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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연구 (2): 세계시장에서의 한반도, 고려를 찾아온 외국의 상인들

문서에서 세계의 대상인들 (페이지 38-55)

4. 연구 내용

4.2. 사례연구 (2): 세계시장에서의 한반도, 고려를 찾아온 외국의 상인들

이 강 한

외국상인들에게 한반도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고려는 그 천연자원의 규모나 인물시장의 크기를 고려할 때, 외국상인이 적 지 않은 비용을 들여 일부러 찾아올 시장에는 해당하지 아니한다. 10세기에는 실제로 외국상인들의 방문이 대단히 부진했다. 9세기 동아시아 삼국 시장을 서 로 연결하던 장보고의 활약상을 감안하면 대단히 의아한 상황이었음은 물론이 다. 중앙집권정책을 추구하던 왕건 및 이후 국왕들의 공격적인 지방견제가 해 상을 통한 중국과의 교류에 종사하던 지방세력의 도태로 이어졌고 해상에서의 한중왕래가 부진해지면서 중국상인들도 한반도에 왕래할 동기를 상실했던 것 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11세기 들어와 상황이 변동했고, 한반도는 다시금 외국상인들로 들 끓게 된다. 물론 그들의 방문도 영원히 계속된 것은 아니어서, 이후 12세기중반 으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방문이 다시금 뜸해진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공이 시작돼 고려인들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그런 상황은 13세기후반 다시 금 반전을 맞게 된다. 회회, 색목, 서역인으로 불리는 외국상인들이 새로이 한반 도를 찾아와 고려인들의 숨통을 터 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고려를 방문한 해외상인들로는 당연히 고려 전ㆍ중기의 송 상인(“宋 商”)들과, 고려후기의 원제국 상인 및 회회ㆍ서역 출신 상인들을 들 수 있다.

대단히 오랜 기간 이어진, 다수 중국 한인 상인들의 꾸준한 한반도 방문은 그간 외국상인들의 자발적 방문을 받아본 바 드물었던 한반도인들에게는 놀라운 일 이었다. 아울러 11세기전반 대식국상인들을 잠시 목도했을 뿐이었던 고려인들 로서는, 13세기후반 이래 이어진 몽골인, 회회인, 서역인들의 방문 역시 이례적 인 일이었다. 다종의 외국상인들이 장기간 꾸준히 한반도를 방문했음을 확인함 으로써, 당시 한반도가 세계교역사에서 점하고 있던 위치와 위상을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11-12세기 ‘송나라 상인’들의 도래

11세기초이래 12세기중엽까지, 150여년간 수많은 송상들이 강수 또는 도강의 직함을 갖고 매년 고려를 방문하였다. 자원이 부족하고 시장도 좁았던 한반도 에 외국상인들이 먼저 도래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들의 방문쇄도는 당시인들에게는 물론,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도 오랫동 안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다. 그들이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문방사우나 자기, 인 삼, 저포 등에 관심을 갖고 찾아왔다는 견해, 한반도를 경유함으로써 송으로서 는 적성국가였던 요(또는 이후 금)나 요동지역 상인들과 접촉하고자 한 것이었 다는 견해 등이 흥미진진하게 제기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무역 그 자체보다는 송 황제의 정치적 메시지를 고려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밀정이라 보는 입장도 없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그러한 모든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 과 송상들의 한반도 방문이 이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의 활발한 방문이 고려인들에게 좋은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12세기전반 몇 개월 고려에 머물렀던 서긍이 견문한 바 및 읽은 책들의 내용을 종합 정리하 여 ‘도’와 ‘경’으로 편찬해 송 황제에 진상했던 <고려도경>이 그를 잘 보여준다.

송의 관료와 사신들이 올 때마다 고려인들이 큰 저자를 조성하고, 송인들의 물 건을 구매함은 물론 고려인들이 제작한 물품도 팔았다는 것이다. 해외무역에 소요되는 비용이 막대해 일부 계층만이 대외무역에 나설 수 있었던 상황에서, 고려를 떠날 필요 없이 국내에 앉아 해외상인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던 고려 의 백성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하겠다.

이 ‘송상’들의 자체 조직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알려져 있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 강수(綱首) 또는 도강(都綱) 등의 직함을 지녔다는 것 정도만이 밝혀져 있 다. 강수는 흔히 강운(江運)을 담당하던 소규모 상인그룹에서 배태된 개념으로 언급되며,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후에는 교역선 운행 중의 모든 업무와 상황을 책임지는 전문교역인으로 그 위상과 직무가 진화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강 수의 활동이 본격화한 시점을 송사 등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고려사의 경우 송 상인으로만 지칭되던 송상들이 특정 시점에 ‘도강’으로 등장하기 시작 하고, 얼마 시간이 흐른 후에는 ‘강수’로도 등장해 흥미롭다. 고려사의 재료

가 된 <고려실록>의 찬자(사관)들이 국왕을 예방하는 외국상인들의 직함을 임 의로 적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그들이 자신의 직함을 스스로 지칭하는 바가 시 기별로 달라졌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으며, 그럴 경우 <고려사>의 기사들을 통해 송 강수제도의 변화과정을 엿볼 수 있는 셈이라 하겠다.

고려사에서 ‘도강’ 용례는 1033년 처음 등장하고, 1055년 한 번 더 등장한 다. 따라서 이른바 ‘강수형(綱首形)’ 존재들이 이미 11세기전반 송상들의 방문 시작 직후 고려를 찾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초기에는, 강수, 도강이라 는 명칭보다는 그저 ‘송상’이라는 지칭이 더 일반적으로 발견된다. 11세기 100 년간 거의 매해 고려를 방문하던 중국 상인들은, 이 두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부 분 ‘송상(宋商)’으로만 지칭됐다. 3건의 ‘도강’ 방문사례가 연달아 등장한 것은 11세기말에 이르러서이고(1094), ‘강수’ 용례는 12세기 들어 처음으로 등장했다 (1103). 이후 송상이라는 일반호칭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때부터는 강수ㆍ도강 호칭의 등장빈도가 대단히 높아진다. 동북아시아에서 도강ㆍ강수 들의 활동이 활발해진 시점이 11세기말∼12세기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 이다.

물론 그들의 고려방문이 이때 본격화된 것일 뿐, 도강ㆍ강수들의 중국내 활 동이 이미 그 전부터 활성화돼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송상 들이 이미 한반도를 활발하게 방문하는 상황에서, 도강ㆍ강수들은 그러지 않았 을 것이라 보는 것도 어색한 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송상들이 11세기후반 강수 무역형 영업으로 대거 전환하였고, 11세기말∼12세기초에 이르러 그러한 변화 가 완성됐으며, 장거리 동-서 세계간 교역에 종사하던 도강ㆍ강수들이 적어도 12세기중엽까지는 한반도를 방문하고 있었던 셈이라 하겠다.

‘송상’들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무엇을 기대하고 왔을까?

그들의 종족 구성은 ‘한족’으로 단일했을 것이지만, 그 활동지역들은 다양했 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상들의 활동지역으로는 천주, 명주, 복주, 태주, 소주, 양 주 등 여러 지역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사에는 일단 천주(泉州)와 명주(明州=경원), 그 중에서도 명주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 11∼12세기 송

상들의 고려 방문 사례들 중 방문자의 출신지역이 고려사 세가에 거론된 경 우만 검토할 경우, ‘명주상인’보다는 ‘천주상인’의 방문이 조금 더 빨랐으며 그 것이 이미 1010년대 이뤄졌을 가능성이 엿보인다(1015년 윤6월의 고려방문이 최초기록). 천주인들의 방문은 1030년대초까지 2∼3년에 한번 꼴로 꾸준히 이 어졌고, 이후 두어 차례 10∼15년간의 휴지기를 보이면서도 1050년대말까지는 이어졌다. 그러다가 이후에는 천주로부터의 방문이 현저하게 뜸해진다(1015ㆍ 17ㆍ19ㆍ20ㆍ23ㆍ28ㆍ30ㆍ33ㆍ45ㆍ49ㆍ59).

그 와중에 명주지역과 고려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1074년(문종28) 고려 정부에서 등주의 위험성을 들어 고려사신들의 도착지점을 명주로 변경해 달라 며 송에 요청한 이래, 고려인들의 중국 왕래는 주로 명주를 통해 이루어졌다.

명주 지방지인 건도사명도경(建都四明道經)도 ‘남쪽에서는 복건과 광동, 동 쪽에서는 일본, 그리고 북쪽에서는 고려로부터 상선들이 들어와 교역하였음’을 기록하였고, 고려사 역시 이 시기 태주와(1031) 명주지역(1038) [상]인들의 방 문이 시작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사료상 확인되는 명주상인의 첫 고려방문 시 점은 천주인들의 첫 방문 보다는 20년 이상 늦었고, 명주와 고려 간의 교류가 본격화된 것은 명주교련사(明州敎練使)가 와서 고려와의 왕래 의지를 천명했던 1078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명주인들의 방문은 이후 천주지역 상인들의 방문 보다 오래 지속됐는데, 명주 근처에서 표류한 고려인들을 명주의 지방관 이 송환시켜 주거나(1088ㆍ89ㆍ1113ㆍ55) 명주지역 지방관들과(1093ㆍ1100ㆍ 09ㆍ27) 상인들이(1103ㆍ24ㆍ38ㆍ62) 고려를 방문했으며, 정부의 공식 접촉도 명주를 통해 이뤄졌던 것으로(1113ㆍ18ㆍ27ㆍ36), 이 모든 정황들은 고려와 관 계하던 당시 중국인들의 주요 배후지가 11세기후반에는 천주에서 명주로 이동 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동-서 세계간 교역의 점증 추세에 따라 초 기에는 천주상인들이, 그리고 천주상인들이 서역과의 교역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후에는 명주상인들이 고려와의 교역ㆍ거래를 주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 시기 ‘여러 차례에 걸쳐’ 한반도에 등장하는 송상들이 주목된다.

1057년 8월 고려에 온 곽만(郭滿)은 1061년 8월에도 왔고, 1063년 9월, 1065년 9월, 1071년 8월 등 무려 15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고려를 방문했다. 임영(林寧)

또한 1063년 10월, 1064년 8월, 1068년 7월, 1075년 6월 등 10여년 이상 고려를 출입했다. 일회성 방문을 넘어 고려시장과 장기 거래하며 주기적, 항상적 관계

또한 1063년 10월, 1064년 8월, 1068년 7월, 1075년 6월 등 10여년 이상 고려를 출입했다. 일회성 방문을 넘어 고려시장과 장기 거래하며 주기적, 항상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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