조를 공 고히 해간다. 하여 누군가 설사 정상의 위치를 점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구조다. 멈출 수 없는 성장에 대한 압박으로 이제는 개별자 스스로가 자기 자

13)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0, p.66 참조.

14) Jacques Attali, <긍정 경제학> 권지현 옮김, 청림출판, 2017, p.2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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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한 압박을 강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구조다. 신자본주의 사회는 급기야 자기 자신마저 자기착취로 내모는 피로사회가 된 것이다.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기본적으로 21세기 자본주의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동을 통해 현대 인의 피로와 분열 증상을 포착한다. 여기서 규율사회란 사회가 무엇은 해야 되고, 무 엇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외부 규제에 의해 타자를 착취하는 시대의 총칭이라 할 것이 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다. “규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부정성을 담보한다. ‘~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 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에 비해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 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 준다. (중략)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 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 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15)

이전 산업자본주의의 규율사회에서 현재의 성과사회로의 전환이란 결국 사회적 생산 의 극대화를 위한 자본의 열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삶의 증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사회적 무의식 속에 생 산성의 최대화라는 목표를 숨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같은 층위에 있는 연속성을 답보해 줄 뿐이다. 말하자면 생산력이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규 율과 금지라는 부정성만으로는 발전의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당근으로서 성과의 패러다임으로 대체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16) 이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따라서 성과주체는 당위의 주체로 빠른 변화를 이끌지만 결국 이는 자본주의 가 끝없이 추구하는 생산성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당위의 부정성과 능력의 긍정 성 사이에 단절이 있다기보다는 사회적 무의식 속에 이들은 연속적인 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 같은 정신분석학자는 바로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현상의 하나로 현대인의 우울증을 예로 들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외부적 권위에 따른 억압과 강제 혹은 금지에 따른 역 할이 부여 받던 사회적 패러다임이 자기 주동적인 능력에 따른 사회적 요구로서 새로

15) 앞의 책, p.24.

16) 앞의 책,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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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규범으로의 전화 과정에서 우울증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현대인의 우울증은 스스로를 단지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평가하면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잉 믿음과 좌절을 통해 오롯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현대인의 좌절이 낳은 병리현상이 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와 같은 병리현상에 더욱 우려되는 점은 현재 우리의 삶은 이 러한 분열적 자아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일정 정도 자연 치유될 수 있는 건강한 공 동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데 더욱 심각성이 있다고 점이다.

4. 경쟁사회와 성격 없는 자아

초기 자본주의 성장 과정에서는 분명히 당시 사회 제도적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 을 가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이상에 대한 믿음이 어느 시기보다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라 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잘 실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 졌을 때 쉽게 결론 내기는 어렵다. 자본주의에 대한 확신은 적극적으로 확대된 자유 속에서 개별 주체는 자아를 보다 능동적으로 이끌며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자아로 만 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과 경제법칙이 지배한 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들을 쉽게 이뤄 내리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니었을까. 사람 대신 시장과 경제가 지배하는 경제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란 얼핏 인간의 적극적인 자유 를 최대한 넓혀주는 주요한 토대가 되는 것처럼 비친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에서 신흥 자본가 계급은 당시 낡은 봉건제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마침내 시민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신흥 자본가 계급으로 부상한 중산계급은 이러한 정치적 승리를 기반으로 그동안 왕이나 귀족들이 갖던 외부의 권위와 특권을 부수고 그 자리에 인간의 내적 충 동에 의해 (자기스스로 자유의지에 의해) 무엇이든 원하는 일을 하고, 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걸 시장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게 유도한다. 여기서는 사람도 예외 는 아니다. 시장 만능주의 뿐 아니라 사람을 비인격적 메커니즘에 따라 개별화 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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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사람이 시장을 통해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의 해 보편화된 개인주의는 주체의 자유를 확대하는데 이바지하기보다는 시장에서 높은 가치로 팔릴 수 있도록 자신을 부추기는 상품화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여 개별 자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위해 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형으로 바뀌어 간 다. 이러한 여건에서의 개인주의란 인류의 의미 있는 번영과는 거리가 있다. 공동체의 연대와 사랑을 품어 존재를 고양시킴으로서 행복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이란 결국 스스로를 상품화 해 이를 바탕으로 삶 자체를 수단화하거나 도구 화해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이란 스스로를 상품으로 내몰 뿐 아니라 이를 장려하기까지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는 시장이라는 장을 통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경쟁 할 수 있다는 그럴싸한 경제 논리를 바탕으로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긴다. 타자와의 극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외로 운 고투로 늘 불안하고 고독한 삶의 연속으로 인해 현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부정할 수 없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란 이러한 극한의 경쟁 속에서는 언제나 사회 로부터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우울해지기 쉽다. 또한 승자독식의 시장 체제는 시장에서의 실패를 곧 사회로부터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내몬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의 경험들이 공유되면서 불안한 자아는 자신을 주체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보다 큰 힘과 권위에 의존하게 되고, 의존은 스스로의 존재에 점점 더 무력감을 느끼 게 된다.17) 결국 무력감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기재로 작동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의 현대인의 심리는 쉽게 기성의 권위와 위압에 복종하게 만드는 경향성을 띤다.

연구자는 바로 이 점이 현대인에게 잠재한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사람 중심이 아닌 생산력에 집중된 경우, 현대사회가 자본이 움 직이는 경제논리에 따라 부조리한 제 상황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극복해 낼 수 있으 리란 기대를 건다면 믿을 수 있을까. 결국 인간 존재자체로 인정받고, 존재 자체의 실 현을 위해서라면 다분히 자본의 논리에 맞서 인간 본성 회복을 위해서라도 공동체의 복원과 사회적 연대는 우리시대 가장 절실한 화두가 아닐까 연구자는 생각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본주의 체계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문화적 정신적 영향은 지대하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것이 상품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소비되는

17) 최상선,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인간소외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P.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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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란 우리가 믿었던 그것과는 달리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속성을 가진 사회로의 이행을 부추기는 결과를 이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 특성은 모든 생산물들이 상품이 되어 시장을 통해 유통되고 소모되는 구조다. 오직 그 과정에서의 이윤 창출을 통해서만 자기 구조를 이어나갈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시장이 발전하 면 할수록 사회는 점점 더 시장에 의존하게 된다. 이윤 창출을 최고 가치로 여긴 자본 주의에서 인간이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시장과 경제를 지배하는 존재로부터 멀어진다.

오히려 시장에 의해 인간마저 상품화 되는 불가항력적으로 왜곡된 결과를 초래한 것이 다. 사람이 상품이 되고 도구화 되는 사회관계 내에서 인간 자체는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단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필연의 귀결일지 모른다. 그리고 인간이 수단화 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회란 반드시 이기심을 낳는다. 개인의 경제적 성공을 앞세운 이 들은 공동체적인 우정과 연대에 대해서는 인색해질 수밖에 없다. 농촌 공동체가 살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 삶의 뿌리를 잃지 않으며 서로 연대와 협력을 통해 이루 던 사랑의 공동체는 이제 개인의 이기심 앞에 더 이상 주의를 끌지 못하는 시대에 우 리는 살고 있는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재생산해내는 구조 속에는 분명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이 상 무언가 거대한 뿌리가 있어 보인다. 그만큼 지금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힘으로는 쉬 이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로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에게 당장 자본주의 시스템을 능가할 대안으로서 자신 있게 내세울 사회구성 체제를 찾지 못한 것 또한 현 인류의 상황이다. 오히려 발전된 자본의 논리는 신자본주의의 틀로 재무장 한 채 우리에게 더욱 가열한 경쟁을 강요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하여 현실은 또 얼 마나 우울한가. 공동체 연대는 다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되었다. 급기야 개인 은 전체적인 이해에 힘을 싣기보다는 개인의 경쟁력과 스스로에 대한 과대한 성과를 목표로 허둥댄다. 부지불식간에 찾아 온 불안과 고립감에 휩싸여 분열증을 겪게 현대 인의 병리현상은 또 무엇을 말해주는가. 현대인에게 분열증으로 겪게 되는 공포란 실 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지 모른다. 이에 대한 증거로 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었는지 되짚어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사태의 핵심은 공동체의 붕괴, 곧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절 박한 고립감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고 연구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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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을 경쟁의 대열에 합류하도록 강요한다. 특히나 신자본주 의 경제체제에 포석된 현대인들에게 경쟁이란 승자독식이라는 막장에 가까운 곳까지 몰리기 일쑤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현대인에게 신경증적 현상으로 고스란히 나타나 기도 한다. 사회가 연대의 따뜻함보다는 극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언제 자신이 속 한 공동체로부터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일 때, 우울증과 함께 심한 무력감을 수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보드리야르가 구성한 적(敵)의 계보학에 따르면 최초 단계의 적은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늑대는 외부의 적으로서 사람들은 이러한 적 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짓고 성벽을 쌓는다.”18) 다음 단계에서 적은 쥐로서 상징한다.

그러나 이 역시 주로 지하에서 활동하기에 인간은 위생학적 수단을 통해 퇴치할 수 있 다. 보드리야르는 다음 단계인 해충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바이러스적 형 태의 적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네 번째 단계는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는 사실상 사 차원에서 활동한다. 바이러스는 시스템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는 훨씬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19) (중략) 바이러스성 폭력은 시스템 속 에 테러리즘의 비밀 세포로 자리를 잡고 시스템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려 하는 개별자 들에게서 나온다. 바이러스성 폭력의 대표적 형태인 테러리즘이란 보드리야르에 따르 면 전체에 대한 개별자의 저항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20)

이처럼 자본주의의 폭력적 형태는 우리 사회에 바이러스처럼 스며드는지도 모른다.

극도의 경쟁이 낙오자를 만들고, 승자라 할지라도 언제 다시 낙오할지 모른다는 불안 은 스스로에 대한 긍정성의 폭력으로 작동한다. 평상시에는 매우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내재적 성격을 갖지만 이러한 내재적 속성은 초기 자본주의가 가졌던 외부에 의한 착취나 압박과 같은 확실한 적대성을 가늠하기 힘들게 만든다. 이것은 면역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확실히 타자로부터 받을 수 있는 공포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를 갉아 먹는 적의 형태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내재화된 폭력이란 잘 포착하기 힘들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인지하기 또한 어렵다. 당연히 이에 대한 대 응 또한 더 복합적이고 비정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려는 현대인에게

18) Jean Beaudrillard, Der Geist des Terrorismus, Wien, 2002. p.85.

19) 앞의 책, P.86 재인용 20) 한병철 앞의 책, p.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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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무력감을 안기며 거대한 자본주의적 권력 앞에 스스로 투항하게 만들기 쉽다.

거대화 된 자본주의는 확실히 현대인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무기력의 대상에는 자본 가라고해도 예외는 아니다. 시장의 법칙은 마치 신의 의지처럼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 어나 인간이 벌인 경제활동에서 벌어진 일일지라도 마치 무목적적인 자연의 힘처럼 통 제하기 힘든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버렸다. 복잡한 금융체계와 얽히고설킨 시장상황은 독점자본의 모략을 은폐시키기에 충분하다. 거대한 산업조직은 자유민주주의라는 합법 적 권력을 가진 정당과 맞닿아 유권자를 현혹하기 다반사다. 그러기에 보드리야르가 말한 바이러스론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정치 경제적 상황은 이전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전방위적으로 이어져 이러한 불합리를 한 개인의 힘으로 이겨내기란 너무 버겁다. 따라서 허약하고 미약해진 개개인이 대응 하기엔 힘이 부쳐 무력감에 빠지기 쉬운 것도 현실이다. 또한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내 재화된 개인의 허약한 힘은 거대 자본과 정치권력에 대항할 힘을 키우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방관하고 무관심하게 되고 심지어 복종하여 편입되려는 의존성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결국 무력감을 바이러스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주적인 인간으로서의 자 기 선택의 길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보다 큰 권위에 빌붙어 살기를 원하 는 무력한 소시민으로 전락하기 쉬운 것 또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모든 당면 문제 를 극복하는 힘을 가져왔다. 역사의 긴 걸음으로 보면 인류 보편 역사는 진보의 길을 걸어왔다. 현대인의 무력감 또한 결국 미약한 개별자들의 연대와 사랑의 능력을 통해 급복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이란 이미 역사적 위기 때마다 그 힘의 권능을 발휘했던 것처럼 우리 앞에 이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 는 유일한 길은 공동체의 복원을 통한 인간성 회복에 있지 않을까.

정리 하자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몇 가지 특징으로 대변되고 있다. 하나는 절대 경쟁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스스로가 성과주체로 변신해 생산력을 최대로 끌어내 는 데 진력을 다하며 고립된 피로를 경험하는 일이다. 해야만 한다는 의무에 앞서 할 수 있다는 당위에 매몰된 개인은 타자와의 협조적인 관계에서의 성공이 아닌 나르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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