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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산진성(釜山鎭城)

우리나라 역사에서 부산이 중요시되면서 오 늘날과 같은 부산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다. 조선 왕조가 건립되면서 왜 구에 대한 방어를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서 부산 에 방어시설인 진(鎭)을 설치하게 되었다.

오늘날 부산이라는 지명이 유래한 곳에 조선 초기부터 일본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군 사적 요충이 부산진성이다. 이곳은 원래 증산(甑 山)을 둘러싸고 첨사영이 있었다. 이런 위치 때 문에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최초의 전장이 되었 다. 그러나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왜성이 축조되 고, 이용의 편의성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자성이 부산진성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기능을 잃었다.

그런데 현재의 부산(釜山)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에 있었던 차별 받던 행정구 역인 부산부곡(富山部曲)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야기,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지금의 동구 좌천 동 서쪽에 있던 시루 모양의 증산(甑山)의 다른 이름인 부산(釜山)과 그 앞쪽 바다를 부산포(釜 山浦)라고 불렸던 데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 다. 이 가운데 뒤쪽의 입장이 일반적이다. 그것 은 증산에서의‘증(甑)’의 의미가 떡을 찌는 시 루인데, 부산의‘부(釜)’도 가마이므로 둘 다 야 트막한 산의 모양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1397년에 부산진이 왜구에 대한 방어 시설로서 만들어지면서 부산은 국방상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때 성곽을 쌓고, 군사를 주둔 시켜 일본에 대한 방어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요인은 부산이 일본이 일 으킨 임진왜란에서 가장 먼저 전쟁의 피해를 입 게 했다. 그것은 임진왜란 시기의 첫 전투지가 부산진성이었던 데서 바로 알 수 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일본군의 고니 시 유기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조선 침략의 선 봉군인 제1군 18,700명의 대군이 700여 척의 병선으로 부산포를 침략함으로써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부산진성은 경상도 해안 지방에 설 치된 수군첨절제사의 진영으로 경상도 제1의 해상 관문이었다. 이에 일본군들이 조선에 상륙 할 때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이었다.

부산진성전투는 임진왜란 시기에 아군이 일 본군을 맞이하여 처음 치른 전투로서 군사수와 무기 면에서 적과 비교하여 현저한 열세였음에 도 불구하고, 군인·관료·민간인이 나라의 관 문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는 점에서 의의 가 크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부산 우암에 상륙 한 바로 당일로 부산진성을 점령함으로써 조선 군의 해안 방어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침략을 위 한 거점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전투의 모습은 부산진성순절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1760년 동래부사 홍 명한(洪名漢)이 좌수영의 수졸이었던 변박(卞 璞)을 시켜 이전의 그림을 베껴 그린 것이다. 검 은 옷을 입고 정발 장군이 분전하고 있는 곳이 성의 정문인 남문이다. 성 입구까지 일본 배가 다가와 있고, 일본군이 성벽으로 다가서는 모습 이 선명하게 그려진 전쟁 기록화로 보물이다.

현재의 지형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이 그림 의 진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재 육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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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임진왜란 시기에 첫 전투지였던 부산 진성은 부산이란 지명과 부산의 정신이 유래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에는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때 쌓은 왜성(倭城)의 흔 적만 남아 있다. 그것은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 군이 주둔하면서 기존의 우리나라 성곽을 허물 고 일본식 성으로 쌓아 주둔하였기 때문이다.

왜성은 표면적인 모습에서 특징을 살펴볼 수 있 다. 우선 하나하나의 성벽이 경사지게 쌓여 있 으며, 성벽이 정상의 중심부를 향해서 몇 겹으 로 둘러쳐져 있다.

현재 부산진성은 교통부교차로에서 망양로를 이용하여 동구도서관으로 찾아가면 접근할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좌천동가구거리 뒤쪽의 산 이 부산진성이 있었던 자리이다. 지금 이곳은 동구의 증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에 각종의 운동시설과 작은 운동장, 서쪽에 수원 지, 입구 쪽에 동구도서관, 남쪽에는 아파트가 건립되어 있다.

그런데 부산진성의 원래 모습은 다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일신기독병원 근처의 정공단 자리가 부산진성의 남문이며, 성문 가까이가 바다였다 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옛 성터에는 경사진 성벽이 있고, 성벽이 몇 겹 으로 둘러쳐진 왜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더욱 이 동구도서관이 원래 부산진성의 한 켠을 차지 하고 있다.

2. 자성대(子城臺)

자성대는 근처에 있었던 부산진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원래는 부산진성의 본성을 모성 (母城)이라 하고, 자식(子息)의 성이라는 뜻으로 자성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부산진성의 지 성(支城)이라고도 하였다. 또 산 정상에 장대(將 臺)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데서 자성대라고 하

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일찍부터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성곽 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성곽은 임진 왜란 시기에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부산 진의 지성을 이용하여 쌓은 일본식의 왜성이다.

구체적으로 1593년 임진왜란 당시에 경상도 군 정의 책임자였던 모리 테라모토(毛利輝元) 부자 가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1592년 일본 군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가 주 둔했기 때문에 소서성(小西城), 또는 환산성(丸 山城)이라도 한다. 그 뒤 산 정상에 장대를 만들 었기 때문에 자성대라고도 한다. 또 임진왜란 시기에 명나라의 장수 만세덕(萬世德)이 진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만공대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전 부산포에는 안쪽의 내성과 바깥 쪽의 외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증산을 둘러싼 본성이고, 자성대는 외성이었다. 이후 임진왜 란 시기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고쳐 쌓아서 일 본군의 거점으로 사용하였다. 또 명나라 만세덕 의 군대가 일시 주둔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는 이곳에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을 다시 쌓고, 4대문을 축조하여 부산진첨사영으 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성이 부산진성의 본성으로 쓰이게 되었다. 본과 말이 뒤바뀐 형 상이다.

당시 쌓은 성의 둘레는 1,689척이었는데, 동 문을 진동문, 서문을 금루관, 남문을 종남문, 북문을 구장루라 하였다. 1785년 서문 앞 범천 의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고쳐 만들었으며, 서문 양측에는 부산진지성의 돌기둥이 새겨졌다. 이 것은 임진왜란 후 부산진성을 쌓을 때 세운 것 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원래 자성대의 서문인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는데, 1975년 보수 때 지금의 서문인 금루관으로 이전하였다. 여기 에는 남요인후(南 咽喉) 서문쇄약(西門鎖 ) 이라는 글자가 두 돌기둥에 새겨져 있어 이곳이 부산의 관방체제와 유적

나라의 관문이었음을 말해준다. 자성대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되고 바다 면은 매축되어 옛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자성대에는 많은 유적들이 있다.

먼저 자성대의 성곽은 왜성의 형태로 경사진 성 벽과 2단의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정상에는 명 나라 장수로 조선을 도우러 왔다가 귀화한 천만 리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가 있다. 또 동 쪽 중턱에는 고려 후기 무신이자 상업의 신으로 여겨졌던 최영 장군의 사당인 무민사가 있다.

정상에는 진남대가 본래 모습과 달리 후대에 만 들어져 있다. 그리고 최근 남문 근처에 통신사 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 영가대가 복원되었다.

3. 동래읍성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 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 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 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나 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 등으 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 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것은 고려 사(高麗史)에 보이는 1201년(현종 12)에 동래 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원래 동래현성의 고읍성지는 수영구 망미동 구 국군통합병원 자리에 있었다. 동래현성이 해 운포의 배산지역에 있다가 지금의 동래시장이 있는 곳으로 옮긴 것은 고려 후기 박위 부사가 왜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우왕 13년(1387)이었 다. 동래현성은 세종 28년에 쌓았다. 동래현 읍

성은 주위가 3천 척, 성의 높이가 평지는 13척, 높고 험한 곳은 12척이며, 여장(女墻)의 높이는 2척이고, 적대(敵臺)가 12개소, 문(門)이 4개소 인데 옹성(擁城)이 있으며, 여장이 5백 13개이 고, 성안에 우물이 6개소, 해자(海子)는 아직 파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 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 상현(宋象賢)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 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 곽의 둘레가 약 5,239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 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 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 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 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 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 도 옹성(壅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 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 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과 옹성·동장대·서장대·

치성(雉城)·여장(女牆) 등이 부분적으로 복 원·보수하고 있다. 최근 지하철 3호선 공사 중 에 성벽과 환호 등이 발견되었다.

동래읍성의 내력을 알려 주는 것으로는 내주 축성비(萊州築城碑)가 있다.이 비문은 1731년 - 154 -

문서에서 2007년 초등교사역사교실 시간표 (페이지 136-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