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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국내 도입과 초창기 아파트들

한국에서 ‘아파트’라는 단어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발 간된 유일한 건축전문지인 『朝鮮よ建築』의 1925년 ‘建築雜報’ 란에 ‘同潤會의 아파 트먼트’32)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심우갑 외 2002: 161). 이어 1930년대 들어 잡지 『삼천리』의 통권 13호(1931년 3월호)에서 경성에 지어진 단층 양식의 여성 합 숙소를 ‘아파-트’로 소개하면서 건축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에도 아파트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함을 볼 수 있다(장림종·박진희 2009: 30). 특히 새로 유입된 외래어들을 소개하던 잡지 『신동아』의 「모던語 點考」에 실린 ‘아파-트 멘트’의 정의는 당시 사람들에게 아파트가 ‘임대주택’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아파-트 멘트(apartment): 英語. 一種의 旅館 혹은 下宿이다. 한 빌딩 안에 房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세를 놓는 집이니, 역시 現代的 都市의 産物로 미국에 가장 크 게 발달되었다. 간혹 夫婦生活하는 이로도 아파-트멘트 生活을 하는 이가 있지마는 대개는 獨身 샐러리맨이 많다. 日本서는 略하야 그냥 「아파-트」라고 쓴다.

(「모던語 點考」, 『新東亞』 通卷18號(1933년 5월) 19쪽, 심우갑 외 2002: 164에서 재인용)

잡지를 구독할 여력이 있던 식민지 조선의 식자층을 대상으로 ‘아파트’라는 새로 운 단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1930년대 무렵은 실제로 경성에 ‘아파트’라 불린 건물들

32) 한국에 아파트를 최초로 소개한 일본에서는 1910년을 전후해 초기 아파트들이 등장했지만 이들은 본격적인 집합주택이라기보다는 공동생활관이나 호텔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일 본에서 아파트 건설이 시작된 것은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주거의 복구와 이재 민 구호를 목적으로 동윤회(同潤會)라는 단체가 설립되면서부터인데, 일본은 에도 시대에 이미 ‘마 치야’ 혹은 ‘나가야’라고 불리는 고밀도의 임대주택이 있어 아파트 수용에서 한국보다 거부감이 덜 했다고 한다(이현호 1997: 116-117 참조).

<사진 2-1> 충정아파트 (예전의 토요다아파트)

※ 사진 출처: http://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park&wr_id=34052202

이 건설되기 시작한 때였다. 그 이전에도 1920년대 도심지의 인구증가에 따른 주택 난 해소를 위해 건설된 ‘부영주택(府營住宅)’이나 일본인 노동자들의 숙소로 건립된

‘요(寮)’와 같은 집합주택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1930년을 기점으로 ‘아파트’라 명명 된 건물들의 건축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아파트라는 명칭이 최초로 붙은 회현동 미쿠니(三國)아파트(1930)와 현재 충정아파트로 불리는 토요다(豊田)아파트(1930) 등 이 당시 지어진 아파트들이며,33) 이들은 대부분 일본인 자본을 통해 건립되었다. 하 지만 이 아파트들은 주로 식민지 조선에 부임한 소수의 일본인만을 거주대상으로 한 일본식 주거의 변형에 해당했고,34) 게다가 1940년대 들어서는 연이은 전쟁으로 주택 자재난이 심각해지며 건설이 위축되었기에 보통의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직·간 접적으로 경험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다만 서구에 기인한 현대식 도시주거의 산물이 자 당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우위에 있던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주거형태로 아파트라는 존재 자체가 해방 이전 한국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짚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33) 참고로 2013년 현재, 충정아파트(지하 1층, 지상 4층)는 ‘아파트’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 가운데 한 국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건축물이다. 이는 이 건물이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드물게 목재나 벽 돌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34) 이와 관련하여 장성수(1994: 58)는 일제시기 건립된 아파트가 주로 목재로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 당시 개념이 일본의 전통적 도시주거 유형인 ‘나가야’를 2~3개 포개어 건설한다는 수준에 머 물러 있었기에 본격적인 의미의 아파트로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 뒤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한국사회에 아파트라는 주택 유형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행촌아파트(1956), 종암아파트(1958), 개명아파트 (1959) 등이 건설되면서부터이다. 행촌아파트는 해방 이후 한국에 지어진 최초의 아 파트35)이자 한국전쟁 후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기관 중 하나였던 한미재단에서 지 은 시범단지의 일부로, 지상 3층(지하 1층) 높이에 3개 동 48세대(14평형) 규모로 지어졌다. 뒤이어 2년 뒤 건설된 종암아파트는 국내 자본에 의해 건설된 최초의 아 파트로, 4~5층 높이의 건물 3개동에 152세대(17.3평형) 규모로 지어졌으며, 민간업 체인 중앙산업이 건설한 것을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 택영단이 인수하여 관리를 맡았다(전남일 2010: 241). 이 가운데 준공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테이프를 끊었고 국내에서 처음 수세식 화장실이 사용되는 등 여러 모로 관심을 끌었던 종암아파트는 한국에서 서구식 공동주거의 시대를 연 최초의 아파트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전남일 외 2008: 201).

이들 초기 아파트들이 건설된 1950년대 말과 뒤이은 60년대는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형식이 국내에 도입되면서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이 공존했던 시기로 볼 수 있 다.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표준화되고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의 시초가 된 마 포아파트와 빈민 주거대책의 일환으로 난립했던 시민아파트들이 국가 주도의 계획 적인 주택공급 시책의 결과물이었다면, 같은 시기 영세 민간건설업체들이 지었던 많 은 소규모 아파트들은 좀 더 다양한 계획요소들을 보여주며 도시 공간에의 정착을 모색했다. 여기서 특히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국내 아파트 도입 초창기에 적지 않 은 비중을 차지했음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1960년부터 1973년까지 지어진 총 217개 아파트의 사업주체를 보면 대한주택공사 9%, 기타 공공기관 및 지자체 24%, 민간 67%로 나타났고, 대규모 자본을 요하지 않는 1개 동 규모로 지어진 경우 역시 전체의 60%에 달했다(박진희 2004: 27-29 참조). 이와 함께 당시 대형건설사들의 주요 국내 사업이 기반시설 건설에 치중해 있었고 아파트 건설에 본격적으로 참여 한 건 70년대 이후인 점을 감안할 때, 60년대까지의 많은 아파트들이 주로 개인과 영세 업체들에 의해 건설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장림종·박진희(2009)는 이렇게 1960~70년대에 건설된 소규모 아파 트들이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다양성을 보여주며 그 이후와 다른 특징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영세 민간업체들이 국가 주도의 대규모 택지 개

35) 2013년 현재 국내의 법적 기준에 따르면 행촌아파트와 종암아파트의 일부 동은 ‘아파트’에 해당하 는 건물이 아니다. 건축법 시행령 제3조4 [별표 1](개정 2011년 12월 8일) ‘용도별 건축물의 종류’

에 의하면, 한국에서 법적으로 아파트는 공동주택 가운데 “주택으로 쓰는 층수가 5개 층 이상인 주 택”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택이 단층이던 1950년대 당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3~4층 높 이의 집합주택으로 새로 지어진 행촌아파트와 종암아파트가 서구식 주거생활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아파트’로 받아들여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사진 2-2> 동대문아파트 외관 <사진 2-3> 동대문아파트 내부 모습

※ 사진 출처: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10/2014021002568.html (사진 2-2)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905208 (사진 2-3)

발 없이 한정된 토지를 이용해 건물을 짓다 보니 새로 지어진 아파트가 기존의 가 로 구조와 주변 장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도시 공간에 자연스레 동화될 수 있 었다. 게다가 이러한 아파트들의 대부분은 주변 이웃과 커뮤니티 시설을 함께 사용 하거나 별도의 커뮤니티 시설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만큼 규모가 작았기에, 이후 아 파트가 난립하게 되는 과정에서 지적되어 온 기존 공동체의 훼손 역시 크게 문제되 지 않았다는 것이다.36)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동대문아파트(1966), 홍제동 원일아파트(1970), 아현동 현대아현아파트(1970) 등 60년대 후반 건설된 ‘블록형 아파트’들이다. 6층 높이의 단일 주거동에 20~40세대가 거주하게끔 지어진 이들 아파트는 도심의 가로 에 맞닿아 들어서면서 도시의 기존 경관 및 사회적 구조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 었다. 특히 블록형 아파트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인 ‘가운데 마당’이라는 외부 공간, 즉 중정(中庭)의 존재는 “외부 공간에서 주호(主戶)로 진입할 때 자연스러운 전이 공 간의 역할을 해줌과 동시에 주민 커뮤니티 활성화의 가능성”(장림종·박진희 2009:

83)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옥상정원, 도시 하천 등 지형과의 유기적 조화 를 이룬 것은 60년대의 소규모 아파트들이 이후 건설된 관 주도 아파트들이 폐쇄성 과 획일성으로 인한 폐해를 낳은 것과는 달리, 지역공동체 조직 및 유지에 있어 주 목할 만한 측면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36) 이는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초 프랑스 아파트와 기존 도시 공간과의 조화에 대한 마커스(Marcus 1999)의 논의와도 접점을 갖는 내용이다. 뒤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국내에서 아파트 관련 문제로 지 적되는 사항들 중 상당수는 아파트 자체보다도 주변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폐쇄적인 아파트 ‘단지’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