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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동선의 반영으로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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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연구자의 작품[도판-19]을 보자. 이 작품은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내면의 갈등을 다양한 표정에 담아 표현한 작품 중 하나다. 인간이란 어쩌면 그가 속 한 사회 속에서만 그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존재다. 바로 그림 속 인물 또한 무엇인가에(혹은 누구인가에) 시선을 주고 있지만, 아직 그 대상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는 불확정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 역시 대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는 거리를 둔 채 표현성의 강화보다는 오히려 관람자로 하여금 더 많은 주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본다. 그림에 나타난 형태적 표현은 아직 무언가로 확증 할 수 없는 존재의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다.

고전적 회화의 개념으로 보자면 면과 선은 분리할 수 없는 조화를 통해 대상에 대한 묘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의 그림에서는 오히 려 자유롭게 중첩되어 나타난 선들이 합리적 공간을 형성해 대상에 대한 표현력을 높 이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여겨진다. 특히 잘 정리되어지지 않은 선들의 혼재는 대상에 대한 물질성까지 의심하게 하게 한다. 선과 색이 따로 비켜선 것처럼 표현돼 비현실적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그림에서 표현된 인물은 마치 물질성 으로부터 벗어난 투명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완전한 선이 형태를 이룬 색면과 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유동하는 선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 고 이러한 선의 흐름이 구상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에서 자주 나타나는 선과는 구별이 된다. 다만 연구자 작품에서의 선의 역할은 감정의 흐 름에 따라 형식과 비형식, 묘사와 해체,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가며 작품의 성격을 애 매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자유롭게 중첩해 나타 나는 형태의 외곽선과 더불어 시각적 대상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채색이 어우러져 비 합리적 공간을 구성하고, 정리되지 않은 듯한, 그러면서도 전체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통일된 비합리성은 오히려 부조리한 현실과 상황을 표현하는 진실한 형태로 작용”90)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해서 말한다면 이제까지 언급했던 연구자 작품에서의 선의 역할은 형태의 단단한 구조를 위한다기보다는, 반대로 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동해 오히려 유동하는 인간 심리를 표현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리고 대상을 비결정적인 상태로 이끌어 가는 이러한 선의 역할은 주제가 가지는 현대

90) 서현호, <표현주의적 회화의 특성과 표현기법의 다양성에 관한 연구> 조선대대학원 논문,석사과 정,2015. p.39.

사회의 불안한 정서를 반영하는데 유효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구자 의 작품에 나타난 이러한 유동하는 선의 특징은 들뢰즈가 언급한 유목적인 추성의 선 들과도 다른 면이 있다. 이는 선의 흐름이 어떤 형태의 구조를 정하기 위한 방향으로 도 읽히지만, 반대로 단단히 영토화된 신체를 탈주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도 읽 힌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기관 없는 신체’의 무한한 되기(Becoming)의 과정을 나 타낸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일정한 힘이 적용돼 하나의 형체를 이루기 위한 강도의 역 할로서 추상성으로부터 반대로 구성성의 구축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튼 연구자의 유동하는 선이라는 특징은 어느 방향으로도 특정 짓기 힘든 도주선의 역할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 활용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인간 내면의 무의식과 결합해 작품 안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고 봐진 다.

나. 발화하는 몸짓

이번 장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연구자 작품에서의 선(線)적인 특징은 앞에서와는 다 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는 어쩌면 동양화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일필휘지 의 기운생동(氣韻生動)과 같은 맥락으로 유추해도 좋을 듯하다. 기운생동이란 동회화 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사혁(謝赫)의 육품론(六品論)에 나오는 제 1 원리다. 여기에 따르면 기운생동이란 “작품을 총체적으로 관찰하였을 때 최고로 요구되는 정신적 감 정과 공간적 감각과 운율적 감정과 생명적 감정과 생동적 감응력을 말한다.”91) 대 개 동양화에서 주로 언급하는 이 점은 작품에 나타난 형상 두에 숨은 정신적 혼을 일 컫는 데 쓰이는 개념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이러한 동양화에서의 정신적 기(氣)의 표 상으로서 이해를 다시 그것이 발화하는 몸으로 돌아가 이해해보고자 한다. 사실 지금 까지 일관되게 이야기 되어졌지만 본 논문에서는 ‘몸이 마음이다’라는 몸철학의 기 본입장을 배경으로 한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자연스런 형상이라고 본다. 아무튼 우리

91) 김종태, 동양화론, 일지사, 1988, p.49.

는 몸을 통해 존재하고 몸을 통해 사유하며 자신을 표현한다는 데 대해 부정할 수는 없다.

다시 이야기는 연구자 작품에 나타난 선으로 돌아가자. 연구자가 기운생동을 연구자 작품에 나타난 선의 특징으로 잡는 데는 작품에 나타난 분위기를 이야기하기 전, 작업 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동양화에서 주로 언급되는 작품에 대한 감상 자의 정서에서 느껴지는 그것과는 좀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액션페인팅이 가진 성질의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연구자가 평소 하는 작업 과정에서 느끼는 몸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이다.

도판-20]서현호, ‘Dancing with Karma1' 450cm x 163cm, Acrylic on canvas, 2015.

도판-21]서현호,‘Between 人'전 전시 모습 중 일부, charcoal& ink on paper 2014.

앞에 언급했듯이 연구자의 작업 방식은 대개 즉흥적인 흐름에 따라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연구자가 자신의 사유를 화폭에 담는 과정은 정밀히 계산된 차원의 구상 으로부터가 아닌 감각과 정서의 순간적 표현으로부터 시작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흥에 의한 작업은 당연히 신체의 움직임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실재로 연구자는 작업 을 할 때, 작업하는 신체성과 작품에 나타난 표현성과의 연관성을 느끼며 작업하는 경 향이 있다. 하여 작품에 나타난 선의 표현은 연구자가 작업하며 벌이는 몸짓의 연장이 자 몸이 발산한 에너지의 흔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드로잉의 속성 자체가 신체 성을 동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 에서 그렇다. 아무튼 작품 진행 과정에 나타난 연구자의 몸짓은 자연스럽게 화면에 구 성된 형태에도 영향이 미친다. 그리하여 화면 속 형태의 왜곡은 보다 동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른 색의 선택 또한 제한 없는 자유를 느낀다.

한편 이 지점에서 연구자는 지금까지 이어온 들뢰즈의 개념 중 ‘리좀(Rhizome)의 사유방식’과 연관 지어 연구자의 선의 문제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들뢰즈에 있어‘리 좀’개념이란 모든 것이 동일성을 근거로 배치되는‘수목형적인 것’과의 구별로서 설 명하고 있다. 곧 리좀이란 “중심도 초월도 전재하지 않는 수평적 평면, 혹은 고원에 서 수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저희들끼리 연결되어 있는 뿌리가 없는 다양체들의 열린 체계”92)를 말한다. 따라서‘리좀식 사유방식’에 의한 선의 해석이란 이란 연결이자

[도판-22]잭슨 폴록 작업사진과 작품

이질적인 해체이며,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변태(變態)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운동하는 선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연구자가 말하고 있는 선(Drawing)과 들뢰즈의 리좀을 설 명하면서 내세운 선의 개념과는 다를 수 있다.93) 그러나 연구자는 연구자 작품에 나 타난 선적 요소들이 리좀의 의미체계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어느 곳으로도 연결 지어 질 수 있고, 이러한 연결을 통한 접속을 통해 어떤 하나의 창조적 생성(생산)을 이루 어 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찾은 것이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의 개념에서는 성질이 다른 어떤 것들 사이 서로 새로운 접속과 연결을 허용하며, 이러한 접속을 통해 다양태의 무엇인가를 생산해 낸다는 점을 강조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작품[도판-23]을 보면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화면

92) 아르노 빌라니, 로베르 싸소 책임편집, 신지영 옮김, 2013. p.468.

93) 즉 “리좀은 그 기본적인 구조로 중간의 위치에서 다양체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선적인 형태를 취한 다.” 는 들뢰즈 선의 개념과 미술에서 표현 양식으로서의 선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도판-24]서현호, Dancing with Karma. 880cm x 163cm, Acrylic on canvas,2019.

도판-23]서현호,‘서창을 그리다' 163cm x 1800cm, Acrylic on canvas, 2015.

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모습은 질서 지어진 무엇으로 보기는 어렵다. 단지 다양한 형상 을 한 모습들이 서로 비정형적인 모습으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발화된 선 은 리좀의 뿌리처럼 파져나가며 새로운 연결을 통해 무엇인가를 창조해 나간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발화된 선은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모든 가능성이 열린 상태로의 운동 을 동력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발회된 선의 진화는 누구도 예측불가의 상태를 전개된다. 이 부분에서 연구자는 다시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을 떠올리게 된다.

어찌 보면 잭슨 폴록의 작품 [도판-22]는 리좀의 성격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 이라 할 수 있다. 즉 폴록의 작품에서 발회된 선들은 다양한 종류의 이질적인 접속과 결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의 축 적이 어떠한 기호체계를 코드화 함 없이 해체함으로서 생선 된 다양체가 갖는 “비의 미적인(Asignifiante), 단절의 원리”94) 를 특징으로 갖는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연구자는 ‘리좀적 사유’의 표현으로서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을 연 결해 살펴보았다. 어쩌면 이는 한 곳에서 발화한 선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은 채 자 유롭게 움직이며 새로운 접속과 연결을 통해 다양체를 생산해 낸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다시 연구자의 작품 [도판-23]을 보자. 사 실 연구자의 작품 제작 역시 하나의 선으로부터 발화한다. 연구자의 실제 작업에서도 이 발화된 선의 흐름은 거의 제약적이지 않다. 폴록의 드리핑을 통해 무의식적 자기감 정의 흐름을 표현해 나가듯 연구자 역시 하나의 선들로부터 시작해 거의 무의식적 감 각에 빠져 선을 뻗어나가다가, 또 다른 지점에서 접속과 혹은 단절을 통해 다양한 연 결을 이루며 형상을 창조해 간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잭슨의 그것과 연구자의 태도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폴록이 생각하는 다양체의 양상이란 거의 해 석 불가한 형태로 우리 앞에 선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주체의 ‘행위’자체가 보다 강 조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연구자의 작품 제작 방식에 있어 연구자 또한 이러한 다이나믹한 행위의 리듬을 느 끼면서 작업을 한다. 그러나 그 행위의 선택과 범위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이 점에 대해서 본 논문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들뢰즈의 사상에 빗대어

94) 최대준, <질 들뢰즈의 리좀에 의한 도시 재해석에 관한 연구“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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