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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주공아파트 재건축의 동학

Meyrowitz 1985; 렐프 2005)과 궤를 같이 한다. 이를테면 메이로비츠(Meyrowitz 1985)는 전자미디어와 장소감각(sense of place)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여 물리적 위치에 구애받지 않는 전자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상호작용이 인간의 사회적 상황과 사회적 정체성의 변화를 야기하여 ‘장소감각의 상실(no sense of place)’을 가져오 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렐프(2005) 역시 산업화로 인해 점차 획일적으로 변해가는 경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집단이나 공동체의 전통적인 장소 정체성과 분리된

‘장소에 대해 진정하지 못한 태도’가 등장하면서 ‘장소상실(placelessness)’이라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오제(Augé 1995)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적 실천과 다른 형태의 상호작용이 발생하며 탄생한, 익명성과 현재성(actuality)이 지 배하는 ‘비장소(non-place)’ 개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78)

그런데 카스텔을 비롯한 이들의 논의가 ‘전통적인 장소’와 다른 새로운 공간성에 대한 거시적인 접근 위주로 이루어졌기에 갖는 한계 역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획일성과 비역사성, 장소상실 등으로 재장소화된 새로운 공간의 성격을 규정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재론의 여지가 있다. 새롭게 등장한 공간성을 결과로서의 현상에만 주목하여 이를테면 ‘장소의 공간’과 ‘흐름의 공간’의 대비라는 이분법적 구 도로 파악하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79) 일찍이 르페브르가 지적한 것처 럼 공간은 그 자체로 “무수히 많은 측면과 움직임들의 기여로 이루어진 과정의 산 ”(Lefebvre 1991: 110, 강조는 연구자)이기에, 탈장소화와 재장소화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발생과 거기에 부여된 의미의 변화 과정을 재구성하여 분석해야 한다. 따라서 특정한 공간이 역사적, 정치·경제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작 용하는 다양한 요소들 간의 경합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로우가 ‘공간의 사회적 생산 (the social production of space)’(Low 2000: 127-128)이라 명명한 것과 같은, 공간이 생산되는 ‘과정’에 주목한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분석틀이 요구된다는 것이 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공간이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르페브르와 로우의 명제 를 바탕으로 장소화와 관련한 일련의 ‘과정’에 접근할 때 간과하기 쉬운 지점이 존 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장소 혹은 공간의 ‘물질성’과 관련한 문제이다. 장소의 물질 78) 이들 가운데 오제의 ‘비장소’는 전통적인 장소의 변모라는 현상에 대해 접근할 때 단순히 인간미가

풍기는 장소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는 점에서 다른 논의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제에 따르면 비장소에서의 상호작용은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적 실천과 다른 형태의 상호작 용일 뿐, 나름의 공간논리에 따라 작동하면서 장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등장을 야기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인식과 상호작용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비장소의 특징과 적용 사례들에 대한 더 상세한 검토로는 졸고(2013)의 논의를 참조하시오.

79) 이는 본 연구가 다루는 브랜드 아파트 단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재건축을 통한 브랜드 아파트 단 지의 등장을 단순히 ‘장소의 공간’에서 ‘흐름의 공간’으로의 변모로 파악하는 것은 실제 현실에서 발 생한 많은 과정들을 놓치게 할 수 있다.

성에 주목한 연구자들의 주장대로 장소는 “사물의 위치 설정과 사물이 수행하는 차 이의 체계”(어리 2012: 226)라는 관점에서 봐야 하며, (인간)주체와 그들의 고유한 인간적 의미와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여기기보다 일련의 사물과의 관계 에서 파악해야 하는 대상이다(Hetherington 1997: 185-189 참조).80) 즉 인간과 사 물을 포함한 다양하고 이질적인 존재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네트워크라는 관점에서 장소에 대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간은 사회적- 물질적 관계가 끊임없이 형상화되는 형태로 나타나는 한편, 인간의 실천과 물리적 요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담론의 연합체로 구성된다.

특정한 공간의 생산 과정은 이 같은 맥락, 즉 과정으로서의 공간(spaces as processes)과 과정 속의 공간(spaces in processes), 그리고 공간/장소의 사회-물 질적 혼종성에 주목하여 파악할 수 있다.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혼종적 공간성의 변 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간은 인간과 사물의 다양한 관계 배치에 의해 모습을 드 러낸다. 즉 인간과 사물의 집합적 관계는 공간적 조건들을 배태하고, 공간들은 인간 과 사물의 상호작용을 위한 틀(frame)로 작용한다는 것이다(Koch 2004: 175). 이러 한 관점은 공간이 생산되는 과정을 사회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물질적 측면을 포함 하여 포착할 수 있게 한다.

아파트 재건축으로 인해 야기된 탈장소화와 재장소화 과정 역시 마찬가지로 공간 의 사회-물질적 혼종성의 측면에서 분석 가능하다. 아파트 재건축이라는 장에는 행 위자들의 욕망과 사회관계, 그리고 다종다양한 사물들이 복합적으로 관계해 있기 마 련이다.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 연구자는 ‘결정(結晶, crystal)’과 ‘결정화(結晶化, crystallization)’라는 은유를 제안하고자 한다.81) 이때 ‘결정’은 혼종적 공간성에 대 한 로 & 몰(Law & Mol 2001; Mol & Law 1994)의 논의 가운데 ‘유체(fluid)’라는 은유에서 고안한 것이다. 로 & 몰은 공간과 공간을 이루는 각종 요소들의 양태를 변이성(mutable/immutable)과 이동성(mobile/immobile) 여부를 기준으로 나누고, 80) 물론 이 같은 접근방식이 공간의 물질성을 절대화하고 그에 대비되는 사회적 관계에 관한 분석을 등한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르페브르(2011: 158)의 지적대로 공간을 수동적인 용기(容器) 로 간주하다보면, 공간 내부에 관여하는 사회적 관계(계급 관계를 포함)를 들춰내는 대신 공간 ‘그 자체’, 즉 공간의 물신성이라는 함정 속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르페브르를 필두로 한 하비, 카스텔 등의 이론가들이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공간에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이 내 재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으로 그들의 논의에서 공간 자체를 낳은 보다 미시적인 구성원리

―특히 물질성과 관련하여―가 결여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공간과 관련한 논의에서 ‘공간’

자체가 빠져 있는 것 역시 모순일 수 있다.

81) 어떠한 상황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은유가 갖는 단점과 한계 역시 분명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레이코프 & 존슨(Lakoff & Johnson 1980: 5-6)의 지적대로, 인간의 사고 과정은 일반적으로 은유 적이며, 이론의 측면에서도 어리의 주장처럼 “이론상의 논의는 대부분 어떤 메타포를 다른 메타포로 대치하려 할 때 생겨나며, 특정한 메타포가 다른 메타포에 승리를 거두어야 마무리된다”(어리 2012:

46). 이 논의에서 연구자는 은유가 갖는 단점보다도 장점에 주목하여 논지를 진행하고자 한다.

그를 바탕으로 각각의 공간성들을 제시한 바 있다. 그 가운데 ‘유체’의 은유로 표시 되는 공간은 공간의 각종 구성요소들이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안정적인 배열관계가 해체되면서 유동적인 변이 형태를 보인다. 그와 함께 공간요소들의 새로운 배치가 진행된 이후에는 새로운 공간이 생겨날 수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 연구자는 주목한 다. 자연과학적 의미에서 ‘결정’은 유체 상태의 용액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인 ‘결정화(crystallization)’를 통해 생성된다. 마치 용액으로부터 결 정핵(crystal nucleus)을 중심으로 일정한 방향성에 따라 몇 가지 구성물질이 결정 을 이루어내듯이, 유체 상태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욕망들로 구성된 아파트 재건축이 라는 무대의 용액에서 특정한 형태의 ‘결정’―아파트 단지의 모습을 취한―이 형성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화 작용을 유도하는 몇 가지 매개체들은 ‘결정 핵’에 해당한다.

이어지는 논의에서는 이 같은 관점을 채택하여 성일주공아파트 재건축 과정 전반 을 아파트를 둘러싼 ‘욕망의 결정화’ 과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파트 단지의 비 가역적인 공간적 특징을 감안할 때, 아파트 단지의 재건축 과정을 ‘결정화’라는 은 유를 통해 파악하는 것은 분명한 이점을 지닌다. 박철수(2013: 148-149)의 지적대 로 아파트 단지에는 공간으로서의 ‘가역성(可逆性)’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 전반의 변화에 맞춰 토지이용이나 건축물의 기능이 유연하고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소규모 필지와 달리, 아파트 단지의 건축은 수년 동안의 집중적인 건설과정에 의해 진행된 뒤로는 물리적 형태가 굳어지게 된다. 따라서 재건축 과정을 ‘결정화’로, 아 파트 단지를 ‘결정’이라는 은유로 보는 것은 무리한 비유가 아니다. 이를 통해 재건 축으로 해체된 성일주공아파트라는 기존의 장소가 어떤 결정핵들의 어떠한 작용에 의해 재건축에 개입한 관계자들의 욕망을 구체적인 공간 형태로 구현해내게 되었는 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