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입주자대표회의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유일하게 법적 근 거를 지닌 자치기구인 동시에, 입주민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 매우 중 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또한 아파트 단지가 수백에서 수만에 달하는 입주민들 이 함께 살아가는 ‘아파트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사항이 입주자대표 회의의 올바른 운영이라는 지적 역시 관련 연구들을 통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곽 도·은난순·하성규 2004; 박광재·백혜선·서수정 2001; 하성규·서종균 2000).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련한 영역은 ‘아파트 단지의 집단적 현안에 대한 무관심’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대부분의 아파트 단지들에서 대다수의 입주민 들은 입주자대표회의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에 대해 큰 관심 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같은 주민들의 무관심이 입주자대표회의의 불투명한 운 영을 낳고, 다시 입주자대표회의의 폐쇄적인 운영이 주민들의 무관심을 조장하는 악 순환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많은 아파트 단지들에서는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입주자대표회의가 이권에만 관심을 둔 소수 동대표들의 손아귀에 놀아 나는 경우마저 발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성일 노블하이츠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Ⅲ장 후반 부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입주 초 입주자대표회의를 처음 구성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혼란은 성공적인 재건축을 위해 헌신했던 ‘활동가’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입주민들 로 하여금 아파트 현안으로부터 관심을 끊고 거리를 두게끔 하였다. 그런 와중에 초 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과 제2대 회장을 역임한 인사들이 업무능력 부족과 비리 의 혹으로 연달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자진사퇴하면서 입주자대표회의는 이권을 노 린 동대표들의 다툼 속에 극심한 내홍을 겪게 되었다.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요식적 인 절차만 밟아 자리에 오른 일부 동대표들은 주민들이 실제 생활에서 겪는 애로사 항을 해결하기보다 각종 위탁업체들과의 뒷거래를 통해 관련 사업의 계약을 체결해 주고 커미션을 수수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일 노블하이츠 입주자대표회의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해 갔다.
입주 초만 하더라도 조합비리에 맞서 문제제기를 해온 이들의 동대표 비중이 결 코 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주자대표회의가 이러한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 데에 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동대표 자격 유지를 위한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 웠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입주자대표회의 규약에 의하면 매달 열리는 동대표 회의 에 3회 이상 불참시 동대표 자격을 박탈하게 되어 있었는데,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 체를 운영하고 있는 동대표 가운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 는 경우가 제법 발생했던 것이었다. 여기에 이권에만 눈이 먼 일부 동대표들의 전횡 에 실망한 뜻있는 동대표들마저 자리를 떠나며 결국 입주 초 60여명에 달하던 동대 표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 40명대로 축소되었고, 소위 ‘직업 동대표’들에 의해 입주 자대표회의가 운영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사게 되었다.
이른바 ‘직업 동대표’는 아파트 동대표를 마치 자신의 직업처럼 삼아 아파트의 각 종 이권문제에 개입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124) 이들 은 대개 따로 직업을 갖지 않고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임원 등 주요 직책을 맡아 각 종 아파트 관리업무에 관여하면서 관리사무소 직원들을 자신의 수족 부리듯 다룬다.
입주자대표회의에 대한 주민들의 무관심 덕택에 이들은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동대표 자리를 쉽게 꿰차고 아파트 단지의 주요 현안들을 좌지우지한다. 성일 노블 하이츠의 경우 역시, 대외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입주 3~4년차에 접어든 2010 년 즈음 적지 않은 수의 동대표들이 직업 동대표에 해당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입주 이래 입주자대표회의가 대다수 주민들과 괴리된 채 자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대외적으로 알리는 일에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 과정 에서 일부 입주민들이 용역업체 선정과 같은 아파트 현안들이 불투명하게 처리되고 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입주민들은 입주자대표회의가 어떻게 돌 아가든 계속해서 무관심으로 응대했다. 아래 인터뷰 내용은 이러한 입주자대표회의 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동대표 선거할 때 보면 솔직히 뭐라 그러지... 후보 나와서 서로 경쟁하시는 분 들, 그런 분들 약력이나 이력을 보잖아요, 그런데 정말 밀어드리고 싶다 할 만한 분들이 없어요. 사실 제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약력이나 이런 게 제대로 된 분들 있으면 밀어드리고 싶어요. 여기 무슨 의사, 박사들도 많이 산다고 들었는데, 정작 그런 분들이 자기 이력을 가지고 이런 데 관심 갖고 나서가지고 하셔야지, 관심들 이 굉장히 없는 거 같아요. 저도 나서지 못하지만, 그래도 저하고는 다르잖아요.
몇몇 분들이 나서서 이끌어 주민들이 따라오게끔 해야 되는데, 별로 그런 게 없는 124) ‘직업 동대표’는 본 연구의 연구대상지에서만 사용하는 말이 아니며, 한국의 많은 아파트 단지들
에서 어렵지 않게 들어볼 수 있는 단어이다. 인터넷 검색엔진에서 해당 단어를 검색해보면 특히 2010년대 들어 ‘직업 동대표’ 관련 문제가 이슈로 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거 같아요. 추천할 만한 분들도 없고. (신유진, 여, 40대, 2007년 입주)
위의 인터뷰 내용 가운데 “무슨 의사, 박사” 관련 언급을 실제로 의사 면허나 박 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동대표에 나서야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 다. 사실 한국의 직업생태계 구조상, 의사나 변호사, 교수와 같은 이른바 전문직 종 사자들이 자신의 업무 외에 추가로 아파트 단지에서 봉사직―엄연히 말해 동대표나 입주자대표회의 임원이라는 자리는 봉사직에 해당한다―을 맡아 수행하기는 불가능 에 가깝다. 여기서 “의사나 박사 같은 분들이 관심 갖고 나서야한다”는 이야기는 최 소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확보한 사람들, 그러니까 동대표를 직업처럼 여기는 이들이 아니라 아파트 바깥에 따로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파트 일 에 관심을 갖고 나섰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의미한다. 기존의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원 들에 대한 불신 속에,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신뢰감 있는 인물이 나서주기를 바라 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인터뷰 내용은 입주민들이 입주자대표회의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의 다른 단면도 드러내고 있다. “저도 나서지 못하지만, 그래도 저하고는 다른 분들”이 나서야 한다는 것, 즉 누군가 아파트를 위해 발 벗고 나서주기를 바라지만 정작 본 인 스스로가 그 일에 나설 생각은 없는 것이 보통의 입주민들이 지닌 입장이다. 하 지만 자신은 직장 일 때문에 바빠서 아파트 일에 나서기 어려우니 대신 다른 직장 인 혹은 자영업자가 ‘직업 동대표’로 인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일에 나서기를 바 라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내가 따로 직업이 있기에 나설 수 없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직업이 있는 다른 사람 역시 나서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입주자대표회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을 갖고, 직접 동대표에 나서지 못하더라도 동대표 선출 과정이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선거에라 도 직접 참여하게 된다면 동대표들이 멋대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누가 동대표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되든 말든 직업 동대표들이 아파트 현안을 좌지우지하든 말든 대다수의 입주민들은 관심 자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2011년 1 월, 성일 노블하이츠에서 치러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선거는 이러한 주민들의 무관 심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자진사퇴한 제1대 이학수 회장(재임 2007.12~2009.2)의 뒤를 이은 제2대 김도진 회장(재임 2009.3~2010.12) 역시 비리의혹으로 자진사퇴하 여 치러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보궐선거는 이전까지와 달리 직선제 방식에 의해 진 행되었다. 2010년 6월 주택법이 개정되면서 500세대 이상의 아파트 단지는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을 주민 직선제에 의해 선출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성일 노블하이 츠에서도 처음으로 직선제 회장 선거가 도입된 것이었다. 회장 후보로는 2기 입주자
대표회의 수석 부회장이자 전임 회장 사퇴 이후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던 임준구씨와 함께, 역시 이전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동대표를 역임했던 박상문씨가 출마하였다.
<사진 4-3> 2011년 1월 치러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선거 홍보 현수막
※ 사진 출처: 성일 노블하이츠 입주민 카페 (포털사이트 Z사)
처음 실시되는 직선제 회장 선거를 지금까지 입주자대표회의가 보여준 난맥상을 바로잡을 기회로 여긴 일부 주민들은 다른 입주민들에게 투표 참여를 독려하며 입 주자대표회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125) 선거 며칠 전, Z사 입주민 카 페에 올라온 아래 게시물은 이들의 바람을 잘 보여준다.
제목: 1단지 입주민들께 드리는 글 (2011.1.18)
오는 일요일 동대표회장 직선제 주민투표가 있습니다. 주민 직선제로 주민들의 권 리는 물론 주민들이 직접 선택을 함으로서 그만큼 공정하고 투명하게 살림을 할 것이라 보며, 아울러 입주자대표회의가 주민들에게도 신뢰도 받을 수 있는 경사스 런 일일 것입니다.
또한 주민들도 아파트 관리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계기가 되리라 봅니다.
이번 직선제 주민투표는 아파트발전과 주민들의 재산상승가치에도 큰 몫을 차지하 는 주민들이 직접 선택하므로 많은 변화와 함께 좌우될 것입니다.
나 아니면 누가 하겠지 하면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서야만 잘될 수 있다는 참여 의식을 갖고 나서야 합니다.
귀중한 내 한 표가 입주 때부터 고장 난 시계를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125) 성일 노블하이츠 입주자대표회의가 일부 직업 동대표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속에서도 일부 주민 들은 아파트 현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며 나름의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논의의 흐름 상 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뒤의 Ⅳ장 3절에서 진행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