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WTO 체제에서 소급적 구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의 대 안적인 측면으로 ICJ를 활용할 수는 없을까? WTO 체제 내에서 소 급적 구제를 실현하기 위해 당장 DSU를 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면 ICJ를 활용해서 실효적 구제를 모색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 다. 국제법을 하나의 법체계라고 본다면 궁극적으로는 국제적 사법 기관의 양적 팽창에 따른 법률체계의 파편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 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DSB와 같은 조약 기반의 분쟁 해결기제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보다 보편적인 관할권을 가 진 ICJ에서 해결하는 방안에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 ICJ의 관할권
ICJ는 UN의 주요기관들 가운데 하나로(UN헌장 제7조) UN의 주 요 사법기관이며, ICJ 규정은 UN헌장과 불가분의 일부를 구성한다 (동 제92조). 국가만이 ICJ 재판에서 당사자 능력을 가지는데(ICJ규 정 제34조 1항), 모든 UN 회원국이 자동적으로 ICJ 규정의 당사국 이 되고(UN헌장 제93조) 사실상 모든 국가가 UN 회원국이 된 오늘 날의 현실을 감안하면 모든 국가가 ICJ 재판에서의 당사자 능력을 가진다고 하겠다. 다만 ICJ 규정 당사국이라 하더라도 국가의 동의 가 있어야만 관할권이 성립한다. 동의는 분쟁 발생 후 ICJ의 재판에
366) Bronckers and Van den Broek, supra note 9, p.121.
회부하기로 합의하여 특별협정(special agreement, compromis)을 체 결하거나 분쟁 발생 이전에 국가 간 조약으로 ICJ에 회부할 것을 미리 규정하는 방식으로 부여된다. 한편 ICJ 규정 제36조 2항의 선 택조항(optional clause) 수락을 통해 동일한 의무를 수락한 국가와 의 관계에서 재판소의 관할권을 미리 수락해 놓을 수도 있다.367)
국제기구는 ICJ 재판에서 사건의 당사자가 될 수는 없으나 법률 문제에 대하여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을 요청할 수 있다(ICJ 규정 제65조).368) 국가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과 달리 권고적 의 견제도는 국제기구에 대한 법률 자문 제공의 목적을 가지며, 권고적 의견은 권고적 효력을 가질 뿐 구속력은 가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를 요청한 기구가 ICJ의 의견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기로 내부 적으로 합의한다면 구속력이 인정될 수 있다.369)
(2) 관할권 중복/충돌의 가능성
분쟁해결에서의 관할권의 중복 또는 충돌은 동일한 분쟁 또는 동 일한 분쟁에서의 관련된 측면들이 두 개의 다른 기관 또는 분쟁해 결체계에 제기되는 것을 말한다.370) 관할권 중복은 소위 포럼 쇼핑
367) ICJ 규정 제36조 2항
재판소 규정의 당사국은 다음 사항에 관한 모든 법률적 분쟁에 대하여 재판소의 관할을, 동일한 의무를 수락하는 모든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당연히 또한 특별한 합의 없이도, 강제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언제든지 선언할 수 있다.
가. 조약의 해석 나. 국제법상의 문제
다. 확인되는 경우, 국제의무의 위반에 해당하는 사실의 존재 라. 국제의무의 위반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배상의 성질 또는 범위.
368) 다만 모든 국제기구가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UN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는 어떤 법률문제에 대해서도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수 있으며, 총 회에 의해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자격이 부여된 UN의 다른 기관 및 전문기구는 자신의 활동범위에 속하는 법률문제에 관하여 요청할 수 있다(UN헌장 제96조).
현재 총회와 안보리 외에 경제사회이사회 등 4개의 UN 기관과 15개 전문기구, 1 개의 관련기구(IAEA)가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자격을 인정받고 있다(정인섭, op cit., p.975).
369) 정인섭, Ibid., p.977.
370) Lowe, Vaughan, “Overlapping Jurisdiction in International Tribunals”,
(forum shopping)의 문제를 유발하고 국제법의 파편화를 심화시키 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제법의 파편화 문제와 관련한 ILC의 논 의 당시 국제재판소의 위계 수립 문제도 제기되었지만 스터디 그룹 은 2005년 보고서에서 VCLT를 기초로 파편화의 실질적 (substantive) 측면들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할 뿐 기구적 측 면의 파편화 논의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371) 오늘날 국제 재판소의 증가로 인해 관할권 중복에 따른 문제가 증가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국가 간의 합의는 아직 이루어져 있 지 아니하다.
Lowe에 따르면 관할권이 중복될 수 있는 경우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넓은 범위의 문제에 대해 일반적인 관할권 을 가지는 재판소와 그 보다 좁은 특정 범위의 문제에 대해서만 관 할권을 가지는 재판소 간에 관할권이 충돌하는 경우(유형 1: 일반- 특별); 넓은 범위의 문제에 대해 관할권을 가지는 두 개의 재판소 간에 관할권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유형2: 일반-일반); 마지막으로 특정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두 개의 재판소 사이에 관할권이 충돌 하는 경우(유형3: 특별-특별)가 그것이다.372) 동일한 사안에 대하여 ICJ 및 WTO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Lowe의 분류에 따르자면 첫 번째 유형의 관할권 중복/충돌 사례가 될 것이다.
일단 관할권 중복/충돌이 발생하려면 ICJ와 WTO 모두에서 관할 권이 성립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선 WTO법 위반에 따른
Australian Year Book of International Law (1999), Vol.20, p.191; Kwak, Kyung and Marceau, Gabrielle, “Overlaps and Conflicts of Jurisdiction between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and Regional Trade Agreements”, in Bartels, Lorand and Ortino, Federico (eds.), Regional Trade Agreements and the WTO Legal System,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p.467. 한편 동일한 내용을 담은 문서가 WTO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다(Conference on Regional Trade Agreements World Trade Organization (26 April 2002)
Executive Summary, p.2, para.7,
<http://www.wto.org/english/tratop_e/region_e/sem_april02_e/marceau.pdf> (2015.1.25.
최종방문)).
371) supra note 6.
372) Lowe, supra note 370, pp.192-193.
손해에 대한 소급적 구제의 문제는 ‘국가 간’에 발생한 ‘국제법상의 분쟁’이라는 점에서 양 당사국 모두 동의하기만 한다면 ICJ의 관할 권 성립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배상이 문제되는 사 안에서 양국이 합의를 통해 재판을 진행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양국 간에 조약을 통해 사전에 동의를 하였거나 혹은 양국 모두 ICJ 규정 제36조 2항의 선택조항을 수락한 경우를 상정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우라면 ICJ의 관할권은 성립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WTO법상의 의무 위반이 문제된 사안이므로 WTO의 관할권 역시 성립한다.
그러나 법리적으로 ICJ와 WTO 사이의 관할권 중복 문제는 성립 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장벽은 DSU 제23조의 문제 이다. DSU 제23조에 따르면 WTO 회원국은 대상협정 상의 의무 위반, 이익의 무효화 또는 침해, 또는 대상협정의 목적 달성에 대한 장애의 시정을 추구하는 경우 DSU의 규칙 및 절차에 호소하고 그 것을 준수하여야 한다.373) 또한 DSU의 규칙 및 절차에 따른 분쟁해 결에 호소하지 아니하고는 위반이 발생하였다거나 이익이 무효화 또는 침해되었다거나 대상협정의 목적 달성이 저해되었다는 취지의 판정을 내리지 아니한다.374) 다시 말해 일방 WTO 회원국이 타방 WTO 회원국에 대하여 WTO 협정 위반을 이유로 통상분쟁을 제기 하는 경우 일단 WTO 협정 위반 여부가 관계된다면 그 분쟁은 오 로지 WTO 분쟁해결기구를 통해서만 해결되어야 한다.375) WTO 대
373) DSU 제23조 1항.
374) DSU 제23조 2항 (a).
375) 이재민, “WTO 분쟁해결절차에서의 문화다양성 협약의 지위”, 法學論叢, 第25 輯 第2號 (2008), p.9. 반면 Garcia-Rubio는 DSU 제23조가 명시적으로 ICJ와 같은 일반국제법상의 사법관할권에 호소할 권리로부터 ‘일탈’을 규정한 것인지의 문제가 여전히 논의를 요하는 대상이라고 본다. 그는 특히 WTO 사법기구가 WTO 협정을 해석함에 있어 환경협약과 같은 다른 협약상의 의무를 고려하지 아 니하는 경우 분쟁을 오히려 악화시킬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ICJ를 활용하게 되면 한쪽에 치우친 판정을 도출하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경우 에 대해서까지 DSU 제23조가 ‘명시적인 일탈’을 규정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아 니하다는 것이다(Garcia-Rubio, op cit., pp.51-52).
상협정에 관계되는 문제에 관해서는 WTO 체제상의 분쟁해결절차 를 이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이러한 전속관할규정376)으로 인해 WTO 의무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 문제는 WTO 체계 밖에서 해 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DSU 제23조 위반 으로 WTO 체제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설 사 소급적 구제에 관련된 ICJ의 관할권이 인정될 여지가 있다 하더 라도 DSU 제23조로 인해 관할권 중복 문제는 발생할 리 없는 것처 럼 보인다.
그러나 Marceau와 Kwak은 WTO의 지역무역협정 회의 (Conference on Regional Trade Agreements)에서 다음과 같은 의 견을 피력한 바 있다.
DSU 제23조는 다른 관할권들이 WTO 법 위반에 대해 사법 판단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체적인 조약 규정이다. 그러나 다른 조약에 의해 수립된 재판소가 WTO 조항과 유사한 혹은 중복 되는 사항을 규정한 자신의 조약 규정 하에서 발생한 소에 대해 관 할권을 행사하는 것까지 DSU 제23조가 금할 수는 없다.377)
이 같은 이유로 이들은 WTO와 다른 지역무역협정이 유사한 의무 를 규율하는 한 각각의 분쟁해결기제가 모두 활용될 수 있다고 한 다.378)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ICJ에 소가 제기되어 ICJ의 관할권 이 성립하는 경우 DSU 제23조를 근거로 ICJ의 관할권 행사를 막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관할권 중복/충돌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겠다.
376) 전속관할규정이란 일정한 부류의 분쟁을 오로지 특정 국제법원의 전속적(專屬 的) 관할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는 조항을 말하며, DSU 제23조가 그 예이다(朴賢 錫. “國際法院 相互間의 消極的 管轄權 衝突”, 國際法學會論叢 제51권 제3호 (2006), p.49; 朴賢錫. “國際司法法院(ICJ) 判決의 旣判力”, 法曹 제56권 제8호 (2007), p.223).
377) Kwak and Marceau, supra note 370, p.476.
378) Kwak and Marceau, Ibid., p.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