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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대상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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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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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종 국

이 강 한

고 동 환

조 영 헌

강 진 아

김 대 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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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기관 연구책임자 참여연구진

이화여자대학교 남종국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강한

한국과학기술원 고동환

고려대학교 조영헌

한양대학교 강진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김대륜

이 보고서는 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 2016년도 인문정책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연 구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 보고서에 수록된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의 공식적 인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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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던 동서양의 대상인들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밝혀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적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동서양의 대상인들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 전을 견인한 핵심 주체였으며, 근대 자본주의는 상업에서 탄생하였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 는 자본주의와 근대의 기원을 탐색하는 연구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는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12개의 상인 집단 또는 개별 상인들에 대한 사례 분석을 통해 천 년 간의 상업사와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를 세밀하게 보여주었다. 본 연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례연구 1: 한국중세 상거래의 주역, 고려시대의 상인에 관한 연구에서는 고려시대에는 여러 유형의 국내상인들이 활동했으며, 상거래가 활성화된 중기 이후에는 그들의 존재가 사료상 실명으로도 곧잘 확인됨을 증명했다. 관료이면서 동시에 상인 노릇을 했던 경우, 미 천한 신분으로서 고위관료나 국왕측근이 돼 정부의 상업정책을 보좌한 사례, 특정 물자의 조달과 유통에 관련돼 있었던 존재 등이 정사류의 기록 및 픽션 자료를 통해 다양하게 확인 되었다.

사례연구 2: 세계시장에서의 한반도, 고려를 찾아온 외국의 상인들에 관한 연구에서는 고려시대에는 수많은 외국상인들이 한반도를 방문했음을 밝혔다. 중국의 한족상인들은 물 론 내륙아시아 위구르상인(“회골인, 회회인”) 및 무슬림상인(“색목인, 서역인”)들이 여러 사 유로 한반도를 찾은 것이다. 고려 자료보다는 외국 자료를 통해 이들의 활동상이 구체적으 로 확인된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한반도의 존재가 외국에 전파되는 한편으로, 한반도인들 의 세계관 또한 여러 외부정보를 소화하는 과정에서 달라져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례연구 3: 한국 전통상인정신의 구현자, 개성상인에 관한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개성상 인들은 개성부내의 상설점포인 시전(市廛)상업, 전국적 행상과 도고(都賈)상업, 해양을 무대 로 한 선상(船商)활동,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무역, 나아가 인삼재배와 홍삼제조업으 로 사업 영역을 넓혀나감으로써, 오늘날 상인정신을 전형적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상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개성상인들의 상업경영은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置簿 法)이라는 독특한 복식부기의 창안, 상업사용인 제도, 독특한 금융제도인 시변제(時邊制) 등 각종 상관습의 합리적 운영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본축적과 그 자본의 생산부문 에의 투자는 우리나라 중세 말기의 근대적 지향을 보여주는 징표로도 이해되고 있다.

사례연구 4: 조선시대 특권상인 시전(市廛)의 상업세계에 관한 연구에서는 시전상인은 국가에 국역을 납부하는 대가로 상품의 독점적 유통권인 禁亂廛權을 보유한 특권상인이었 음을 밝혔다. 본 연구에서는 동아시아 역사속에서 시전이 지닌 특성, 육의전, 유분각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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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인 立廛(중국산 비단판매점)과 어물전의 사례를 통해 살폈다. 이외에도 18세기 이후 난 전상업의 성행에 따라 시전체제가 동요되는 양상과 이에 대응하여 정부에서 금난전권을 무 력화시키는 통공정책의 추이에 대해서도 고찰했으며, 개항이후 육의전 상인들이 어음교환 과 할인 등 금융업에 진출하는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육의전 상인의 상업자본가로서의 전환 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사례연구 5: 중국 근세 경계를 넘나들던 해상에 관한 연구에서는 중국 근세, 특히 16-17 세기 바다로 진출하여 육지와 바다의 경계,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경계를 넘나 들며 소위 ‘국제무역’을 개척했던 상인들의 활동을 조명했다. 왕직에서 정성공에 이르는 이 들은 다양한 경계를 넘나들던 ‘경계인’으로 자신의 동향을 기반으로 한 해상 네트워크로 활 동하며,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시대를 앞서가는 해금 완화와 개시(開市)를 요구하였다.

사례연구 6: 대운하시대(15-18세기) 중국의 거상, 휘주 상인에 관한 연구에서는 중국의 명과 청 시대에 중국 경제를 주도했던 안휘성 휘주부 출신의 상인들의 성장과 활동 양상을 그들의 주된 거점이었던 대운하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휘주 상인은 국가 권 력이나 신사층과 경쟁하기보다는 그들의 후견에 의존하거나 적응하는 대처 방식을 선호했 고, 그 결과 “신사화된 상인”의 성격을 가지고 내륙에서 대운하와 양자강을 중심으로 장거 리 유통업에 종사했다.

사례연구 7: “양행(洋行)” : 동아시아의 “구교(歐僑)” 상인에 관한 연구에서는 18-19세기 중국의 차와 아편 무역, 인도와 신대륙의 원면과 산업혁명을 링크시키며 글로벌 무역이 역 사상 유례없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19세기 중엽 동아시아의 개항과 개항장 시스템의 성립과 더불어 유럽과 미국의 상인자본들은 본격적으로 중국과 동아시아 로 진출하였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장해 나간 대표적 양행(洋行) 자본의 흥 쇠를 추적하면서, 현지화 전략을 통해 동아시아에 뿌리내린 기업만이 21세기까지 글로벌 자본으로 성장해 나갔음을 다루었다.

사례연구 8: 광동(廣東) 화상(華商) 네트워크와 세계에 관한 연구에서는 19세기의 서세동 점의 시대를 배경으로 거꾸로 아시아에서 세계로 뻗어나가 성장한 화교 자본을 가장 대표 적인 화상(華商)인 광동 화상을 소재로 서술하였다. 18세기 이래 양행의 보조적 역할로 매 판자본으로 성장한 광동 상인들은 개항 이후 열린 세계시장을 선구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노하우와 기회를 누릴 수 있었고, 이러한 자산을 이용해 근대화를 꾀하던 청의 정부와 관료 와도 유착하여 특별한 지위와 특권을 누렸다. 중화민국 성립 이후 완전히 새로운 환경 하에 서는 화교자본으로 다시 등장하여 중국 본토에 투자하고 개혁개방 이후까지 중국 경제의 재건과 부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례연구 9: 중세 이탈리아 상인에 관한 연구에서는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지중해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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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연구 10: 카리미 상인에 관한 연구에서는 중세 후반 인도양과 홍해에서 향신료 무역 을 주도했던 이슬람 출신의 카리미 상인들의 상업 활동을 분석함으로써 중세 이슬람 사회 가 상업에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오해와 편견을 바로 잡았다.

사례연구 11: 영국 동인도회사와 아시아 무역에 관한 연구에서는 유럽인의 아시아 진출 에서 동인도회사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본문은 잉글랜드 동인도회사의 성립에서 시작 해 1620년대 중반 이후의 위기, 1650년대 동인도회사의 개혁과 그에 따른 상업적 성공, 명예 혁명 이후 또 한 차례의 위기와 그 극복과정을 차례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18세기 중반 잉글랜드 동인도회사가 무역회사에서 제국 권력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진행되는 역사적 배 경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사례연구 12: 18세기 런던 대서양 상인의 세계에 관한 연구에서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 기 중반까지 런던 대서양 무역의 발전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이를 이끌었던 런던 대서양 무 역 상인의 세계를 재구성했다. 상인이란 어떤 사회적 존재였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논 의는 대서양 상인 세계의 구성, 대서양 상인의 성장과 성공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대서양 상인의 사회적 열망을 재검토하는 일로 끝맺는다.

핵심어 : 대상인들, 국제 무역, 고려, 조선, 중국, 이탈리아, 영국,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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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 배경 ··· 1

2. 연구 목표 ··· 4

3. 연구 진행 과정 ··· 7

4. 연구 내용 ··· 9

4.1. 사례연구 (1): 한국중세 상거래의 주역, 고려시대의 상인 ··· 9

4.2. 사례연구 (2): 세계시장에서의 한반도, 고려를 찾아온 외국의 상인들 ·· 27

4.3. 사례연구 (3): 한국 전통상인정신의 구현자, 개성상인 ··· 44

4.4. 사례연구 (4): 조선시대 특권상인 시전의 상업세계 ··· 65

4.5. 사례연구 (5): 중국 근세 경계를 넘나들던 해상 ··· 93

4.6. 사례연구 (6): 대운하시대(15-18세기) 중국의 거상, 휘주 상인 ··· 117

4.7. 사례연구 (7): “양행(洋行)” : 동아시아의 “구교(歐僑)” 상인 ··· 143

4.8. 사례연구 (8): 광동(廣東) 화상(華商) 네트워크와 세계 ··· 166

4.9. 사례연구 (9): 중세 이탈리아 상인 ··· 188

4.10. 사례연구 (10): 카리미 상인 ··· 208

4.11. 사례연구 (11): 영국 동인도회사와 아시아 무역 ··· 228

4.12. 사례연구 (12): 18세기 런던 대서양 상인의 세계 ··· 252

5. 결론 ··· 276

참고 문헌···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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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 배경

오늘날 세계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적 체제로 형성된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면서 짧게는 300년 길게는 500년 동안 우리와 함께 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인류 진화와 정부의 최종 형태이자 역사의 종착점이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아마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자본 주의는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을 견인했던 핵심 세력은 다름 아닌 세계의 대상인들(영어로 great merchants, 불어로 hommes d’affaires)이 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과 상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상업에서 탄생하였다. 본 연구는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기원을 탐색하는 연구이기도 하 다.

대상인이 근대 세계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상인과 상업에 관한 사회적 종교적 가치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로 상거래를 천시했던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 또한 상인과 상업을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비난했다. 이자 대부를 하는 상인은 영원한 구원을 받 을 수 없는 비참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근대 세계에서 대상인들은 스스 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초래했다. 서유럽의 대상인과 자본가들은 수많은 지역에 서 제국주의적 침탈의 첨병 역할을 했으며, 현대의 금융 자본과 다국적 기업들 은 제3세계의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막대한 부당 이익을 거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까지도 상인과 상업을 둘러싼 부정적 인식은 완전히 사라 지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대상인들이 근대 세계 형성을 주 도했던 원동력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에 대한 객관적 인 분석과 평가는 절실하다.

상업과 상인은 인간 존재 그 자체이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살기 시작하 면서 상품 교환과 이를 매개하는 상인은 줄곧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상인에 관 한 연구는 경제적 동물인 호모 에코노미쿠스 자체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상 거래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부를 가져다주었고, 타 지역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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켰으며, 때론 평화 증진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더 높아지는 무역 장벽과 더욱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 속에서 과거 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대상 인들의 경험과 시행착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넘쳐 난다. 고전적인 자본주의 경제학에 서부터 사회경제학을 거쳐 케인즈의 자본주의와 20세기 후반 신자본주의에 이 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와 변화를 다룬 다양한 연구서와 대중을 상대로 한 책들이 나와 있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를 견인했고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대상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 한 형편이다. 본 연구는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12가지 사 례를 통해 세계의 거상들의 활약상을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바로 잡고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총체적인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한 국, 동양 그리고 서양의 역사에서 각각 4개씩의 사례를 선정하였다. ①고려 상 인들, ②고려에서 활동한 외국 상인들, ③조선의 개성상인, ④조선시대 서울의 시전상인, ⑤16세기 해양에서 활동하며 중국과 일본을 왕래했던 거상 왕직, ⑥ 명청시대 대운하 도시에서 활동했던 휘주 상인, ⑦洋行 : 동아시아의 歐僑 상인 들, ⑧ 근현대 중국의 광동상인, ⑨ 중세 이탈리아 상인, ⑩인도양의 이슬람 상 인, ⑪ 잉글랜드 동인도회사와 아시아 무역, ⑫ 18세기 런던 대서양 상인의 세 계.

대상인들에 대한 연구는 지난 5백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무엇보다도 중요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근대 세계를 견인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를 지배하 는 또 다른 형태의 지배계급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상인과 그들이 가진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돈이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 고 명령하게 된 것이다(Nummus vincit, nummus regnat, nummus imperat). 대상인 의 역사는 미천한 신분의 장사치가 세상의 주인으로 부상하는 성공 스토리이기 도 하다. 대부분의 전근대사회에서 상업은 천시 받는 직종이었다. 조선 사회에 서 사농공상이라는 유교적 지배 질서는 상인을 비천한 존재로 자리매김 했고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상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외면 받고 구원을 받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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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불쌍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성공 스토리는 그 자체가 역사 적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역사는 근대 사회의 모습과 특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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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 목표

본 공동 연구의 일차 목적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던 대 상인들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밝혀내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다룰 시기는 11세 기부터 20세기까지이며, 대상 지역은 고려와 몽골 제국, 조선과 동아시아, 명 청 시대의 중국과 동아시아 세계, 중세 지중해 세계와 인도양, 대항해 시대 대서양 과 동인도 등 이다. 12개의 집단 또는 개별 상인들의 다양한 활동은 천 년 간의 세계 상업사와 자본주의 역사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 다룰 세계의 대상인들은 단순히 상품만을 판매하는 좁은 의미의 상인은 아니다. 이들은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에 발맞춰 끊임없이 모습을 변화 시켰던 국제적인 규모의 거상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자본주의 초기에는 상인이자 은행가였으며 산업 혁명기에는 산업 생산에 투자한 공장주 즉 산업자 본가였고 오늘날에는 세계 시장에서 독점적인 힘을 행사하는 다국적 기업이기 도 하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에서 가장 많은 이윤을 축적하는 부문은 생산이 아니라 금융이다. 그래서 현재 세계의 대상인들은 금융 자본가로 변신 했다. 500년 동안 대상인들은 가장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부분으로 스며 들어갔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세 말부터 현대까지 세계의 대상인들이 이룩했던 여러 활동을 연구하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형 성과 발전을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대상인에 대한 연구는 그들이 취급했던 상품에 대한 역사이기도 하다. 본 공 동 연구는 상품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탈리아 상인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핵심 배경이자 유럽인 들로 하여금 미지의 아시아 대륙을 찾아 나서게 만든 것은 바로 향신료였다. 그 래서 다수의 역사가들은 향신료가 근대를 만든 상품이라고 이야기 한다. 산업 혁명기 노동자들에게 달콤함을 선사하고 고된 노동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게 만들었던 설탕은 근대 세계의 불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품이다. 면화와 아편 무역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근대 동아시아를 둘러싼 갈등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 을 것이다. 조선의 인삼을 차지하기 위한 동아시아 세계의 경쟁 또한 치열했다.

역사 속에 상품과 상품 소비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욕구만을 채우는 단순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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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만은 아니었다. 인류가 특정 상품을 탐하고 소비하는 것은 그 사회의 가치관, 문화, 전통, 심리적인 특징 등 다양한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본 공동 연구는 상품의 문화사이기도 하다.

또 다른 목적은 공동 연구를 통해 상업사와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총체적이 고 균형 있는 이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의 역사 연구는 한국사, 동양사 그리고 서양사라는 세 개의 영역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타 영역에 대 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한 편이다. 이러한 구분과 경계 설정으로 역사를 총체적 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고려 상인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몽골이 건설 한 세계 제국 덕분에 만들어진 유럽과 아시아의 직접적인 교류라는 시대적 구 조(아부-루고드는 이를 13세기 세계 체제라 부른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항해 시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동인도 회사가 인도 를 포함한 아시아로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었던 사실을 설명하려면 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19세기 동 아시아의 역사는 세계사이기 때문에 한국사, 동양사 그리고 서양사 간의 협동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본 공동 연구는 대상인들의 활약상을 과장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상인들의 성공 요인을 그들의 창의성과 천재성에서 찾으려고 하는 기존 연구는 그들에 대한 신화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던 것은 사 실이지만 이런 모든 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천부적인 자질이나 독창성에 기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본 연구에서는 대상인들의 성공에는 구조적 인 요인들이 크게 작용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개별 이탈리아 상인의 능력과 창의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구조적 요인들 예컨대 지리적 이 점, 거시적 차원의 국제 정세 변화, 유럽 봉건왕조의 변화, 선진 문명과의 교류 와 접촉 등이 이탈리아 상인의 성공에 기여했음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이러한 구조 분석의 일환으로 대상인과 정치권력과의 유착이 그들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조선의 물류를 장악하고 있었던 시 전 상인들은 조선 왕조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상인 집단이었다. 동인도 회사 의 성공은 영국 왕실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이었다. 세속의 정치권력과의 긴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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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관계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치권 력과의 밀월은 대상인들에게 성공의 발판이자 몰락을 재촉한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마지막 그렇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목표는 대상인들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 로 분석함으로써 좀 더 평등하고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인들의 역사는 상품, 상업 조직, 회계, 자본의 조달, 수송 등과 같은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들의 활동을 제약했거나 아니면 옹호했 던 사상과 관념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상업과 상인을 천시하고 부정시하는 종 교적 윤리적 관념에 맞선 그들의 긴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 을 구속했던 종교적 윤리적 비난과 사회적 제제를 제거했고 이제는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이제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구를 억제할 수 있는 장치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종교와 윤 리의 규제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지배 계급의 논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큰 문제 점 중의 하나인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했다. 어떤 규제도 받지 않는 자본의 끊임 없는 탐욕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더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capitalism)가 형성 발전하면서 버렸던 윤리와 도덕을 다시 회 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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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 진행 과정

본 공동 연구는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는 현재까지 계획했던 일정에 따라 차 질 없이 진행되었다. 본 공동 연구의 1차 작업은 주제에 적합한 연구진을 모으 는 일이었다. 1년이라는 짧은 연구 기간에 공동 저서를 만드는 작업은 매우 어 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기존에 대상인을 다룬 논문 이나 전문연구서를 출간한 경험이 있는 저자들을 섭외했다. 다행히도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전공자 중에서 이에 적합한 연구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본 공동 연구에서 계획했던 추진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크게 두 가지 차원에 서 본 공동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즉 개별 연구와 공동 연구를 병행하는 것 이다. 각자 원고를 마무리하고 이를 수합해서 묶어서 출판하는 방식은 지양하 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개별 연구자들은 공통의 문제의식과 시각을 공유하면 서 개별 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2016년 1학기에는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초 고를 작성할 것이다.

둘째 상호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자리를 가질 예정이다. 최종 결과물을 도출 하기 위해 총 5차례의 세미나와 1번의 워크숍을 진행할 예정이다. 정기적인 발 표 모임에서 중간 결과물을 상호 교차 검토하면서 원고를 수정하려고 한다.

2016년 여름 방학 기간에는 1박 2일 워크숍을 가질 예정이다. 1학기 연구를 진 행하면서 겪게 될 시행착오를 공유하고 세미나에서 미비했던 것들을 보완할 것 이다. 이러한 공동 작업을 통해서 상호 연관성이 떨어지는 12개의 개별 사례 연 구가 아니라 상호 내용을 보완하고 대상인들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종합적인 연구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본 공동 연구팀은 처음에 계획했던 일정을 충실히 수행했다. 실제로 공동 연 구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 수차례의 모임을 통해 공통적으로 다룰 내용들과 공동 연구의 취지 등에 관해 심도 있는 의견을 공유했다. 그래서 공동 연구에서 는 개별 집단이 주로 취급했던 대표적인 상품, 상업 조직, 자금의 조달과 운영, 상업 활동을 규제하던 이데올로기, 그들이 활동했던 시대에 대한 개략적인 소 개 등의 내용을 필수 항목으로 다루기로 합의했다.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연구 성과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여러 차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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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에서 미비했던 점들을 보충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6년 11월 18일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관 111호에서 “세계의 대상인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을 토론자로 섭외해 깊이 있는 학문적 교류 를 진행했다. 토론자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원고를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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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구 내용

4.1. 사례연구 (1): 한국중세 상거래의 주역, 고려시대의 상인

이 강 한

고려 때도 상인들이 활동했는가?

고려시대의 상업에 대한 연구가 그리 많지는 않으나 그것이 활발했음은 분명 하다. 국내에 조성된 상권 내부에서 매매ㆍ유통이 활발했을 뿐 아니라 외부시 장과의 거래도 꾸준했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시장(수도)과 다양한 상인, 그리고 제품과 화폐의 꾸준한 매매가 고려시대 내내 확인된다. 중앙 장시는 거대했고 (매 시기 주기적으로 확장됨) 상인들은 상황에 따라 분화돼 있었으며(이동상인 들과 공인들), 고위층과 하위민들을 위한 별도의 통화(은병과 포필)가 전국적으 로 통용됐다.

물론 고려의 그러한 ‘유통 질서’가 언제나 정상적인 모습만 보였다고는 할 순 없다. 상인들의 활동에 일종의 투자자로 동참하던 정상적 공권력이 존재했던 한편으로, 상인들이 거둔 이윤을 흡취하는 데 골몰했던 폭압적 권위자들도 적 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한 주체가 두 모습을 모두 보인 경우도 있 어 주목되는데 국왕, 정부, 종실, 관료들은 사실 모두 그랬다. 이들은 자신들의 수중에 있던 [가치가 하락한] 은병을 처분하고자 백성들의 물품을 빼앗았으며 (抑賣), 심지어 외국에 내다 팔 물건들을 확보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싼 가격에 그것을 백성들로부터 빼앗아오기도 하였다(抑買).

아울러 불교사찰들 역시 그와 매우 달랐다고 하기 어렵다. 물론 사원들은 어 디까지나 종교 공간에 해당했던 만큼 앞서 언급한 행위를 보였더라도 그 수위 가 권세가들과는 달랐으며, 생산활동을 겸한 존재였다는 점에서 사회경제에의 기여도 남달랐음이 확인된다. 민간과의 관계 또한 ‘거래’보다는 ‘신앙’을 매개 로 한 것이어서 일반 경제주체와 달리보아야 할 필요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상황과 경우에 따라 국내상인들을 대하는 불교사원들의 입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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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이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은 경우도 분명 존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국내상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안타깝게도 고려시대의 기록에 상인들이 그리 자주 등장하지 않는 바, 그 생애들의 제면모 를 찾아내 재구성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상인들의 동태가 시장질서를 해치거나 국왕의 정책에 반하는 것일 경우 징벌 대상으로는 등장해도, 그 사람의 영업행 위나 개인적 일생이 관찬사료에 담길 이유는 적어도 당시인들의 관점에서는 거 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정부나 관료들과 결탁한 상인들이 있 어 특권을 토대로 영리를 도모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지만, 그것이 당대 상인들 이 보였던 모습의 전부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라 할 것이다. 선량한 상인들의 경 우 그 행적이 사료에 남아 전하기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의 실명이 고려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런 사례들은 고려 중기를 넘어 후기에 특히 더욱 자주 발견된다. 따라서 고려시 대 상인들의 역사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들에 우선적으로 주목해 볼 필요가 있 다. 그들의 삶에 대한 자료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경우에 따라 추 론해 낼 수 있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충렬왕대의 경제관료 주영랑

충렬왕대 주영랑의 경우, 예빈경을 역임했던 인물로서 1263년 외교사절로 등 장한다. 상인보다는 관료로 분류해야 할 인물임은 확실하지만, 여기서 그를 다 뤄야 할 이유 또한 작지 않다.

1263년 4월 그는 몽골에 보내는 진상품을 들고 중국에 가게 된다. 수달가죽 500장, 비단 100필, 흰모시 300필, 종이 1천장 등 그가 가져갔던 공물의 양은 실 로 막대했다. 진상품의 규모가 이렇게 커질 경우, 진상사절의 방문길에 동행해 야 했을 운송인력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아울러 이런 진상품은 기본적으로 고 려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징발한 것이지만 그 징발과정 자체에는 그런 물품(상 품)들을 취급하는 여러 상인들도 개입했을 것인데, 그런 물건들을 민간에서 확 보해 조정에 전달하는 데 공헌했던 그들 역시 그런 노력을 이윤으로 보상받고 자 사행 자체에 동참하는 것 또한 모색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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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으로의 대몽 진상품 운송 길에는 외교사절들 뿐 아니라 여러 유통업자 및 운 수업자들이 동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사행무역’의 전형 적인 모습이라 하겠는데, 외교사절단의 중국방문길에 일군의 상인들이 동행해 중국에 들어가 무역을 벌였으며, 외교사절들 본인들의 중국내 사적 교역에 조 언과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영량의 경우 또한 예외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사신으로 갔다 가 돌아온 그 해 말, ‘처벌’을 받았음에서 그를 엿볼 수 있다. 그는 ‘17명으로부 터 뇌물을 받은 후 그들을 사절단에 포함시켰고, 그들이 중국에 가 무역행위를 하는 것 또한 방치했다’는 혐의로 치죄됐다. 주영량에게 뇌물을 먹인 것이 들통 나 은병 170구와 비단원사 700근을 몰수당한 17명이 관료인지 상인인지는 분명 치 않지만, 신분은 관료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중국에 들어가 조정이 승인하지 않은 무역을 벌였음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그들을 상인의 부류에 속했던 이들 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한편 주영량 본인의 경우, 직접 무역을 단행했 는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고, 그가 개인적으로 추징당한 은 9근 역시 그의 무역자금이 아니라 ‘17명’으로부터 받은 뇌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 를 17명과 동일하게 논의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도 있겠으나, 비록 그가 직접 개인 무역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가 사행무역의 공간을 만들어준 것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고려상인들의 대원(對元) 무역이 1260년 대 초, 즉 몽골침공 종료 직후 ‘개경 환도(還都)’ 이전부터 이미 재개된 상황에 서, 관료와 상인들의 공모 또한 관찰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의 경험이 아래 세대로 이어져, 원제국에서 무역하는 관료형 상인, 원제 국과의 ‘관(官) 차원’ 교역에 주로 투입되는 상인형 관료들의 증가로 이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많은 고려관료들이 외교임무 수행차 원으로 가게 되면서, 중 국내의 사정에 대해 일정 수위 이상의 이해를 갖게 된 외국방문 기경험자, 해외 활동 유경험자들이 육성되고,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의 후손들이 또한 다른 이 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주 고려와 원제국 사이를 왕래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 다.

그와 관련하여, 1290년대 중반 충렬왕이 원제국에 파견했던 관영무역선 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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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관료였던 ‘주시랑’의 존재가 주목된다. 이 배의 출항 사실은 고려측 기록에 는 남아 있지 않으며, 흥미롭게도 1295년을 전후하여 원 닝보(慶元, 四明) 항의 지방관을 역임한 것으로 보이는 사요(史燿, 강절행성 우승, 복건행성 평장정사 등 역임)의 묘지명에서 발견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닝보항에서는 애초 고려 관 영선에 ‘3/10세’를 매기려다가, 고려측의 항의로 인해 ‘원과 고려의 관계를 감 안,’ ‘1/30세’만 매겼던 것으로 되어 있다. <동방견문록> 등에 몽골의 1/3 관세가 언급되기도 했던 탓에, 그간 많은 연구자들이 이 기록을 두고는 원이 고려관영 선을 ‘특별히 봐 준’ 것이었으며, 어떤 이는 심지어 원 항구의 지방관이 고려선 박을 [해외 선박이 아닌] ‘원제국의 선박’으로, 그리고 고려선박에 실린 화물은 원제국 시장권내의 물품으로 간주한 후, 관세가 아닌 거래세를 부과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10세는 남송시절 이래 입항 외국선박들에 부과돼 온 불법 2차세와 동일하며, 1/30세는 그러한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원제국정부 가 1293년 시박추분잡금과 함께 반포한 공식 2차세인 ‘박세전’ 세율임이 최근 의 연구에서 논증된 바 있다. 즉 이 기록에 묘사된 고려선박과 원 항구 간의 ‘다 툼’은 [1차 관세(1/10,1/15)가 이미 부과되고 납부된 후] ‘2차 관세’를 부과하는 단계에서 벌어진 것이었고, 원제국정부의 인하결정은 고려를 봐 준 것이 아니 라 그 직전 공식 반포됐던 ‘새로운 2차세율’을 부과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 며, 고려선박은 어디까지나 외래선박으로서 원제국 항구를 상대했던 것이라 평 가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시랑이 관료의 신분으로, 향후 중국에 입항하는 여러 선박들에게 적용될 세율의 전례, 선례가 될지도 모를 관세 문제 관련 교섭 을 충렬왕을 대신해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상인들 못지않은 감각과 지식을 가 진 이가 아니고서는 원의 관세당국을 상대로 이런 결론을 이끌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이 일화는 당시 관료와 상인 간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었을 가능성 을 시사하고 있다. 아울러 원 항구들 인근의 결코 작지 않은 시장이었던 고려측 으로부터 출항해 오는 무역선들에게 부과될 2차세가 공식화된 결과, 다른 지역 에서 원으로 오던 외국 상선들 역시 그 혜택을 보게 됐을 것이므로, 인근해역의 무역량 증대에 고려관료의 행정교섭이 기여한 셈이 되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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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관료들 또한 광의의 상인으로 규정, 분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충숙왕대의 상인: 이노개와 손기

고려국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던 충렬왕(忠烈王, 1275-1307)의 손자이자, 고려왕으로서는 역시 처음으로 고려-원 혼혈태생이었 던 충선왕(忠宣王, 1298, 1308-1313)의 아들이었던 충숙왕(忠肅王, 1313-1330, 1332-1339) 재위기간의 일이다. 그가 원제국정부의 압박을 받아 아들 충혜왕(忠 惠王, 1330-1331, 1340-1343)에게 왕위를 내어주기 2년 전인 1328년 8월, 그는

‘상인의 아들’ 이노개(李奴介)라는 인물을 이른바 ‘추밀’, 즉 고려전기 중추원의 후신이자 첨의부(고려 전중기의 중서문하성)와 함께 ‘양부’로 군림해 왔던 추밀 원의 일곱 재상 중 마지막 자리인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하였다.

이 이노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야말로 전무하다. 그가 상인의 아들로 전하고 있긴 하나 그 스스로가 상인이었는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다만 천인이 아니면 과거응시가 가능했던 고려시대의 관행에도 불구하고, 상인의 아들이 학 문연구나 과거응시에 도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임을 감안하면, 상인의 아들 이노 개 역시 아버지를 도와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상인이었을까? 당시 고려에는 여러 민간상인들이 활동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에는 이른바 이동상인과 정주상인의 두 종류가 있었 을 것이다. 전자가 여러 지역을 오가며 영업했던 존재라면, 후자는 한 지역에서 좌판을 운영하며 고정 소비자들을 상대하던 존재라고 할 만하다. 고려시대의 경우 지방시장의 활성화 정도가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낮았던 것으로 간주되나 (‘장시’라는 것 자체가 16세기 이후 정립된 것으로 파악됨), 이동상인의 도래를 원하는 소비자들은 있었을 것인 만큼, 이노개는 이러한 이동상인, 순회상인이 었을 수 있다. 여러 지역의 행정중심지(‘치소’)에 설치된 소규모 시전(‘치소시’) 사이를 오가는 행상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노 개가 어느 한 지역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정착상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충숙왕에게 섭외되었던 점을 보더라도 그가 개경의 ‘경시’에서 활동하던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강하게 상정된다. 당시 개경과 서경 등 고려의 이른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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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는 중앙 시전이 조성돼 고려초부터 활발하게 운영됐고, 그들은 양경의 민 도 상대했지만 주로 정부측 수요에 조응해야 할 임무를 맡는 바가 많아 그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적지 않은 권위 또한 행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정이 필요로 하던 여러 물건들이 시장에 모두 구비돼 있곤 했기 때문에, 조정 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그 침탈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노 개도 정부와 개경시전의 그러한 거래 와중에 국왕의 눈에 띈 것일 수 있다.

한편 제3의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오늘날의 2차 유통업자로 분류될 만한 또 다른 종류의 상인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용어로는 흔히 ‘공인 (貢人)’이라 한다. 민간에서 정부에 바쳐야 할 공물(貢物)을 민간인들이 직접 제 작, 조달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그런 물건의 원재료 확보처를 알거나 그 런 물품의 생산자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정부와 민간인을 연결해 주곤 했던 것 이다. 흔히 고려 사회경제의 분화상이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낮았을 것으로 짐 작해 고려시대에도 전문 공물대납업자(공물대납업에 종사하는 2차 상인)이 존 재했을 가능성을 낮게 보기도 하지만, 공물대납 자체는 이미 고려정부가 11세 기 후반 문종대 이전 스스로의 필요로 인해 허용했던 엄연한 행정절차였으며, 고려중기와 후기에도 대납업자들의 폐단이 끊이지 않았음을 <고려사>는 잘 보 여준다. 이들이야말로 민간과 정부를 연결하던 중간자들이었다고 할 것인데, 이노개도 그런 부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아울러 후술하겠지만 충숙왕의 상인 등용은 그의 대외교역정책과 무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노개는 외국에 수출할 물품을 민간에서 확보해 정부와 왕실에 연결시켜 주는 납품업자 였을 수도 있다.

충숙왕이 그를 밀직부사라는 고위직에 임명한 이유도 그와 무관치 않았던 것 으로 보인다. 이른바 ‘7추(七樞)’로 일컬어지는 추밀원(樞密院=전기의 중추원 [中樞院])의 일곱 재상[추밀] 자리는 아무나 등용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소위 ‘5재(五宰,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전기의 첨의부[僉議府] 재상들)’와 함 께 정부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요직이었던 동시에, 국왕을 곁에서 보위 하는 핵심 측근직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5재 7추’는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여러 관직들을 두루 역임한 엘리트들만 오르곤 하던 자리였다. 그리고 밀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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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바로 ‘7추’의 시작점으로서, 일단 이 자리에 오르면 7추의 나머지 여섯 자 리는 물론 ‘5재’로도 승급할 수 있는, 즉 최고 권력직으로 도약할 기반을 당사자 에게 부여하는 관문이었다. 이노개는 바로 그 관직을 수여받은 것이었다.

상인 이노개가 과연 그러한 자리에 올라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겠는지, 그리 고 그를 그 자리에 등용한 충숙왕이 과연 그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충숙왕이 ‘상인 집 자식’ 이노개의 경험과 견식을 어떤 형태로든 활용하 고자 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충숙왕이 구사한 재정정 책의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다.

충숙왕은 재위 전반기만 하더라도 상인들의 영업 그 자체에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승려들의 상행위를 금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조치는 일견 ‘종교인의 영리행위’를 금지한 조치로 보이지만, 당시 사원경제가 민간경 제의 주축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조치는 ‘영리행위’ 그 자체를 겨냥한 성격이 짙 다. 아울러 충숙왕은 그 연장선상에서 민간에 대한 정부의 ‘가혹한 과세’에도 비판적이었다. 재정세입 증대책에 골몰하던 부왕 충선왕의 국정은 그가 특히 혐오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경제정의’ 부분의 개혁에 적극 나섰다.

재위전반기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이라는 기구를 내세워 토지과 백성의 소유권을 변정(辯定)해 주는 ‘소유권 정의 구축’, ‘분배 정의 실현’에 나섰다. 그 결과 충선왕의 무리한 세입증대책이 낳았던 폐해 중 상당부분이 시정, 개선되 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정부의 징세액이 현저히 낮아졌고, 그에 따라 세입의 증가 폭이 현저히 낮아졌다. 재정도 결국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충선왕과 충숙왕에 대한 사관의 대조적 평가가 당시 고려정부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충선왕대는 ‘국가의 정사와 창고 출납을 모두 측근에게 맡긴 결과 비록 과오는 있었지만 창고는 차고 넘쳤던’ 시기였지만, 충선왕이 1320년 12월 티베트로 유 배를 떠난 후에는 ‘관료와 측근들이 충선왕대의 제도를 고치고 충선왕대의 구 신(舊臣)들을 내쫓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제도의 변경 및 충선왕 측근들의 축 출이 재정의 고갈로 이어졌음을 암시하는 평가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은 충숙왕에게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세자 시절에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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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정에 관심을 뒀던 아버지 충선왕은 복위 무렵인 14세기초 전혀 다른 모습 을 보였다(그는 고려후기 국왕들 중 유일하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지 않았던 왕이기도 하다). 민간으로부터 온갖 세금을 뜯어내 괴롭히고, 갑인주안(甲寅朱 案)이라는 새로운 세안(稅案)을 만들면서도 토지와 호구의 변동사항만을 반영 했을 뿐 침탈의 결과로 이뤄진 부분들은 도외시했던 것이다. 아들 충숙왕으로 서는 그를 용납할 수 없었고 따라서 정반대의 정책을 취했던 것인데, 그것이 재 정의 악화라는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던 셈이다. 정책방향을 전환하거나, 파장 이 덜한 증세조치를 취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그는 원에 억류를 당하였고(1321-1325), 정치적, 경 제적 곤경에 처하게 된다. 당장 그의 중국체류를 지원하기 위해 다량의 물자들 이 원제국으로 공수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여러 상인들이 고려와 원제 국을 오가는 물자운송작업에 동원되었다. 손기(孫起) 같은 이가 대표적인 사례 이다. 그는 상인 출신의 인물로서, 원제국에서 곤경에 처한 충숙왕을 변호했을 뿐만 아니라, 1325년 충숙왕의 귀국을 성사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던 인물이다.

손기는 금은과 저포를 원제국내 충숙왕측에 전달한 인물로서 사료에는 1321 년 8월 처음 등장하며, 이후 충숙왕의 총신[倖臣]이 되게 된다. 등용 이후의 관 력이 확인되지 않는 이노개와는 달리, 무직(武職)으로는 대호군, 문반 관직으로 는 총부(摠部, 고려전기의 병부[兵部])의 전서(典書, 고려전기의 상서[尙書]) 및 지밀직사사(일곱 추밀의 중간 단계)를 역임했음이 확인되며, 원에서 충숙왕을 옹위한 공을 인정받아 1327년 11월 1등공신으로 책봉됐을 뿐 아니라, 평리(評 理) 및 찬성사(贊成事) 등 고려 전,중기의 참지정사[叅知政事] 및 평장사[平章 事]에까지 오르는 등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던 인물로 확인된다. 그는 윤석, 이의 풍 등과 함께 ‘사욕’을 추구한다고 비판받았지만 그의 직종이 상인이었기 때문 으로 보이며, ‘고려백성들에게 물품을 누차 징발한다’는 심왕(瀋王) 왕고(王暠) 의 비판을 들었던 것도 그가 물자운송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손기는 곤경에 처한 충숙왕에게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으 며, 그 결과 정치적으로 성장했던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손기를 비롯한 여러 상인들의 그러한 활동과 후원이야말로 충숙왕으로 하여금 상인들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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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잠재력에 새삼 주목하게 했을 수 있다. 그의 억류가 비록 견디기 어려운 경 험이긴 했지만, 역설적으로는 상인들의 영리, 영업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거두 고 향후 그들을 달리 활용할 방안을 모색케 하는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는 얘기 이다. 손기의 경우 비록 이후에는 충숙왕을 배신하고 그 아들인 충혜왕의 ‘폐행 (嬖倖, 측근)’으로 변신했다는 이유로 1332년 숙청되지만, 후술할 충혜왕의 ‘친 상업적, 친교역적’ 면모까지 감안하면, 그러한 변신 자체가 그가 상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 충실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바가 있으며, 당시 이러한 상인들 에 둘러싸인 충숙왕 역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대도(大都)에 머무르면서 원제국정부의 교역정책, 재정노선을 가 까이서 지켜보게 된 것도 그로 하여금 국정노선을 전환케 한 중요한 변수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1320년대후반∼1330년대전반의 원황제들, 예컨대 태정제(泰 定帝, 1324-1327)와 문종(文宗, 1328-1333)은 해외 상인들과의 거래를 확대했으 며, 그 결과 원제국정부의 수입이 현저하게 증가했다. 그가 이때 받은 영향이 워낙 컸던 탓에, 그는 돌아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재정정책을 구사하게 된다.

1325년 ‘서정(庶政)을 새롭게 하고자 했다’거나, ‘다시 정사를 맡으면서(1325) 고친 것이(更改) 많았다’는 평가가 그를 잘 보여준다. 이전의 경우 각염제(소금 전매제)를 비롯한 선왕 충선왕의 증세위주 정책기조를 강하게 비판하던 것을 자제하고, ‘증세’ 이외의 방식으로 재정 수입을 늘리고자 노력하게 된 것이며, 조정의 인적 구성에서 ‘상인 출신 인물’들이 다수 발견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충숙왕의 상인 등용이 재정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해법의 한 일 환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재위 전반기 선왕노선 부정의 결과 궁 핍해진 재정을 정상화하고자 상인을 등용하는 등의 여러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혜왕의 장인과 애첩: 은천옹주와 그 아버지 임신

그런데 상인들과 가까웠던 것은 충숙왕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 충혜왕도 그에 못지않았으며, 그는 심지어 사기(沙器) 상인의 딸을 빈(嬪)으로 맞기도 하 였다. 게다가 그는 “삼현신궁(三峴新宮)”이라는 궁궐을 만들어 대규모 방직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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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활용하면서, 이 빈에게 신궁 시설의 관리를 맡기기도 하였다. “신궁의 창고 와 방(庫屋) 100간에 곡식과 비단을 채우고, 낭무(廊廡)에는 채녀(綵女, 방직공) 역할을 할 비자(婢子)들을 두었는데”, 이 시설을 관리한 은천옹주(銀川翁主)가 바로 앞서 언급한 충혜왕의 측근이자 사기 상인이었던 임신(林信)이라는 인물 의 딸이다.

은천이 충혜왕의 옹주가 되면서 장군으로 승진했다는 것 외에는 전하는 바가 거의 없지만, 그가 충혜왕과 기씨(奇氏) 일가의 분쟁상황에서 존재감을 드러냈 음은 주목된다. 기황후는 이미 1340년대부터 충혜왕과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그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1320년대후반부터 재개된 원제국측의 고려물 자 징발에서 이른바 ‘직문저포(織紋苧布)’가 중점적으로 징탈됐고, 그런 징탈이 공민왕대초까지 계속됐지만, 유독 충혜왕의 재위기간이었던 1340-1343년 사이 에는 원측의 고려 직문저포 징발이 관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혜왕이 무상 제공을 거부했을 가능성이 느껴지고, 이어진 충혜왕의 퇴위가 고려와 원 양측 무역세력간 갈등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살핀 최근 연구에서는 기씨의 도발 이 끝내 성공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듯 치열하게 전개된 충혜왕과 기씨가문 간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임신이 기황후의 족제 기륜과 충돌했을 당시 충혜왕 이 임신의 편을 드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 주목된다. 기황후의 도발에 대한 충혜 왕의 대응을 임신이 대행했을 가능성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임신이 당시 충혜 왕의 교역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 각된다.

아울러 이 임신과 그 딸이 ‘사기를 파는 것’으로 업을 삼았음이 주목된다. 사 기란 기본적으로 옹기나 도기 등 여러 하급 그릇들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되지 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등의 고급물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임신 부녀가 어떤 경우에 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취급했던 물자의 수준은 다양했을 수 있 다. 특히 그가 충혜왕의 눈에 띄었음을 감안할 때, 이 두 사람이 다루었던 물자 의 품질이 보통 이상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충혜왕은 원제국내에서도 방탕한 것으로 소문이 났고, 고려에서도 야밤 중에 잦은 미행(微行)을 했던 것으로 악명 높았던 인물이다. 그가 밤에 저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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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 숨어들어 온갖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허름한 상인들과 어울리며 형편 없는 물건을 취급하던 임신 부녀와 연을 맺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가난한 시중 상인이지만 충혜왕과의 사랑은 재물과는 별개의 문제였을 수도 있 다. 그런 점에서 충혜왕과 은천옹주의 관계에서 일정 수위 이상의 경제적, 교역 적 함의를 찾아내려는 것은 무리한 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충혜왕이 아무리 이례적인 경우였다 하더라도, 일국의 국왕에게는 운 신의 제약이 적지 않았다. 시중 종사자들을 만나는 데에도 한계는 있었을 것이 라는 얘기이다. 상인들 역시 그 영업의 규모가 일정 수위를 넘을 때에나 정부 고위관계자들과 접촉할 개연성이 높았을 터다. 형편없는 물건을 취급하는 상인 들의 경우 권력자들과 엮이게 됐을 가능성이 그만큼 낮았을 것이라는 의미이 다.

그런 점들을 감안하면, 은천옹주에 대한 사료상의 언급(“사기를 팔아 벌어먹 고 사는”)은 다소 인색한 바가 있다고 느껴진다. 즉 은천과 그 부친 임신의 경 우, 당시의 고가품이자 일상품인 동시에 주요 대외수출품이기도 했던 도자기를 제작하거나 그 유통을 취급하는 상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그녀의 별명이

‘사기옹주[沙器翁主]’였던 것도 비록 ‘비칭[卑稱]’이긴 하나 그녀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그녀가 충혜왕의 옹주가 되기 전 먼저 종실 인사 단양대군 (丹陽大君)의 비[奴婢]였음이 주목된다. 물론 이 기사는 신분이 비루한 여인을 종실인사가 먼저 취했고 그 종실인사와 교류하던 충혜왕이 은천을 빼앗은 것임 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나, 반대로 당시 모두가 개입하고 싶어하던 자 기산업에 먼저 종실인사 단양대군이 주목하고, 다음으로 충혜왕이 주목하게 되 었음을 은천옹주의 자리 이동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아울러 그녀의 전문성과 조예는 자기(사기) 분야에 머무르지 않았을 수도 있 다. 그녀가 삼현 신궁에 배치된 채녀(綵女)들을 감독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당시 충혜왕대 대외교역정책의 핵심이었던 문저포(紋苧布) 제작을 진두지휘했을 가 능성을 시사한다. 중국인들이 기꺼워해 마지않았던 고려의 전통 토산물이 바로

‘고려자기와 저포’이기도 했다.

자기의 경우, 고려의 대표상품인 상감청자가 중기 이래 어떤 경로로 중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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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됐고, 고려후기의 청자들이 원제국 백자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 해 다양한 연구가 발표됐다. 최근의 경우, 청자에 비해 더 많이 들어온 ‘원 백 자’가 고려청자에 심대한 영향을 (기형,문양 양쪽에서) 미쳤지만 그로 인해 만 들어진 ‘새로운 청자’들은 대체로 고려에서 소비됐고, [고려가 ‘수출’한 것으로 짐작되는] 중국내 원대유적 출토 고려청자들의 경우, 전통 상감기법과 기형, 문 양을 보였음에 주목하였다. 상인들의 전략이 중국자기들과 차별성을 지닌 고려 전통자기들을 수출하는 쪽으로 짜였을 가능성을 제기해 본 것이다. 충혜왕의 경우 자기수출과 관련한 행적이 그리 분명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만약 그가 자기수출에도 관심이 있었다면 은천옹주도 그와 관련해 수행한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직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의 경우 저포와 비단에 ‘직염’ 방식으로 각종 무늬를 넣어 수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저포 정도가 특산물로 주목받았을 뿐 비 단은 중국상품과 경합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경우에 따라 다양한 상 황이 빚어졌을 가능성이 눈에 띈다. 특히 13-14세기에 해당하는 원대 중국 직물 시장의 경우, 이른바 ‘잠재(蠶災)’가 빈발함에 따라 원사(原絲) 수급에 차질이 생겨 직물(織造) 정책이 부침(浮沈)하는 한편으로, 원제국정부의 대외교역정책 변동으로 말미암아 13세기말 동남아시아 ‘서금(西錦)’ 수입의 감소 및 14세기전 반 ‘서역(西域)’으로의 고급비단 수출감소 등이 원대 직물시장의 내부상황을 뒤 흔들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한 변동기, 과도기적 상황들이 때때로 고려상 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실제로 이 시기 고려에 재위중이 었던 충선왕과 충혜왕이 각기 공격적인 저포가공품 생산에 박차를 가했음이 흥 미롭다. 특히 후자의 경우 은천옹주가 주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삼현신궁 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픽션 속 고려상인들

실존인물이 아닌 픽션 속 인물이긴 하지만, <노걸대>에 소개된 2명의 고려상 인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14세기 전,중반 고려인들의 대원교역 동참대열이 폭 발적으로 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문헌으로 꼽히는 <노걸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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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려상인들의 애환이 절절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노걸대>는 원제국으로 가던 고려상인들의 수가 너무 많아 그들의 활동을 보호하는 동시에, 정부의 무역이권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상인훈련용 어학교습서로 평가된다. 최초의 발간시기는 1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이후 고려말, 조선전기 여러 차례 재간행됐다. 해외로 나가는 상인들을 어학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해외교역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들’을 배경으로 한 여러 일화들을 수록했는데, 그 결과 가격, 상권, 노선 등 다양한 정보를 담게 된 다. 고려의 직물이 원제국 내에서는 어느 정도의 가격으로 흥정됐는지, 원제국 의 비단을 사기 위해서는 얼마 정도의 돈이 지출됐는지, 당시 고려상인들에게 원제국의 지폐였던 원보초(元寶鈔)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였는지 등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당시 해외로 나가던 고려상인들의 해외활동상을 재구성하는 데 이만한 자료는 현재 발견하기 어렵다.

이들의 경우 말에 인삼과 모시를 싣고 개경을 떠나 육로로 요동에 들어섰고, 거기서 중국상인을 만나 함께 북경으로 여행했다. 그들은 북경에서 갖고 간 고 려물건들을 판매한 후, 강남으로 이동하여 각종 비단, 귀중품, 악세사리들을 구 매한 후, 직고(톈진)로 이동해 중국배를 빌려 타고 고려로 돌아온다. 그들이 중 국 시장 내의 상황과 관련하여 외국인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거래과정에 서는 어떤 곤경에 직면했으며, 갖고 간 고려물자의 판매와 고려로 수입할 중국 물자의 구매과정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이익과 손해를 봤을지가 구체적으로 묘 사돼 있다. 당시 고려인들의 심리, 정서, 안목, 그리고 목적 의식 등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노걸대>는 또한 고려상인이 대원(對元) 무역에서 중요한 ‘무기’로 썼을 원 제국의 지폐, 즉 원보초(元寶鈔)의 활용상을 잘 보여준다. 고려상인들이 당시 구사했을 통화로는 고려의 은병, 포화(布貨), 그리고 외국통화였던 원보초가 흔 히 꼽히곤 한다. 그런데 이 중 원보초의 경우, ‘고려로 밀려들어와 기존의 은병 을 대체하는 등 고려의 통화질서를 해쳤던 존재’로 오해돼 왔다. 고려상인들의 통화운용상에 대한 후대인들의 그러한 곡해로 인해, 고려 경제사에서의 원보초 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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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보초는 원제국의 공식 지폐로서, 중국통화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에 해 당한다. 이전에는 교자,회자 정도만이 남송 일부지역에서 일시 유통됐을 따름 인 데 비해, 원제국 시기에 접어들면 중국전역을 대상으로 원보초가 1세기 간 유통되며, 심지어 다른 칸국에서도 유사지폐가 만들어졌다. 원제국정부는 평준 고 및 행용고의 운영을 통해 원보초의 신용을 보증할 지급준비물자(금은)를 넉 넉하게 확보하는 동시에, 헤진 지폐 또한 신속하게 환전(신초-혼초)해 줬다.

이런 원보초가 일본정벌 준비 당시 한반도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14세기전반 에는 국왕에게의 하사 및 사찰에의 시주 형태로 다량의 원보초가 고려 시장에 진입하였다. 그런데 일본정벌 준비 당시에는 농우구입 또는 선박건조 비용의 일부를 보전해 준다는 ‘생색내기’의 일환에서 원보초가 제한적으로만 유입됐 고, 14세기전반의 경우 비록 유입량은 13세기후반에 비해 늘었으나 그 가치 자 체는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여서 들어와 유입의 실가치 총량이 그 리 현저하지 못했다. 게다가 유입된 원보초의 대부분은 관료, 승려, 상인 등 원 제국과의 왕래가 잦았던 인물들에 의해 해외 유출되었던 바, 그것이 고려 경제 또는 유통질서, 통화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고 려로 들어온 다량의 원보초 중 ‘신권(新券)’에 해당하는 것들이 고려상인들의 무역자금으로 활용되곤 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노걸대>이기도 하 다. 고려정부가 <노걸대>를 간행하며 그 속에 ‘훼손된 원보초 사용’에 대한 경 고를 담았음에서 그를 확인할 수 있는데, 찢어진 돈 사용을 절대 금지하고 위조 지폐의 수령으로 인한 고려인들의 피해를 우려하는 내용이 65화 등에 등장한 다. 고려상인들 중 원으로 무역차 나갔다가 도장색깔이 옅어졌거나 파손된 지 폐를 사용하면서 곤경에 처한 사례들이 증가해 그를 미연에 방지해야 했기에,

<노걸대> 같은 어학 교습서에도 굳이 그 같은 상황을 다룬 일화를 집어넣은 것 이라 하겠으며, 당시 외국행 고려상인들이 맞닥뜨리고 있던 여러 도전들 중 한 대목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바가 있다.

주방의 자기 담당 요원들, 옹인

그간의 고려 상인연구에서는 충혜왕대에 등장하는 국왕 측근으로서의 ‘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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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小)’들이 주목했다. 이들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재물을 침탈하거나, 국왕을 만족시킬 미녀들을 찾아다니는 존재들로 등장한다. 충혜왕의 공격적 대외교역 정책을 고려하면 상인적 존재들이었다고 할 만하다. 다만 사료가 적어 구체적 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그에 비해 그 직종상 상업과 교역에 종사했을 법해 보이는 더 구체적인 존재 가 충혜왕의 부친 충숙왕대부터 주목된다. 이른바 ‘옹인(饔人)’들이 그들이다.

고려말 ‘사옹원(司饔院)’이라는 부서의 이름에서도 확인되듯이, 이들은 기본적 으로는 궁궐내 주방요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요리뿐 아니라 [마련된 음식 을 담을] 다양한 품질의 각종 용기를 시장에서 확보해 조달하거나 심지어 제작 해야 할 임무까지도 맡았을 가능성이 주목된다. ‘옹(饔)’을 담당하는 요원이자

‘옹(甕)기’도 수급해야 했던 존재였던 셈이라 하겠으며, 과거 기록에 등장하는 옹기가 도기(陶器), 자기(瓷器,磁器), 사기(沙器) 등을 통칭하는 개념이었을 가능 성까지 감안하면 이 옹인들을 당대의 자기 유통업자로 개념화할 필요성마저 대 두된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들 옹인들이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 인다는 점이다. 고려말 조준의 상소를 보면, ‘사옹’들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존재인 동시에, 지방에서 도자기를 엄청난 규모로 징발해 들이는 가해자로도 등장한다. 즉 사옹원에서 파견한 사옹, 또는 옹인들 이 막대한 양의 자기들을 취급하던 상당 수준 또는 위상을 보유한 경제주체들 이었음을 이 기사는 시사한다. 게다가 그러한 경제주체들이 상당히 높은 정치 적 위상 또는 지녔던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고려사에서 옹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320년대인데, 충숙왕비 원공 주의 사망을 둘러싼 고려-원제국 간 긴장 상황에서 그 존재가 최초로 확인된다.

1321년 원 중서성에서 충숙왕비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의 사망을 조사하기 위 해 고려에 파견한 사신이, 사건조사 과정에서 원 공주의 궁녀인 ‘호라적여자(胡 刺赤女子, 겁설직 중 하나로서의 ’호라적‘ 직임을 맡은 여인으로 추정)’ 및 “옹 인(饔人) 한만복(韓萬福)”을 구금 후 심문했고, 이 한만복은 공주의 사인(死因) 을 묻는 원제국 사신에게, 전해(1320) 8월 공주가 충숙왕과 덕비(德妃)의 연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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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慶宮) 내 밀회를 질투하자 충숙왕이 공주를 구타한 바 있었고 그 다음 달인 9월에도 충숙왕이 묘련사(妙蓮寺)에서 공주를 구타했음을 실토했다. 그가 심문 종료 후 원으로 잡혀 가자, 백원항(白元恒)과 박효수(朴孝修) 등 고려의 중신들 은 원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한만복이 무고(誣告)를 한다며 그의 진술을 반박했다. ‘일개 옹인’의 증언 때문에 고려의 중신들이 원제국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 협상에 적극 나섰던 것은 물론 위 사건이 당시 충숙왕을 겨냥해 진행되고 있던 심왕옹립운동 및 입성론(立省論)에 악용되는 것을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 지만, 원으로 끌려간 한만복이 충숙왕에게 불리한 또 다른 증언들을 추가로 내 놓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당시 ‘옹인’들이 고려 정부와 왕실의 내부에 상주하며 상당량의 고급 정보, 민 감한 정보에 노출돼 있었을 것임을 보여준다. 고려왕실 주방의 자기 기명 조달 책임자가 이렇듯 양국의 외교관계를 일거에 헝클어뜨릴 수도 있었던 것에서 당 시 옹인들의 권능을 엿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옹인은 이후 1340년대 충목왕대의 탄핵사건에서도 등장한다. 감찰장령 송천 봉(宋天逢)은 재상(평리) 전윤장(全允臧)이 왕의 총애를 믿고 전횡하면서 옹인 (饔人)과 작당하여[交結] 어선(御膳)을 몰래 도둑질한” 혐의를 제기하였다. 각종 권력을 쥐고 있던 전윤장이 단순히 국왕의 수랏상에 올라갈 물건을 훔치려 한 것이었다면, 굳이 일개 옹인과 연대할 이유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옹인과 의 협조 아래 ‘어떤 재화’를 빼돌렸다면, 그 재화는 최소한 음식이나 식자재보 다 더 고가(高價)의 물화였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얘기이다. 그 물화는 옹인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취급하던 자기류였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옹인 들이 자기류를 매개로 전윤장 같은 권력자와 제휴, 결탁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 체가 그들의 권력의 강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옹인들이 왕실 권력의 주변에 기생하며 권한과 재력을 휘두르던 상황이 고려말까지 이어졌음은 “이인임이 조 정의 충신ㆍ훈신ㆍ대신을 내치고는, 환관(宦官), 궁첩(宮妾), 내수(內竪) 및 옹부 (饔夫)들을 작록(爵祿)과 궤유(饋遺)로 회유해 국왕에게 좋은 소리만 들리게 했 다”는 언급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함께 열거된 부류들을 감안할 때 이 ‘옹 부’가 결코 단순 주방 담당자가 아니었으며, 여느 측근 간신들 마냥 상당규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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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축적하고 그를 토대로 권력도 휘둘렀던 존재들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이 시기 옹인들이 고려에 와 있던 원제국인들과도 결탁해 있었을 가 능성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당시 겁설(怯薛, 케식)직 중 하나였던 ‘파오치(波吾 赤)’의 경우, 1345년 5월 “정동행성 내 3소(三所: 좌우사, 이문소, 도진무사로 추 정)의 홀지(忽只=忽赤), 순군(巡軍), 그리고 ‘파오적(波吾赤, 파오치)’들이 서로 모여[投屬] 당을 이루고 횡행하므로 적발해 첩을 회수하고 본래의 역으로 귀환 시키라”는 건의에서 등장한다. 이런 지적이 나올 정도로 경제적으로 전횡을 하 고 있던 이 파오치들이 사실상 ‘옹인’이었음을, ‘파오치로 하여금 필요한 물건 을 강원도에서 구하게 했다’는 태종11년(1410) 윤12월의 기사와, 궐내 공역 담 당자들의 호칭을 고치면서 “한파오치(漢波吾赤)는 별사옹(別司饔)으로 개칭했 다”는 태종17년(1416) 5월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옹인들이 고려와 원을 오가며 자기교역에까지도 종사하고 있었을 존재들이었을 가능성을 암시 하는 극히 중요한 기사이며, 사기상인의 딸을 빈으로 맞았던 충혜왕이 공격적 대중국, 대서역 교역에 골몰하는 이였던 사실과 엮어 검토해야 할 부분이라 하 겠다.

한편 이 옹인들이 취급한 상품은 당연히 도자기였을 것이며, 이는 당시 고려 내수시장의 가장 보편적 상품이자 송과 원제국으로도 수출됐던 대표적 교역물 이었다. 자기 외에 활발히 생산, 소비된 물품으로는 모시와 인삼, 그리고 문방사 우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상품성을 갖춘 제품의 형태로 고려 안팎에서 거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인삼의 경우 아직 채취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문방사우 는 공예품의 영역에 속했던지라, 그 생산량에 엄연한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 각된다. 반면 모시의 경우, 비록 민간에서의 생산 동향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고 기타 수공업품과도 달라 ‘소(所)’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성과에서도 뾰족한 단서를 찾을 길이 없지만, 다행히도 국왕들의 생산 및 교역정책의 일부로 중시 되었던지라 몇몇 기록을 통해 그 동향이 남아 전하고 있음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바로 ‘인신 매매’의 문제이다. 이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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