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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체험적 미술의 구현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02-107)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예술가라고 해서 예외는 있을 수 는 없다. 따라서 아무리 주관화 된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예술일지라도 본질적인 내 면에 있어서 그것은 사회적인 맥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데에는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예술가는 그가 존재하는 동시대 사회정치적 상황과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예술가의 감수성이란 바로 그가 속한 사회 현실에서 발생된 모순과 부조리를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 람이라고 본다. 더욱이 이때 예술행위란 개인의 상이한 경험 속에서 얻어지는 특별한 감정을 보다 강렬한 메시지로 표현해 내는 것이 사회 공동체에서 예술이 감당해야 할 몫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연구자는 예술이 사회적 책무를 져야 한다거 나, 동시대 사회적 현상에 미술이 적극 관여해 무언가 발언을 해야 한다는 소위 ‘예 술 참여론’과는 거리를 둔다. 이는 예술이 곧 어떤 도덕적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을

[도판-26]서현호, 여든 한 개의 밥그릇에 대한 위로와 찬미, 설치작품,2016.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작가의 작품과 작가가 영위한 삶의 존재 행태와 연관 지어 그의 작품을 더 우월하게 평가하거 나 폄하 할 수 있는가 라는 논쟁과도 맞물릴 수 있다고 본다. “예술작품은 도덕적 효 과를 가져 오지만, 예술가에게 도덕적 목적을 요구하는 것은 예술가로 하여금 파멸에 이끄는 길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예술가의 임무는 삶에 생기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95) 연구자 또한 이러한 주장에 공감한다. 예술에서의 도덕적 문제란 다시 예술에서의 정의의 문제와도 직결 된다.

예술에서의 정의 문제는 작가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 심을 가지는지 아닌지, 혹은 작가가 그만큼의 뛰어난 기질 및 도덕적 자질을 소유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와는 별개라고 연구자는 생각한다. 문제는 예술가의 탁월성으로 인해 고립적인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작가와 그것에 기반을 둔 ‘위대한 예술’ 자체 에 있다고 본다. 위대한 예술에서 그 위대성의 본질은 예술이 단지 개인적 욕망 충족 이나 자의식의 과잉으로 오는 자기도취, 허무주의에 기댄 자조, 자본주의에 의해 부추 김 당하는 저열한 개인적 탐닉 수준에 머문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예술가이기 전에 한 인간의 존재방식을 동시대적 역사성과 분리시키지 않은 채 받아들이고 승화시킬 때 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는 모든 예술이 정의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

95) 조요한 <예술철학> 앞의 책, p.49.

[도판-27]서현호, 5월엔 만인의 얼굴이 꽃이다. 공원설치작품사진, 2019.

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어쩌면 반대로 예술은 그 어떠한 권력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창작활동이 권력의 행사로 변질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정치사회적 조건을 떠나 존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모색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순수하게 예술을 위한 예술이 한 예술가의 자율적 탐닉 에 의한 유혹으로 받아들여져 이를 예술의 본질 중 하나로 강변 한다하더라도 이는 결 국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모든 인간 삶의 토대가 되는 사회적 현상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재 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동시대 아픔과 희망,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함께 하려는 유대. 그 리고 공동체 내의 연대를 통해 예술은 보다 더 예술로서의 가치를 고양할 수 있을 것 이라는 믿음이 있다. 특히나 대부분의 인간 행위가 물질 지향적이고 시장 지향적으로 변모해 가는 작금의 사태 속에서 예술의 존재방식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 질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예술이 동시대 시대상황과 사회 사이의 상 관성을 필연성으로 받아들여 예술이 무엇에인가 복무해야만 한다는 당위로서‘예술의 수단화’에는 동의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시도로서 창조 활동을 통한 일정 한 자기 역할수행에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길게 봐서는 예술의 본령으로부터 파국을 초래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 또한 연구자의 생각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순수 를 위한 순수만을 지향해 오로지 불안전한 자아에로만 집중하는 예술세계를 탐한다면, 이 또한 예술의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결국 사회 구성체가 개개인의 집합을 통해 이 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철저히 사적인 세계란 인간 세계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거 자체가 사회적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아무리 개인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은 오늘날 사회가 보다 파편화 되고 개별화 되어 보이는 허구이자 위선이 깃든 탓으로 본다. 물론 모든 예술 이 결연한 태도로 동시대의 고통을 감내하는데 집중할 필요 또한 없다. 단지 자신이 갖는 상황적 조건을 진솔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을 때, 그리고 우리에게 깊이 내면화 되고, 영토화 된 사회현상에 대해 애써 외면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예술가나 감상자 모두 예술을 통한 존재의 도약을 보증할 수 있을 것이 연구자의 평소 주장이다.

한편 연구자의 생각으로 한국미술의 전개과정에서 이처럼 예술가 자신의 지평을 사 회로까지 확장해 진지한 고민하기 시작했던 건 한국의 민중미술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아무튼 한국에서 전개되었던 민중미술은 한국 미술사에서 어쩌면 처 음으로 자발적 자기 형식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예술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 치열하게 맞섰던 때가 아닐까 연구자는 회상한다. 아무튼 이 장에서는 예술이 동시대적 감수성 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작업 했던 연구자의 작품을 보면서 더 논 의를 진해해 나가도록 하겠다.

[도판-28]연구자의 작품은 세월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 품이다. 2014년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떠난 단원고 학생 325명 을 포함해 476명의 탐승객을 태 운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 에서 침몰한 사건은 한국 사회 의 구조적 병폐를 고스란히 들 어낸 사건이었다. 조류가 거센 바다에서 중심을 잃고 표류하다 가 침몰하던 과정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 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 미치는 영향이란 대단 한 것이었으며, 어쩌면 아직도 실체를 다 규명하지 못한 채 진행 중인 사건이기도 하 다. 아무튼 여객선 세월호는 결국 배 안에 갇힌 탐승객을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이 사고에 대해 청해진해운과 세월호 운행 승무원, 한국해운조합, 한국선급 등 선박 관련 기관들, 그리고 대한민국 행정부가 책임을 소홀 히 했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사상자가 많이 늘어난 데에는 침몰 징후를 보인 후에도 초기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임무를 방치한 선장을 비롯해, 해양조건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운행한 청해진 해운, 또한 해수부 마피아로 불리는 해운계의 정경 유착, 해경의 뒤늦은 대처 등 여러 가지 한국 사회의 병폐를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사 건이 되었다.

[도판-28] 서현호, ‘헤엄치는 사람’, oil on canvas, 116.8 x 80.3cm, oil on canvas, 2015.

이처럼 세월호 사건이란 해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하나의 대형 사고라는 의미로서가 아닌 보다 포괄적인 사회적 이슈를 담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연구자는 이러한 세월 호 사건을 주제로 작품을 구상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러한 구조적인 사회 부 조리라거나 혹은 그 저변에 깔린 부패한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정치적 계산 같은 거시 적인 문제보다는 오히려 당시 사건 전개 과정에서 생생하게 전달됐던 사건 현장에서의 인간 실존의 문제에 먼저 마음이 갔다. 생사의 귀로에서 침몰해가는 어둔 선채 안에서 마지막 문자를 보내는 아이들의 공포와 두려움. 차마 그 순간이 이승의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부모의 절규와 찢어질 듯한 고통. 연구자에게 먼저 떠오른 이와 같은 감정 이입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한편 가감 없이 받아 들여진 당시의 진솔한 감정이었다. 물론 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세월호 사건이 가진 거시적 인식과 이로부터 확장될 수 있는 이념적 주장을 강화하는 태도로 작품을 구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금상첨화로 대중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리얼리즘 형식 을 빌려 표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민중미술이 추구하던 예술적 태도를 잘 반영하 는 작품이 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연구자 생각으로는 이러한 주장도 좋지 만 그렇다고 예술대상을 어떤 이차적 인식의 범위 내로 좁게 규정했을 때 오히려 예술 이 갖는 보편적인 특성을 가둘 개연성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연 구자는 ‘헤엄치는 사람’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바는 단지 그 순간 연구자 가 경험했던 진솔한 감정과 곁들여 파생된 체험적 해석에 따라 표현하고자 했다는 점 이다.

‘헤엄치는 사람’에서 헤엄치는 사람은 ‘유영’하는 사람과는 다르다. 유영하는 사 람이라면 설사 헤엄치는 동안 힘이 빠져 기진맥진 한다하더라도 그 표정에는 깊은 만 족감으로 충만감에 사로잡히는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화면 속의 주인공의 헤엄치는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턱밑까지 차오른 검푸른 빛의 물결 과 짙은 피부빛깔과 대비적으로 희게 드러난 눈의 흰자위는 우리에게 무언가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인상이란 두려움과 원망이 섞인 채이다. 또한 헤엄치는 자의 왼쪽 얼굴을 처리하고 있는 윤곽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 중첩돼 있어 무언 가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렇게 불안전하고 불확실하게 중첩된 윤곽선의 움직임과 더불어 흔들리게 표현된 눈 또한 마치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동요를 고스란히 표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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