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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구현과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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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지금까지 연구자의 작품분석과 관련하여 주로 들뢰즈의 사상을 바탕으로 연관 지어 설명해 왔다. 이는 자본주의와 욕망이 끊임없이 상호관계를 이어오며 오늘 날에 이른 점과도 무관치 않다고 본다. 들뢰즈는 자본주의 욕망체계를 누구보다도 실 천적 입장에서 분석한 철학자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인간 욕망에 대한 긍정을 통해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따라서 연구자 또한 본 논문 이전 장에서 들뢰즈의‘기관 없는 신체’개념 등을 빌어 몸에 대한 담론 들을 정리한 바 있다. 그렇다고 주지하다 시피 본 논문은 어떤 철학적 논점을 파고들 어 새로운 담론을 형성한다거나 주장을 강화 혹은 비판하기 위한 논문은 아니다. 단지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주변 개념들을 빌어 연구자의 작품에 대한 보다 객관성 있는 분 석과 함께 앞으로의 작업 방향제시에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장에서는 ‘실천의 철학’으로 명명되어지기도 한 들뢰 즈의 기본 사상을 바탕으로, 연구자의 작품이 과연 이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현재 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토대 위에 연구자가 작품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들뢰즈는 예술을 정의하면서 예술은 한 마디로‘감각의 구현’이라고 했다. 이를 연 구자의 작업과 관련하여 평면회화를 상정하고 풀이한다면 이렇다. 회화란 주체에게서 발생한 감각을 형태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이를 들뢰즈의 ‘사건의 발생’으로 이해해 보자면, 내재성의 평면 위에 무수한 사건의 줄들이 그어지는데 바로 이 과정에 서 사건의 줄들을 ‘감각의 줄’로 변용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즉 여기서 내재성 의 평면 위에 무수한 선들이 그어지면서 발생한 사건이 곧 감각인 셈이다. 따라서

“사실의 감각적 형태, 다시 말해 발생한 감각을 형태화 한 것이 바로 형상”이다.

111) 여기서 말한 들뢰즈의 감각은 물론 의식의 작용이 있기 전 몸으로 통해 직접적이 고 아직 경험이전의 인격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상태의 감각을 말한다. 이렇게 들뢰즈 가 생각한 감각에 대한 사유와 이러한 감각의 구현을 예술의 목적으로 삼았을 때, 연 구자 작품중춤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특히 들뢰즈의 감각론과 밀접한 존재론적 이유 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예술론을 보면 그는 예술을 단순히 재현으로 보는 태도를 버리고 ‘생산’

자체로 이해한다. 따라서 그는 자연히 감각의 존재를 강조한다. 들뢰즈가 말한 감각이 란 몸과 세계(외부환경)가 접촉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사건, 즉 진동처럼 발생하는 몸이 느끼는 변화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회화란 바로 이러한 감각을 그려내는 것 이 라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들뢰즈는 두뇌적인 것이 아닌 감각론으로서 감정(Feeling)과 구분되는 정서 (Affects)를 제시한다.“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감정이 없고 오직 촉발적인 정서

111) 박정태, 철학자 들뢰즈, 화가 베이컨을 말하다, 이학사,2015,p.133.

[도판-42] 서현호, ‘파랑새는 있다3’노마드를 위하여. 162.2 x 130.3 cm, Acrylic on canvas, 2018.

만 존재한다고 말.”112) 로서 감각에서 인격적 합리적 방식으로 가공되지 않은 선험적 순간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때 감각이란 특정한 순간의 본능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 다. 연구자는 이러한 들뢰즈의 존재론적 기초 위에 이와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는 연구 자의 작품 중에 ‘춤’ 시리즈 작품을 꼽는다.

들뢰즈는 삶의 역량으로서 의식의 체계보다는 무의식의 잠재적 역량을 높이 샀다.

즉 삶의 궤적은 곧 몸의 궤적이고, 이러한 몸의 역능은 미리 주어진 의식의 체계(경험 적, 이성적, 합리적 체계)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직 인격 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선험적 순간이 우연히 만나는(사건의 발생) 마주침을 통한 변용 이 자기보존의 능동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들뢰즈는 우리의 몸을 의식을 통해 규정된, 즉 유기체화된 신체로 보지 않는다. 한정된 틀에 종속된 신체개념이 아닌 끊임없이 외부와 접속하고 연결 지으면서 변용되는, 소위‘기 관 없는 신체’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신체의 이해는 의식을 통해 신체가 지배 하는 이성적 질서에 반해 신체에 내재된 무의식적 역량을 강화함으로서 우리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간다는 주장한다.

연구자 작품 [도판-42] 에 나타난 신체들은 이성에 의한 존재의 부각과는 거리가 먼 인간군상이다. 즉 여기서 춤추는 인간의 모습은 일상생활에서의 도구적 몸의 형식 과는 거리가 있다. 합리적 이성이 호명하는 유기체로서가 아닌 모든 마주침에 대해 열 린 감각이 살아 있는 신체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만나는 ‘자아’는 오 직 신체를 통해서만 즉 누군가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신체가 된다. 춤 추는 신체는 오직 신체 내면의 본질적인 부분을 감각의 작동에 의한 육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탈주체성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신체의 감각은 접촉하는 신체 사이의 순수한 차이를 형성하며 공통의 개념을 만들어간다. 물론 여기서 공통개념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실재적인 공통성을 말함이다. 존재와 존재의 양태가 만나 는 그런 공통성 말이다.

112) 질 들뢰즈. 하태환 역, 감각의 논리,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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