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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이 말해주는

문서에서 2007년 초등교사역사교실 시간표 (페이지 127-131)

삶의 한 모습 -초혼과 재혼-

2)

오늘날과 달리 유교질서가 강조되던 조선후 기에 혼인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우리의 통념과 같이 조혼이 성행하고, 여성이 나이 어 린 신랑과 혼인했을까? 또 재혼이 제약되어 있 어서 특히 남편을 잃은 과부의 경우 남은 생을 홀로 살아갔을까? 그럼, 18세기 단성호적을 사 례로 이를 확인해 보자.

호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초혼의 모습은 연령 이다. 호적에는 여성의 개가(改嫁) 사실이 기록 되어 있으므로 전 식년 호적의 나이와 비교해 대략의 초혼 연령을 산출할 수 있다. 가령 16세 에 개가한 것으로 기록된 여성의 경우 전 식년 나이 13세로부터 16세에 이르는 어느 시점에 혼인했을 것이므로 이 여성의 초혼 연령은 이 기간의 평균 나이인 14.5세로 보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18세기 단성호적을 분석한 결과 초혼 연령이 확인되는 여성은 모두 562명이었 으며, 이들의 평균 초혼 연령은 17.5세였다.

이 무렵 법전에 규정된 남녀의 가혼 연령은 남 자가 15세, 여자가 14세였으므로 대체로 가혼 연령보다 어린 나이에 혼인을 하지는 않은 것이 다. 1717년 단성호적만을 보면 여성의 평균 혼 인연령은 20.7세로 더 높게 나타난다. 그리고 법전상 가혼 연령에 미달된 혼인관계는 전혀 보 이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호적상으로 는 당시 조혼이 성행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 다. 18세기 단성지역 초혼여성의 연령별 비율 을 살펴보면 15~20세 사이에 혼인한 비율이 높 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 연령대가 당시 단성지 역 여성의 초혼 적령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남성의 초혼 연령은 어떠했을까? 남 성은 여성과 다르게‘개가’와 같이 초혼 연령을 추정할만한 기재가 없다. 따라서 남성의 초혼 연령을 추정하기 위해서는 부부의 연령차를 계 산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부부의 연령차를 산출한 뒤 여성의 초혼연령과 비교해보는 방법 이 그것이다. 1678년부터 1789년까지 단성지 역에 살았던 30세 미만 부부의 연령차를 계산해 본 결과 남성이 여성보다 약 0.4세가 많았다.

이 무렵 여성의 초혼 연령이 17.5세였으니 남 성의 초혼연령은 이보다 0.4세 많은 17.9세였 다. 남성 초혼의 적령기는 남성이 여성보다 0.4 세 연상이었음을 감안하면 16~21세 정도였음 을 알 수 있다.

1717년 단성호적에서 부부의 연령차를 조사한 결과 처가 연상인 경우는 22.3%이며, 그 차는 1

~2세가 가장 많았다. 반면 남편이 연상인 경우 는 68%이며, 그 차는 1~10세 사이가 가장 많으 며, 동갑부부는 9.7%였다. 우리나라에서 처가 연상인 부부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흔히 생 각하듯이 압도적인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재혼의 모습을 살펴보자. 조선후기는 주 자가례의 보급에 따라 홀아비나 과부가 된 경우 여생을 홀로 살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 나 호적의 분석 결과는 이것과 많이 다르다.

호적에서 홀아비를 가리키는‘환부(鰥夫)’를 18세기 단성호적에서 조사해 본 결과, 전체 홀 아비의 1,158명 중 337명(29.1%)이 전처의 사망신고를 한 바로 그 식년에 재혼신고를 했 다. 호적이 3년마다 작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 면, 다수의 홀아비들이 처가 사망한 뒤 1~2년 사이에 재혼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홀아 비 가운데 그러한 부류가 차지하는 비율은 사회

2) 이 부분의 내용은 김건태, 「18세기 초혼과 재혼의 사회사 - 단성호적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51, 2004. ; 정지 영, 「조선후기 과부의 수절과 재혼 - 단성호적대장에서 찾은 과부들의 삶-」, 『고문서연구』18, 2000. 두 편의 연구 성과를 요약 정리한 것임.

적 계층이 낮을수록 높게 나타난다. 상층의 13.8%, 중층의 32.2%, 하층의 45.3%가 바로 그러한 부류였던 것이다. 상층민들에 비해 중하 층민들의 재혼률이 높게 나타난 것은 집안을 돌 보면서 틈틈이 농사일을 거들어줄 처가 더 필요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주자가례적 윤리 의 식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지만 이들에게 더욱 중 요했던 것은 농업노동력의 확보였던 것이다. 반 면, 상층의 재혼율이 낮은 까닭은 당시에 일반 화되었던 축첩제도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실 제로 단성호적에서 첩을 등재하고 있는 홀아비 28명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는 첩을 두고도 호 적에 등재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므로 실제 로 첩을 거느렸던 홀아비들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재혼을 한 홀아비들은 보통 10세 정도 연하의 여성을 배우자로 맞았다. 이를 계층별로 살펴보 면 상층의 경우 15.8세, 중중 9.9세 하층이 8.6세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연령차가 적다. 상 층 홀아비들의 경우는 주로 젊은 여성을 배우자 로 맞았다. 중층 홀아비들이 재혼할 때 맞아들 인 배우자는 30세 이상이 48.8%, 30세 미만이

51.2%로 후자가 약간 더 많다. 중층 홀아비들 은 재혼할 때 30세 이상 된 여자를 맞아들이는 비율이 상층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50세 이상 된 여자를 맞아들이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중 층 홀아비들의 상당수는 과부와 재혼했던 것이 다. 하층 홀아비에게 시집간 여자는 30세 이상 이 30세 미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전자가 71.1%이고 후자는 28.9%이다. 하층 홀아비에 게 시집간 여자의 다수는 중층의 경우와 마찬가 지로 과부였다. 당시는 과부의 개가를 인정되지 않았지만 중하층 과부들에게 이런 규정은 의미 가 없었다. 개가를 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사 회적으로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한편, 과부의 재혼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20 세 이상의 여성 중 과부가 차지하는 비율을 조 사해 본 결과 양반 여성으로서 과부인 경우가 양인 여성 과부의 1.5배를 넘었다. 양반 여성이 과부인 채로 남아 있는 경우가 훨씬 많았던 것 이다. 천인 과부의 수는 가장 적은데, 천인의 신분으로서 과부의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가 어 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 남편이 사망한 후 재혼을 하지 않은 과 조선후기의 호적(戶籍), 그리고 이를 통해 본 삶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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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년 양반 양인 천인

1678 30.3 16.2 7.5

1717 28.9 18.2 8.4

1759 27.5 18.9 6.7

1789 23.9 14.5 2.9

<표 3> 신분별 20세 이상 여성 중 과부의 비율 단위 : 명(%)

식년 母 丈母 女 妹 婦 嫂 叔母 기타 합계

1678 148 10 6 9 7 2 2 2 186

1717 457 39 14 25 15 28 6 2 586

1759 367 29 5 12 15 22 3 2 455

1789 393 10 6 2 11 16 2 0 440

<표 4> 동거인으로 기재된 과부의 호주와의 관계 단위 : 명

부들, 그들은 어디에서 남은 삶을 영위했을까?

당연히 남편과 살던 집에 남아서 계속 정절을 지키거나, 아니면 시댁으로 옮겨가 며느리로서 의 삶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 나 단성호적에 나온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 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성호적에서 동거인으로 기재된 과부와 주 호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주호의 딸 또는 여동 생인 경우와 며느리 또는 형(제)수인 경우가 흥 미를 끈다. 전자의 경우 과부가 친정으로 옮겨 와 살고 있음을, 그리고 후자의 경우 시가에 거 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표4>에서처럼 비록 미약한 수치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과부들은 친 가 곧 친아버지, 친오빠의 집에 머무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러한 경향이 신분별로는 어떻게 나타 날까. 친가 쪽에서 시가 쪽으로 옮겨가는 경향 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양반층 여성이 었다. 반면 양인이나 천인은 별다른 변화를 보 이지 않는다. 그들은 양반층에서 강조하는 부계 질서에 대한 관념보다는 실질적인 경제적 조건 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양인 과부들 은 친가든 시가든 그 두 집안 가운데 편하게 의 탁할 수 있는 곳을 택했을 것이다. 시가의 입장 에서도 혼자된 며느리를 데리고 살기가 버거웠 을지도 모른다. 양인 과부들은 앞으로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야 했고, 대부분의 경우 재혼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임학성, 『17·18세기 丹城地域 住民의 身分移 動에 관한 硏究』, 인하대박사학위논 문, 2002.

김현영, 「朝鮮後期 大丘月村戶籍大帳의 分析」,

『大丘月村丹陽禹氏文書』, 1994.

김건태, 「18세기 초혼과 재혼의 사회사 -단성 호적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51, 2004.

정지영, 「조선후기 과부의 수절과 재혼 -단성 호적대장에서 찾은 과부들의 삶-」,『고 문서연구』18, 2000.

손병규, 『호적(1606-1923) -호구기록 본 조 선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7.

식년 양반 양인 천인 합계

1678 4:3(0.75) 5:6(1.4) 6:0(0) 15:9(0.60) 1717 2:19(9.5) 21:20(0.95) 16:4(0.25) 39:43(1.10) 1759 3:26(8.7) 11:10(0.91) 3:1(0.33) 17:37(2.18) 1789 0:21(21) 4:5(1.25) 4:1(0.25) 8:27(3.38)

<표 5> 과부의 신분별 친가:시가 거주 상황 단위 : 명

부산의 관방체제와 유적

김강식_ 동명대학교 교수

Ⅰ. 관방체제

Ⅱ. 유적

문서에서 2007년 초등교사역사교실 시간표 (페이지 127-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