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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연구 (8): 광동(廣東) 화상(華商) 네트워크와 세계

문서에서 세계의 대상인들 (페이지 177-199)

4. 연구 내용

4.8. 사례연구 (8): 광동(廣東) 화상(華商) 네트워크와 세계

강 진 아

중국 최대의 “교향(僑鄕)”: 광동성

일반적으로 화교 상인이라고 하면, 중국인으로 해외에 진출하여 상업 활동을 영위하는 상인 집단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 출신은 상당히 편중되어 있어서, 근 대까지 주로 화상을 배출한 지역은 중국 최남단의 두 성, 광동성(廣東省)과 복 건성(福建省)이다. 1949년 전까지 해외 화교 수의 약 60%는 광동성, 40%는 복 건성 출신이었다고 한다. 복건 사람들은 예로부터 평지의 부족으로 척박한 생 태 환경 속에서 어업 종사자가 많았고, 명대부터 타이완, 류큐를 통해 일본과도 널리 교류하면서 때로는 해상(海商) 집단을 때로는 해적(海賊) 집단을 형성한

[지도 8-1] 광동성과 복건성(1820년의 청 왕조)

https://en.wikipedia.org/wiki/Qing_dynasty#/media/File:Qing_Dynasty_1820.png

해민(海民)으로 유명하다. 이에 비해 광동성은 명, 청 이래 유일하게 공식적 대 외무역 항구로 공인받은 광주(廣州)와 포르투갈 상인의 거류지인 마카오를 끼 고,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일찍부터 상업과 교역이 발달한 부 유한 성이었다. 서구의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식민지화와 더불어, 서양세력이 가장 먼저 상륙하여 서구문물과 접촉한 지역이다. 광동 사람들은 이 루트를 통 해 광범위하게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서구의 식민지 경영에 중간 계층으로 참 여하기도 하고, 개항 전은 서구와 무역을 독점적으로 대리한 공행(公行)으로 개 항 후는 서구의 아시아 경영의 파트너인 매판(買辦)으로 서세동점의 시대 변화 에 따라 얼굴을 바꾸어 강력한 상인 디아스포라를 형성해 나갔다.

특히 청대에 두 성의 해외 이주가 늘어난 것은 1700년에 1억 5천만이던 중국 인구가 1850년에는 4억 3천만으로 3배나 증가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옥수수, 감 자 등 신작물의 도입, 국내 상업의 발전과 원공업화의 진전, 대외무역의 확대와 은의 유입, 장기간의 정치적 평화는 18세기 중국 경제를 윤택하게 만들었지만, 전대미문의 인구 폭발은 경작지 부족, 생태위기, 사회 유동화와 같이 문제점도 함께 키웠다. 이 시기에는 평지에서 산지로, 연안 지역에서 내지로, 화북에서 만 주로 새로운 생활터전을 찾아 국내 인구이동이 활발했는데, 광동성과 복건성은 해금(海禁)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로의 이주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외에 대 한 정보와 지식이 풍부하고 지리적 접근성이 높았던 것, 이미 동남아시아에 정 착한 동향 및 친인척 네트워크의 존재가 이주를 용이하게 해주었다.

18세기 후반부터 대내외 경기가 급격히 악화가 된 이후도 인구 증가는 멈추 지 않았는데, 19세기 개항을 전후해 해외이주가 합법화되면서, 중국인의 해외 이주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복건 인구는 1791년에 1,280만 명에서 1890년에는 2,500만 명으로, 광동은 1,645만에서 2,98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두 배씩 불어 난 인구를 자체적으로 부양하기는 힘들었다.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18세기 후 반부터 1930년대까지 중국 인구는 1.7배, 경지는 1.6배가 늘어났으나, 광동성은 인구는 2.1배, 경지는 1.6배로 늘어나 평균을 훨씬 상회할 정도로 인구 압박이 심했다. 개항 이전의 중국인 이주는 대부분 동남아시아로의 이주였고, 아편전 쟁과 개항 이전에도 이미 동남아시아에는 100만 명 이상의 광동, 복건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884년 남양 시찰을 했던 정관응(鄭觀應)은 동남아시 아의 화교가 200만을 헤아린다고 보고하고 있다. 1893년에 공식적으로 해금이 폐지되면서 해외로 도항하는 중국인의 수는 비약적으로 늘었다.

근대 화교 이주를 논할 때는 주로 노동자에 관심이 집중되는데, 쿨리(苦力)라 고 불리는 중국인 하층 노동자가 기업적으로 해외에 대량 송출되었기 때문이 다.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된 동남아시아에서는 대규모 플랜테이션농장이 조성 되었고, 미국ㆍ오스트레일리아 등 신대륙에서는 철도를 비롯해 인프라 건설 및 근대 공업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노동 수요가 급증했다. 1833년 영국의 흑인노 예제 폐지를 시작으로 각 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하급 노동에 종사할 대 체 노동력 수요가 늘어났고, 증기선의 도입과 원거리 정기항로의 개설로 싼값 의 노동자를 대량으로 운송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세계 노동시장은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통합되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과 1865년 미국 대 륙횡단철도의 건설로 신대륙이 새로운 이주 지역으로 각광받게 되는 것도 이즈 음이다. 서부대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탄광과 철도건설 현장 에 대거 투입되었다. 주로 계약이민 형식의 이러한 노동자의 송출지가 된 것이 광동과 복건이었다. 1869년과 1939년 사이에 하문(厦門), 산두(汕頭), 홍콩을 통 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인구는 대략 1,470만을 헤아린다.

근대 동아시아 시장과 광동 화상(廣東華商)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는 이러한 노동이민뿐만 아니라, 상인자본의 이주 역시 가속화되고, 일찍부터 글로벌한 “화상자본(華商資本)”을 형성시켜나갔다는 점이다. 특히 쿨리 이민이 압도적이었던 신대륙과 달리, 동 남아시아와 새롭게 개항된 일본, 조선, 만주 등 극동 지역에는 화상의 진출이 대단히 활발했고, 각지의 상권(商權)을 좌지우지하였다. 이 시기 아시아에서 활 동한 화상 자본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가 바로 광동성 출신의 화상들이다.

1842년의 난징조약과 중국의 개항 이전부터 대량의 이민송출이 있었던 동남 아시아와 달리, 일본과 조선은 각각 1858년과 1876년에 서구 열강의 압력 하에 서 비로소 개항장을 설정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광동 화상은 가장 먼저 이들

극동의 개항장에 공식적으로 발을 디딘 상인집단들이었고, 앞장에서 살펴본 서 구 양행들과 함께 매판(買辦)의 자격으로 입성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광주는 청대 유일한 대외무역항으로, 200여 년간 서구의 대중무역을 보조하며 성장한 광동 상인들은 개항 전에는 청 정부를 대리해 관세를 징수하고 교역을 독점ㆍ 통제하는 공행(公行)으로 성장하고, 개항 후에는 연안 각 개항장으로 확대해 간 양행(洋行)의 사업을 보조하는 매판(買辦)으로 성장하였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각 개항장마다 도량형과 화폐의 단위도 다른 중국 시장에서 서구 양행들은 교 역 전반에서 중국인 대리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직원 성격에 가까 운 하급 매판에서 프랜차이즈 대리인에 가까운 상급 매판까지 매판의 성격은 다양하지만, 모두 서양 상품의 판매와 중국 상품의 매집에서 손실과 수익에 따 라 차등적으로 성과급 보수를 받고, 인적ㆍ금전적 보증이 따르는 계약 관계였 다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하급 매판에서 판로 개척에 성과를 보이면 점차 취 급량을 늘리며 상급 매판으로 승진하면서 계약조건도 달라지면서, 사실상 자기 사업을 운용하는 프랜차이즈의 성격이 강해진다. 이렇게 성장한 매판 상인은 양행의 매판 이외에 독자적으로 자기 상점을 개설하여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것 이 보통이었다.

광동상인들은 개항 초기에 동아시아에서 영어에 능통하고 서구의 상업관습 에 익숙한 희귀성 있는 상업 인재였으므로, 서구양행이 광주에서 중국 각 개항 장과 동아시아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갈 때 현지 파트너였던 광동인 역시 매판으로 데리고 갔고, 광동 상인들도 이에 부수하여 중국과 동아시아 각 개항 장지로 진출하여 함께 성장하였다.

일본의 경제사학자 후루타 카즈코(古田和子)는 동아시아 개항 초기 동서교역 을 잇는 물류센터인 상해를 중심으로 방사선과 같은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그 핵심 물류는 영국산 면포였음을 논증했다. 아울러 이 상해 네트워크를 통해 중국 각지의 상인 역시 고향에서 다시 중국 각지로, 아시아로 동향관계를 자산 으로 진출했다고 지적했다. 후루타 교수가 말한 “객방(客幇) 네트워크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광동 상인이다.

[지도 8-2] 19세기 동아시아의 개항장 네트워크

출전: François Gipouloux, The Asian Mediterranean: Port Cities and Trading Networks in China, Japan and Southeast Asia, 13th - 21st century, Edward Elgar Publishing Ltd., 2011, p. 151.

근대 중국 개항장을 선점(先占)했던 광동상인

개항장 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대두한 근대 광동상인은 야누스와 같이 상반된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서구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의 첨병으로 서구양 행의 중국 시장 잠식에 일조한 “매판” 자본의 모습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 서 청 말 중국이 자력으로 서구 근대문물을 수입하여 근대적 산업을 건설하고 자 했을 때, 물심양면으로 이에 참여한 것이 서구어에 능통하고 서구 경제를 잘 아는 광동 상인들이었다. 이 두 그룹은 인적으로도 같은 그룹이지만, 보는 각도 에 따라서 애국자와 매국노의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매판 자본 으로 성장한 광동 상인은 양무운동(洋務運動) 시기 이홍장 양무파 관료의 근대 공업 건설과 각종 경제 기획에 자본과 인력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관직을 수여받고 청조와 유착한 “관상(官商)”으로 성장해 나갔다. 19세기 중반

이후 특히 개항장에서 광동 상인의 세력이 커진 것은 열강의 보호를 받는 외국 양행의 매판이라는 특수신분과 양무운동(洋務運動)의 브레인으로 활동하면서 누린 청조의 후원이라는 정치적 요인이 대단히 중요했다.

연안 개항장에서 광동 상인이 가장 집중되어 있고 동아시아 전역으로 진출하

연안 개항장에서 광동 상인이 가장 집중되어 있고 동아시아 전역으로 진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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