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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과 춤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29-146)

‘탈주’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실천적 삶의 대안으로서 그는 노마드 를 말한다. 노마디즘이란 어떠한 고정된 관념에 안주하지 않고 본능의 역능에 충실한 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끊임없는 창조의 삶을 지칭한다. 이는 마치 유목민의 삶의 태도처럼 영토화 된 강제나 통제로부터 벗어나 언제나 정주하지 않은 채 탈주할 수 있 는 운동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강조되는 것은 우리 신체(욕망)가 가지고 있는 속성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기관 없는 신체’에서처럼 “신체는 매 순간 각각의 다른 속성을 지닌 다양체로 존재한다.”113) 그리고 이러한 신체의 속성을 가장 잘 반영하 고 있는 것이 또한 춤이라고 연구자는 생각한다. 춤추는 몸의 특징은 몸을 일상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도구적 몸이 아닌, 매 순간 창조하는 힘으로서의 몸을 경험하게 한다는 데 있다. 춤을 추는 몸은 고정된 유기체로서의 몸이 아니다. 물론 물리적 현상에서 몸 은 유기체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춤추는 순간의 몸은 물리적 현실을 초 월한다. ‘창조되어지고 있는 상태’자체로서의 몸으로 받아들인다.

즉 이때 몸은 어느 지점에 정지한 상태의 몸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유동하고 끊 임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로서 들뢰즈가 말한 욕망의 그것과 그대로 대응됨을 알 수 있다.

연구자는 무자비한 자본증식의 속성에 의해 끊임없이 조작되고, 자신으로부터 소외 된 현대인의 몸에 대한 여러 경험을 회화작품을 통해 표현해왔다. 소외된 몸의 자리에 는 몸이 지닌 창조적 에너지와 잠재된 의미들은 사장된 채, 탐욕스런 자본의 욕망이 부추기는 상품화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슬픈 초상이 깃들어 있음 또한 적지 않게 대 면하게 된다. 그때마다 연구자는‘몸’이 느끼고 표현하는‘살아있는 주체’로서의 생 명력 넘치는 지위에로부터 밀려난 현대인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억압과 피동의 대상으 로 전락한 몸의 현실 앞에 한없이 우울했다. 하여 연구자는 춤이라는 주제를 통해 구 체적으로 언어화 될 수 없는 현실의 억압적 흐름에 저항하고 싶었다. 바로 이러한 과 정에서 무력해진 현실적 삶을 위로하는 하나의 의식으로서 춤을 끌어들인 것이다. 문 화인류학에서 춤은 원시무속문화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기원이 샤머니즘에 있다는 설 이다.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교섭을 통해 불가항력의 현실적 문제를 극복하고 미래의 불확실한 불안을 줄이고자 하는 샤먼의 고투에서 춤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춤

113) 진윤희, 들뢰드의 신체론에 근거한 즉흥무용프로그램 개발과 효과, p.8.

이란 결국 자신의 내적 에너지와 초자연적 존재자와의 교섭을 통해 얻고 싶었던 초월 적 세계를 동경하는 인간의 몸짓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와 세계와 의 사이에 존재하는 막연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몸짓으로부터 파생된 인간의 행위가 춤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춤이란 바로 주체와 대상이 아무런 장애 없이 만나는 지점에서의 원초적인 몸의 표현인 것이다. 또 하나 표현 형태적 특징을 따진다

면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로 벌거벗은 채 나타난다 는 점이다.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누드(nude)와 벌거벗은 몸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누드는 절 대 벌거벗은 몸이 될 수 없다고 본다.114) 즉 여 기서 나타난 벌거벗은 몸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 한 목적의 가장(假裝)으로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 서 춤은 애초부터 관조의 심오한 정신세계에서 나 오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지닌 순수한 감정의 가감 없는 표현인 것이며 언어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에서는 몸과 세계가 맞닿는 순간의 감각과 감 정을 즉흥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쁨과 슬픔. 목 적지향을 위한 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순간과 과 정 자체가 목적인 되는 지점에서 만나는 몸의 언 어로서의 춤을 형상화 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몸스러운 모습을 내보이는 향연으로서 춤의 세계는 이성이 지배하는 합리적 사유의 반영이 아 니라,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순수한 감정의 표현으로서 디오니소스적 축제를 향한다.

그리고 이때 춤은 비로소 우울과 한풀이의 순간을 넘어 고스란히 몸의 긍정을 통한 인 간 본성을 향한 힘이 된다고 믿는다.

삶이란 곧 몸의 실천이다. 그리고 몸의 실천이란 끊임없는 삶의 여정인 것이다. 삶 이란 선지식이 있어 목적을 향해 이뤄내는 선택이 아니다. 인생이란 실천의 연속일 뿐 정해진 지향점이 없는 인과의 끝없는 여행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과 관계없이

114) John Berger. <WAYS OF SEEING>, 최민 옮김, 열화당, 2012. p.64.참조.

[도판-44] 서현호, ‘춤추는 사람2’, 191.0 x 72.7 cm, Acrylic on canvas, 2018

삶의 과정의 축적이 업(Karma)을 이룬다. 물론 우리 삶의 행위 자체는 근본적으로 중 립적이다. 춤 또한 단순한 목적지향적인 행위는 아니다. 어쩌면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의 하나가 춤이다. 그리고 보면 삶의 압축적 표현으로서의 춤만 한 매체도 드물 다. 연구자는 몸의 변용으로(신체상태의 변조로) 생기는 감정의 줄기를 즉각적이고 원 초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춤이 가져다줬던 전율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직도 내 존재의 강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낀다. 작품 ‘파랑새는 있 다’ 시리즈에서 연구자는 이러한 춤에 대한 연구자의 느낌과 감정을 형상화 하면서 동시에 춤이 주는 생동적인 에너지를 ‘파랑새’라는 이미지를 통해 상징성을 보다 강 화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이 갖는 고난과 험난한 여정을 춤이라 는 감각적인 몸의 언어를 통해 발언하는 동시에, 몸 스스로가 지닌 역동적인 힘을 파 랑새라는 상징을 통해 더 강화해 감으로서 결국 삶을 긍정 할 수 있는 바탕을 이룬다 고 볼 수 있다.

서현호는 ‘인간의 욕망과 소외’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그 근원인 ‘인간의 몸이 지닌 생명 에너 지’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전의 <불편한 욕망>(2015)시리즈에서 인간의 소외 된 욕망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전시의 <춤추는 사람>과 <파랑새는 있다>(2018) 시리즈에서는 인간 욕망의 근원인 몸의 에너지 자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작가는 다양한 형태의 군무를 통해 원초적 에너지의 본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몸은 이성에 앞서서 세계를 근원적으로 지각하고 반응하는 에너지 덩어리이고, 그와 동시에 공동체와 소통하기를 본능적으로 원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여러 회화적 장치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115)

서현호는 확장된 시선을 통해 대상을 자유롭게 지각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대상들을 정확히 종이 위에 옮기는 방식을 거부했고, 그 결과 대상은 자신의 신체적 차원을 넘어 그 이상의 공간적 지면을 차지하며 나타난다. 묘사된 인물들의 불완전함은 더 이상 완전한 작품에 필요한 자질이나 기호로 작 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몸과 의식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작가 자신의 신체의 ‘움직 임’, 즉 ‘그리는’ 과정에서 과거 기억의 현재로의 중단 없는 참여로 인해, 억압된 정서의 변화가 대상 속에 표현되는 결과이다. 이로써 ‘몸’은 하나의 육체적 덩어리가 아니라 의식을 동반하며 이 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생명력을 가진 존재가 된다.116)

115) 장민한, ‘Dancing for Karma’ 산수미술관, 2015. 개인전 비평문 중.

116) 양초롱, ‘Dancing for Karma’ 산수미술관, 2015. 개인전 비평문 중

인용글에서 장민한의 지적처럼 연구자는 몸과 세계가 만나는 근원적인 지각의 한 형 태로 춤을 설정하고, 춤이 갖는 잠재적 에너지를 삶에 투영하는 과정에서 감지 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각성의 하나로, 공동체적 삶에 대한 사유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몸이란 양초롱이 말하듯이 하나의 육체적 덩어리가 아니라, 의식을 동반하며 이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서 거듭나는 것이다.

연구자가 몸의 솔직한 언어로서 춤을 선택한데는 몸의 철학적 고찰 이전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예술이 춤이라는 인류문화학자의 주장과도 통한 다. 춤은 인간 감정의 본질을 이성 이전의 몸 자체로 표현하고 지각할 수 있는 형식이 다. 따라서 춤이란 세계에 대한 몸의 직접적 경험이자 내적 에너지의 살아있는 현현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조사라의 비평글을 통해 춤이 갖는 힘의 표현이 다시 축제라는 공동체적 의식의 저변으로까지 확장되는지를 알아보자.

이처럼 인간에게 몸은 감각이며, 솔직하며 원초성의 주체이다. 이는 춤의 특성과도 연결된다. 인간 의 유희적 본성이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이 축제이며 축제의 절정이 춤이라 할 수 있듯, 춤은 육체의 자각이다. 음악사가이자 무용사가 쿨트 작스(C. Sachs)가 선사시대부터 무용이 고등예술로 발달했다 고 주장하듯 여타 예술 장르 및 과학의 발달 이전에 육체의 예술은 이미 만개하고 있었다. 그만큼 춤은 오로지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인간의 ‘내적 생명’을 묘사하는 최적화된 예술이었던 것이 다. ...서현호의 춤은 이성이 구축해온 것으로부터 해방을 향한 ‘예배의식’이자 ‘굿판’이다. 인 위적인 가치 판단, 사회 체제와 지배 규범, 자본으로부터 탈주이자 자연의 구성요소로서 인간 본연 의 회복으로 해석 가능하다. 절대적 자유를 말한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이다. 이는 철학자 장 뤽 낭시(Jean Luc Nancy)의 ‘무위’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다. 낭시는 공동체의 조건으로 평등과 소 통의 장소를 말하며, 그 장소야말로 인간을 규격화·정형화하는 윤리적·사회적 가치와 관념에 종속 되지 않는 ‘무위’라 했다. 서현호가 구축한 화면 속 공간에 환치시켜보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 은 무위의 환경이 반(反)자본주의의 대변일지라.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 부유하듯 춤추는 이들의 세 상이야말로 해방된 공간이자 통합과 연대의 장이다.117)

조사라의 지적처럼 군무를 보는 듯한 ‘파랑새는 있다’시리즈에서 연구자는 몸이 지닌 내적 에너지를 통해 자본주의 체계 속의 영토화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스스로의 자각을 원초적 몸의 언어인 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117) 조사라, ‘Dancing for Karma’ 산수미술관, 2015. 개인전 비평문 중.

춤을 추고, 얼싸 안고, 절망하고, 엎드려 절규하기도 한다. 그러한 몸짓 위로 파랑새 가 날아간다. 여기서 파랑새는 해방과 소통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고된 삶의 나날에서 도 인간 본성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민초들의 의지로서의 몸의 실천이 춤으로 나타난 것이다. 춤은 노마드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노마드의 삶을 통해 우 리가 만나고 싶은 꿈을 파랑새를 통해 말해주고 있다. 연구자 생각으로 여기서 파랑 새, 즉 유토피아는 낭시가 말한 ‘무위(無爲)의 공동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제5장 결론

지금까지 본 논문에서는 연구자의 작품을 분석하는데 있어 들뢰즈의 사상을 주요 토 대로 삼아왔다. 물론 이러한 전개는 연구자의 주요 작품이 갖는 의미구현과의 관련성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론에서 밝혔듯이 본 논문 에서 들뢰즈 철학에 대한 몇 가지 개념의 차용과 검토는 그 자체로 또 다른 담론을 형 성한다거나 비판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서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 이후 현 대미술을 규정할 수 있는 다양한 개념들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가 본 논문에서 끌어들인 들뢰즈의 사상은 예술이 우리 삶에서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도 관련이 이었다고 본다. 연구자는 평소 예술이란 삶의 한 과정에서 파생된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하며 작업 해왔다. 바로 이러한 연구자의 예술 에 대한 태도는 자연히 동시대사적인 관심과 유리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우리의 현 실적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에서도 이야 기 했듯이 오늘 날 자본주의는 현대인의 욕망을 관리 통제하는 가장 거대한 힘으로 작 용한다. 이는 이미 우리의 욕망을 무한히 부추기며 자극하는 한편, 지배하고 통제하는 분열적 힘을 가진 괴물이 되었다. 연구자의 초기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인 간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되었고, 결과는 현대인의 내면적 분열증에 대한 표현으로 나타난 바 있다. 개념적으로 말한다면 이때의 인간 내면의 무의식이란 들뢰즈가 비판 했던 프로이드류의 욕망이론에 기댄 억압에 대한 좌절과 거대 힘에 대한 순응으로 나 타났다고 본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난 대상의 인물은 고독하고 우울해 보이며, 때론 극도의 자기분열에 시달리는 루저(loser)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는 당연하게도 연구 자 작품에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파생된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무한경쟁구도 속에 서 분열증적으로 다가온 인간소외와 불안,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재영토화 되면서 나타난 욕망에 대한 왜곡 등 여러 문제를 중층적으로 안고 있는 실존의 인간의 모습으 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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