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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인의 살림살이

문서에서 2007년 초등교사역사교실 시간표 (페이지 37-41)

1. 고기잡이(漁撈)

기원전 8,000년 무렵 빙하기가 끝나면서 우 리나라의 기후와 지형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자연환경의 변화 속에서 신석기인들 은 새로운 식량획득방식을 개발해야 했다. 신석 기인들이 제일 먼저 눈을 돌린 곳은 강과 바다 였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곳곳에 강과 바다가 생겨났으며, 그 곳에는 물고기, 조개 등 식량자 원이 풍부하였다. 주변의 풍부한 수산자원(水産 資源)을 활용하는 고기잡이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주요한 생계수단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 도 정착생활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신석기시 대의 집자리가 주로 바닷가나 큰 강변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고기 잡이에는 동물의 뼈와 돌로 만든 작살·낚싯바 늘·그물추 등이 이용되었다.

작살[ ]은 돌이나 동물의 뼈로 만든 꼬챙이 [刺突具]를 긴 나무막대에 연결하여 물고기를 찔러 잡는 도구이다. 작살은 작살머리[ 頭]과 자루[柄]로만 이루어진 것과 작살머리·자루·

로프[索繩]로 이루어진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앞 의 것은 창(槍)을 사용하듯이 직접 물고기를 찔 러 잡는 방법으로 얕은 물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되었다. 뒤의 것은 작살이 포획물 에 명중되고 난 뒤, 도망치는 포획물을 연결된

로프에 의지해 지칠 때까지 쫓아가 잡는 방법이 다. 주로 먼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 고래, 상어 등을 잡는데 이용되었다.

낚시[釣]는 미끼를 달아 물고기를 유인하여 잡는 도구로 작살에 비해 한층 발전된 형태이 다. 낚시는 줄[繩]·바늘[針], 혹은 줄·바늘·

자루[柄]로 구성되는데, 유기질의 자루와 줄은 남아있지 않으며, 다만 바늘만 남아 있어 당시 의 낚시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낚싯바늘은 크게 외낚싯바늘 [單式釣針]과 이음낚싯시바늘[結合式釣針]로 구 분된다. 외낚싯바늘은 갈고리형과 찌르개형으 로 구분되는데, 갈고리형은 주로 동북지방의 후 기유적에서만 출토된다. 몸체[軸]와 갈고리[ ] 를 따로 만든 다음 끈으로 이어 사용하는 이음 낚싯바늘은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 일대의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 출토된다. 이음낚싯바늘은 먼 바다에서 대구나 다랑어 등 비교적 큰 물고기를 잡는데 이용되었다.

그물[魚網]의 사용은 고기잡이 기술에 있어서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작살이나 낚시는 개인적 인 단독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어획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물을 이용하면 서부터 집단적 공동작업을 통해 대량어획이 가 능해졌다.

그물 자체는 유기질이어서 남아 있지는 않지 만, 돌로 된 그물추[漁網錘]가 발견되고 있어 그 존재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물추는 이른 시기부터 전국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 밖에도 해초나 조개류를 따는 채취어법(採 取漁法)이 있었다. 채취어법에는 별다른 도구가 필요치 않아 신석기인들의 채취행위를 보여주 는 증거는 그들이 먹다버린 조가비뿐이다. 우리 나라 남해안과 서해안에 분포하는 많은 수의 조 개더미를 보아 조개채취가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개더미에서 출토되는 조개류에는

갯벌이나 얕은 바다에서 서식하는 굴, 바지락, 백합 등도 있으나, 깊은 바다 속에 사는 홍합, 전복, 투박조개 등도 보인다. 이들 조개류는 잠 수를 해야만 채취가 가능하다. 통영 연대도에서 출토된 이 시대의 인골에서 보이는 외이도골종 (外耳道骨腫)이라는 질환도 잠수작업 때문에 생 긴 것으로 보고 있다.

2. 농경(農耕)

신석기시대에 개발된 또 다른 식량획득방식 은 바로 농경이다. 땅을 일궈 곡물(穀物)을 재배 하는 농경은 인간이 특정자원을 생산 활용한다 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함께 농경이 이루어지지 는 않았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유적에서 출토 되는 괭이, 따비, 낫 등의 농경용 석기와 황해 봉산 지탑리, 부산 동삼동, 충북 옥천 대천리 등지에서 확인되는 탄화된 조, 보리 등 낟알들 을 고려한다면,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 곡식농사 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농경이 시 작되었어도 여전히 고기잡이와 사냥, 채집활동 이 주된 식량획득 방법이었으며, 농경은 보조적 인 수단이었다.

신석기시대의 농사형태는 먼저 나무를 쳐내 고 불을 지르고 난 뒤 모든 식물이 불에 타 재가 되면 이것을 비료로 사용하여 작물을 재배하는 일종의 화전농업(火田農業)일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나무꼬챙이 등을 이용하여 구멍을 파 씨를 뿌렸으나, 점차 나무자루 끝에 돌날 등을 달아 보다 효율적으로 땅을 일구었다.

신석기시대의 밭갈기는 나무뿌리를 캐내고 땅을 고르는 간단한 형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흙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수 있는 돌따비와 돌괭 이는 삽, 괭이, 호미 등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 할 수 있는 도구였기 때문에 밭갈이에 효과적이 신석기의 문화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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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능률적인 도구였다. 또한 이들 갈이용 농기 구는 농사뿐만 아니라 움집 등의 땅을 파는데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주요 재배곡물인 조, 기장 등은 낟알이 잘 흩어지고 익는 시기가 불규칙하기 때 문에 이삭이 익는 순서에 따라 따는 것이 효과적 이다. 민족지자료에 의하면 별다른 도구 없이 이 삭을 손으로 직접 따거나 뿌리 채 뽑기도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수확용 농기구로는 주로 길 쭉한 돌이나 멧돼지 이빨 등의 한 쪽을 갈아서 날을 세워 만든 낫 모양의 도구가 있다. 그러나 이들 도구가 수확용 도구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오히려 낫 모양의 도구는 가지치기, 벌초구 등의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밖에도 밭을 개간하면서 나무를 베는 데 사용되는 벌목구(伐木具)와 생산된 작물을 가공 하는 조리구(調理具)는 농경과 직접 관련되는 도구는 아니지만, 농경에 부수되는 도구로 분류 할 수 있다.

3. 사냥(狩獵)

사냥은 구석기시대부터 이루어진 가장 오래 된 식량획득방법 중 하나이다. 신석기시대의 사 냥형태를 보여주는 자료는 창과 화살촉이 있다.

창과 활은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미 발명되었으 나, 본격적인 사용은 신석기시대의 일이다.

각 유적에서 출토되는 창과 화살촉의 비중은 고기잡이도구나 농경도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이 점에서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롭 게 개발된 고기잡이나 농경에 비해 사냥의 비중 이 낮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냥된 동 물은 인간에게 단백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뼈와 뿔, 이빨, 가죽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 구를 만드는 재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신석기

시대 생업경제에도 사냥은 여전히 큰 비중을 가 졌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사냥도구는 바로 활[弓]과 화살[矢]이었다. 날쌘 동물들을 잡기위해서는 먼 거리에서도 사냥할 수 있는 활과 화살이 제격이었다. 활과 화살의 사용으로 사냥에 실패할 위험성은 줄어들었으 며, 효율성은 보다 커졌다. 함북 웅기 서포항유 적에서는 다리에 화살촉이 박혀있는 멧돼지의 뼈가 발견되어 화살의 위력을 잘 보여주고 있 다.

활과 화살은 대부분이 유기질로 되어 있어 살 촉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살촉은 돌이나 동물의 뼈로 만들었는데, 구석기시대 후 기의 것보다 날카로워졌으며 형태도 정형화되 었다. 동북지방과 남해안지방의 화살촉은 주로 눌러떼기 기법으로 제작된 뗀석기임에 반해, 중 부지방의 것은 전체를 갈아서 만들었다.

창은 구석기시대 이래로 짐승사냥에 효과적 으로 이용된 사냥도구이다. 몸집이 큰 짐승을 가까이 다가가 사냥하기 위해서는 공격기능 뿐 만 아니라 방어기능도 갖추어야 한다. 창은 이 두 기능을 모두 갖춘 위력적인 무기였다. 그러 나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냥도구로서 창 은 효용성이 떨어졌다. 몸집은 작지만 날쌘 짐 승이나 새는 창으로 잡기가 어려웠다. 사냥도구 는 점차 활과 화살로 대체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화살촉이 창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출 토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신석기시대의 창은 돌이나 동물 뼈로 만들었 다. 모양은 화살촉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크기가 화살촉에 비해 크다. 돌창[石槍]의 경우 갈아서 만들기도 하지만 주로 떼어서 만들었다. 형태는 슴베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버들잎모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곰과 호랑이와 같은 맹수를 사냥한 흔적이 함

북 나진 초도·무산 범의구석, 평북 미송리, 부 산 동삼동, 경남 김해 수가리 등지에서 확인되 었다. 이들 맹수의 뼈들은 이빨이나 다리뼈 등 특정부위에 한정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맹수사냥은 식량의 확보 차원에서 이루 어진 것이 아니라 사냥꾼의 용맹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석기인 들은 곰과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이나 신체 일 부를 몸에 지님으로써 맹수의 영혼이 자신의 몸 에 깃들기 원했을 것이다. 이것을 몸에 차는 사 람은 아마도 신석기사회를 총괄하는 샤먼 혹은 지도자였을 것이다.

동물사육에 대한 고고학 증거는 많지 않다.

그러나 평남 용강 궁산, 함북 웅기 서포항·청 진 농포동, 부산 동삼동, 경남 통영 연대도·창 녕 비봉리 등지에서 개와 돼지의 뼈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의 개와 돼지의 뼈들은 야생종 도 있지만, 야생종과 사육종의 중간 형태를 띠 는 것도 있다. 이 점에서 개와 돼지는 신석기시 대부터 사람들에 의해 길들여지기 시작했을 가 능성이 크다. 함북 청진 농포동에서는 개 머리 모양 토제품이, 경남 통영 욕지도에서는 멧돼지 모양 토제품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신석기인들 이 이들 짐승을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가를 짐작 할 수 있다. 야생동물의 사육은 농경과 함께 신 석기인들의 안정적인 식량확보에 기여하였다.

4. 야생식물채집(野生植物採集)

야생식물의 채집은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생 계수단이었다. 식물줄기나 잎, 뿌리 등 다양한 야생식물이 식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 나, 야생식물의 채취는 별다른 도구를 필요치 않아 아직은 고고학적으로 구체적인 자료를 제 시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다. 다만 탄화된 채 로 발견되는 나무열매와 가공도구 등을 통해 그

양상을 추론할 수 있다.

기온이 온화해지면서 북반구 중위도 지역에 는 도토리를 산출하는 참나무류가 급증하게 된 다. 신석기인들은 이렇게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토리를 식량으로도 이용하였다. 서울 암사동, 강원 양양 지경리에서는 집자리 안에서 도토리가 출토되었으며, 경남 창녕 비봉리, 울 산 세죽리에서는 도토리를 저장하는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도토리는 칼로리와 영양가가 곡류 못지않게 높으나, 타닌이라는 성분이 있어 날로 먹으면 떫은맛이 난다. 이 떫은맛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불에 굽거나 물에 우려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물을 저장하는 토기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토기 는 유기질로 된 다른 그릇들과는 장기간 물을 저장할 수 있어 도토리를 우려내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에 일부에서는 동아시아 신석 기시대의 토기가 출현하게 된 배경을 도토리의 타닌제거와 연결시켜 보기도 한다. 떫은맛을 없 앤 도토리는 알 채로 먹거나, 갈판과 갈돌을 이 용해 가루를 내어 먹었다.

도토리 외의 나무 열매로는 가래, 살구, 보리 수 등이 경남 합천 봉계리, 창녕 비봉리 등지에 서 검출되었다.

5. 신석기인의 살림집

구석기시대에는 이동생활에 용이한 동굴, 바 위그늘, 지상의 간이천막에서 살았으나, 신석 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움집이라는 새로운 형태 의 살림집이 나타났다. 움집은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별도의 벽체시설 없 이 갈대나 이엉 등으로 엮은 지붕을 얹은 형태 이다. 이러한 움집은 종전의 살림집과 비교해 볼 때 반영구적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생활이 매 우 안정적일 뿐만 아니라 정착생활도 가능했음 신석기의 문화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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