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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노블 자율방범대의 함의: 공간의 사회-물질적 구성

한편 이처럼 나름의 성과를 거둔 자율방범대가 방범활동과 하자점검, 비리감시 등 의 활동을 하면서 내세운 것이 바로 ‘아파트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안전한 아파트’

이며, 이를 통해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들이 활 동하는 내내 가장 큰 어려움을 호소한 것은 다름 아닌 주민들의 무관심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다수 입주민이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한 가운데 아파트와 관련한 활 동에 특히 열성적이었던 소수 인원에 의해 성일 노블하이츠는 주목할 만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소수에 불과한 집단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움직일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들이 거둔 성과는 상당부분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이 ‘구성되는 방식’의 재설정 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앞서 Ⅲ장에서 논의했듯이 공간은 인간의 실천과 물리적 요소,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담론의 연합체로 구성된다. 이러한 공간의 사 회·물질적 혼종성은 브랜드 아파트 단지에서도 예외가 아니며, 공간을 이루는 복합 적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느냐에 따라 아파트 단지의 장소성도 달리 나타 나기 마련이다. 성일 노블하이츠에서 자율방범대가 펼친 활동의 함의는 바로 이 지 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자율방범대의 활동은 단지 내 각종 공간요소들의 점검과 관리 에 주안점을 두어 왔다. 이들은 처음 단지 조성 단계에서 주민들의 실제 사용을 고 려한 공간 배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을 찾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였다. 다른 공간들과 마찬가지로 아파트 단지 역시 계획가들이 생각했던 공간 배치와 공간의 실제 활용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de Certeau 1984). 르페브르(2011) 의 표현을 빌리면, 도시계획가와 기술관료(technocrat)들에 의해 기호나 부호, 지식

등으로 표준화되고 개념화된 ‘공간의 재현’135)만으로는 사회적 산물로서의 공간을 설명하기 어렵다. 로우(Low 2000)가 지적하듯이 특정한 공간에는 그에 대해 타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세력들 간의 복합적인 경합 과정과 함 께, 공간 설계자들의 의도와 해당 공간을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들의 경험 사이의 불 일치가 병존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공간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space)’이라 명명하여 분석에 활용했다.

공간의 형성 과정에 작용하는 각종 요소들 간의 경합을 다루는 또 다른 개념쌍인

‘공간의 사회적 생산(the social production of space)’에 대응하는 이 개념은 일 단 형성된 공간을 놓고 그 이용자들이 행하는 의미 전유 방식을 가리킨다(Low 2000: 127-128).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 마주하는 일부 공간들의 양상을 볼 때, ‘공 간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개념에는 한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로우의 논의처럼 공간에 부여된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하고 설계자의 의도와 달리 공간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물리적·

상징적 배열방식을 변형시키는 등 공간적 요소와 ‘연합(association)’(Latour 2007)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때 건조환경(built environment)으로서의 공간을 구 성하는 사물들은 단순히 인간의 전유 대상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공간적 실천에 직 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즉, 기존의 논의에서 빠져 있는 공간의 ‘물질적’ 측면―

인간과 사물의 상호개입과 같은―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공간의 사회-물질적 구성(the socio-material construction of space)’이라는 관점을 통해 공간에서 펼쳐지는 양상을 볼 것을 제안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성일노블 자율방범대의 활동을 다시 돌아보자.

자율방범대 구성원들은 단순히 높은 담장을 두르고 최첨단 장비를 설치하는 것만 으로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주민들의 관심을 촉구하며 아파트 단지라는

‘담을 두른 마을’136)을 위해 희생하는 봉사자들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이 같은 자율방범대의 활동은 도시 생활의 안전 문제에서 주민 참여를 강조한 제이콥스 (2010)의 논의와 공명한다. 제이콥스에 따르면 안전은 공간적 분리 혹은 위험한 요 소의 격리(isolation)가 아니라 참여(engagement)에 의해, 그리고 거리를 향한 사람 들의 시선(“eyes upon the street”)에 의해 유지된다. 안전한 도시 생활을 위해서 는 도시민들에 의한 자발적 감시와 그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연결망이 중요하다는 135)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s of space)’은 르페브르가 ‘공간의 생산’을 설명하며 주장한 세 가

지 차원의 요소 중 하나로, 나머지 둘은 ‘공간적 실천(spatial practice)’과 ‘재현된 공간 (representational space)’이다. 전자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각종 구체적인 흐름과 이동, 상호작용들 을 뜻하며, 후자는 공간의 거주자 및 사용자들의 상징적 이용과 상상에 의해 변화되고 전유되는 양 상을 가리킨다(르페브르 2011: 86-88).

136) 이는 발표자의 현장연구 과정에서 만난 한 주민이 직접 사용한 표현이다.

<사진 4-5> 성일노블 자율방범대 모집 공고문, 모집 플래카드 (연구자 직접 촬영)

것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자율방범대 역시 안전한 아파트를 위해 주민들이 다양한 아파트 현안에 관심을 갖고 직접 참여에 나설 것을 호소해 왔다. 비록 전문 경비업 체 수준의 방범활동을 펼치진 못하더라도, 이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주거 공간에 대 한 주인의식과 봉사정신을 발휘한다면 아파트의 안전에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파트 단지 각지에 첨단 보안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해도 단순히 감 시 장비를 기계적으로 관리할 뿐인 용역업체의 태도와 실제 입주민들이 갖는 열의 와 성의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자율방범대가 추구하는 ‘안전’은 제이콥스가 논한 좁은 의미에서의 안전, 즉 범죄로부터의 안전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율방범대 의 활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범죄예방보다도 하자점검과 비리감시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율방범대에게 ‘안전’이란 단순히 범죄로부터의 안전만을 뜻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종 비리와 그에 기인한 시설 관리 미비 등의 문제 역시 이들 에게는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며, 그렇기에 이들은 “밖에서 오는 도둑뿐 아니 라 안의 도둑에 대해서도” 감시의 눈초리를 놓치지 않아 왔다. 아파트 단지라는 지 역사회 안에서 공동체성의 함양을 강조하고 깨끗한 입주자대표회의를 가꾸어 나가 는 것은 ‘안전한 아파트’를 위해 꼭 필요한 실천적 행위였던 것이다.137) 게다가 무 137) 바로 위 문장에서 “밖에서 오는 도둑 뿐 아니라 안의 도둑”이라는 표현은 자율방범대 활동 중 많 이 들을 수 있던 말이었다. 이들에게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은 ‘도둑’이 나 다름없었기에 방범활동의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이때 자율방범대가 추구한 아파트 단지 안 에서의 주민 참여, 즉 공동체성의 함양과 ‘안전한 아파트’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이 장의 마지막 절에서 더 상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엇보다도 아파트 비리와 관련한 문제는 자율방범대가 초창기 멤버들을 중심으로 결 속력을 갖고 운영될 수 있었던 주된 원동력이기도 했다.

“우리 아파트가 안정되고, 진짜 투명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움직이는 거에요.”

(자율방범대원 B씨)

“아파트가 안정화되면, 동호회도 더 많아지고 운동도 같이 하고, 같이 활동도 많 이 해서 그렇게 살기 좋은 단지가 되면 그만큼 남들이 부러워하고, 그러면 아파트 가치도 올라가고 그럴 텐데.” (자율방범대원 F씨)

“모든 가구가 한달에 1000원씩만 모아서 기부해도 아파트 가치가 확 올라갈 텐 데. 집값으로 치면 아마 1년에 1천만원은 오를 걸요? 그런데 똑같은 1000원이어 도 관리비로 새나가는 건 관심이 없으니.” (자율방범대원 D씨)

사실 자율방범대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다 해서 실질적인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는 점에서 이들의 행위는 다분히 ‘비합리적’이다. 가치를 생성하는 행위의 역할에 관한 논의에서 그레이버(2009: 121)가 지적하고 있듯이 사람들은 충분히 자신에게 중요하고 유의미하다 생각하는 대상에 자신의 에너지를 투자하기 마련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들을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끈 것은 현재 상황과 과거 사회적 궤적 사이의 밀접한 관계였다. 야나기사코(Yanagisako 2002: 100)가 주장하듯 인간이란 존재는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과제와 이해관계를 재설정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의 정체성과 이해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은 과거 의 사회적 궤적과 자신의 현재 위치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과거에 어떤 행 보를 걸었는가에 따라, 그리고 현재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이해관 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성일노블 자율방범대의 출범 배경에 입주 초 입주자대표회의를 둘러싼 혼란이 있 었음은 이미 살펴보았다. 특히 자율방범대 초창기 멤버들의 경우 대부분 입주 초 동 대표로 활동한 바 있으며, 동시에 이들은 재건축 과정에서부터 조합과 시공사를 상 대로 한 투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입주자협의회 활동에 처음 합류한 시기의 차 이는 있지만 이들은 “검찰청 앞에서 데모하여 대리석 따내고 조합장, 부조합장 구속 시킨”138) 경력을 자랑하는, 투쟁의 에토스를 보유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이러한 과거 행적이 끼친 영향은 입주 이후에도 이어져 대다수 입주민들이 아파트 현안에 대해 눈을 감을 때 이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게 했다.

138) Ⅲ장 3절의 내용 참고. 이들이 나누는 사적인 대화에서 재건축 시기와 관련한 ‘옛날이야기’만 나 오면 등장하는 주된 레퍼토리는 2007년 하반기 지방검찰청과 대검찰청 앞에서 벌인 집회 얘기이다.

조합과 시공사를 상대로 한 투쟁의 절정을 이룬 이때의 경험은 자율방범대 구성원을 비롯한 과거의

‘활동가’들에게 지금의 성일 노블하이츠를 지켜낸 영웅적 업적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