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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연구 (4): 조선시대 특권상인 시전의 상업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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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구 내용

4.4. 사례연구 (4): 조선시대 특권상인 시전의 상업세계

고 동 환

시전(市廛)이란 무엇인가

동아시아 왕조의 모든 왕도(王都)에서는 왕궁과 함께 시전을 경영하였다. 중 국 고대 도읍 건설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 주례 「고공기(考工記)」에도 좌묘 우사(左廟右社), 면조후시(面朝後市)라 하여, 종묘와 사직, 조정과 함께 시전을 도읍을 구성하는 필수요소로 꼽고 있다. 중국 고대왕권은 상업과 상인을 직접 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시전을 국가체제 안에 두었던 것이다. 시(市)에는 관서가 설치되어 질서를 유지하였다. 중국 고대의 시에는 정연하게 열을 이룬 점포가 업종에 따라 구분되어 존재했는데, 이를 사(肆)라고 불렀다. 이 시사(市肆)는 동 업조합으로서 특정 물품에 대한 독점적 유통권을 장악하였다. 시사에서 영업하 는 상인들은 시적(市籍)에 등록하여 시조(市租)를 납부해야 했다. 중국 고대의 시전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시전제도는 당나라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송나라 이후 붕 괴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문헌기록에 나오는 최초 시장은 490년(소지왕 12) 신라의 수도 경주 에 개설된 경사시(京師市)였다. 이후 509년(지증왕 10)에는 경주에 동시(東市)를 설치하고 시전(市典)이라는 시장 감독관청을 두어 관리하였고, 695년(효소왕 4) 에는 다시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열었고, 이 시장을 관리하기 위해 서시전 (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두었다. 이 기구들은 상인의 감독, 물가 조절, 도량 형 감독, 상인들 사이의 분쟁 해결, 정부 수요품 조달 등의 업무를 관장했던 것 으로 보인다.

고려에서도 시전이 설치되었다. 기록상 최초로 보이는 것은 919년(태조 2) 수 도 개경을 건설할 때 궁궐과 조정 건물과 함께 시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다. 시 전을 감독하는 기관인 경시서(京市署)는 목종(998~1008)때 이미 존재가 확인되 지만, 관제가 확립된 것은 문종(1046~1082) 때였다. 경시서에서는 도량형의

통일, 화폐에 관한 업무, 물가조절기능을 담당하였고, 시장에서의 불법적 상행 위도 감찰하였다. 고려의 시전상인들은 어용상업으로서 국가의 비호 아래 일정 한 특혜와 특권을 보유하였다. 국가에서 시전행랑을 지어줬으며, 상인들은 행 랑세를 납부하긴 했지만, 그 자체가 큰 특권이었다. 시전상인들은 국가가 조세, 공물로 거둔 물자를 불하받아 판매하거나 위탁판매를 통해 이익을 얻었다. 시 전상인들은 이러한 특권과 더불어 국가에 대해 정부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 고, 정부의 각종 역을 부담하였다. 이러한 부담은 시전상인들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조선왕조에서도 시전은 한양 건설당시부터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한양의 건 설원리는 주례 「고공기」와 더불어 풍수사상에도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시전은 면조후시의 원리에 따라 궁궐 뒤에 배치되지 못했다. 정궁인 경복궁의 뒤편은 주산(主山)인 북악산이 자리했기 때문에, 궁궐 전면에는 조정이 자리했 지만, 시전은 궁궐 정면에서 동쪽으로 비켜간 운종가에 자리잡을수 밖에 없었 다. 시전행랑은 1394년(태조 3) 한양천도이후 궁궐과 관청, 도성 등 도시시설을 건설할 당시에는 건설되지 않았지만, 1399년(정종 원년) 개경으로 왕실이 이어

[그림 4-1] 조선후기에 그려진 한양도성안의 시전 행랑 모습 (寰瀛誌의 漢陽圖)

(移御)했다가, 다시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환도(還都)한 후, 1412년(태종 12) 에서 1414년(태종 14)까지 3차에 걸친 공사 끝에 총 2,027간 규모로 건설되었다.

이 때 건설된 행랑 중에 운종가∼종묘앞의 루문(樓門) 구간과 종루∼광통교구 간 즉 오늘날의 종로 1가∼종묘 앞 구간과 종각∼광교구간이 시전전용행랑으 로 사용되었고, 1472년(성종 3)에는 일영대∼연지동 석교(石橋) 구간에 위치한 행랑이 시전용으로 확대 사용되었다. 시전행랑에는 중국의 예에 따라 표를 세 워 시명(市名)과 판매물종을 표시하였다.

[그림 4-2] 한말 종로의 시전거리 모습

시전제도는 물적 기반인 시전행랑의 완성, 개성의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강제 이주를 통한 시전상인의 충원으로 창출되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시전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기관으로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한 경시서는 1466 년(세조 12)에 평시서로 명칭을 바꾸었다. 평시서는 시전을 감독하며, 도량형의 표준을 지키며, 물가를 통제하는 등 시장의 질서를 감독하는 기관이었다. 1453 년(단종 1)부터 평시서에서는 시전행랑의 간수(間數)와 상인들의 성명, 그리고 수공업자들의 등급도 모두 기록하여 관리하였다. 시전 감독업무는 평시서에서 전담하였지만,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한성부, 형조, 사헌부 등 법사(法

司)에게도 주어져 있었다. 조선전기 평시서의 업무는 도량형 통일, 물가 조절, 상업질서의 확립 등이 주된 것이었으나, 조선 후기 금난전권이 확립된 뒤에는 각 시전의 전안물종(廛案物種)을 결정하고 그것의 전매권을 보호해주는 구실을 담당하였고,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행도 담당하였다.

농업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수도에서 시전을 필수요소로 삼았던 이 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왕조의 경제체제는 농가에서는 농업과 수공업의 결합 에 의해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을 자급하는 체제가 유지되었으며, 국가경제차원 에서는 왕실이나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용조(租庸調)라는 현물부세수취와 노동력 직접 징발에 기초한 요역제를 기초로 충당하였다. 조선왕조의 경제체제 는 시장에서의 교환이 최소화된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본적 사회체제 하에서 수도에 시전을 둔 까닭은 조세와 부역으로 충당되지 못하는 물자를 조 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전상인의 특권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금난전권(禁亂廛權)과 국역(國役) 서울의 시전제도는 17세기 말을 전후하여 그 이전 시기와 전혀 새로운 모습 으로 재편되었다. 17세기 후반 사상난전이 대두하면서, 난전물 압수권과 난전 인 체포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 17세기 최말기에 성립 하였다. 또한 금난전권이 확립되면서 종전 시전이 부담하던 시역(市役)도 변하 였다.

조선전기 시전상인들은 단순한 상인만이 아니라 직접 물품을 제조하여 판매 하는 수공업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판매물종에 따라 간판을 내 걸고 시전행랑에서 영업을 하였다. 평시서에서는 시전상인들에게 공랑세(公廊 稅)와 좌고세(坐賈稅)를 징수했는데, 이는 시전상인들에 대한 건물임대료와 영 업세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전상인들에 대한 좌고세는 계구수 세(計口收稅), 곧 인두세 형식으로 부과한 것이었다. 조선전기 시전상인들의 부 담은 이와 같은 좌고세와 행랑세 외에도 정부가 공물 진상으로 충당하지 못한 임시의 수요물을 저자에서 무역할 때 시전상인들이 여기에 응하여 책판(責辦) 하는 의무도 졌으며, 이러한 책판에는 외국사신에 대한 각종 접대물품의 조달

또는 외국사신과의 무역에 응해야 하는 의무도 있었다. 또한 시전상인들은 각 종 잡역을 부담했고, 국장과 관련된 요역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시역부담 체제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크게 변화하였다.

1670년 무렵에 완성된 반계수록에는 조선전기에 부과되었던 공랑세가 폐지 되고, 다만 칙사에 대한 접대와 제사, 장빙(藏氷)이나 제반 수리역을 부과하는 체제로 변동했음을 얘기하고 있다. 시전상인들의 부담을 지칭하는 용어도 17세 기까지 시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국역(國役) 또는 분 역(分役)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평시서에서는 물종별로 주관하는 상인들을 시안에 등록하고, 각 시전의 규모 에 따라 등급을 매겨 국역을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국역 가운데 주요한 것이 바 로 궁궐과 각종 관청의 수리도배역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전상인 들의 부담을 17세기 후반부터는 국역(國役), 또는 분역(分役)이라고 칭하였다.

국역은 궁궐 즉 왕실과 관청에 대한 의무를 의미하는 용어이며, 분역은 국역을 육의전이 각 시전에 나누어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각 시전의 규모 에 따라 차등 분배되었다.

이러한 국역체제의 확립을 바탕으로 유분각전과 무분각전도 성립하였다. 평 시서에서는 모든 시전의 등급을 나누고, 각 시전에 국역을 부담시켰다. 시전의 등급을 분등(分等)이라 했으며, 시전이 부담하는 역을 분역이라고 했다. 유분각 전은 국역을 부담하는 시전이며, 유분각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전을 여섯 주비로 묶은 것을 말한다. 육의전에서는 국역을 시전 가운데 여유있는 시전을 뽑아 유분각전(有分各廛)으로 정하고, 10분역에서 1분역까지 부담하게 하였다.

분역은 유분각전이 부담하는 국역의 비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분각전은 국역 부담을 면제받는 매우 영세한 시전이었다. 무분각전의 상인들도 시안에 등록된 상인이기 때문에 정부 조달물자를 담당할 시전이 없거나, 조달물품에 대한 조 달가가 시가보다 헐하여 시전상인들이 손해를 입었을 경우 육의전에서 무분각 전에 부족한 액수를 징수하였다. 무분각전도 국역부담의 의무가 완전히 면제된 것이 아니고 일정한 부담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전상인이면 모두가 부담하는 국역이 특정되고, 국역을 육의전이 유분각전에 분담시키는 체제를 기

초로 시전의 국역체제가 확립되었다.

평시서 시안(平市署 市案)과 시전의 판매물종

17세기 말을 전후하여 시전체제가 재편된 것은 정부에 대한 물자조달이나 진 배를 주된 기능으로 삼고 있던 서울의 시전체제가 민간에 대한 상품판매중심으 로 그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평시서의 시전상인 등록장부인

17세기 말을 전후하여 시전체제가 재편된 것은 정부에 대한 물자조달이나 진 배를 주된 기능으로 삼고 있던 서울의 시전체제가 민간에 대한 상품판매중심으 로 그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평시서의 시전상인 등록장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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