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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역할과 한계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과정에서 정부가 급한 불을 끄는 소방관 역할을 한 점에 대 해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 경제를 신속하게 균형성장경로로 복귀시키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임무이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과 한계를 명 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지순(1989)은 경제생활에 있어서 정부의 역 할이 중요시된 것은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현상으로 1929년의 대공황 이후에 더욱 심화되었다고 말한다. 시민혁명을 거쳐 활약한 18∼19세기의 사상가들은 경제운용 이 원칙적으로 시장의 가격기구에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대공황 이후 에 극심한 불황을 체험한 사람들은 정부가 불안정한 시장기구로부터 발생하는 문제 들을 해결하는 데 존재 이유가 있으며, 정부는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 입함으로써 경제안정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사 상적 변화는 시민의 재산, 건강,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데만 정부의 역 할을 한정하자는 자유주의사상이 후퇴하면서 나타났다.

World Bank는 1993년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상당한 경제적 성과를 이룩한 예를 보고서로 발간하였다. 보고서의 제목인 The East Asian Miracle이 시사하듯이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신흥개도국과 일본이 이룩한 놀라운 경제성장의 원인을 민간과 정부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분석하였다. 동 보고서는 이 지역 경제성장의 요인은 민간투자와 인적 자본인데, 왕성한 투자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높은 국내저축 때문이었으며 높은 교

육수준과 효율적인 공공행정 시스템의 발전도 비약적 경제성장의 요인이라고 파악 하였다. 그렇지만 동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경제성장에 관련된 정부의 역할이다.

World Bank는 이 지역에서 고성장을 이룩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특정 산업의 발 전을 위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시장에 개입한 점에 주목하였다. 동 보고서는 특 정 산업에 대한 신용지원, 예금금리는 낮게 유지하는 대신 대출금리에 대한 상한 설 정, 수입대체산업의 보호, 사양산업에 대한 지원, 국책은행의 설립과 지원, 응용연구 분야에 대한 정부의 투자 지원, 특정 기업이나 산업에 대한 수출목표의 설정, 수출 홍보기관의 설립,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정보교류 등을 고도성장의 주요 요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방식의 정부개입이 과연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느냐는 점이다.

동 보고서는 이 지역 국가들의 정부개입은 성장을 크게 저해하지 않았다고 평가 하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World Bank는 정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이 지 역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아졌을지 여부를 검증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또한 다른 개 발도상국도 유사한 정책을 구사했지만 대부분 정부의 지나친 개입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을 적시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나라에서는 정부개입이 성공하고 어떤 나 라에서는 실패하는 것인가? 정부개입이 성공한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 제조건들이 충족되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정부개입에 대한 분명한 성과기준을 가 지고 있었으며, 개입의 성과를 평가할 만한 제도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정부개입의 비용은 크지 않았다. 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추진할 때 거시경제의 안정성을 저해할 정도로 재정비용이 과다한 경우에는 정부가 추진을 지연시켰다. 마지막으로 정부개입에 의한 물가왜곡 이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비해 크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World Bank의 보고서처럼 정부개입이 경제성장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 을 것이라는 평가와는 달리 개입이 오히려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Borensztein and Lee(2005)는 정책금융과 관련해서 한국은 1970∼

1996년에 걸쳐 신용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지 못했으며, 정부가 선호하는 산업에서조

차 성과를 내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하였다. 동 연구는 산업을 32개 세부부문으로 나 누어 조사하였는데, 1980년대부터 시작된 금융개혁이 신용을 직접 배분받았던 부문 의 수익률을 더 향상시켰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개입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와 는 반대로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되었는지에 관해서 학계의 평가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경제는 정부개입에 의해 성장이 촉진될 것이라고 믿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커져 버렸다. 17년 전 정부개입의 성공을 위해 World Bank가 제시했던 세 가지 전제조건들을 되돌아보면 지금의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 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외환시장 개입의 경우, 첫 번째 기준을 적용시켜 보면 ‘개 입을 위한 분명한 성과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더 욱이 외환시장 개입의 결과를 평가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두 번째 전제조건인 정부 개입 비용에 대한 판단은 정책의 시계(視界)를 얼마나 길게 정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 진다. 일반적으로 정부개입은 비용보다 편익이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시간이 흐름 에 따라 개입에 따른 비용이 편익보다 커지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정부개입에 의한 물가왜곡은 규모가 작은 개발도상국보다 우리나라에서 훨씬 심하게 나타날 것 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과거와는 달리 요즈음은 정부가 직접적으로 물가지수를 관 리하지 않는데다 민간경제의 규모가 상당히 커져 있기 때문이다. 본 장에서는 글로 벌 금융위기의 극복과정에서 체득한 정부의 역할과 한계점을 논의한다.

우리나라는 1962년부터 7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최빈국에서 중 진국을 거쳐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개 발도상국들은 한국의 발전모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2004년 부터 예산을 지원하여 한국 고유의 발전모형을 개도국에 전파하는 ‘지식공유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32) 강광하(2000)는 경제개발계획이 국민들에게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제개발계획이 성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신념을 가져다주었으며, 경제정 책수립에 있어서 방향과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기업의 투자활

32) 지식공유사업(Knowledge Sharing Program)은 2004년 베트남과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지원 을 시작으로 매년 실시되고 있으며 KDI가 사업실행을 맡고 있다.

동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동 연구는 경제개발계획이 공급자 중심의 경제관을 형성케 함으로써 비효율적인 생산이라도 생산은 유익한 것 이고 합리적 소비라도 소비는 절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려서 경제개발계획 의 수립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소비자 후생의 증대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했으며, 경 제성장을 계속하는 동안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정부 의존적 태도를 갖게 함으로써 시장기능의 활성화를 더디게 만들었고, 정부개입에 의한 금리결정과 자금배분은 금 융산업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 내렸다.

1997년 말에 겪은 외환위기의 원인에 관해서 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기업과 금융 기관의 방만한 운영 때문이라는 시장책임론도 있으나 본질상 정부개입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유정호(2004)는 외환위기의 대내적 원인은 기업 부문과 금융 부문에 누 적된 부실이었는데 그 원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업과 금융 두 부문뿐 아니 라 우리 경제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임을 직시하고, 문제의 뿌리 가 정부의 역할에 있다고 간파하였다. 동 연구는 외환위기는 시장경제가 관치로 인 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생긴 소위 ‘시장경제 부전(不全)’현상이며, 기업주가 기업 을 경영하고 관리하듯 정부가 경제를 경영하고 관리함으로써 성과를 높일 수 있다 고 믿는 관리주의가 팽배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1960년대의 폭발적 수출 증대는 관치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으며33), 1970년대의 관치는 경 제성장을 오히려 둔화시켰음을 밝혔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전용덕․김학수(2009)는 정부의 통화정책에 의해 인위적으로 유도된 경기호황에서 투자자와 소비자의 시간선호율이 이자율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자본재 산업에서 과잉투자가 발생하고 소비자의 과소비에 의해 소비재 산업에 서도 과잉투자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런 상황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 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글로벌 금융위기에 적용하여 분석하였다. 이처럼 경기 변동 혹은 위기가 근본적으로 정부의 정책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는 견해가 있지만, 최운화(2009)처럼 정부의 시장에 대한 지나친 맹신과 금융기법에 대한 과신

33) 유정호(2004)는 박정희 정부 시절의 고속성장과 공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관치 때문이 아니라 세계 시장 규모의 증대와 정부 본연의 역할 수행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동 연구는 시장에서의 가격 결정만으 로는 현실 경제에서 많은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정부개입과 감독 시 스템이 불가피하다고 전제한 후, 글로벌 금융위기는 위험관리나 신용관리기법이 낙 후되었거나 감독 시스템이 미비해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시장에 대한 맹신, 금융기법에 대한 과신, 그리고 감독 시스템에 대한 금융당국과 의회의 거대한 착각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위기의 근본 원인이 시장에 있는지 아니면 정부에 있는지에 관해서는 상반된 견 해가 존재한다. 정부가 지나치게 시장에 개입했거나 아니면 정부가 지나치게 시장을 방기했거나 모두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는 점이 재미있다. 정부의 시장 방기론은 정부가 시장에 꼭 필요한 만큼의 규제와 감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 력을 가졌을 경우에만 타당한 주장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정부 는 시장에 필요한 규제의 양을 정확히 생산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두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정부의 지나친 개입과 관치는 위기를 불러오며 이에 따른 비용은 고스란 히 국민이 떠안는다는 체험을 하였다.

위기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부는 시장경제의 활성화와 시장개입의 최소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규모를 불문하고 경쟁력이 부족한 많은 기업들이 생존의 기로에 서있다. 위기에 취약한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꾸기 위 해서는 기업에 대한 상시적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우리 경제는 환율불안정과 취업자 감소 등을 비롯해 위기에 취약한 면모를 드러내었다. 또한 생산물시장이나 외환시장 의 회복 속도에 비해 고용시장의 회복이 느린 것은 우리 경제의 생산구조가 노동절약 적 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에도 원인이 있지만, 위기로 인한 기업부실의 발생도 한 몫 하고 있다. 부실기업이 많을수록 경제활력은 저하되기 마련이며, 경제의 효율성도 낮 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부실기업들이 연명할 수 있 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출 구전략을 염두에 둔 금리조정 등의 거시경제정책과 기업구조조정에 초점을 맞춘 미 시경제정책을 병행해야지만 민간경제의 활성화가 실효를 거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