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GATT/WTO 체제 내에서의 소급적 구제에 관한 논의 는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지난한 줄다리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개 도국들은 선진국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적 틀 내에서 실질적인 형평 을 달성하기 위해 투쟁해온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는 경 제 현실과 GATT/WTO의 명분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다. 소급적 구 제의 부재로 인해 결과적으로 손해가 존재하는 엄연한 현실에도 불 구하고 GATT/WTO의 설립 취지가 손해보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 다는 명분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급적 구제 의 문제에 관한 개도국과 선진국의 명분 싸움 끝에는 소급적 구제 의 부재에 따른 불합리한 결과가 놓여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손해 배상에 관한 예외적 판정들은 어 쩌면 불합리한 현실을 시정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damage)에 대해 책임을 지울 필요나 그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167)
GATT 체제 내에서 과거의 피해에 대한 보상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들 중 GATT 체제의 대상과 목적을 이유로 한 이 같은 설명은 특히 설득력이 있는 것처 럼 보인다.
그런데 WTO 체제에 들어서면서 그 대상과 목적이 그대로 유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일단 WTO상 구제조치의 대상과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한 명시적인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DSU의 여 러 조항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DSU 제 3.2조를 통해 WTO의 분쟁해결절차는 ‘다자간 무역체제에 안전과 예견가능성(security and predictability)을 부여’하는 데 있어 중심적 인 요소임을 확인할 수 있다.168) 또한 분쟁해결제도의 ‘목표(the aim)는 분쟁에 대한 긍정적인 해결책을 확보하는 것’169)이며 분쟁 당사자 사이에 상호 합의된 해결책이 없는 경우 분쟁해결제도의 ‘첫 번째 목표(the first objective)는 대상협정에 대한 위반 판정이 내려 진 조치의 철회를 확보하는 것’170)이다. 이 같은 내용은 WTO체제의 목적이 GATT 체제의 그것과는 같지 않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WTO 분쟁해결) 체계는 (형식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순수한 국 제분쟁해결 체계에서 무역조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구체적인 산업들 의 구제(relief)에 관심을 두는 체계로 확실히 전환되었다. 그 주요 목표는 WTO법에 합치하지 않는 조치를 철회하는 것이다. 양허 균 형의 회복이라는 거시경제적 목표는 대개 구체적인 구제를 실현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가는 중이다.171)
167) Ibid.
168) DSU 제3.2조 제1문.
169) DSU 제3.7조 제2문.
170) DSU 제3.7조 제4문.
171) Cottier, Thomas, “DSU Reform: Resolving Underlying Balance-of-power Issues”, in WTO at Ten, op cit., p.265.
이 같은 Cottier의 입장은 현재의 WTO 체제에서는 과거의 손해에 대한 소급적 구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지로 이어진다.
소급적 구제 및 금전보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러한 기능(구체적 인 구제 제공 기능: 설명 추가)을 불완전하고 불균형하게 한다. (불 법 보조금이나 덤핑, 그리고 세이프가드 조치의 상계에 관한) 무역 구제의 영역에서 구제조치들은 대체로 비효과적이었으며 다자체계에 대한 사적 당사자들(private sector)의 관심과 신뢰, 의존에 손상을 입혀 왔다.172)
Pauwelyn은 GATT의 대상과 목적은 양허 균형의 회복‘이었다’며
“일부에게는 WTO의 대상과 목적도 여전히 그러하다고 여겨지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 Cottier와 마찬가지로 WTO의 대상과 목적이 변화하였다는 입장을 제시한다.173) 이어 GATT 체제의 대상과 목적 하에서는 양허 균형의 회복이 중요한 것이었기에 과거 손해에 대한 책임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었으나 오늘날의 맥락에서 이 같은 주장 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한다.174)
WTO 위반이나 위반에 대항하는 WTO 의무의 정지는 개별 사업자 들(individual operators)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과거의 손해 에 대한 배상 없이 무역 양허의 균형을 도모하는 행위는 정부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모르나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 규칙들은 더 나은 예측성과 안정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철회되거나 다른 것들로 교환될 수 있는 정치적 합의로써가 아니라 위반 시 –과거의 손해에 대한 일종의 배상의 형태를 포함하는- 국가책임으로 이어지 는 국제의무로써 존중되어야 한다.175)
172) Ibid.
173) Pauwelyn, Conflict of Norms, op cit., pp.221-222.
174) Ibid., p.222.
175) Ibid., p.227.
이 같은 주장은 WTO법을 국제적 ‘법의 지배 체계’로 보고 WTO 체제가 국내법 체계와 같이 점차 시민 권리의 효과적 보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과도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176)
한편 Bronckers와 Van den Broek은 양허 균형의 회복이라는 GATT의 목적은 법에 기초하는(rule-based) WTO 체계에는 더 이 상 들어맞지 않으며, 이제는 규칙에 합치시키는 것(rule compliance) 이 규범(norm)이 되었다고 한다.177) 게다가 WTO 설립협정의 전문 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WTO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 사인의 행위(private initiative)가 핵심적이라며, WTO에서의 분쟁해결은 경 제 성장에 기여한 사적 당사자들의 기대를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 다고 주장한다.178)
구제조치의 대상과 목적에 관한 명시적인 규정이 존재하지 아니 하는 상황에서 WTO 체제상 구제조치의 대상과 목적이 변화했는지 여부를 일률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의 변화를 주장하는 측이 제시하는 근거 즉, 대체로 사적 당사자들 혹 은 개별 사업자들의 이익을 고려요소로 제시하는 견해들이 일견 급 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국제법이라는 것은 주로 국 가만을 주요 행위자로 간주할 뿐 국제기구나 개인의 주체성이 인정 되는 영역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179) 이 점은 WTO 체제의 경우에 도 다름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피해를 국가의 피해와 같은 것으로 의제하여 외교 적 보호 제도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Vattel의 영향력이 건재한 현 대 국제법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만도 아 니다.180) 실제로 소급적 구제가 예외적으로 인정되었던 분야가 모두
176) supra note 145 Petersmann 참조.
177) Bronckers and Van den Broek, supra note 9, p.112.
178) Ibid., pp.112-113.
179) 정인섭, op cit., p.2.
180) P.J.Kuyper는 반덤핑조치로 인해 사인이 입은 피해와 관련하여 국가가 소송의 주체가 되는 GATT/WTO의 분쟁해결방식이 국제법상의 외교적보호제도와 닮아 있다며 GATT/WTO 체제 내에도 국내구제완료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사인의 이익이 관계되는 반덤핑 혹은 반보조금 조치에 관련된 분야 라는 점은 주지할 사실이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반덤 핑 협정 또는 보조금 협정이 관련되는 피해에 관한 한 소급적 구제 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좀 더 타당성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