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연구 (9): 중세 이탈리아 상인

남 종 국

이탈리아 상인, 신화를 만들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11-15세기 유럽 경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1-12세 기를 전후하여 지중해와 유럽 대륙 곳곳을 누비고 다니기 시작한 이탈리아 상 인들은 13-14세기에 이르러 유럽 최고의 거상으로 성장했고, 이탈리아 도시들 은 모직물과 향신료를 사러 온 외국인들로 붐볐다. 이러한 상업적 활기에 힘입 어 이탈리아는 새로운 도약을 이루었고 마침내 유럽 근대 문화의 산실이 되었 다. 오늘날 이탈리아 해군은 과거 위대했던 중세 해양도시의 업적을 기려 이 시 대를 대표하는 4대 해양도시인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의 깃발을 해군 기로 사용하고 있다.

11-15세기 유럽 경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피사 등의 이탈리아 도시와 그 상인들의 활약상에 관한 연구의 역사는 길고, 그 연구 성과도 방대하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존의 연구들은 이탈리아 상인들의 업적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중세 이탈리아 상인의 활약상을 가장 화려하게 묘사한 사람은 이브 르누아르였다. 그는 [중세 이탈리아 사업가]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새로운 시대를 창조한 선구자였다고 칭송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상업과 은행 기술들을 보존시켰 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업, 은행, 정보, 그리고 근대적 은행제도들을 더욱 발전 시켰다. 그들은 산업을 발전시켰고 오늘날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냈다. 그들에 의해서 농촌적이고,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방 식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도시적이고,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삶의 방식이 나타 났다.”

하지만 홉슨과 같은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상인이 이룩한 업적은 신화에 지나 지 않으며 중세 이탈리아가 유럽 자본주의를 가속화한 모든 혁신의 본거지라는

주장이나, 이탈리아 상인들이 대부제도와 은행 및 복식부기와 같은 선진적 자 본주의적 상업 기술들을 독자적이고 창의적으로 개발했다는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약상을 과장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과소평가할 이유도 없다.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중세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약상이 대단 했음을 증언하다. 비잔티움 황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항구 도시 제노바가 지중해를 장악했다고 한탄했으며, 12세기 후반 비잔티움 출신의 연대기 작가 키나모스는 “비잔티움의 부가 거의 모두 라틴인(이탈리아인)들의 수중에 들어 갔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의 거만함”이라며 이탈리아 상인들의 경제적 침탈과 위 세를 개탄했다. 해상무역과 상업뿐만 아니라 정보력에서도 이탈리아 상업도시 들의 우세는 두드러졌다. 14세기 중반 피렌체 출신의 작가 보카치오는 중국에 관한 이야기의 진위를 알아보려면 제노바 상인들에게 물어보라며 제노바의 정 보력을 높이 평가했다. 15세기 말 베네치아 상인 지롤라모 프리울리는 포르투 갈 왕국의 선단이 인도 남서부 캘리컷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일기에 기록했다.

즉 새로운 항로 개척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곳이 바로 베네치아였다. 그런 점에서 베네치아는 유럽 제일의 정보 수집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하는 이탈리아 상인: 순회상인에서 정주상인으로

중세 이탈리아 상인들이 상업과 경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탈리아 상인들은 세 차례의 큰 구조적 변화를 겪었다. 십자군 전쟁 시기의 이탈리아 상인의 전형적인 모습은 순회상인과 모험상인이었다. 순회상인은 상품을 직접 가지고 이곳저곳을 찾아 다닌 상인을, 모험상인은 낯선 땅을 찾아 항상 모험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만 큼 큰 이익을 노렸던 상인을 가리킨다.

12세기 베네치아 상인 로마노 마이라노는 십자군 시절에 활약한 대표적인 순 회상인이자 모험상인이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과 시리아의 라틴 왕국, 이집 트의 알렉산드리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도시를 누비며 활발한 상업 활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