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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매사추세츠, 브라이튼 112 포스터 테라스 1958년 3월 18일 B. F. 할리

미국경제학회지(American Economic Review) 편집장

스탠포드 대학, 220강의실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할리님께,

3월 14일에 귀하께서 보낸 서한과 동봉된 심사위원의 의견을 흥미롭게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귀하 측 심사위원도 동일한 결론을 내신 것처럼 보임에 따라, 한국 정부의 정책이 구호물품의 판 매를 통해 비예산 수익을 창출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는 증명되었습니다. 이 정책을 이용한 그런 식의 탈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한국경제체계 운영을 일괄적으로 일반화하는 근거로써 적용해서는 안 되며, 이는 어쩔 수 없는 불운한 정책 위반 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사위원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본인의 의견은 “원저(original article)에서 제기된 문제를 명확하게 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1. 한국정유회사(Korea Oil Storage Company)(가솔린 관련), 금융협회연맹(Federation of Financial Association), 비료 물품을 맡고 있는 현재 농업 은행 – 캠벨과 털럭이 언급한 것이 아님 - , 정부물자공급소(Government’s Office of Supply)와 같이 구호물자 판매를 맡고 있는 기관들에서 들어온 판매 수익금이 재무부(Ministry of Finance)에 누적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간 과하였다는 것.

미국 경제학회지에 실린 B. F. Haley의 한국 경제 관련 평가에 대한 반박 입장을 담은 서한

생산일자 1958년 3월 18일 서한종류

철 명 35-서한철(Park Sei young) 수 신 B. F. Haley 건 명 Sei-Young Park이 B.F.Haley에게 보낸 서한 발 신 Sei-yo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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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저가 현 체계의 실제 운영을 다루는 것만큼 법 조항을 그다지 많이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주요 내용을 본인이 놓쳤다는 것.

3. 본인이 정부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환율 문제를 언급했으며 이는 심사위원이 “다소 이상하 고, 일관성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함.

1번 사항과 관련하여 심사위원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잘 이해하기 힘듭니다. 심사위원은 구호 물자 판매를 담당하고 있는 기타 기관들에게 받은 판매 금액이 재무부에 축적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 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기타 기관들을 “한국정유회사(Korea Oil Storage Company)”, 금융협회연 맹(Federation of Financial Association), 정부물자공급소(Office of Supply)라고 가리키셨는데, 재 무부를 위해 구호물자를 판매하는 그 외에 다른 기관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심사위원에게 이 문 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의 사항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본인은 한국정유회사(Korea Oil Storage Company), 금융협회연맹(Federation of Financial Association), 물자보급소(Office of Supply)를 통해 구호물품을 처분하는 한국의 방식에 대해 상당 부분 설명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로, 비록 제 설명이 애매모호하지는 않지만, 다시 한 번 다음의 사 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무부는 미국 원조 기관과의 협조를 통해 위에 언급된 세 곳의 기관만을 통 해 판매된 구호물자 수익금을 처리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며, 재무부 자체가 구호물자 판매에 관여 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심사위원 당사자도 “정부가 취급, 판매한 그러한 물자들은 물자공급소(Office of Supply) 및 금융협회연맹(Federation of Financial Association)(지금은 농업은행(Agricultural Bank))에 집중된다”라고 다른 곳에서 언급하며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2번 사항과 관련하여, 캠벨과 털럭(Campbell and Tulluck)이 아닌 제가 주요 사항을 간과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털럭 자신이 법 조항이 아닌 한국의 현 체계의 실제 기능을 다루었 다는 내용의 서신을 귀하께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캠벨과 털럭이 한국의 경제 체계가 이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증명하지 않고 연관성이 없는 예시를 들어 결론을 바 로 도출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캠벨과 털럭의 주장이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는 전제 하에, 저희 앞에 놓인 진짜 문제는 이 예시들이 한국의 전체 경제체계에 반하는 그들의 일반화 된 주 장을 지지해 줄 충분한 근거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의 논평에서 법 조항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던 부분은 한국의 상황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 한국에서 채택된 경제체계는 내부적 으로 그러한 불법행위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추론에 대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심사위원이 생각하는 주요 문제가 캠벨과 털럭의 주장의 진위여부를 조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실 없는 논쟁을 조장하는 것이며 저는 이 논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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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습니다. 저는 캠벨과 털럭이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불법행위 존재 자체 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3번 사항과 관련하여, 저는 “민간 상인들은 이러한 물자를 수입하는 데 필요한 외환을 충분히 보 유하고 있지 않다”라고 언급한 점을 제외하면 한국의 환율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심사위 원 자신이 우리의 논의 사항을 현 질문과는 다소 연관성이 떨어지는 환율 문제로 확대시킨 것이 아닌 가 싶습니다. 최저 물가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부 정책이 자동으로 한국 정부의 환율 정책 유지 노력 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둘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환율 수준이 어쨌든 간에 한국의 현 경제 상황에서는 가능한 최저 물가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 리의 논의 사항을 환율의 타당성으로 확대하는 것은 자유 시장과 정부 고시 가격 사이에는 잠재적인 혹은 실제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문제에 대한 우리 논점의 근거를 없애는 것과 같습 니다. 털럭과 본인이 벌인 논쟁은 정부가 과연 “비현실적으로 낮은” 공시 환율에서 축적된 혜택을 최 종 사용자들에게 낮은 물가의 형태로 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저환율의 존재는 우 리의 의견 교환에 있어 필요한 조건이며 털럭이 우리의 논의 사항을 환율 문제로 확대시키지 않은 것 은 옳았다고 봅니다. 저 또한 이 문제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귀하 측 심사위원이 캠벨-털럭의 논문에 응수할 필요가 있다는 본인의 의견에는 동의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기뻤습니다. 물론 심사위원의 의견 중 일부에 대해 반박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기 는 하였지만, 심사위원의 일반적인 의견에 뒤이어 정정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원저가 나타내고 있 는 한국 정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명확히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귀하 께서 다음 비평을 준비 중이시라고 제게 말씀해 주셨는데 그 내용이 학회지에 실린 것을 보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신 것만큼 잘 준비되지 않은 의견을 보시고 알려주신다면 그 논란 이 되는 부분은 삭제하고 좀 더 수용 가능한 답변을 다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행운을 빌며,

당신의 진실한 벗, 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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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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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이승만 대통령이 양유찬 주미 대사에게 보낸 경향신문 폐간 관련 대응을 조언하는 서한

생산일자 1959년 5월 29일 서한종류

철 명 39- 이승만 대통령 사신철(Felix B. Stump)

(1958~1959) 수 신 양유찬

건 명 이승만 대통령이 양유찬 대사에게 보낸 서한 발 신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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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5월 29일 No. 1314

수신: 양유찬 대사 발신: 대통령

동봉한 봉투 안에는 밸리포지 자유재단(Freedoms Foundation at Valley Forge) 이사회에 보내는 편지가 들어있습니다. - 대사께서 참고할 수 있도록 사본도 첨부했습니다.

그 편지를 스텀프 제독에게 전달할 때 제독 부부를 대사관에서 접대하고 싶다는 말도 전하길 바랍 니다. 자유재단(Freedoms Foundation) 이사들 명단을 첨부합니다. 스텀프 장군이 가까이 사는 이사 들이 있으면 초청자 명단에 포함시키길 원할 것 같아서입니다.

대사께서도 비밀 보고서에서 보았겠지만, 스텀프 제독이 내게 경향신문 사건에 대해 언급을 해서 내가 그 상황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혹시라도 또 질문을 하는 경우에는 대사께서 우리의 견해를 다시 설명해 주길 바랍니다. 미국 대사도 자신의 견해를 표시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의혹을 확실히 해 소해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견해를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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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류큐제도의 일본 반환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담아 Stump 제독에게 보낸 서한

생산일자 1958년 11월 18일 서한종류

철 명 39 - 이승만 대통령 사신철(Felix B. Stump)

(1958~1959) 수 신 Felix B. Stump

건 명 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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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1월 18일

친애하는 스텀프 제독,

최근에 제독이 발티모어 키와니스 클럽1) 에서 한 연설에 관한 신문기사를 아주 흥미 있게 읽었습니 다. 저는 미국 국민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교회에 침투하고 있고 학교에도 공산주의가 침투하 려고 하고 있다는 제독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더 이상 간과되어서는 안 될 매 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베트남으로 여행 중에 비행기 엔진 문제로 오키나와에 착륙해야 했습니다. 버거(Burger) 준장이 차로 섬 주변을 안내해 주었고 저는 미군이 그곳에서 하고 있는 작업을 볼 기회를 가지게 되어 기뻤 습니다. 제가 농담 삼아 작업이 모두 끝나면 아마도 일본인들에게 넘겨주게 되지 않겠냐고 말했더니 버거 준장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가 오키나와에서 만난 미국 군인들의 사 고방식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섬이 침략으로부터 동남아시아를 방어하는 방파제로 서 미국의 통제 하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그 입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1) 실업가 및 지적 작업인 중심의 국제민간봉사 사교단체 , 1915년 Detroit에서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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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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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8일

근계,

본인은 Time지의 초기 구독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아주 오래전 Time이 뉴스를 보도하는 한 장짜 리 신문 시절, 마스터 헤드(발행인 란)에 “Time에 게재된 것은 신뢰할 수 있다”고 자랑하듯 설득력 있 게 게재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편향되고 편협한 한 장짜리 신문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습니다. Time은 선전 분야에 어느 정도 깊이 관여하더라도, 모험하기에 안전한지를 간파하는 방법을 감지하였던 과도기적인 미묘한 단 계를 겪었습니다. 독자를 흥미롭게 할 수 있다면 한계를 두지 않고, 대중은 도덕적 편견과 편협, 그리 고 편향된 접근 방식에 관심이 없다는 결론을 귀사가 내린 것이 분명합니다.

본인은 방금 3월 21일 자 귀지에 실릴 “투표 기권을 어떻게 방지하나?” 제목의 남한 관련 기사를 완성했습니다.

본인은 귀사의 진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귀사는 인용했다고 주장합니다. 서명 이 없는 인용을 증거로 대는 잡지는 익명의 편지 작성자만큼이나 비겁합니다. 귀사는 법정에서 증거 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단적인 주장일 뿐만 아니라 순전히 날조된 것으로 내팽개쳐 질 것입니다. 어떠한 방관자(국외자)도 귀사가 귀사 기자들에게 돌린 단어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인용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귀사는 선거 보도에 종교 문제를 삽입하였습니까? 왜 귀사는 천주교 신자인 장면 (John Chiang) 씨를 언급하고 “개방적이고 정직한 선거에서 장면 씨가 다시 이길 수도 있다.”는 진술

26 TIME지에 실린 3·15 정부통령선거 기사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의 서한

생산일자 1960년 3월 18일 서한종류

철 명 50-이승만 대통령 사신철 수 신 Gentlemen 건 명 Frank E. Masland Jr.가 Gentlemen에게 보낸 서한 발 신 Frank E. Masland 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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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을 덧붙였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종교적으로 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개신교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 는 사람들에게 귀사는 종교적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귀사는 “한 젊은 천주교 지도자가 각하가 이끄 는 녹색 셔츠 차림의 반공연맹 지역 책임자 칼에 찔려 사망했다”고 게재하면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재차 귀사는 “각하의 심복인 감리교 지역 책임자에게 찔려 사망한 젊고 용감한 천주교 지도자 사진”

으로 종교적 개입을 하였습니다. 의도적이었든 혹은 비의도적이었든 귀사는 “그 젊은 천주교 지도자”

가 공산주의자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귀사는 그가 반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었다고 게재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선거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은 이곳 미국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본인은 그 젊은 천주교 지도자가 공산주의자였다는 귀사의 암시에 이의 를 제기하며 왜 귀사가 정치 캠페인에 종교를 집어넣었는지에 대해 묻습니다.

본인은 약 2주 전에 한국에서 돌아왔고 세계에서 가장 큰 여자 대학교인 이화여자대학교를 방문했 습니다. 본인은 이승만 대통령 각하와 함께 45분을 지냈습니다. 선교사 일원으로 본인은 공산주의의 희생양들이 살고 있는 고아원과 미망인 마을과 판자촌을 방문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이 어떻게 되었을 지 그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정통하고 현재의 상황을 알고 있으며 편향되지 않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오늘날의 한국에 대해 우리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 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가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는 한국 에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 공약을 수행하여 우리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평화 협상”을 저질렀습니다.

북측에 산과 하천과 수력 발전소를 남겨둔 채 한국을 절반으로 분단한 미국의 결정은 남측을 산업 과 발전소가 거의 없는 농업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을 구하기 위해 전쟁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서 우리 자신에게 꼭 필요한 교두보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의 공산주의자와 교전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을 미국이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한국에 갖고 있는 책무보다 더 큰 책무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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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국가는 없습니다. 경이로운 것은 한국이 우리의 긴밀하고 진정한 친구라는 사실입니다. 이 대통 령 각하를 비판하기보다는 한국에 타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인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 실에 언제까지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Bourguiba나 Nkruma나 혹은 Nasser와 같은 사람들을 다루는 보통의 국가 원수를 가졌더라면 우리는 오래전에 떠나도록 요청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동방의 아일랜드 사람”인 그 한국인은 키가 크고, 튼튼하고 말랐습니다. 그는 강인하고 권투 경력 을 가진 개성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진실하지만 상처받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35 년간 피정복 국가로 있었고 공산주의자의 극악무도한 행위들을 경험한 그들은 오직 경제재건만 추구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유로 그들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 한국에게 큰 책무를 지고 있는 미국이 기 꺼이 제공해야만 하는 전폭적인 동정과 재정적인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Time지가 건설적인 서비스를 수행할 열의가 조금이라도 있고 정의라는 대의명분 아래 도울 의향 이 있다면 귀사의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부와 민간 부문이 남한과 남한 경제 발전에 대한 원조 제공을 장려하기를 제안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귀사는 우리 자신의 매우 이기적인 이해 당사국들 에게 힘을 보태게 될 것이라는 점을 덧붙입니다. - 왜냐하면 반공 한국과 대만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승만 대통령 각하를 방문한 마지막 5분은 무릎 끓고 기도하는 데 보냈습니다 ; 세 명의 선교사와 정보부장, 이승만 대통령 각하와 본인의 아내, 그리고 나 자신은 “하나의 나라, 하나의 언 어, 하나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기도를 끝냈습니다. 이 기도문을 Time지가 지지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매우 진정한 Frank Ma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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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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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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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온 서한 루마니아와 헝가리로 강제 추방된 한국인들

로마, 11월. 1,000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현재 루마니아의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피테스티(Pitest) 시 근교의 플로리카(Florica)라는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강제수용소는 과거에 마르코 장군(General Marco)의 공산군들이 납치한 그리스 국민들을 그리스의 에피루스(Epirus) 지 방에 구금한 후 그리스 내전 중에 루마니아로 추방한 데서 유명해졌습니다.

1954년에 일부 그리스 추방자들이 플로리카 강제수용소에서 루마니아의 여러 도시와 마을로 옮겨 졌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국제적십자사(International Red Cross)의 주선으로 본국으로 송환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플로리카 수용소는 그날부터 남한을 침공하던 중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추방시킨 한국 가족들을 받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추방자들은 봉인된 트럭을 탄 채 철도로 소련의 여러 지 역을 거쳐 루마니아로 보내져 부카레스트(Bucarest)의 비밀경찰인 “세큐리테이트(Securitate)”에 인 계되었습니다. 소련과 루마니아의 국경에 있는 웅게니(Ungheni) 지역에 한국인들이 최초로 격리 수 용되었으며 루마니아의 서부지역, 즉 플로리카 강제수용소에 배로 이송되었습니다. 이 집단에는 모 든 연령대의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플로리카는 아르게시(Argesh) 강둑 위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여름철에는 기후가 아주 좋지만 겨울철에는 매우 추워서 영하 30°C까지 내려갑니다.

이 마을 바로 바깥에 있는 강제수용소는 판잣집 몇 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의시설은 갖추지 않고

27 보고서 :‘루마니아와 헝가리로 강제 추방된 한국인들’

생산일자 서한종류

철 명 30-공보 관계 서한철 수 신

건 명 Koreans Deported In Roumania And Hungary 발 신 A. Gr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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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있습니다. 음식은 늘 부족하고 질이 떨어집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성적으로 문란하며 대개 비참하 고 불쌍합니다. 이렇게 억류된 사람들은 루마니아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으며, 루마니아 사람 들은 이들을 동정적으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억류된 사람들 중 다수가 질병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최근 이태리에 도착한 루마니아 난민들이 말하기를 루마니아에 있는 한국인들이 의복상태가 너무 형편없으며 의료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고 질병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체력 이 더 좋은 재소자들은 인근에 있는 국영농장에서 일하도록 선발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능력이 있 는 사람들은 여러 산업용 공장으로 보내거나 소련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는 루마니아 북서부의 우 라늄 광산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새로 도착한 이 루마니아 난민들로부터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한동안 가족들과 떨 어져 루마니아에 있는 여러 공산주의자 교육센터로 분산되었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센터 들은 북한이나 중국 교육자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이 센터들 중 하나는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 기슭에 있는 트르고비슈테(Targoviste) 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학까지 여러 단계로 구성된 특수학교가 운영되고 있으며 언어는 한국어이고 러시아어도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교육제도는 소련의 교육제도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14세가 된 어 린아이들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인 콤소몰(Komsomol)에 강제로 가입하게 됩니다. 이 조직의 목표는 게릴라전이나 태업(sabotage)을 위해 마르크스 사상을 적절하게 주입하기 위한 교육훈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소련제 소총으로 도시 인근의 사격장에서 일주일에 세 번 사격 연습이 있습니다.

목표물은 이승만 대통령과 기타 대한민국 정부 요인들의 초상입니다. 콤소몰(Komsomol)에서 적합 한 것으로 인정받은 교육생들은 추가로 공수(空輸)과정을 교육 받게 됩니다.

루마니아의 한 지방인 트란실바니아(Transilvania)의 카르파티아 산맥 북쪽 사면에 있는 스탈린 (Stalin: 구 브라쇼프(Brasov)) 시 외곽에서 이런 종류의 또 다른 교육센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곳의 젊은이들은 트랙터와 탱크, 그리고 항공기 등을 제조하는 시(市) 공장에서 박봉을 받으며 일해 야 합니다.

아주 신중한 선택과정을 거쳐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젊은이들은 루마니아의 수도이자 트란실 바니아 지방의 주요도시인 클루지(Cluj)의 주도인 부카레스트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부카레스트에 서는 한국 학생들이 포포프(Popov: 구 베르틀로 장군(General Berthelot)) 가(街)의 비밀경찰들이 거 주하는 안가에서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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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태리에 도착한 같은 루마니아 난민들에 따르면, 이렇게 교육을 받은 한국인 젊은이들이 이미 점령지인 북한으로 보내져서 거기에서 대한민국에 잠입하여 스파이행위와 태업을 할 목적으로 공산군에 징집되었다고 합니다.

궁핍함과 과로로 추방된 수많은 젊은이들이 결핵에 걸려서 이들 중 일부는 작년 여름 예전에 루마 니아 왕조가 거주했던 시나이아(Sinaia)에 있는 결핵 요양원(TB Sanatorium)으로 후송되었습니다.

다른 소식통들로부터는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봉기가 있었던 기간 중 루마니 아에서도 반 공산주의운동이 일어났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클루지 대학(Cluj University)의 한국 학생들이 동료 루마니아 학생들과 함께 이 운동에 참가했었는데, 이 사건으로 루마니아 사람들과 러 시아 당국자들이 대경실색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젊은이들은 대학에서 나와 감옥에 수감되었 고 학생주택에서 추방되어 강제노동에 처해졌습니다. 이 용감한 젊은이들 중 일부는 체포되어 루마 니아 인민공화국(Roumanian Popular Republic)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10년에서 15년까지 다 양한 기간 동안 강제노동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결국, 1956년 10월에 있었던 봉기에 참가했던 이태리에 있는 헝가리 난민들은 부다페스트 (Budapest)의 러시아 탱크에 맞서 자유를 위한 싸움에 참가했던 한국인 젊은이들에 대한 소식을 전 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인 추방자 그룹들은 무자비한 소련 제국주의의 희생자들로서 헝가리에 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이 그레고리(A. Gr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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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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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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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15일

Editor, The Times Los Angeles

[2월 4일] 일요일 사설의 글쓴이는 대한민국이 처한 조건에 대해 관대한 이해를 모색했음이 분명하 지만, Times지 독자들에게 공정하기 위해-- 그리고 그 글쓴이의 깨우침을 위하여— 널리 오해되고 있는 것을 논박하기 위한 사실들을 싣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정확히 미합중국[U.S.] 대통령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우리 자신이 그러 한 것만큼 부패하지 않은 선거에서 자유롭고 비밀이 보장되는 인민들의 투표에 의해 “그 자신의 권력 을 영속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엔 위원회[U.N. Commissions]의 공식적 보고서에 의해 증명되어 왔고, 또한 그것은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래로 한국의 매 대통령 선거마다 감독되고 관찰되어 왔습니다. 세계 어느 국가도 그렇게 유리집처럼 투명하게 자진해서 그리고 자랑스럽게 운 영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수당과 좌파들에 의해 주장되는 것처럼, 도쿄나 홍콩에 있는 그들의 소속 본거지로부터 일년 중 불과 며칠만 한국을 방문한 냉소적인 특파원들에 의해[나도 그 중 하나였 습니다.] 역겨운 장난같은 추론들이 들려오고 퍼트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내각은 2월 3일, 대통령선거가 통상적인 경우[쌀 문화권에서는 농부들을 여론조사에 참가시키지는 않을 것이므로]보다 더 일찍, 하지만 헌법에서 요구된 40일의 캠페인 기간 이후인, 3월 15일에 열릴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거일을 늦추려고 시도했던 것은 이승만 박사의 지 지자들이 아닌 반대편이었습니다.

작년에 교수형을 당한 “야당지도자”는 적절한 절차에 따라 법정에서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습 니다. 불법적인 공산주의 정당과 관련된 그의 과거행적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28 이승만 대통령이 LA TIMES의 한국 정치 관련 사설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의 서한

생산일자 1960년 2월 15일 서한종류 일반 서한

철 명 서한철(경제 지원 관련 - 미국인 Mr. O.H.P. King) 수 신 건 명 Editor, The Times Los Angeles(O.H.P. King) 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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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현 부통령의 “가택연금”에 대해 제기된 혐의는 완전히 사실이 아닙니다. 그 재임자는 그가 1956년 9월 28일 그 자신의 정당회의에서 불만을 품은 정당원에 의해 습격을 받은 이래로 그의 공공 출현을 제한하여 왔습니다. 그 정당은 부통령에 의해 이끌어진 두 당파 속에서 수년간 분열되어 왔습니다.

장면[Chang Myoung]과 그 일파는 대통령직을 위해 조병옥[Chough Byong Ok][현재 미국에서 수 술 받고 있는]을 지명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양당제 체제 하에 운영되지만, 물론 이곳의 경우만큼 매끄럽지는 못합니다. 그 대답은 경험부족이라 할 것입니다. 232개의 의회의석은 자유당이 149석[이승만의 진정 보수당원들], 민주당 이 73석, 무소속이 10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정당들은 주로 정부의 구조에 대해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정당은 균형 잡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분화를 가진 미국식 구조를 선호합니다. 부통령의 정당은 대통령이 명목상 최고위자가 되고 수상이 변덕스럽게 의회를 통치하는 [드골 이전][pre-de Gaulle] 프랑스식 수상제 구조를 선호합니다.

그러한 기본적인 의견 차이를 본다면 왜 이승만 박사가 그의 부통령과 협력할 수 없는지에 대해 명 백합니다. 하지만, 그의 정당이 과반수의 3분의 2를 얻기엔 적은 득표를 얻었기 때문에, 동일한 정당 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관들을 가득 채우길 요청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을 개정할 수 없었습니다.

Dick Nixon 없는 Ike2) 을 상상해보십시오. 좀 더 나쁘게 생각해본다면, 부통령 Mr. Truman과 함께 능률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를 그려보십시오!

또 다른 관점에서 : 이승만 박사는 상원을 만들기 위해 헌법을 수정하고자 주장했었습니다. 이것은 1952년에 벌어진 일이었고, 질투심에 가득차고 자신들의 큰 권력을 공유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단원 제의 의회는 되풀이하여 선거를 위한 자금과 상원의 운영에 대해 투표하기를 거절해왔습니다.

의회 회의로부터 나온 반대편의 이러한 이질적 분출은 다수의 통치를 믿는 어떠한 사람에 의해서 도 정당화 될 것입니다. 다만, 그 반대편은 2주 동안 다수당 의원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 그들 스스 로 바리게이트를 쌓았으며, 정부운용과정에 꽤 지장을 주어 행정부가 포기할 때까지 물리적인 의사 진행 방해를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여 왔습니다. 대신에, 국회의장은 의회경비들에게 물리적으로 의 사당 문을 열 것을 명령했고, 침구들과 다른 장애물들이 치워졌습니다. 이에 화가 난 소수당은 그 회 기를 보이콧했고, 그때 법안들이 통과되었습니다.

이승만 박사에 대한 비판들 대부분이 잊은 것은, 자유 한국이 여전히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다는 점 입니다. 그 핏빛 어린 전쟁의 국면은 유예되었지만, 잠입, 전복 그리고 불안의 확산에 의해, 공산주의 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확장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2)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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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의 모스크바 여행 중에 서울에 잠시 머물러야 한다면,[만약 그가 그 경솔한 여행을 계속하기를 고집한다면] 아마도 그는 거기에 있는 유엔군[두 개의 미(美)사단을 포함 한]이 비무장지대 근방에 있는 새롭게 패인 공산주의자들의 벙커와 진지들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 제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승만 박사가 우리에게 말했지만 우리가 현 상태에 안주하여 무시 했었던, 1949~50년대 38도선을 따라 구축된 붉은 군대[the Red military]에 의한 위협들로서 초창 기의 공화국을 위협하고 있는 또 다른 휴전협정 위반 행위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편집자 : 극동에 관한 강사로서-- Beverly Hills의 Gertrude Purple Gorham은 저의 대리인입니 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에서의 전직 연합 통신사[Associated Press]특파원으로서—저는 스스로 이들 국가의 현재 발전 현황에 대한 정보통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승만 박사의 조언가로서 삼 년 이상을 보냈으며, 그를 가장 대단한 인물이자 이 세기에 가장 중상모략 된 인물로서 고려하고 있습니 다. 저는 1949년 초에 처음으로 한국 땅에 발을 디뎠고 1958년까지 매년 왕래하여왔으며 이번 여름 에 저는 AP에서 다룬 바 있던 그 비극적인 전쟁 발발 1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다시 갈지를 고민 중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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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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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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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3일 Editor, The Times Los Angeles

Sir,

저는 “Letters to the Editor”의 엄청난 양 때문에 그것들 모두를 싣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의견을 표출한 그 편지들이, 특히 허위거짓의 Times지 사설의 근거가 되었을 때 에는, 그 사실에 있어 나타난 오류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한 달 전 귀하의 사설인 “The Continuing Tragedy of Korea”와 2월 14일 날짜로 수정되었으 나 여전히 발간되지 않은 저의 책에 관해 언급코자 합니다.

그 사설은 은연중에 대한민국[ROK] 대통령 이승만이 고압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정부를 위해 원 조된 비용으로 그 스스로의 권력을 영속시켜 온 것처럼 나타내고 있으며 반대편 지도자들은 교수형 에 처하거나 가택연금을 당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유 한국은 양당제가 체계가 없 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정하게 말해서 1949년 창립 이래 대한민국에서의 매 국가적 선거는 책임 있는 UN 위원회들 [United Nations officials]에 의해 감독되거나 관찰되어 왔음은 잘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민의 의지로서 승인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다른 정부도 자발적으로 그러한 유리집[a glass house]처럼 운영되지는 않습니다.

은연중에 이승만 박사가 마치 라틴 공화국들[the Latin republics]을 간신히 흉내 낸 것처럼 묘사하 거나 또는 옹졸한 폭군으로서 행동한 것처럼 표현한 것은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의 편향된 비난을 앵 무새처럼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이따금씩 국회[the National Assembly]를 무뚝뚝하게 다뤄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승만을 제외한 단원제의 조직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 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균형 있게 분리되어 있으며 대통령을 선출하는 인민들과 입법적 권위를

29 LA TIMES의 이승만 대통령 비판 기사에 대한 반박 내용을 담은 서한

생산일자 1960년 3월 13일 서한종류 일반 서한

철 명 서한철(경제 지원 관련 - 미국인 Mr. O.H.P. King) 수 신 건 명 Edior, The Times Los Angeles(O.H.P. King

Pacific Palisades) 발 신 O.H.P.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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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공유하는 상하 양원을 가진 정부를 원했습니다. 의회는 그런 권력 중 그 어느 것을 내주는 것도 꺼렸 습니다. 하지만 1952년 헌법이 꽤나 수정되었고 대통령 선거가 대중적 투표에 의해 치러져 왔음에도 의회는 여전히 상원 창설을 위한 자금 안에 투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양당제 체제입니다. 231석의 의회의석은 3월초를 기준으로 자유당[Liberals] 150석, 민주당[Democrats] 71석, 무소속[Independents] 10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유당은 미국식 유 형의 민주주의를 선호하지만, 민주당은 대통령이 명목상 수장이고 수상이 의회를 변덕스럽게 통치하 는 [드골 이전의] 프랑스식 수상제를 선호합니다.

역설적으로 한 명의 민주당원이 현재 부통령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1956년의 선거에 있어 반-이승만 성향의 6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함으로서 선거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다섯 명은 투표에서 9분의 5를 얻었습니다.

[3월 15일] 선거일 이래 공화국이 수립되는 동안 선거 캠페인을 진행해 온, 당선자인 장면[Chang Myong]이 사실상 가택연금에 처해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의 지난 반-은둔 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장[Chang]이 1956년 그 자신의 정치적 정당의 회의에 서 수중에 상처를 입은 이후로 시작된 것입니다. 민주당은 장[Chang]과, 한 달 전 암수술 이후 워싱 턴에서 그가 죽기까지 1960년 공천후보자명단[ticket]에서 승리하여 선두를 달리던 조병옥[Chough Byong Ok] 사이의 파벌 갈등에 의해 찢겨져 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장[Chang]은 그의 부상을 정치적 자산으로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발로 2월 16일 Times지에 실린 내용은 잘못된 표현들이 조합되었습니다. 그것은 1952년과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이 아무 경쟁자 없이 남게 된 데 죽음이 개입된 것처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하에서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 [1952년] 선거 전에, 조봉암[Cho Bong-am]은 공산주의 북한과 음모를 꾸민 것에 대 해 유죄가 입증되었고, 반역자로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0년 민주당은 자유당인 이승만에 반대하 는 활동으로 인기를 얻은 정치가인 P. H. Shinicky[신익희]를 선택하였다. Shinicky는 선거 10일전 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52년에는 3명, 1956년에는 Shinicky가 죽었을 때 선거캠페인 동안 이승만을 대적했던 조봉암 [Cho Bong-am]을 포함하여, 1952년과 1956년에 모두 이승만에게 반대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 입니다. 전-공산주의자이자 불법적인 진보당[the outlawed Progressive Party]의 당수였던 조봉암 [Cho]은 1958년 초 21명의 반역죄의 피고 중 하나로 체포되었습니다. 조봉암[Cho]은 서울 지방법원 [Seoul District Court]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고,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서울 고등법원[Seoul Appellate Court]은 유죄를 재차확인하고 조봉암[Cho]과 다른 한명의 공동피고에게 교수형을 내렸습니다. 처 형은 1959년 7월 31일에 이루어졌고, 1952년 선거 전이 아닙니다.

이승만 박사는 자유세계 사이에서 기념되어야할 날짜인, 3월 26일에 85세의 나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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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이래, 정치적으로 활약한 그는 국제적 현장에서의 거물들 중에서 압제와 공산주의에 대한 가 장 중요한 반대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침략자들을 달래기 위해 원칙과 타협하려는 겁쟁이들 의 모든 탄원을 견뎌왔기 때문입니다. Patrick Henry처럼 그는 자유는 삶 그 자체보다 선행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만약 이승만 박사가 미국을 둘러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지지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기에 합중국[the United States]에도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O.H.P. King Pacific Palisades

편집자 : Hubbard Keavy는 내가 1949년 1월부터 1952년 4월까지 일본과 한국의 연합 통신사 [Associated Press]를 대변해왔다는 것, 1953년 말 한국에 대한 연락담당관이자 이승만 박사의 언론 부문 조언자로서 돌아간 것에 관한 사실의 진실성을 보증해 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진실함과 공정 함에 대한 관심으로서 이 편지를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승만 박사의 탄신 기념일 행 사를 위해 쓴 축사를 보시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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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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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관련 서한Chapte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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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 만 대 통 령 영 문 서 한 자 료 집 Ⅱ

외신 기자 회견 관련 서한

Chapter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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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승만 대통령과 UP통신과의 인터뷰 내용

생산일자 1958년 3월 24일 서한종류

철 명 30-공보 관계 서한철 수 신

건 명 President Syngman Rhee's Answers to Questions Submitted

by United Press Correspondent, Charles R. Smith 발 신

1958년 3월 24일

합동통신사(The United Press) 통신원인 찰스 스미스(Charles R. Smith)씨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변

질문 1. 각하께서는 인생 대부분을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우시는 데 쓰셨습니다. 각하의 83 번째 생신을 맞아 각하께서 품고 계신 평생 동안의 목표 달성에 대한 전망은 어떻게 보시 는지요?

답변 1. 저는 궁극적으로 올바른 것이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이러 한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는 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고독한 대의(大義)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한국의 독립을 위한 싸움을 시작했고 이를 계속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침략적 성향을 모르고 있는 서구 국가들은 일본에게 전 폭적인 지지를 하고 있었고 그들이 사실상 일본의 침략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 해 주었을 때 이를 들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서구세계의 친구들에 게 “귀하가 폭력배들이 이웃에게 총을 겨누고 강도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면 그 폭력배들이 언젠가는 그 무기를 귀하에게 겨누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때 당시 제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1941년 12월에 가서는 제가 했던 말들이 옳 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전망은 훨씬 더 밝아졌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열강들은 아직도 무장된 힘에만 근거를 둔 힘의 정치보다도 우리의 대의인 정의에는 관심이 덜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능력을 활용하여 올바른 것이라는 대의를 지원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한국을 분단시키는 데 있어서 러시아를 지원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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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기자 회견 관련 서한ChapterⅢ

정의로써 해결하려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연합하지 못하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 세계 평화와 인간의 자유라는 대의를 희생시켜가면서 -- 공산주의 폭력배 세력을 달래려고 노 력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오늘날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어 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쟁취하고자 하는 평화옹호론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으나, 이제는 아무런 보람도 없이 거의 유화정책이라는 진퇴유곡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각 국가적으로든 아니면 국제적인 차원에서든 간에 폭력배들은 어쩔 수 없이 폭력배들이라는 인식이 팽배해가고 있으며 또한 이제 그런 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들과 논의할 수 없으며, 이들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정도의 회의 나 협상 또는 훌륭한 회담도 이들로 하여금 영원히 정의와 평화라는 조건을 수용하도록 하 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가장 크게 힘을 얻고 있는 원천입니다. 저는 우리의 전망이 나날이 밝아져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국가들이 더 빨리 장래의 세계 정복자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를 해방 시키고자 하는 결의를 가지고 연합하면 할수록, 진정으로 용감한 새로운 세계가 우리의 시 야로 떠오르는 모습을 더 빨리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제 평생의 목표를 성취하는 순간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세계정세를 당시 그 대로 보았을 뿐이며 지금은 역사 속에서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궤적을 따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도 힘이 올바른 것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 나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올바른 것이 힘을 만들어낸다는 제 평생 의 지도원칙을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신하고 있습니다.

질문 2. 각하께서 장수하시게 된 주요한 요인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답변 2. 저는 어린 시절부터 무엇이든 제 안에 있는 강점을 더 많이 사용하기보다 덜 사용함으로써 약하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신 제 부친의 교훈을 따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힘이 한정되어 있으며 어느 한순간에 이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하게 되면 마치 가솔린 탱크가 새어 나가서 말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원천이 너무 빨리 고갈되어 버릴 것이 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훌 륭한 힘의 저장고와 자원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더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더 많이 주어 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귀하가 오랫동안 걷게 되면 당연히 앉아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듭니 다. 그러나 다음에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한계가 더 늘어나게 되어 그 한계에 도달하기까 지 너무 심한 고통을 겪지 않도록 더 힘을 내어 노력하고 약점을 극복하라는 것이 저희 아 버지의 이론입니다. 이것이 제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켜온 습관입니다. 어떤 의사들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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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오후에 낮잠을 자고 나면 좀 더 상쾌해질 것이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기에 그렇게 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인생은 너무나도 짧기 때문에 계 속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지금 이 노년에도 저는 피로와 쉬고자 하는 욕망 을 극복할 수 있으며, 제 아버지의 교훈이 평생 동안 제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원칙을 적용해서 제 수명이 연장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우 리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물주께서 많은 위험과 우여곡절 속에서 도 제 생명을 지켜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수도 없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일구어 놓은 성공과 함께 제83번째 생일을 자축하고 최소한 제 조국의 절반이 자주독립국으로 복구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 다. 저는 이제 지금까지 제 생명을 연장해 주신 하느님께서 제 조국 전체가 통일되고 신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조금 더 생명 을 연장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저는 귀하의 언론을 통해 행복한 생일을 맞도록 안부 를 전해주신 제 모든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하며, 기도로써 저를 지탱 하게 해 주신 제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분들께도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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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기자 회견 관련 서한Chapter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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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기자 회견 관련 서한Chapter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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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이승만 대통령과 INTERNATIONAL NEWS SERVICE 도쿄 지국과의 인터뷰 내용

생산일자 1958년 3월 22일 서한종류

철 명 30-공보 관계 서한철 수 신

건 명 Answers to Questions Submitted by Mr. Sidney White,

Executive Editor, International News Service, Tokyo Bureau 발 신

1958년 3월 22일

국제뉴스서비스(INTERNATIONAL NEWS SERVICE) 도쿄 지국의 수석편집자인 시드니 화이트 씨(MR. SIDNEY WHITE)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변

질문 1. 각하의 83번째 생신에 즈음하여 각하의 인생이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 면 그 성공의 일부에 대해 염려가 있으신지요?

답변 1. 예. 저는 제 양심에 비추어 제 인생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위대한 업적에 대한 거짓된 느낌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선한 싸움을 결코 중단해 본 적이 없기 때문 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제가 만약 올바른 것에 대해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단 하나 의 목적만을 위해 그것을 추구한다면, 그 대의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궁극적으로 는 올바른 것이 이긴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이것이 큰 승리입니다.

질문 2. 각하께서 평생 동안 성취하시고자 분투해오셨지만 지금까지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이 있으신지요?

답변 2. 저는 평생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해왔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남북 한이 아직도 처참하게 분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머지 않아 통일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는 제 생애의 원칙이었던 신념의 한 조항이며, 이 것을 따르면서 실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을 무한정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질문 3. 각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업적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답변 3. 어떤 것이든 특정한 업적을 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주장할만한 권리를 가지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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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기자 회견 관련 서한ChapterⅢ

변하고자 노력해 본다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때 저와 동포들에게는 그것이 큰 기 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 끝난 문제라고 할 때에도 한국 의 독립이 제게는 평생을 바친 대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 한 순간도 저 혼자만의 노력 으로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945년 10월 해 방이 된 후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서 서울에 도착했을 때 저는 거의 적의 캠프에 있는 것처 럼 느껴졌습니다. 많은 곳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저를 “인민공화국의 대통령(the President of the People's republic)”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저는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인민 공화국의 시민으로 부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공산주의자들이나 우리의 북녘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을 자극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미군 정부 관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천도교 빌딩에 운집한 젊은이들의 대규모 집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는 연단에서 그 들에게 “나는 여러분들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이며 러 시아를 조국으로 부르는 여러분 모두는 나의 적이며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은 이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한국의 남부 지역을 순회하면 서 모든 대도시에서 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운 저의 1인 전쟁이 시작되게 된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우리나라의 남부 지역에서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한국은 여전히 분단 상 태가 지속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북녘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950년에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그들의 사악한 침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 령(President Truman)의 중대결정으로 미군과 유엔군이 우리 편이 되어주었고 동맹국들 이 통합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한국의 공동목표를 위해 우리와 함께 힘을 합쳤습니다.

그리고 일부 자유국가들이 여전히 겁을 내고 불필요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는 있 지만, 저는 우리의 공동의 적이 우리와 그들을 정복하도록 허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 니다.

질문 4. 각하의 공직생활과 조국에 헌신하는 과정에서 거두신 수많은 성공과 업적이 주로 무엇 때 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질문 5. 각하의 발자취를 밟아 오시는 동안 각하의 모범으로서 또는 안내자로서 그 어느 누구보다 도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있으신지요?

답변 4 및 5.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님 덕에 공자님의 가르침을 교육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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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다른 영향보다도 전능하신 하느님 덕분입니다.

유교 가정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저는 어린 시절에는 심지어 기독교의 숭배방식을 비판 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배우고 싶어 했던 저는 1895년에 서울에 있는 감리교 선교학교(Methodist Mission School)에 가서 예배실에 다니면서도 선교사들이 제가 가지 고 있는 유교철학으로부터 저를 떼어내기 위해 영향을 주도록 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 학교에서 미국의 초기 역사와 미국의 독립전쟁 및 미국인들이 누렸던 개인의 자유에 대 해 배우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전제 군주적 통치하에 있던 우리나라 국민들이 그러 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축복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황제와 그의 지지자들이 반역자 집단이라고 여겼던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적인 선동가 가 되었습니다. 오래 끌었던 투쟁이 끝난 후, 다른 여러 사람들 중 저는 어두운 지하 감옥에 수감이 되었습니다. 두 발이 나무평판에 고정되고 -- 칼(cangue)이라고 부르는 -- 5피트 내지 6피트 정도 되는 나무편자의 한쪽 끝에 목이 잠긴 채로, 양손은 칼 위로 쇠고랑이 채 워졌습니다. 7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 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동료 죄수가 저에게 신문을 크게 읽어주었을 때 제가 지난밤에 처형되었다는 소 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여기에서 어디로 가게 됩니까?”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여 러 가지 생각에 잠겨 학교 예배실에서 들었던 것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머리를 굽혀 칼 위에 대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기독교인이 된 과정이며, 저는 한 번도 이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신께서 진실로 제게 잘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석방이 되 기까지 감옥에서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왔습니다.

질문 6.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각하를 뒤따르게 될 한국의 젊은 지도자들에게 어떤 내 용을 조언해주시겠는지요?

답변 6. 한국의 젊은이들은 제가 우리나라의 평화적인 발전과 번영에 기여해 온 바를 실행에 옮기 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새롭게 형성되던 시 절에는 외국인 참관인(observers)들뿐만 아니라 일부 한국인들 스스로도 민주정부를 성공 적으로 수립할 수 있을지 의심했었습니다. 그러나 헌법이 채택되어, 그 헌법에 따라 자유 선거가 치러지고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가 조직되었습니다. 정부 안팎으로 심각한 문제 는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요한 정당 2개를 보유하고 있는데, 통상적으로는 이따금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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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헌법적 권리 범위 내에 있는 행위들입니다. 처음에는 적당한 자리에 배치할 적절 한 인물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기억 해야 합니다. 저는 내각을 자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때로는 그 때문 에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 내각이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 국을 위해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헌신하는 유능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자랑 스럽게 말씀드립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 군은 어디에서 침략을 해오든지 그 침략에 맞서 우리나라를 방어할 필요가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군은 호된 시련을 겪어왔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알고 있는 우리 미국 친구들이 적절한 물자지원을 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질문 7.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각하의 동포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해주시고자 하 는 권고사항은 무엇인지요?

답변 7. 저는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충고를 해드리고자 합 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공동의 적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거나 굴종하지 않는 국가들은 모두 파괴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자신의 자유를 방어하기에 너무 약하고 무력하다면 우리는 그들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굳건히 버텨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들의 파괴행위 로부터 우리자신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할 의지를 찾고 그들에게 우리가 의도하는 바를 설 득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은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평화정책으 로는 극복할 수 없으며 — 오로지 어떤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자유를 보존하고 회복할 의지 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질문 8. 각하께서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답변 8. 저는 권력에 미친 공산주의자들이 패배할 때에만 전 세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패배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이 악과 싸우기 위한 자유세계의 목적을 위해 빨리 힘을 합쳐야 하며 — 만 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심지어 싸울 기회조차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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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이승만 대통령과 Dr. DAVID FELDMAN과의 인터뷰 내용

생산일자 1958년 2월 25일 서한종류

철 명 30-공보 관계 서한철 수 신

건 명

Answers to Questions Submitted by Dr. David Feldman of “Scholastic Teacher” Magazine, 33

W. 42ND Street, New York 발 신

1958년 2월 25일

뉴욕 주, 뉴욕 시 웨스트 42번가, 33번지 소재“학자풍의 선생님(SCHOLASTIC TEACHER)”의 데이비드 펠드맨 박사(DR. DAVID FELDMAN)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

질문 1. 장래에 한국이 통일될 가능성은 어떤지요? 그리고 언제 통일될 것으로 보시는지요?

답변 1. 한국의 통일에 대한 전망은 최근 들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 한 국은 1950년에 사실상 통일이 되었지만 중공군이 개입해서 유엔군 사령부가 평화적 수단 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면서 1953년 정전협정에 서명을 했습니다. 따라서 지 금까지는 공산주의자들의 배신과 방해공작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남한에 있는 우리처럼 그렇게 간절히 통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구 열강들의 한 순간 잘못된 결정으로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여 공산주의로 빠져 들게 되었으며 소련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중공의 물리적 점령으로 인해 철의 장막 뒤에 가 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 대로 중공이 북한을 떠나고 대한민국 국회에 아직도 열려 있는 북한의 의석들을 채우기 위한 자유선거가 개최된다면 민주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정확한 시점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중공이 자신들의 철수 약속 을 지키고 미국과 유엔이 지속적으로 대한민국과 함께 공조한다면 이 시점이 비교적 빨라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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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기자 회견 관련 서한ChapterⅢ

질문 2. 공산주의자들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지요? 재차 침략의 위협이 존재 하고 있는지요?

답변 2. 한국의 정전협정은 어느 쪽도 군비를 증강하거나 개선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바 있습니 다. 그 협정이 조인되자마자 공산주의자들은 압도적인 공군력, 신 모델의 탱크 및 야포와 원자포 및 미사일 등과 같은 핵무기 등이 포함된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착수했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인용해 보자면, 정전협정 체결 당시 북한에는 단 한 대의 항공기도 없었고 운 용 가능한 비행장도 역시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이 제트 기인 대략 800대에 달하는 전투기와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40개에 근접하는 활주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군비증강은 명백히 정전협정 위반임이 입증되어 유엔군 사령부가 군사정전위원회 (the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를 통해 계속 항의서를 제출했지만, 모두가 무시되 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부가 자체 무기와 대한민국의 무기를 현대화하 기 시작한 것은 1957년에 들어서였습니다. 더 이상 이 현대화 작업을 미룬다는 것은 분명 히 공격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 것이었습니다. 작년에 중공의 추수상황이 형편없어서 북 평(北平; Peiping)이 남한의 곡물저장고를 공격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음이 분명해졌습니 다. 오로지 미국으로부터 현대식 무기가 신속하게 도착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 계획을 좌 절시킬 수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와 맞서 전투대형을 갖추면서 침략은 언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 다. 그들은 1950년에 입증된 바 있듯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상대적으로 쉽게 정 복할 수 있을 만큼 약하다고 판단하는 순간에 공격을 할 것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발판인 대한민국을 보호하는 것은 오로지 강력한 힘일 뿐입니다.

질문 3. 한국을 강화하기 위해 어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거나 계획 중인지요?

답변 3. 원조 프로그램의 초기에 한국은 구제물품 -- 대부분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 -- 외에는 별로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1954년 이후 미국과 유엔의 재건 및 부흥 프로그램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확고한 기초를 다지는 과정을 개시했습니다. 동력, 시멘트와 유리 공장 등이 완성되어 현재 가동 중입니다. 비료 공장은 건설 중에 있으며, 이보다 더 소형인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이거나 완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섬유, 광업, 어업, 운송, 통신 및 많은 여타 산업부문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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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 수 있지만 건전한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비교적 자급자족이 가능 한 한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수준은 서서히 그렇지만 꾸준히 올라가고 있으며, 인 플레이션은 정상적으로 잡혔습니다. 안타깝게도 미국의 원조금액 삭감으로 생산적인 투자 에 사용할 수 있는 기금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기본적인 산업화 과정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세부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수립하기 위해 협조하고 있지만 이를 실행하 는 데 필요한 자금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정도가 매우 심했으며, 1945년 이전에 40년에 걸친 강점 기간 동안 일본은 산업화를 매우 조금만 허용했었습니 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택 문제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아 최소한 백만 호에 달하는 거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질문 4. 미국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요?

답변 4.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군사적 지원이 자유국가로서 한국의 생존을 보장하고 우리 국민들의 보편적인 복지를 증진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자유세 계를 방어하기 위한 투자가 되기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미국이 한국에 도움을 주는 것은 한국이 자국 정부 수입의 거의 절반 을 군대를 유지하는 데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납세자에게는 절약이 됩니다. 만약 미국이 여기에 더 큰 규모의 자국 방어병력을 유지해야 한다면 그 비용은 훨씬 더 클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한국의 조기통일, 공산주의자들의 위협 제거 및 평화적이고 통일된 자유 아 시아의 안정화 등으로 이어질 정책들을 지원하면서 미국의 리더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게 돈으로 갚을 수는 없지만 자유세계의 민주적인 대의에 대해 확고한 충성 심을 보여줌으로써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질문 5. 요즈음 일본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한국인들은 일본이 다시금 한국의 독립에 위험을 드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답변 5. 일본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강점했지만, 오로지 미국에 패하여 점령을 당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침략적인 점령상태를 포기했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대해 가슴속에 쓰라 림과 분노를 새긴 채 그러한 압제기간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 대 초부터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이 독립을 다시 회복하고 있었을 당시 한국과 일본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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