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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연구 (3): 한국 전통상인정신의 구현자, 개성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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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구 내용

4.3. 사례연구 (3): 한국 전통상인정신의 구현자, 개성상인

고 동 환

개성상인의 유래

개성상인들이 상업에 전문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려시대 개경이 국제무역도시로서 번성했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개경 은 국제무역항인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를 거점으로 외국사신의 빈번한 왕래에 의한 공무역과 외국상인에 의한 사무역이 번창 하여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이때부터 개경의 상인들은 송상(松商)이라고 불려졌다.

조선왕조는 신왕조를 개창한 이후 개성 주민들을 한양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 정책에 호응하지 않고 개성에 잔류한 자들은 신왕조에 충 성하지 않는 자들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과전(科田)의 혜택도 부여 되지 않았다. 또한 개성부의 토지도 다른 군현에 비해 훨씬 적었으므로 개성주 민들은 장사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개성주민들의 상업활동은 개성의 상권을 무대로 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행 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남성들은 겨울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선 왕조실록에는 개성주민들이 행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개성부의 승려들이 여염에 드나들면서 부녀자들을 희롱하는 것이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우려도 조 정에서 논의될 정도였다. 그러나 개성주민 모두가 장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 로 행상에 나가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었고, 부자들은 행상에 참여하기 보다 는 행상들에게 자본을 대여하고, 그 이자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이른바 상업과 금융업이 일찍부터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개성에서는 다른 어떤 고장보다 채무관계 소송이 많았다. 원래 조선의 행정기관중 채무관 계 소송을 전담하는 부서는 한성부였지만,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개성부에서 도 채무소송에 관해 관할권을 인정해주기도 했다.

한편 이처럼 개성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짓기 보다는 봄철에 행상을 나가 가

을무렵에야 돌아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개성부의 재정운영도 다른 지역의 재정운영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개성부의 재정운영은 다른 군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시대 대부분의 군현의 재정은 농민들에게 징수하는 전세와 군역, 공납으로 이루어졌지만, 개성부 주 민들의 경우 농사짓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전세, 군역, 공 납으로 재정을 충당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개성부에서는 개성주민 중에 부자 들을 뽑아 부거안(富居案)이라는 장부를 만들어 이들로부터 거둔 비용을 가지 고 개성부의 재정에 충당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왕조가 상업을 철저하게 억제하 는 농본억말(農本抑末) 정책을 펼쳤음에도 개성지역에서만큼은 상업이 번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개성지역 상인들은 조선시대를 대표 하는 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초기부터 개성주민들은 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나, 조선전기 까지 이들은 전국을 무대로 농민들이 필요로 하는 의류나 농기류 등을 판매하 는 소상인에 불과하였다. 소규모 자본으로 전국을 무대로 행상활동을 하던 개 성상인이 오늘날 거대자본을 축적하고 합리적 상업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상 인집단으로 각인된 것은 조선후기부터였다.

고려의 구도(舊都) 개성에서의 시전상업

조선시대의 상설시장은 서울의 시전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서울의 시전상인 들은 정부에 일정한 국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금난전권이라는 독점적 상품유통 권을 장악하여 막대한 상업이윤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전은 서울외에 평양과 전주, 그리고 개성에도 존재했다. 개성의 시전은 고려때의 시전을 계승 한 것이었다. 고려때에는 개경의 광화문(廣化門)에서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도로의 좌우변에 1,008간(間)의 장랑(長廊)을 건축하여, 몇 개의 칸으로 이루어 진 점포마다 각자 따로 상호를 붙여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양천도이후 개성의 시전상인들은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여 한양의 시전상인을 구성하게 되었고, 시전 영업은 금지되었다. 그러 나 상업을 주된 생계로 삼는 개성주민들에게 시전의 폐쇄는 큰 타격이었다. 때

문에 정부에서는 1409년(태종 9) 다시 시전영업의 개시를 허락하였다. 개성의 시전상업은 개성에 잔류한 상인들에 의해 영위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 조선시대 개성의 시전규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흔치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개성에는 사대전(四大廛)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비단을 파는 선 전(縇廛), 무명을 취급하는 백목전(白木廛)과 중국산 면포를 파는 청포전(靑布 廛), 어물과 과일류를 판매하는 어과전(魚果廛)이 그것이다.

이들 시전에는 서울의 시전처럼 도중 (都中)이라는 동업조합조직을 갖추고 있 었으며, 서울의 육의전과 마찬가지로 사 대전의 연합회의체는 개성 상업계와 개 성상인의 상행위 전반에 관한 문제를 개 성부의 위촉에 의해 자율적으로 해결하 는 관행을 지니고 있었다. 개성의 시전상 업도 개성부에 대해 일정한 부담을 지고, 그 대신 금난전권과 같은 특권을 소유하 고 있었으며, 영업이 어려울 때 개성부로 부터 자본을 대출받는 특혜를 소유했다.

개성시전의 영업은 서울의 시전과 동일하게 견본품만을 진열하고, 거래품은 도가(都家)라는 창고에 저장하여 구매자가 오면 견본을 보여주고, 구매의사를 확인한 후 창고에서 상품을 넘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개성의 시전은 사대전 외에도 1925년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의전(衣廛), 유기전(鍮器廛), 장전(欌廛), 사 기전(砂器廛)등 16개의 시전이 존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국 시장을 무대로 한 행상단과 상업조직

개성상인의 본령은 시전상업보다는 전국의 시장을 무대로 전개된 상업활동 이었다. 개성상인들은 대부분 소나 말을 소유하고 여러 명이 행상단을 조직하 여 활동하고 있었다. 15세기 후반 전라도 무안지역에서 출현한 농촌장시가 16 세기 이후 삼남지역에 보편화되면서 개성상인들의 행상활동은 더욱 활발해졌

[그림 3-1] 개성의 백목전 깃발

다. 행상들은 행상단을 꾸려 활동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 상인과 달리 상인조직 이 발달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물주(物主)인 부상(富商)과 사용인인 차인(差人)이 존재했지만, 조선후기에는 조직이 더욱 세분화되어, 차인, 서사(書士), 수사환(首使喚), 사환 (使喚) 등으로 구성되는 상업사용인 체제가 정립되었다. 수사환과 사환은 상업 활동의 구체적인 업무를 담당하였다. 사환은 소년점원으로서, 좋은 집안의 자 제를 상업견습생으로 다른 집에 위탁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사환에게는 일정한 보수가 없었으며, 매년 1-2회 의복, 신발 등을 지급할 뿐이었다. 사환은 일정 기 간이 경과되면 수사환으로 승진하였다. 수사환도 사환과 마찬가지로 보수가 없 었지만, 영업성적에 따라 결산기에 이익의 일부분을 지급받았다. 재직 7-8년이 지나 신용을 얻게 되면, 주인은 수사환에게 소자본을 주어 독립시켜 지방행상 을 하게 하였다. 서사는 부기장부인 사개치부의 작성 등 회계업무를 담당하였 다. 차인은 주인의 신용을 얻은 자가 독립하여 지방행상 및 금융에 종사하는 자 였다. 이렇게 보면 차인은 독립된 상인이었지만, 자금의 융통이나 상품의 거래 는 주인의 지휘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사용인의 범주에 드는 상인이었다. 차인은 상업자본가를 대신하여 영업하는 점포의 고급사용인으로서, 일정한 월급을 받 거나 자기책임하에 진행된 손익계산에 의하여 이익분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기록에 의하면 차인의 규모는 대상인의 경우 30명 이상, 소상인의 경 우는 2-3명 규모였다.1)

이와 같은 상업조직을 기초로 개성상인들은 전국의 주요지역에 송방(松房)을 설치하여 차인을 상주시키고 그 지역의 상품유통을 담당하게 하였다. 개성상인 들은 자본력은 물론 조직력에서도 국내의 여타 상인에 비해 훨씬 월등했으므로 전국을 대상으로 한 도고상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에는 개성상인 들은 백면지(白綿紙)를 생산하는 삼남지역의 제지업자들에게 선금을 주고 이를 독점하였으며, 1810년(순조 10) 갓을 만드는 원료인 양태(凉台) 산지인 제주의 길목인 강진과 해남에 차인을 파견하여 양태를 매점함으로써 서울 양태전의 상 권을 침해하기도 했다. 또한 1817년(순조 17)에는 면화의 흉년을 계기로 황해,

충청지역의 면화를 독점하여 상당한 시세차익을 얻기도 했다. 이와 같은 개성 상인의 도고상업은 한양 시전상인들의 독점상업과는 달랐다. 한양 시전의 독점 은 봉건적 특권에 의거한 것으로서, 다른 상인과의 경쟁이 봉쇄된 상업행위라 고 한다면, 개성상인들은 자체의 조직력과 자본력에 기초한 독점으로서 다른 상인과의 경쟁이 전제된 독점이었던 것이다.

해상을 무대로 한 선상활동

개성상인들의 활동은 육지시장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 상(私商) 세력중에서 상당한 자본력을 소유한 상인들이었기 때문에, 개성상인 들은 선상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5세기 후반 김시습(金時

개성상인들의 활동은 육지시장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 상(私商) 세력중에서 상당한 자본력을 소유한 상인들이었기 때문에, 개성상인 들은 선상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5세기 후반 김시습(金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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