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초창기 자율방범대 운영의 중심인물들은 재건축 과정에 서부터 조합과 시공사를 향해 목소리를 내어 온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보니 이른바 직업 동대표들이 장악한 입주자대표회의가 보기에 아무래도 자율방범대는 잠재적인 위협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성일노블 자율방범대가 성일동 자율방범 대와 연계하여 공식 자원봉사단체로 등록한 것 역시, 외부로 연을 확장하여 자신들 의 세력을 불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자율방범대가 아무리 겉으로 ‘순수한 봉 사’를 내세운다 한들, 이들에게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실제로 자율방범대의 활동 취지에 입주자대표회의 장악이라는 ‘의도’가 완전히 없 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언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스스로 자신들의 활동을 어 떻게 규정하든 간에,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동대표 경력을 갖고 있었지만 자의든 타의든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소외’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9년에서 2010년 중반까지 그들이 펼친 활동을 보았을 때, 자율방범대가 처음부터 입주자대 표회의를 표적으로 삼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논했듯이 자율방범대 인 원 중 동대표 경험이 있는 이들은 입주자대표회의의 혼탁한 운영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며, 의도적으로 입주자대표회의와는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다른 자 생단체들과는 달리 입주자대표회의에 공식 인준을 받고자 하지도 않았고, 인터넷 카 페에 인원모집 공고를 내면서도 끊임없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분은 받지
않습니다.”, “순수한 봉사정신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분을 찾습니다.” 등의 언설을 강 조하며 입주자대표회의 바깥에서 아파트 단지의 ‘가치’131)를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율방범대가 점차 활동을 해나가면서 마주한 아파트 단지의 현실은 그들 로 하여금 입주자대표회의에 다시금 눈을 돌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사무소는 본연의 관리업무에 충실하기보다 자신들의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는 입주자대표회의 측의 눈치를 먼저 살피고 있었고, 여기에 주민들의 무관심이 더해지며 아파트 단지 의 공용공간은 점차 황폐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를 대표하는 조직인 입주자대 표회의는 각종 용역업체 선정에서 뒷돈을 받아 챙길 궁리만 할 뿐, 관리업체의 감독 과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는 일에는 손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제2대 김도진 회장의 자진사퇴로 실시된 2011년 1월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보궐선거―이미 Ⅳ장 2절 “입주자대표회의에 대한 무관심”에서 다룬―는 자율 방범대의 입장에서 ‘썩어가는’ 입주자대표회의를 바로 잡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 다.132) 주택법 개정으로 인해 기존의 선거방식과는 달리 주민 직선제로 선거가 치러 지는 만큼, 그동안 아파트 현안에 관심이 없었던 대다수 입주민들에게 성일 노블하 이츠 입주자대표회의의 현실을 알리기만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자율방범대 구성원이자 동대표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박상문씨가 회장 후보로 출마했고, 다른 두 명의 구성원들은 회장 선거와 함께 실시된 감사 선거에 입후보하였다.
그러나 실제 선거결과는 그들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2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율방범대를 대표하여 출마한 박상문씨는 41.2%의 득표율 (득표수로는 당선자와 100여 표 차이)에 그치며 기존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수석 부회 장을 역임한 임준구씨에게 패하고 말았다. 두 명의 감사를 선출하는 감사 선거에서 도 자율방범대 회원들은 모두 고배를 마셨고, 대다수 입주민들이 여전히 입주자대표 회의에 무관심하다는 사실 또한 저조한 투표율(12.2%)로 재차 확인되었다. 회장 당 선을 위해 부지런히 발로 뛰고, 인터넷 카페에 기존 회장단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투표를 독려했던 자율방범대는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조직 동원력을 앞세운 기존 세력을 꺾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우려했던 대로 자율방범대가 잠재적 위협요인이었음을 확인한 기존 입주자대표회의 측에서는 직접적인 방해공작에 나서 기 시작했다. 자율방범대의 회의 참관을 막기 위해 입주자대표회의 날짜를 일부러
131) 이때 ‘가치’에 대해서는 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절에서 분석하게 될 것이다.
132) 입주자대표회의로 재진입하기로 한 자율방범대의 결정에 대해 한 대원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 다. “동대표가 되어서 입주자대표회의에 들어가서 소리를 내어야지, 내가 아무리 여기서 방범 열심 히 하더라도 입주자대표회의에 진입도 못하고 밖에서 떠들면 소용이 없어요.” 그때까지 펼쳐 왔던 비공식적인 활동만으로는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었다.
자율방범대 순찰일과 겹치게 잡고, 동대표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자율방범대 구성원 들에 대한 압박도 강화되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자율방범대 참여인원은 십여명 수 준으로까지 감소하게 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았던 2011년 후반기, 순찰활동 을 마치고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의 아래 대화내용은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D: 우리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를 보면 말도 아니에요. 일선에서 물러나서 자기 직업 없는 사람들이 동대표 나와서 일 꾸미고, 직업 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어요.
E: 아파트가 잘되기 위해서는 주민들 스스로 참여와 관심이 필요해요. 이런 직업 동대표들이 발을 못 붙이게 만들어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F: 지금 입주자대표회의 회장만 해도 수상해요. 어디 인테리어 업체 운영하고 있 다고는 하는데, 우리가 알아보니 확실한 회사가 아니에요. 관리사무소 바로 옆 에 회장실 만들어서 맨날 나오던데, 일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겠어요?
D: 우리가 이러는 것도, 자꾸 우리를 방해하고 그러니 우리도 악이 생기는 거에 요. 썩은 입대의(입주자대표회의)에 대항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자율권을 발동하 는 거죠. 솔직히 방범대가 이런 것들이 주가 되면 안 되는데, 상황이 그럴 수밖 에 없어요. 이런 일들을 우리 단지에서는 방범대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E: 대한민국이 잘 되려면 동네에서부터 잘 이뤄져야 하는데, 동네에서도 이러니 도시가, 나라가 잘 되겠습니까?
F: 우리 방범대가 좀도둑 위주로 잡아야 하는데, 내부 도둑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네요.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을 방범을 해야 되니, 아이고...
(자율방범대 대원들과의 순찰활동 후 뒤풀이 자리에서의 대화)
이렇듯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자율방범대는 입주자대표회의에 대한 감시와 도전 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선거가 보궐선거였기에 1년 뒤 다시 회장 선거가 있다는 점 에 착안한 이들은 다가오는 선거를 위해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하였다. 포탈사이트 에 ‘성일노블하이츠지킴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여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련한 비리의혹을 꾸준히 올려 주민들에게 이런 별도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필요할 정도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한편, 지역 신문사에도 관련 내용을 제보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또한 이들은 입주자대표회의와 용역업체 간의 유착의혹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법률대응에 나섰다. 일례로, 엘리베이터 유지보수업체를 선정하 는 과정에서 회장이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의로 B업체와의 계약을 강행하자 연 주시 강산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여 승소하기도 했다. 기존에 1억 4천만원으로 유지 보수업무를 수행하던 A업체와의 계약기간이 끝나자 회장단은 제대로 된 입찰과정 없이 B업체와 입찰가 3억 7천만원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무려 2.5배 이상 많은 입찰가로 업체를 선정하고자 한 회장단에 맞서 자율방범대는 구청에 행
정소송을 냈고, 구청 측은 입주자대표회의가 ‘주택관리업자 및 사업자 선정지침 제 28조’133)를 위반했다고 판단하여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일은 자율방범대가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하고 현 회장단의 문제점을 다른 입주민 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렇게 다시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제3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선거가 예정된 2011년 12월이 다가왔다. 회장 선거에 앞서 먼저 각 동별 동대표 선거가 진행되었 고, 자율방범대에서도 4명의 인원이 각자 거주하는 동에서 후보자로 나서 동대표에 당선되었다. 그들 가운데 이번에는 이명훈씨가 회장 후보로 출마했고, 지난 선거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인원이 감사 후보로 출마했다. 한편 기존 회장단 측에서는 뜻하 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현직 회장인 임준구씨가 자신이 거주하는 동대표 선 거에서 두 차례나 연달아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두 명의 후보가 맞붙은 동대표 선 거에서 임준구씨를 누르고 당선된 후보가 선거법 위반으로 재선거가 치러졌는데,134) 재선거에서조차 다른 후보가 임준구씨를 이기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두고 자율방범 대 측은 “얼마나 인심을 잃었으면 자기 동에서조차 두 번씩이나 떨어졌겠냐”는 반 응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내심 재선을 바랬던 임준구씨 대신 기존 회장단에서 수석 총무를 지낸 유도경씨가 회장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고, 여기에 지역 초등학교 출신 으로 동창 조직을 등에 업은 허지훈씨가 제3의 후보로 도전장을 던졌다.
선거가 3자 구도로 펼쳐지게 된 상황에서 자율방범대는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처음에는 기존 회장단과 가 까운 사이였으나 관계가 틀어지며 등을 돌리게 된 여성 동대표 박영선씨와 손을 잡 아 ‘여성 표’를 체계적으로 끌어오려는 노력을 펼치는 한편, 인터넷 카페와 공식 선 거포스터 등에 지금까지의 자율방범대 활동을 강조하며 주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이전의 보궐선거와 달리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1년간의 활동이 상당부분 분위기를 가져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는데, 아래의 사례는 기존 회장단의 비리감시에 대해 자 율방범대 활동이 거둔 성과를 다소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133)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가 고시한 ‘주택관리업자 및 사업자 선정지침’ 제28조에 의하면, 입주자 대표회의 또는 관리주체가 입찰서를 개봉하고자 할 때에는 입찰에 참여하는 자 각 1인과 관리주체 의 계약담당자 및 이해관계인이 참석한 공개된 장소에서 개찰하게끔 되어 있다. 성일 노블하이츠 입 주자대표회의 회장단은 이 조항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134) 동대표 선거 당일 아침, 후보자의 부인이 남편을 돕는다고 선거홍보물을 재차 세대별 우편함에 넣 었는데, 이를 임준구씨의 측근이 발견하고 신고하여 CCTV 판독까지 가는 끝에 선거법 위반(선거당 일 선거운동 금지) 판정이 내려진 것이었다. 규약상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동대표만이 출마할 수 있었기에 임준구씨 입장에서는 동대표에 당선되는 것이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