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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軒 趙宇慤의 <대명복수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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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蒼軒 趙宇慤의 <대명복수가> 연구*

1)

김 수 현**

❙국문초록❙

본 논문은 趙宇慤이 지은 가사 <대명복수가>에 대한 연구로서, 조우각의 생애, 본 작품의 창작 배경을 밝히 고 한글본의 특징을 학계에 보고함을 목적으로 한다. 조우각은 영남의 문인으로 갈암 이현일을 사숙한 퇴계학 파의 문인이다. 李玄逸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가 중국에서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로 명나라의 부활을 소 망하며 「山東檄文」을 지었다. 조우각은 이 글을 접하고 200년이 지난 시대상황에서 <대명복수가>를 지어 마 치 병자호란 직후의 분개한 선비처럼 강개한 심정을 쏟아내었다. 이는 퇴계학파의 학풍과도 관계되는 것으로 서 주리론을 강화하며 의리를 숭상하는 전통이, 북벌이라는 소재로 조우각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본 연구는 그 동안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한글본 <대명복수가>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기존의 연구에서는 밝히지 못했던 작 가의식이 구현되는 양상을 파악하였다. 이를 위해 작가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자료들을 찾아 분석하 였고, 여러 이본과 비교하여 한글본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특히 필사자를 여성으로 추정하면서 한문 고사가 매 우 많은 본 작품을 필사하여 향유한 점을 미루어, 매우 광범위하게 향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필사한 표 기법을 연구한 결과 한문의 발음이 온전하게 기록되지 않은 점으로 봐서 구전되는 것을 적었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었다.

[주제어] 조우각, 대명복수가, 북벌, 가사, 이본, 한글본

❘목 차❘

Ⅰ. 머리말

Ⅱ. 趙宇慤의 생애와 사상

Ⅲ. <대명복수가>의 저작 동기

Ⅳ. 한글본 <대명복수가>의 특징

Ⅴ. 맺음말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과제번호)(NRF-2018S1A5B5A07072553)

**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강사 / anohi@hanmail.net

(2)

Ⅰ. 머리말

본 연구의 목적은

,

조선후기 주요 사상사를 이루었던 북벌과 중화주의에 대한 지식인의 의식을 추적하여

,

<

대명복수가

>

에 반영된 양상과 창작 동기를 밝히는 것이다

.

이를 위해 조우각의 학통과 사상을 중심으로 생 애를 고찰할 것이다

.

아울러 본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발굴된

한글본

<

대명복수가

>’

의 특징을 학계에 보고하 고자 한다

.

<

대명복수가

>

1824

(

순조

24)

에 蒼軒 趙宇慤

(1765~1839)

이 지은 가사 작품이다

.

내용은 오랑캐로 인 식되던 청나라를 쳐서 명나라를 위해 복수를 하겠다는 이상을 담고 있다

.

이 작품은 다양한 이본이 존재하는 데 󰡔東音󰡕 소재본

,

1) 安永 昌氏家 소장 󰡔歌辭集󰡕 소재본

,

2) 경주최씨 소장본

,

3) 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

,

4) 한 국가사문학관 소장본5) 등의 이본이 많이 알려져 있다

.

이와 같은 현황은 필사의 형식을 통해 넓은 지역으로 전파된 것에 기인한다

.

기존에 알려진

<

대명복수가

>

는 한문에 한글이나 구결로 토를 단 형식을 취하고 있으 나 본 연구에서 새롭게 소개하려고 하는

<

대명복수가

>

6)는 순전히 한글로 쓴 것이다

.

대체로 한문본과 한글 본

,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중간 단계로 한문본에 구결과 토를 단 형태의 선후를 적용해보았을 때

,

한글본이 시간적으로 더 늦은 시기의 작품일 가능이 높다

.

본 연구의 대상인 작품에는 여타의 이본과 변별되는 특징이 있다

.

그것은 바로 필사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

필사기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단서를 제공한다

.

이런 점에서 본 연구가

<

대명복수가

>

를 연구하는 데 이 전의 연구와 같이 단순히 작품을 개괄하고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깊이 있는 연구에 보탬이 되어줄 것으로 기 대한다

.

<

대명복수가

>

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

작품을 소개하고 해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

하지만 본 연구는

<

대명복수가

>

의 새로운 이본을 발굴하여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기존 연구에서 면밀히 고찰하지 않았던 작 자 조우각의 생애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

이를 바탕으로 조우각이 병자호란이 한참 지난

19

세기 무렵에 청나 라를 공격하여 명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북벌론을 소재로 하여 본 가사를 지은 이유

,

즉 저작동기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연구할 것이다

.

현시점에서 고전문학의 연구는 기존 연구자들의 연구를 답습하여 새로움을 찾는 탐색 활동이 부족한데

,

1)홍재휴, 「창헌 조우각의 대명복수가, 천군복위가 고」, 󰡔행정 이상헌선생 회갑기념논문집󰡕, 1968, 539~562; 김광순, 「대명 복수가 고」, 󰡔동양문화연구󰡕 3, 경북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1976, 45~69. 이 두 논문의 끝에 <대명복수가> 원문을 실어 놓고 있는데 󰡔東音󰡕 책자에 실려있다고 밝히고 있다.

2) 임기중, 󰡔한국역대가사문학집성󰡕(www.krpia.co.kr)

3)경주최씨가 소장 <대명복수가>는 한문에 구결로 토를 단 형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아카이브를 통해 볼 수 있다. 필사기는 따로 없다.

4) 경상북도 내방가사DB(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5) 한국가사문학관 DB(www.gasa.go.kr)

6)본 논문에서 대상으로 삼은 <대명복수가>는 노진환씨 소장본으로 우연히 얻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노진환 소장 본은 다른 이본들과 달리 한글로 작성되어 있어서 이하 본 논문에서 이 이본을 한글본 <대명복수가>’로 칭한다. 크기는 480×22㎝로 두루마리형으로 되어 있다.

(3)

본 연구는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함은 물론

,

기존 연구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깊이 있는 연구를 더해갈 것이다

.

이는 고전문학의 연구 발전의 긍정적인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

고전문학의 연구는 당시 사회적 여건과 작가의 내밀한 상황에 접근한다

.

그러나 이러한 연구 대상이 시간적으로 오래 거슬러 올 라가서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고

,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정황을 파악하기는 더욱 어렵다

.

그러나 이런 고단 한 과정을 감내하고 연구해야 고전문학의 가치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

.

다양한 연구의 퍼즐이 맞춰 져야 하며 이전의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고

,

이를 토대로 기존의 연구가 수정 되고 확대되며 심화되어야 한다

.

연구의 시작은 저자 조우각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조우각은 川沙 金宗德

(1724~1797),

容淵 金宗發

(1740~1812)

형제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葛庵 李玄逸

(1627~1704)

의 도학을 사숙

하였다

.

스승들에게 전수받은 학문이 조우각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데

,

조우각의 문집 󰡔蒼軒集󰡕에는 그가 저술한 시와 문을 비롯하여 스승 및 지역 문인들과 교유한 흔적이 남아있다

.

이러한 자료들을 모아서 분석하는 것이 연구의 첫걸음이 된다

.

이상의 연구 과정을 바탕으로 조우각의 생애를 재구성할 것이다

.

이같은 연구는 조우각의 생애가 매우 간 략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

기록은 그 사람이 살았던 삶 의 성과에 반드시 비례하지만은 않는다

.

그렇기 때문에 그가

<

대명복수가

>

를 남기고 많은 사람이 향유했을 정도라면 이에 걸맞은 자취가 있을 것이다

.

본 연구는 이를 구축하기 위해 자료 조사와 분석을 최우선 과정 으로 삼는 것이다

.

이상의 자료 구축과 분석을 통해 조우각의 생애와

,

교유 및 학맥에 관한 연구가 진척될 것이다

.

이는

<

대 명복수가

>

의 창작 배경을 밝히는 데 필요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조우각이라는 조선후기 문인 연구라는 점에 서도 매우 가치 있는 연구이다

.

병자호란이 지난 지

200

여 년 뒤에 북벌을 논한다는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명나라는 이미 멸망하고 청나라의 새로운 문명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에서

대명복수

라 는 모토를 외쳤던 조우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둘러싼 인적 교유를 분석할 것이다

.

이를 위해 그의 학문적 연원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

왜냐하면

<

대명복수가

>

는 단순히 외적 전경에 의해 감흥이 촉발된 작품이 아니고 시대와 관련된 뚜렷한 사고체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대개 한글 가사 작품은 외적 상황과 내적 감정의 교직으로 이루지는 경우가 많다

.

그러나

<

대명복수가

>

는 철학적이고 정치 적인 상황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작품이다

.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시어와 표현법을 중심으로 작품 자체에 주 목하는 내재적 관점으로 작품을 분석하기에 앞서 작자의 철학적 지향을 파악해야 한다

.

이를 위해 병자호란 직후부터 조우각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북벌

에 대한 인식 변화와

중화

를 둘러싼 조선 지식인의 철학적 흐름 을 파악할 것이다

.

이 두 개념의 흐름 속에 조우각이 지향했던 철학적 가치를 분석할 것이다

.

이 과정에서

<

대명복수가

>

의 사상적 배경 또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

이와 관련해서 파악해야 할 자료가 바로 이현일이 쓴 「山東檄文」7)이다

.

이 작품은 숭명배청이 뚜렷하게 7) 「山東檄文」의 원래 제목은 「擬爲國家檄山東士民書, 己丑春, 聞姜姓者倡義山西, 感而作」으로 󰡔葛庵先生文集󰡕 別集 卷2에 실려

있다. 조우각의 행장에서 이 글을 山東檄文로 표현하고 있어서 편의상 「山東檄文」으로 표기하였다.

(4)

드러난 작품이다

.

조우각이 스승을 통해 이어받은 퇴계학파의 사상적 지향은

<

대명복수가

>

의 사상적 배경 설명에 큰 단서를 제공한다

.

따라서 이러한 자료를 적극 분석하여 그 의미를 밝힐 것이다

.

이상의 논의는

<

대명복수가

>

를 둘러싼 작가와 사상적 배경 등 그 토대에 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

<

대명복수가

>

는 이본이 많이 있는 작품으로 당시 필사를 통해 두루 향유되었다

.

다양한 이본이 있는 만큼 이를 체계화하여 분석하고 그 차이점을 밝혀

한글본

<

대명복수가

>’

의 특징을 도출할 것이다

.

아울러 여타 이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필사기에 대한 분석을 통해 향유층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할 것이다

.

Ⅱ. 조우각의 생애와 사상

조우각은 가사문학인

<

대명복수가

>

를 비롯하여

<

천군복위가

>

를 저술한 가사문학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연구는 전무하다

.

본 연구에서는 기존에 연구된 바 없는 조우각의 생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것이다

.

이를 통해 그가 병자호란이 지난 지 수 백년 뒤에 이 작품을 창작한 이유와 그것을 필사하여 향유했 던 당시 독자층의 욕구 및 지식인의 의식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定齋 柳致明

(1777~1861)

의 문집 󰡔定齋 先生文集󰡕에는 조우각의 행장인 「處士蒼軒趙公行狀」이 실려있다

.

행장의 내용을 통해 조우각의 생애와 활동 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 <

대명복수가

>

의 저작동기 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 다

.

다음은 「處士蒼軒趙公行狀」의 일부이다

.

공은 영조 을유(1765년) 3월 2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성품이 굳세고 드높아 굽히지 않았다. 백부 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6~7세 때부터 문장을 알았다. 백부의 휘는 우원으로 대산 이상정선생의 문하에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천사 김종덕 선생의 학문을 따라 배움에 사승이 있었는데, 공을 가르칠 때 순순히 도리를 따르도록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용연 김종발 선생에게 학업을 전수받았다. 용연은 곧 천사의 셋째 아우이다. 둘째 아우는 호가 구재이고 막내 아우는 호가 제암으로 서로 마주하여 학문에 힘써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8)

위 자료는 조위각의 학맥과 사승관계를 압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

조우각은 천사 김종덕과 용연 김종발 형제에게 학문을 배웠다

.

김종덕과 김종발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촌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후학 을 양성한 학자이다

.

이들은 퇴계학의 학맥을 계승한 大山 李象靖

(1711~1781)

의 제자이다

.

이상정은 퇴계학 맥의 중요한 계승자인 李栽의 외손으로

,

외조부 이재에게 수학하며

李滉 – 李玄逸 – 李栽

로 이어지는 퇴계학 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金宗德

,

南漢朝

,

柳長源 등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

조우각은 김종덕의 가르침을 통

8) 柳致明, 󰡔定齋先生文集續集󰡕 卷20, 「處士蒼軒趙公行狀」, “公以 英廟乙酉三月二十四日生. 幼性亢厲不屈. 學於伯氏, 自六七歲 知屬文. 伯氏諱友愿, 遊大山李先生之門. 從同里川沙金先生學, 學有師承, 敎公循蹈規矩. 稍長, 受業于容淵金公宗發, 容淵, 乃川 沙叔弟也. 仲號苟齋, 季號濟庵, 聯牀博約, 爲士林模楷.”

(5)

해 이현일의 도학과 포부를 흠모하였고

,

퇴계학맥의 영향을 받으며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

조우각은 천사 김종덕과 그의 셋째 아우 용연 김종발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

김종덕은 영남 지역에서 는 柳長源

,

李宗洙 등과 더불어 湖門三老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

조우각은 김종덕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는 동안에 퇴계학파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

퇴계학파의 문인들은 청에 대한 복수설치의 뜻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지속되고 있었다

.

퇴계학파의 문인 가운데 李時明

(1590~1674)

은 북벌에 관한 논의를 나누었던 林慶業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秋懷」라는 시를 남겼다

.

구절중에

벽에 기대 부질없이 천하의 일을 생각하니

,

옛 신주를 복구할 뜻을 품은 사람이 없구나

.[

倚壁空懷 天下事

,

無人志復舊神州

]’

에서

,

청에 대한 복수설치의 뜻을 엿볼 수 있다

.

이시명은 퇴계 문하의 손꼽히는 학자인 鄭逑

,

金誠一

,

柳成龍에게서 두루 사사한 장흥효의 사위로 퇴계학 맥을 계승한 인물이다

.

이시명의 아들인 갈암 이현일은 아버지의 「秋懷」에 차운한 시9)에서

나는 늘 國恥를 씻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고

,

中弟는 매양 고통받는 백성에게 은택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였다

.[

余常恨 國恥未雪

,

中弟每憂民隱不澤

,

故頸聯引詩及之

]’

라고 부기해 두었다

.

이시명과 이현일의 시는 병자호란을 겪은 당대의 인물들이 남긴 작품이다

.

이후 이현일의 아들 밀암 이재

(1657~1730)

는 「林將軍慶業傳」을 지어 임경 업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이재가 이 작품을 창작한 시기는 청나라가 이미 중원에서 안정적인 지배를 이루어 나가고 있을 때이다

.

이러한 시기에도 영남지역 퇴계학맥의 문인들에게는 북벌에 대한 의지가 지속되어 조우 각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조우각의 행장을 쓴 유치명은

19

세기 영남 유림의 종장으로 큰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

동 시대를 살아간 유치명은 조우각의 행장에서 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

공은 자태와 모습이 맑고 여위었으며 키가 보통사람을 넘지 못하였다. 염연히 법도의 가운데 있어서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고 스승을 대접하고 친구를 취하는 예절을 다하고 항상 당당하게 우주를 넘 고 바람을 타고 우레를 채찍질하는 뜻이 있었다. 차라리 소홀할지언정 하찮은 의리를 지키고자 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엄준할지언정 속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뜻이 숭상하는 바는 높고 빛나는 곳에 있어서 心術의 미묘함을 저변에 두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10)

조우각의 인품과 성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조우각은 예의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키면서도 이상은 높고 커서 자잘한 일에는 얽매이지 않은 인물됨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

규범을 엄격히 지키는 것과 크고 호방한 뜻을 품는 것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듯이 보이지만

,

유치명은 조우각에게서 서로 대립되는 성향을 읽어냈다

.

조우각의 저술은

6

3

책의 문집 󰡔蒼軒集󰡕에 전해지는데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의 학문과 사상의 전반 을 이해할 수 있다

.

조우각의 학문과 사승관계는 「讀九思堂集有感而書」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

9) 李玄逸, 󰡔葛庵集󰡕 권1, 「次應中秋懷韻」.

10) 柳致明, 󰡔定齋先生文集󰡕 속집 권12, 「處士蒼軒趙公行狀」, “公姿相淸癯, 長不踰中人. 斂然繩墨之中, 以求盡乎事親從兄隆師取 友之節, 而常昂昂有凌跨宇宙駕風鞭霆之志. 寧失於疎, 而不欲爲小諒, 寧過於峻, 而不欲爲流徇. 意之所尙, 在俊偉光明, 不容其 有一毫低暗於心術之微也.”

(6)

.

조우각은 영남의 문인 九思堂 金樂行

(1708~1766)

의 문집에서 사승관계에 대해 서술한 글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글을 썼다

.

“내가 여기까지 읽고 일찍이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 군자를 지금 모실 수 없구 나. 만약에 식산, 대산 두 선생님이 세상에 계시고, 천사옹, 동암옹, 만곡옹과 구재, 제암은 모두 병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 세상에 머무를 때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식산은 내가 진실로 따를 수 없고, 천옹은 내가 師門에 있었고, 동암은 동시대에 살며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때 만곡을 종족의 의론 으로 얻을 수 없었으니 數三人을 모셨다. 구재와 제암을 사사받기를 일삼았지만 또 어찌 그 천수를 누 리지 못하였는가. 만약 오늘날 여기에 있더라면 또한 몹시 늙지는 않았을 것이다.”11)

그는 영남학맥을 이어오는 선현들에 대한 선망을 드러내고 자신이 사사받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

息山 李萬敷

(1664~1732),

대산 이상정

,

천사 김종덕

,

東巖 柳長源

(1724~1796),

晩谷 趙述道

(1729~1803),

苟 齋 金宗敬

(1732~1785),

濟庵 金宗燮

(1743~1791)

등 퇴계학맥을 계승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을 열거하고 있 다

.

몇몇 학자들은 운 좋게 문하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대가 맞지 않아서

,

혹은 동시대에 살고 있으나 단명하여서 더불어 학문할 수 없었음을 애석해하고 있다

.

그는 여기에서 퇴계학파의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자신의 학문적 성향을 적시해 두었다

.

절의를 숭상하고 기개를 좋아하여 병자년 성하의 맹약을 자신이 진흙탕에 빠진 듯 여겨서 척화한 사람에 관한 일을 읽었으며 발로는 차가운 북방지역을 밟듯이 여겨 분개하여 무릎을 치기를 그치지 않 았다. 갈암 이현일 선생의 「산동격문」을 모방하여 <대명복수가> 백오십운을 지어 뜻을 펼쳤다. 또 반 드시 공허한 말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여겨 「천국복위가」 팔십운을 지었다. 매일 밤 인적이 고요할 때 아이들에게 자리 옆에서 암송하게 하여 스스로 세상에 대한 울분을 표했다.12)

절의를 숭상하고 기개를 좋아한

조우각은 병자호란 때의 치욕스런 패배의 역사를 읽으면서 자신의 일인 듯 몹시 몰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아울러 그는 갈암 이현일이 쓴 이른바 「山東檄文」이라 일컬어지는 「擬爲 國家檄山東士民書

,

己丑春

,

聞姜姓者倡義山西

,

感而作」을 읽고 이를 모방하여

<

대명복수가

>

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

이현일이 쓴 글은 명나라가 망한 뒤 명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산동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에 저 항한 사건으로

,

이들은 청군에 의해 바로 진압되었다

.

그러나 조우각에게는 이러한 사실관계가 중요하게 작 용하지 않은 듯하다

.

사실이야 어떠하든 청에 맞서는 명의 의병을 소재로 쓴 이현일의 글에 강개하여 자신도 이와 비슷한 글을 쓰게 된 듯하다

.

11) 조우각, 󰡔蒼軒集󰡕 下, 「讀九思堂集有感而書」, “余讀及此, 未嘗不掩卷而歎曰, 嗚呼, 君子今不可侍也. 使息山大山兩先生在世, 而川沙翁, 東巖翁, 晩谷翁與苟齋濟庵, 皆無恙者。吾之居於此。其樂當如何哉. 思山吾固不及已, 川翁吾師門, 東巖幷世可侍, 未得一時晩谷以宗族之誼, 而數三侍焉. 苟齋濟庵以事事師者也, 而又何其不壽也. 使今日在者。亦不甚老也.”

12) 柳致明, 󰡔定齋先生文集󰡕 속집 권12, 「處士蒼軒趙公行狀」, “尙節義, 好氣槩, 痛丙子城下之盟, 若身陷泥塗, 讀斥和人事, 若足 躡寒門, 奮慨擊節不已. 倣葛庵李先生山東檄文, 作大明復讎歌百五十韻以抒志. 又以畢竟空言無施, 復作天君復位歌八十韻. 夜靜人閴, 使兒曹誦於座側, 以自頓挫焉.”

(7)

Ⅲ. <대명복수가>의 저작 동기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에 대한 논의는 병자호란 이후 끊임없이 이어졌다

.

병자호란 직후에 제기된 초 기의 북벌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점차 퇴색되었다

.

서사문학만 보더라도 소설

,

야담 등에 그 변화 추이가 나타난다

.

13) 조우각이 활동했던 시대의 북벌론은 현실의 문제를 담아내기 위한 하나의 화소로 쓰이 거나 실행 불가능한 하나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

그렇다면 조우각은 병자호란 이후

200

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구시대의 담론을 가져와 현실적으로 북벌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세인의 관심에서도 멀어진 때에

,

대명복수 에 대한 소재를 활용하여 왜 이 작품을 창작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

창작한 동기를 파악하는 것은 작품의 의미를 구명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

조우각의 행장 「處士蒼軒趙公行狀」에는 조우각이

갈암 이선생의 「산동격문」을 모방하여

<

대명복수가

>

150

운을 지어서 뜻을 펼쳤다

.”

14)는 내용이 있다

. <

대명복수가

>

를 분석하려면 우선 갈암 이현일의 「산동격 문」이라 불리는 「擬爲國家檄山東士民書

,

己丑春

,

聞姜姓者倡義山西

,

感而作」을 분석하여 그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

다음은 이 글의 일부이다

.

의병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혹은 앞을 막기도 하고 혹은 뒤를 공격하기도 하며, 혹은 동쪽에서 추격 하기도 하고 혹은 서쪽에서 압박하기도 한다면 저들이 공허한 나라와 피폐한 군졸로 어찌 한 방면의 군대를 감당하여 감히 執事들의 선봉에 맞서겠는가. 이렇게 하면 흉도를 沙漠으로 몰아내고 鑾車를 옛 도읍에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공들의 忠烈은 靑史에 길이 남을 것이고 과인의 깊은 수치도 장차 씻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제공들은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삼가 고하노라.15)

위 글은 격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

격문은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급히 알리거나 군병을 모집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

의병을 모집하여 사방에서 오랑캐를 공격하여 중원에서 몰아내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이 현일은 기축년

(1649,

인조

27)

봄에 姜瓖이 山西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에 반기를 든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격하여 이 글을 지었다

.

비록 이 사건은 실패하였지만 이현일은 이에 크게 감화를 받아 글을 지은 듯 하다

.

山西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니 山東에서 사민이 떨쳐 일어날 것을 擬作한 편지의 형식을 취했다

.

山西와 山東 등 여러 방면에서 협공하자는 메시지가 글에 담겨있는 것은 바로 이런 취지에서였던 것이다

.

이현일이 이 글을 쓸 때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

스승 김종덕으로부터 퇴계학파의 학문을 이어받으며 그 이전의 스승들을 흠모해 오던 조우각은 이현일의 이 글에 크게 감화되었을 것이다

.

따라서 그는

<

대명복수가

>

에서

山東倡義 姜姓人께 朝鮮檄文 뉘지은고

라는 구절

13) 김수현, 「조선후기 서사문학과 북벌론 ‒ 북벌론의 추이와 문학적 형상화」,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논문, 2012, 9~16. 14) 柳致明, 󰡔定齋先生文集續集󰡕 卷20, 「處士蒼軒趙公行狀」, “倣葛庵李先生山東檄文, 作大明復讎歌百五十韻以抒志

15) 李玄逸, 󰡔葛庵先生文集別集󰡕 卷3, 「擬爲國家檄山東士民書, 己丑春, 聞姜姓者倡義山西, 感而作」, “義旅四集, 或當前或攻後, 或自東躡 ,或從西蹙, 則彼以空虛之國罷散之卒, 惡能當一面之師, 敢逆執事之顏行哉, 兇徒可驅於沙漠, 鑾車定回於舊都, 諸公 忠烈, 遠垂竹帛, 而寡人深恥, 庶雪將來矣, 嗚呼諸公, 可不勖哉, 敬以聞.”

(8)

을 지어 이현일의 이른바 「산동격문」에 대해 자신이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

그는 또한 이와 유사한 정서를 시에서도 나타내는데 「看大明末紀有感」이 그것이다

.

一自南寧播越後 한 번 남녕으로 피난한 뒤 뒤로부터

朱家消息久悠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의 소식이 오래도록 아득히 멀구나 尙今中夏無人傑 지금의 중국 땅에는 인걸이 없으니

誰直笞兵入蘇州 누가 다만 병사를 독려해 소주에 들어가겠는가.16)

조우각은 명나라 말의 역사 기록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시를 썼다

.

그는 청의 침략으로 명이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고 결국은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의 위용은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여겼다

.

그러나 지금 중 국에는

,

徐達이 주원장을 도와 군대 이끌고 소주를 공략한 것과 같은 일을 할 영웅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 다

.

조우각은 명말의 역사를 읽으며 마치 지금의 일처럼 몰입하여 비분강개하고 있다

.

이현일의 글과 조우각 의 시의 공통점은 군대를 일으켜 청나라를 공격해야한다는 직접적인 방식의 북벌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

<

대명복수가

>

는 특이하게 서문17)이 존재하는데

,

여기에서 저작동기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

천자의 기강이 끊어지고 온 천하가 혼란스러운데, 불운하고 이치가 다하여 물 흐르듯 회복하지 못하 였다. 우임금이 다스린 중국이 鬼域에 침탈당하고 周왕실의 문물이 오랑캐의 풍습에 없어졌다. 오직 秉彝는 천성에 근본하니 종종 초야의 사이에서 강개하여 슬피 읊조리는 선비가 있다. 대해의 동쪽 옛 날 箕子의 땅 만리관에 처사가 있어 그 뜻이 컸으니 세상에 이름 나기를 구하지 않고 궁벽한 오두막에 서 무릎을 감싸안고 제갈량의 글과 도잠의 시를 읽기를 좋아하였다. 매번 암송하고 공부하는 사이에 時事를 언급할 적에는 아닌게 아니라 탄식했으며, 황조의 일과 인조 성하의 치욕에 있어서는 몹시 원 통하고 한스럽게 여겼다. 숭정 갑신년 거듭 돌아보니 억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고 秋風에 이르러서 는 간담이 격동하여 중원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 쉬었다. 이백 년 오랑캐의 비린내가 사방을 막고 있 다.…(하략)…18)

「大明復讐歌序」의 첫 부분이다

.

조우각은 명나라의 멸망으로 인해 천하가 어지럽고

,

중화의 문물이 오랑 캐 청나라에 침탈당했다고 여겼다

.

그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이러한 상황에 강개한 마음이 든다 고 밝히고 있다

.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출사하지는 않았으나 초야에 머무르며 학문에 뜻을 세우고 있는 선 비라고 표현하고 제갈량이나 도잠에 은근히 자신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

명의 멸망과 인조의 성하의 치욕

16) 趙友慤, 󰡔蒼軒集󰡕 권上.

17) 김광순, 「대명복수가 고」, 󰡔동양문화연구󰡕3, 경북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1976, 53쪽의 원문과 번역을 참조하였고 번역이 어색한 부분은 다시 번역하였음.

18) 「大明復讐歌序」, “乾綱絶紐, 四海橫流, 運否理極, 滔滔不返. 禹貢之封疆, 沒侵鬼域, 周家之文物, 掃盡祝髮. 曰惟秉彛, 本乎天 , 往往草澤之間, 有慷慨悲吟之士. 大海之東, 故箕之壤, 有萬里館處士, 其志嘐嘐, 不求聞達於世, 抱膝窮廬, 好讀孔明之書, 靖節之詩. 每誦學之餘, 語及時事, 未嘗不歎息, 痛恨於皇朝之事及仁祖城下之辱. 歲次崇禎甲申重回, 不勝抑鬱之心, 臨秋風而激 肝膽, 望中原而起長吁. 二百年腥氣, 塞于四隅.”

(9)

을 원통하고 한스럽게 여긴다며 격렬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

숭정 갑신년 즉

, 1644

년은 명나라가 멸망한 때이다

.

추풍은 한무제의 「秋風辭」를 의미하는데 시의 내용보다는 한무제가 흉노를 정벌한 업적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

즉 명나라가 멸망한 때를 돌아보니 한무제처럼 오랑캐를 정벌하지 못한 것에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 들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조우각은 오랑캐 청이 명을 멸망시켜 중화 문물이 침탈 당한 것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

퇴계학파의 문인들은 병자호란 이후 줄곧 북벌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

이러한 성향은 조우각에 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

조우각이 갈암 이현일의 글을 읽고

<

대명복수가

>

를 창작했다고 하는데

,

이현 일의 북벌론은 당대의 현실이었지만 이현일이 처한 정치적 위치에서 실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이현일의 북 벌론은 인간의 보편가치로 믿는 義理에 대한 강한 신념이 그 기본 동기다

.

이런 점에서 그의 북벌론은 그의 주리론 강화의 명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

19) 이는 李栽에게도 이어져서 그는 병자호란 이후 北伐에 부정적 인 자들을 비판한 「北伐議」20)를 저술하였다

. ‘

義理에 대한 강한 신념

으로 볼 수 있는 퇴계학파의 북벌론이 조우각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

Ⅳ. 한글본 <대명복수가>의 특징

앞서 밝힌 바와 같이

<

대명복수가

>

의 이본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 우선 이본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본 뒤 한글본

<

대명복수가

>

의 특징에 대해 살펴 보려한다

. <

대명복수가

>

는 󰡔東音󰡕 소재본

,

安永 昌氏家 소장 󰡔歌 辭集󰡕 소재본

,

경주최씨 소장본

,

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

,

한국가사문학관 소장본 등의 이본이 많이 알려져 있다

.

이 중 󰡔東音󰡕 소재본은

<

대명복수가

>

초기 연구21)에서 대상으로 사용되었다

.

이 자료는 한문에 한글 로 토를 단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冊子의 형태이다

.

安永 昌氏家 소장 󰡔歌辭集󰡕 소재본은 󰡔한국역대가사문 학집성󰡕에 해제와 더불어 가사 본문과 간략한 주석을 첨가해 실려있다

.

이 자료는 󰡔東音󰡕 소재본을 對較한 것으로 역시 한문에 한글토를 붙인 것으로 冊子의 형태이다

.

경주최씨 소장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 관 장서각 아카이브에서 이미지를 확인해 볼 수 있었는데 한문에 구결토가 달려있다는 점이 특이하며 두루마 리의 형태이다

.

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과 한국가사문학과 소장본 역시 한문에 한글로 토를 단 형식이며 책자 의 형태이다

.

한글본

<

대명복수가

>

480×22

㎝의 두루말이 형태이다

.

한글본

<

대명복수가

>

는 여러 이본들이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한글로 쓰여져 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또한 두루마 리 끝 부분에 필사기가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19) 이동환, 「갈암집 해제」, 󰡔국역 갈암집󰡕, 한국고전번역원, 1999.

20) 이재, 󰡔密菴先生文集󰡕 권12, 「北伐議」.

21) 홍재휴, 「창헌 조우각의 대명복수가, 천군복위가 고」, 󰡔행정 이상헌선생 회갑기념논문집󰡕, 1968, 539~562; 김광순, 「대 명복수가 고」, 󰡔동양문화연구󰡕 3, 경북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1976, 45~69.

(10)

<표 1> <대명복수가> 이본 현황

한글본 󰡔東音󰡕 所在본 安永 昌氏家 소장

󰡔歌辭集󰡕 소재본 경주최씨 소장본 한국국학진흥원본 한국가사문학관본

표기 한글 국한문혼용

한문+한글토

국한문혼용 한문+한글토

한문 한문+구결토

국한문혼용 한문+한글토

국한문혼용 한문+한글토

형태 두루마리 책자 책자 두루마리 책자 책자

필사기 있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그림 1> 한글본 <대명복수가>

한글본

<

대명복수가

>

명복슈가라

로 시작하며 하나의 두루마리에 전편이 기록되어 있다

.

기존에 소 개된 이본들과 달리 전체 내용을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

<

대명복수가

>

에 대해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가사

라는 개괄적인 연구만이 이루어졌다

.

기존 연 구에서는

<

대명복수가

>

에 대해 북벌론을 소재로 쓴 가사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차원에 그쳤기 때문에 가 사 내용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

,

고사 등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다

.

역사적인 내용

,

풍부한 고사 등에 대 한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

고전문학은 산문과 운문을 막론하고 전고를 많이 활용한다

.

전고의 활용은 단순한 지식의 표출이 아니라 그 전고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작가의 의도에 따라 배열하고 부각하여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는 기능을 한다

.

특히 본 작품은 조우각이 남성 작가라는 점에서 용사가 매우 활발히 사용되어 해석이 난해하였다

.

따라서 전고의 활용이 매우 빈번한

<

대명복수가

>

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11)

조우각이 활용한 전고의 양상을 파악하여 전체적인 맥락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이에 국한문 혼용으로 필사된 이전 자료들과 한글본

<

대명복수가

>

의 원문을 비교 대조하여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

다음은 한글본

<

대명복수가

>

의 첫 부분이다

.

말니관의 슈을취코

말니츈풍 다달나셔

고 오은후의

츌표 노하고

당송이샹 던지고

명소식 어요

남영토쥬 드러간후

영영년호 그만이라

당우쳔지 잇건마

강조죵 글너다

만졀필 이한귀

선조일 말이오

북노치 이경녕은

영능십년 부심이라

말리관

은 萬里館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우각이

1796

(

정조

20)

에 永川의 梅谷에 집을 지어 강학한 곳이 다

.

만리관의 萬里는 중국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다는 관념적인 거리를 나타낸 것이다

.

고 오운후의 츌표 노하고

는 갈암 이현일의 행장에

, “

때로 붕우들과의 술자리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술이 몇 순배 돈 뒤에 문득 무후의 「出師表」를 읊고 간간이 杜甫의 「古柏行」을 읊었다

.[

有時 朋酒之會

,

遇賞心之人

,

則酒數行

,

輒誦武侯出師表

,

間詠老杜古柏行

]”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

이 구절은 갈암 이 현일이 󰡔尊周錄󰡕을 편찬하여 존주사상을 고양시킨 것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

남영토쥬는 곧

,

南寧土州 를 의미하며 명나라의 잔여세력이 도읍을 南寧으로 옮긴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

영영년호는 永曆年號를 가리

키며

, 1644

년 의종이 죽고 명나라가 멸망하였으나

,

명나라의 잔여세력은 도읍을 南寧으로 옮기고 永明王이

임금 노릇을 하면서 永曆이라는 연호를 쓰며 명맥을 유지하다 그마저

1662

년 완전히 멸망하였다

.

하지만 이 영명왕을 인정해 영력 연호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

갈암 이현일의 경우에 그러했다

.

강조죵

은 여타본에서는

江漢

으로 표기되어 있다

. ‘

江漢朝宗

’,

즉 모든 강물이 바다로 향해 흘러가듯이 조선이 중국을 받들어 섬겼다는 말로

,

󰡔書經󰡕의

江水와 漢水가 바다에 조종한다

.[

江漢朝宗于海

]’

에서 유래하 였다

. ‘

만졀필

萬折必東

으로 강물이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한다는 뜻으로 명나라를 흠모하는 尊明意識을 표명한 것이다

.

북노치 이경녕은

/

영능십년 부심이라

는 北虜 청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는 효종의 북벌론이 寧陵

[

효종의

(12)

능호

]

10

년간의 切齒腐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

도입부분을 조금 인용하였을 뿐인데

,

조우각과 그를 둘러싼 배경

,

북벌과 중화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

작품의 전체 내용이 이렇게 많은 고사와 역사적 배경에 바탕한 내용 또는 자신의 사상을 대 변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 내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연구는 불가능하다

.

영천에서 萬里館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조우각은 갈암 이현일의 글을 읽고 북벌의 의지를 세운다

.

필사 기에 보이는 조소저라는 여성이 필사한 작품이라서 여성에 의해 전승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내용을 상세 하게 살펴보면 조선의 역사와 병자호란 등에 대한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용사도 다양하게 사용되 어 학문이 깊지 않은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

한글본

<

대명복수가

>

는 기존에 발굴된 한문본

,

그리고 조우각의 행장

,

「대명복수가서」 등에 나타난 내용 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미 필사된 자료를 보고 베껴 적었다기 보다는 귀로 듣고 손으로 적어 내려간 자료 로 보인다

.

가장 첫구절

말니관

은 조우각에 영천에 지은 萬里館을 가리키는데

,

만리관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하고 있다

.

다음 구절의

말니츈풍

은 조우각의 시구절

萬里秋風獨長吟

[

만리에 추풍부니 홀로 길게 한숨 쉬네

]’

를 인용한 것으로 萬里秋風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 ‘

강조죵

도 여타본에서는

江漢朝宗

으로 쓰고 있 는 등 이러한 부분 외에도 이와 유사한 표기의 오류가 다수 있다

.

표기상의 오류인지 표현상의 허용인지는 원문의 내용을 정치하게 분석한 뒤에 판단할 수 있었다

.

기왕에 소개된

<

대명복수가

>

는 한문 원문에 한글이나 구결로 토가 달려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또한 역 사와 고사를 많이 인용하여 일정부분의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

하지만 필사기에 보이는 필 사자는 젊은 여성이다

.

그가 내용을 이해하고 필사하였는지 아니면

조소저

라는 단서로 미루어 집안에서 내 려오는 가사를 그저 베껴 썼는지에 대해서도 실체에 접근해 볼 예정이다

.

병자호란 이후

200

여년이 지난 시 점에서 조우각이라는 인물이 대명복수라는 다소 유행이 지난 소재로 가사작품을 지었다

.

여기까지는 조우각 개인의 사상적 지향이라 해도 무관한 일이다

.

그러나 여러 이본이 존재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필사를 통해 두루 향유되었다

.

하나의 작품이 널리 퍼져 읽혔다는 것은 그것을 수용할만한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었 다는 것을 의미한다

.

본 연구는 필사자

조소저

가 남성들의 전유물로 이어져 내려온 북벌 소재의 작품을 베 껴썼던 당시 사회적 배경을 구명하고 문화적 풍토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한다

.

한글본

<

대명복수가

>

는 가사 내용 뒤에 다음과 같은 필사기가 있어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해 향유와 전승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정유 정월 초칠일 조소졔 일등셔 쥬엿시 글시 흉궐 이나 이 가사 죠히 보압 쥬니 두 고 앗겨앗겨 보시고  젼손고 유뉴손하기 쳔만라이

(13)

조우각의 생몰연대와 생애 등을 미루어 정유년은

1897

년이거나 혹은

60

년 후의

1957

년으로 볼 수 있다

.

필사자가

조소졔

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통상 시집가지 않은 양반가의 여성을

小姐

로 일컬었기에 필사자의 성별과 나이

,

신분 등을 알 수 있다

. ‘

조서졔

는 조씨 성을 가진 출가하지 않은 양반가의 여성으로 짐작할 수 있다

.

필사기 마지막에

두고 앗겨앗겨 보시고  젼손고 유뉴손하기 쳔만라이

라고 필사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

조소저는 이 가사를 두고두고 아껴보고 代代傳孫하고 維子維孫하기를 몹시 바라노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

이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데

,

조소저는 조우각 가문의 후손으로 선대의 훌륭한 문학 작품 이 집안에 길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대명복수가

>

를 필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또한 한글본

<

대명

복수가

>

곳곳에서 보이는 오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

,

22)조소저가 한문으로 된 가사를 보고 쓴 것이 아니라

암송하고 있던 내용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

대명복수가

>

북벌

청에 대한 적개심

등이 드러난 가사 작품으로 우리나 라 역사와 병자호란 등에 대해 전반적인 지식이 있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

또한 역사와 전쟁에 대한 내용이기 에 다양한 용사가 등장한다

.

이는 학문의 깊이가 일정정도 이상이 되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

당시 여성 교육 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이러한 내용을 양반가의 여성이라고 하여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

필사자가 조소저라고 명시된 것으로 보아 조우각의 후손으로 조상의 가사를 대대로 듣고 자라온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 <

대명복수가

>

는 다양한 용사와 복잡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영남지역 여성들 사이 에서 전승되어 왔다

.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가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

가사 작품의 경우

,

작 자와 더불어 필사와 전승 부분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

Ⅴ. 맺음말

본 연구는 세 가지 분야에서 결과물을 도출한다

.

첫째는

<

대명복수가

>

의 한글본 발굴이고

,

둘째는 조우각 이라는 문인의 생애와 사상에 연구이며

,

셋째는

<

대명복수가

>

가 창작되고 향유되었던 당시 조선 지식인의 현실인식에 대한 구명이다

.

첫째

, <

대명복수가

>

는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

그러나 한글로만 된 이본은 본 연구에서 처음으로 발굴하

여 진행하는 것이다

.

한글로만 되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

그것은 한글을 즐겨 쓰는 계층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

필사의 시기를 놓고 판단했을 때 적어도 후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무엇보 다 매우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내용의 작품이 한글로까지 필사되어 향유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

둘째

,

고전연구에서 훈고적인 연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정이다

.

그러나 최근 고전에 대한 연구는 기존에 이미 갖추어진 토대를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며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

작가를 둘러싼 매우 섬세한 사실에 22) 한글본 <대명복수가>의 오기는 소리나는대로 표기하거나 혹은 한문을 잘 몰라서 잘못 기록한다거나 하는 것 이외에 또 사

투리로 표기한 부분도 간혹 눈에 띄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14)

서부터 고증적이고 검증적인 잣대를 들이대야만 한다

.

그래서 이전의 지식체계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이 를 통해 새로운 내용을 산출해내야 한다

.

고전문학에서 작가 연구의 축적은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

.

학계에서 조우각이 속해있던 영남 문인의 세계와 그 집단이 추구했던 가치에 대한 연구는 한창 진행중이다

.

이 연구에서 중점을 두고 있던 인물을 발굴해내고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짐으로써 기존 연구를 발전시키고 외연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

이전의 연구에서

<

대명복수가

>

의 작자라는 것

,

퇴계학파의 문인이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는 작자 조우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하나의 성과 이다

.

조우각의 행장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승 등을 살펴볼 수 있었고

,

그의 문집에 실린 글에 대한 번역과 분석 등을 통해 학문과 교유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

본 연구에서 분석한 여러 작품 등을 통해 이제껏 밝혀지지 않았던 그의 학문세계에 대한 이해의 편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

셋째

,

조선후기 사상사에 대한 기여이다

. <

대명복수가

>

는 문학과 역사 및 사상사를 통틀어 접근해야만 의 미를 파악할 수 있는 텍스트이다

.

이 작품은 병자호란이라는 상징적인 사건 외에도 조선인의 세계인식으로까 지 사상사를 확장해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지식이 취했던 입장은 매우 다양했다

.

이 가운데 하나의 갈래가 바로 조우각이 취했던 노선이다

.

그동안의 연구는

북벌

중화

에 대한 매우 피상적인 논의의 토대위에 이 작품이 평가되었다

.

동아시아사적인 관점과 조선 지식인의 현실에 따른 개별 집단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연구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

따라서 본 연구가

<

대명복수가

>

를 연구하기 위해 구명하는 조선지식인의 세계관과 천하관은

,

효종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북벌

에 대한 연구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

그 외연을 확장하는 연구가 될 것이다

.

더구나 정치 문화의 중심지인 한양에서 멀리 떨 어져 있는 영남지역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내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연구이 다

.

본론에서 밝힌 것처럼 북벌론이 대두한 지

200

년의 뒤에 영남에

<

대명복수가

>

가 나온 것은

,

조우각이 속해 있던 학맥의 전통에서 주리론적인 의리 숭상의 매개체로 작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그동안 해제적인 수준에 머물러 다양한 이본의 선후 관계 고찰 없이 진행되었던 연구에서 탈피하여 작가와 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

편린적인 연구수준을 벗어나 작 가론과 사상사 및 영남 문인의 의식 고찰

,

이를 바탕으로 한 이본간의 비교와 향유 영역에 대한 연구를 통한 종합적인 연구결과는 한글본이라는 새로운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될 것이다

.

조선후기 가사문학의 한 축을 형 성할 수 있는 장르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담고 있으며

,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통해 사상사

,

지역 인문학

,

가사 장르 등 분야에 기초자료 및 토대자료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

(15)

<참고문헌>

1. 자료

경주최씨가 소장

<

대명복수가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아카이브

.

柳致明

,

󰡔定齋先生文集續集󰡕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

DB.

李玄逸

,

󰡔葛庵先生文集󰡕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

DB.

李時明

,

󰡔石溪集󰡕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

DB.

趙宇慤

,

󰡔蒼軒先生文集󰡕

,

한국역대문집총서

2815,

경인문화사

.

2. 논문

김광순

,

「대명복수가 고」

,

󰡔동양문화연구󰡕

3,

경북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 1976.

김수현

,

「조선후기 서사문학과 북벌론 ‒ 북벌론의 추이와 문학적 형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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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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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암집 해제」

,

󰡔국역 갈암집󰡕

,

한국고전번역원

, 1999.

홍재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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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헌 조우각의 대명복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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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복위가 고」

,

󰡔행정 이상헌선생 회갑기념논문집󰡕

, 1968.

3. 참고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www.itkc.or.kr

한국역대가사문학집성

www.krpia.co.kr

한국가사문학관

DB www.gasa.go.kr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경상북도 내방가사

DB

*

이 논문은

2020

8

28

일에 투고되어

, 2020

9

21

일에 심사위원을 확정하고

, 2020

10

8

일까지 심사하고

,

2020

10

14

일에 게재가 확정되었음

.

(16)

❙Abstract❙

A Study of Chang-heon Cho Woo Gak’s Korean Version <Daemyung-boksooga>

23)

Kim, Su-hyun*

This study is about Gasa <Daemyung-boksooga> which Cho woo Gak wrote, have purpose such as reaching Cho woo Gak’s life and creative background, academic reporting of Korean version’s peculiarity. Cho woo Gak was a writer of letters in the Gyeongsang Province who study from Galam Lee Hyoen Il, scholars of Toigye. Lee Hyoen Il wrote

Sandong- Proklamation

with wishing resurrection of the Ming Dynasty after Qing Dynasty Convicts China’s hegemony. Cho woo Gak read this work and a couple of hundred years later, wrote <Daemyung-boksooga>

venting his anger just like an indignant scholar right after the Manchu Invasion of Korea. This have relation with the Toegye school tradition which strengthen one’s argument and justice stretch to Cho woo Gak with a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This study research Korean version

<Daemyung-boksooga> that is not reported to the academic circles, and figure out the aspect of the writer’s consciousness being realized which never been able to study in existing research. For that, this study search and analyze various data about tracing the author’s thoughts and establish Korean version’s peculiarity by textual bibliography. Especiall it could be guessed <Daemyung- boksooga> to be widely enjoyed, from point of view which an examination of Chinese characters were very numerous. By result of a research about transcribed notation, Chinese character’s pronounce was not recorded intact. This is proof that the speech were written down.

[Key Words] Cho woo Gak, Daemyung-boksooga, Bukbeol(Conquest of the northern region), Gasa, Different Versions, Korean version.

* Lecturer,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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