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의 논의를 WTO 체제 내에 소급적 구제를 도입하는 문제와 연결 지어 생각해보자.
우선 국제법을 하나의 법질서로 바라보는 시각에 입각할 때 국가 책임법상의 규칙들은 일반국제법에 해당하며 이에 대해서는 통일이 요구된다. 이는 국제법의 파편화 및 그에 따른 문제를 해결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소급적 구제에 입각한 배상의 원칙이 국가책임 영역의 기본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WTO 체제 내에서도 소급적 구 제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다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는 국제법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당위적인 것일 수도 있고 터무니없는 주장일 수도 있다.
한편 ILC의 입장을 정리하면 WTO 체제 내에서 국가책임 이슈의 일반법이라고 할 수 있는 ARSIWA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 을 것인지와 관련해 세 가지 경우를 도출할 수 있겠다. (1) WTO 체제 내에 일반국제법으로부터의 명시적인 일탈 규정이 있거나 일 탈을 추정할 수 있어 WTO 체제 내의 규칙만이 적용되는 경우; (2) 일탈 규정이나 일탈을 추정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 WTO 체제 내 의 규칙 및 ARSIWA상의 규칙이 모두 적용되는 경우; 마지막으로
245) Ibid., p.82.
(3) WTO 체제가 예정하지 못한 사정이 발생하거나 WTO 체제가 실패하여 ARSIWA상의 규칙이 적용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우선 WTO 협정상 일반국제법상의 배상 원칙을 배제한다는 내용 을 가진 명시적인 규정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위의 세 가지 경우 중 첫 번째 가능성은 배제된다. 만약 소급적 구제의 문제가 두 번째 경우 즉, 일탈 규정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다면 WTO 체제의 규칙과 일반국제법상의 규칙이 모두 적용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ARSIWA의 적용 또는 그로 부터의 일탈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WTO 대상 협정들에 대한 해설 문제로 귀결되며 특히 WTO 협정이 소급적 구제의 문제에 대해 침 묵하고 있다는 점에서 WTO 협정의 침묵에 대한 해석 문제로 귀결 될 것이다. 즉 침묵을 WTO 체제의 흠결로 보아 일반국제법상의 구 제원칙으로 보충할 것인지 혹은 침묵은 협정 기초자들의 의도인 것 으로 보아 일반국제법의 적용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볼 것인지 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가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면, 즉 WTO 체제 설 립 당시 소급적 구제의 부재에 따른 문제를 예견하지 못하였거나 혹은 소급적 구제의 부재로 인해 WTO 체제상의 규칙을 고수하는 것이 비효율적 혹은 비합리적이어서 체제의 실패라고 간주할 수 있 다면 별다른 해석의 문제를 동반할 것 없이 ARSIWA의 원칙에 의 존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전술한 대로 소급적 구제의 문제는 개도국들이 대거 GATT 체제 내에 진입하였던 1960년대부터 제기되기 시작하여 우 루과이 협상 과정에서도 논의된 바 있었다. 다만 최종적으로 WTO 체제 내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예기치 못한 상 황의 발생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소급적 구제 로 인해 실효적 구제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나 이것이 체제의 실패라고 여겨질 정도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부분의 특별한 체제들은 특별한 문제에 관한 법을 강화하거나 특 별한 이익을 좀 더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raison d’être 를 가지고 있다. ... WTO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분쟁해결 체계도 그 중 하나이다. ... 체계 내의 분쟁해결기제의 기능이 너무 느리거나 너 무 비효율적이어서 올바른 분쟁해결에 대한 합리적인 전망 없이 손 해(damage)를 계속 유발하게 될 수 있다.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체계는 ‘실패’한 것이고 피해자들에게는 일반국제법상의 제 도나 기제들에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제공되어야 한다.246)
즉 WTO 체제의 특별한 raison d’être 중 하나인 분쟁해결제도의 신 속성 및 효과성은 WTO 체제의 실패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과연 현재 WTO 체제의 분쟁해결기제가 이러한 실패의 사 례라고 간주할 수 있겠는가? 물론 도하개발어젠다(Doha Development Agenda: DDA)의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WTO 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지 고 있기는 하지만247) GATT 체제와 달리 신속성 및 효율성을 구비 한 WTO의 분쟁해결제도는 범세계적 국제분쟁해결제도로서는 유례 가 없을 정도로 활발히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248) 따라서 소급적 구제의 문제를 세 번째 상황에 해당한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소급적 구제의 문제는 두 번째 상황에 해당 하며 그런 점에서 특히 협정의 침묵에 관한 해석 문제가 중요해진 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WTO 체제에서의 적용법 문제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일반국제법상의 원칙들이 WTO 체제의 적용법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인지 여부가 확인되어
246) ILC, Study Group Report, supra note 17, pp.97-98, paras.186-187.
247) Ujal Singh Bhatia, “Save Doha Round, Save the WTO”, The Economic
Times, 11 June 2011, at
<http://economictimes.indiatimes.com/opinion/policy/save-doha-round-save- the-wto/articleshow/8809392.cms> (2015.1.25. 최종방문) 참조.
248) 정인섭, op cit., p.992.
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면 상기의 논의는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2) WTO 체제의 적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