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신사(通信使)와 회답겹쇄환사(回答兼 刷還使)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다시 열리면서 일본에 간 통신사는 조선국왕이 일본국왕인 도쿠가와 (德川)막부 장군에게 파견하는 외교사절이다.
통신사의 명칭은 대체로 조선에서는 통신사, 신 사, 일본통신사, 일본에서는 신사, 조선통신
통신사와 왜관
김 동 철
사, 조선신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는 12회 파견되었다.
처음 3회(1607, 1617, 1624년)의 사절 명칭 은‘통신사’라 하지 않고, ‘회답겸쇄환사’라 하 였다. 장군의 국서에 대한 회답(回答)과 납치된 피로인의 쇄환(刷還)을 목적으로 한 사절이었 다. 아직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남아 있어, 통신 의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통신사행은 1636, 1643, 1655, 1682, 1711, 1719, 1748, 1763, 1811년의 9회 파견되었다.
막부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해 에도 (江戶, 東京)까지 갔다. 1617년 회답겸쇄환사 는 교토, 1811년 통신사는 대마도까지만 갔다.
2. 조선전기의 통신사
통신사란 이름은 고려 때도 있었다. 1375년 (고려 우왕 1) 나홍유를 무로마찌(室町)막부에 통신사로 파견한 적이 있다(「고려사절요」권 30, 신우 원년 2월). 조선전기에 통신사 이름으 로 일본에 파견된 사절은 모두 8차례 시도되었 으나, 사절의 발병(發病)과 일본 국내 사정으로 3차례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통신사 규정에 가 장 근접한 최초 사행은 1429년(세종 11) 사행 이다. 정사 박서생(朴瑞生), 부사 이예(李藝), 서장관 김극유(金克柔)로 구성되었고, 막부장군 의 경조를 위한 사절이었다.
3. 통신사를 맞을 준비
朝鮮御用役 老中이 임명되어 통신사를 맞을 준비를 맡았다. 새 장군이 들어서면 막부는 대 마도주에게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 倭)를 부산왜관에 보내어 알리도록 하였다. 이 어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통신사청래차왜(通 信使請來差倭)가 조선에 건너왔다. 朝鮮御用役
老中은 통신사 영접 최고책임자가 되어, 통신사 가 지나가는 지방의 다이묘(大名)들과 함께 준 비에 착수하였다. 지방에서는 통신사가 묵을 숙 소를 신축·수리, 경호선단 및 예인선단 편성, 항구 정비, 도로 정비와 인부·말의 조달, 하천 의 주교(배로 만드는 다리) 설치, 접대용 음식물 마련 등의 많은 준비를 하였다.
4. 통신사의 규모
삼사, 역관, 제술관, 상관, 차관, 중관, 하관 으로 나누어졌다. 삼사(정사, 부사, 종사관)는 최고 책임자로서 외교 실무를 담당한다. 역관은 일본어 통역을 맡고, 제술관은 외교문서의 초안 등을 담당하였다. 상관에는 의사, 사자관, 서 기, 화원이 속했으며, 학술 문화 교류에 대비하 여 각 분야의 제1인자가 선발되었다. 차관은 마 상재(馬上才), 전악(典樂), 선장 등이다. 중관은 복선장(卜船將), 소동, 사령, 사공, 취수(吹手), 포수(砲手), 기수 등이다. 하관은 풍악수와 격 군(格軍) 등이 있었다. 총인원이 거의 500명에 가까웠다. 삼사를 비롯한 100명 남짓 규모의 통신사가 부산에 집결한 후, 부산을 비롯한 경 상도 전역과 전라도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급 실무 수행원을 보충하였다.
5. 통신사의 길
창덕궁 인정전에서 삼사 임명식을 거행한 후, 숭례문을 나왔다. 판교·충주·문경·예천·의 성·안동·영천·경주·울산을 거쳐 동래부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로의 각 군현 에서는 통신사를 위한 송별연을 열었다. 수령이 개별적으로 접대하는 것 외에, 국가에서 공식적 으로 베푸는 사연(賜宴), 공연(公宴)으로 불리는 전별연이 열렸다. 공식 전별연은 충주, 경주, - 166 -
안동, 영천(永川), 부산에서 열렸다. 충주, 경 주, 안동 세 곳은 접대 비용을 줄이기 위해 1655년(효종 6) 사행부터 폐지되었다. 영천에 서는 경상도관찰사(경상감사)가, 부산에서는 경 상좌수사가 전별연을 주관하였다. 영천의 전별 연 때는 마상재 공연이 열리기도 하였다.
통신사는 날씨에 따라 부산에서 40·50일 머 물면서, 왜관을 구경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 였다. 부산은 통신사의 접대, 편성, 물품의 보 관 등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왜관은 통 신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준비와 실무교섭 등을 맡았다. 통신사는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올린 후, 통영에서 만든 4척, 경상좌수영에서 만든 2척 합계 6척[騎船 3척, 卜船 3척; 삼사가 각 2척씩, 단 1811년에는 4척]의 배를 타고 일 본으로 출발하였다.
일본배의 안내와 호위를 받으면서 대마도, 이 키섬을 경유하여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下 關, 赤間關), 카미노세키(上關), 도모노우라 (浦), 우시마도(牛窓), 무로쓰(室津), 효고(兵 庫), 오사카(大坂)에 도착했다. 귀국준비를 위 해 100명 정도를 오사카에 남긴 후, 일본 배로 갈아타고 요도가와(淀川)를 거슬러 올라가 교토 (京都) 부근에 이르러 다시 육지에 올랐다. 히코 네(彦根), 나고야(名古屋), 시즈오카(靜岡), 오 다와라(小田原)를 거쳐 에도(江戶)에 도착하였 다. 야쓰(野洲)에서 히코네까지의 약 40㎞의 길 은‘조선인가도(街道)’란 별명이 붙었다. 막부 장군의 전용도로인 이 길은 외국사절의 왕래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통신사는 예외였다. 왕복 6
~12개월의 긴 여정에서 지나는 곳마다 많은 시 (詩)와 기행문을 남겼다.
6. 통신사행의 역할
「회답겸쇄환사」에서 정식으로「통신사」로 명
명되어 1636년 파견되었을 때, 조선은 청나라 의 위압에 견디기 힘든 때였다. 1643년 통신사 도 사정은 같았다. 조선 변경을 안정시키는 것 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통신사의 명목은 장군 계승을 축하하는 것이었지만, 남쪽을 안정 시키기 위해 파견된 문화사절이었다. 통신사의 외교 의례행위는 일본에 대한 조공사절로 오인 되기도 하였다. 통신사는 최고 권력자이자 외교 권자로서 도쿠가와 장군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여러 호족들에게 정치적 우위를 과시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통신사의 가장 큰 의례는 조선국왕의 국서를 막부장군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머무는 동안 각 지의 일본인과 유학, 문학, 의학, 미술 등 각 분 야에서 활발한 문화교류를 하였다. 필담창화한 문집은 현재 수집종이 전한다. 통신사 일행은 빨리 짓는 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미리 시를 지어 놓았다가 한두가지만 고치기도 하였다. 필 담은 과학, 한글, 관혼상제, 의사문답(醫事問 答), 인삼·본초학 등 광범위하였다. 시문의 증 답과 서화의 휘호는 주로 제술관, 서기, 사자 관, 화원들이 맡아 하였다. 1763·64년 사행 때 시문을 주고 받은 일본인이 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7. 금강산·후지산 우열 논쟁
한일 문사간의 창화나 필담을 보면 자국의 문 화적 우수성을 보여 주려는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금강산과 후지산의 우 열에 관한 논쟁이다. 사행원들이 각 지역 경관 을 시로 읊는 가운데 후지산의 절경은 빠뜨릴 수 없는 호재였다.
1643년 통신사행 때 부사로 간 조경의 후지 산시에 금강산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후지산에 지지 않는 금강산을 언급했을 뿐, 적극적인 예 통신사와 왜관
찬은 하지 않았다. 1655년 사행 때 종사관인 남 용익은 양자를 비교하면서, 금강산의 우수성을 논했다. 이에 일본인 승려 중달(中達)과 초백(貂 柏)은 금강산보다 후지산이 낫다는 시를 썼다.
시를 통한 상호 우수성에 대한 논쟁은 이 때 가 장 심각하였다.
논쟁은 18세기 후반에도 계속되었다. 이정암 (以酊庵) 장로인 지림(芝林)화상이 후지산을 찬 미한 시에 대해, 1748년 사행 때 부사의 서기 유후(柳逅)는 금강산보다 아래라고 화답하였다.
1763년 통신사 때도 팽팽한 대결 의식이 있었 다. 제술관 남옥(南玉)은 후지산을 찬미하면서 도 금강산처럼 봉우리마다 다른 모습이 나타나 는 신비함이 없다고 하였다. 정사 조엄(趙 )은 후지산을 금강산과 비교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 지 않으려고 하였다.
통신사행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후지산에 대 한 금강산의 우위를 주장하면서도, 금강산의 실 경 묘사에는 서투르거나 무지했다. 이것은 실제 금강산을 보지 못하고 상식만으로 필담하거나 시화한 데서 기인할 것이다. 사행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후 많은 금강산 시를 남겼다. 일본 인들과 논쟁을 하면서 금강산 실경을 체험할 필 요를 느꼈을 것이다. 금강산을 비롯한 국토에 대한 자각은 문인뿐 아니라 사행을 수행했던 화 가들에게서도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8. 신유한을 놀라게 한 일본의 출판업계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인 신유한(申維翰)은 사행록「해유록(海游錄)」에서“석가원(釋迦院) 정사(精舍)의 서림(書林), 서옥(書屋)인 유지헌 (柳枝軒)·옥수당(玉樹堂)에는 고금의 백가(百 家) 서적을 저장하고 출판 판매하며, 중국 책과 우리나라 선현의 글이 없는 것이 없다.”라고 서 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신유한을 더욱 놀라게 만든 일이 일어 났다. “담 장로가 오사카에서 새로 출판된「성 사답향(星 答響)」두 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나와 세 서기(장응두, 성몽량, 강백)가 장로와 화답한 시편이다. 이미 출판된 것은 아카마세키 (赤關, 下關) 이전의 작품이고, 그 나머지는 아 직 출판이 끝나지 않았다 한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한 달 안에 출판된 것이다. 왜인이 일을 좋 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습성이 자못 중화와 다 름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신유한이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기 전에 쓴 창 화 시문이 에도(江戶)에 갔다가 오사카에 다시 돌아왔을 때, 「성사답향」에 수록되어 출판되었 다는 것이다. 이 책은 1719년 10월에 목판본으 로 간행되었다. 초스피드의 일본 출판업계 실력 을 과시하고 있다. 통신사의 창화집에 대한 일 본 학계, 문화계의 수요가 그만큼 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9. 통신사의 꽃, 마상재(馬上才)
마상재는 말을 타면서 여러 가지 묘기(妙技) 를 보이는 사람이다. 통신사에는 마상재 2명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통신사의 차관(次官)에 편 성되었다. 마상재는 1636년에서 1811년까지 9차례 통신사 중 7차례 일본에 갔다. 1655년과 1811년 통신사 때는 마상재가 포함되지 않았 다. 마상재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1635년이 다. 이때는 통신사의 일원로 간 것은 아니었다.
마상재는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 마병(馬 兵) 가운데 무술(武術)이 뛰어난 자로 선발하였 다. 1719, 1748, 1763년 3차례의 통신사 때 는 특히 별무사(別武士)로 선발하였다. 별무사 는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자였다. 1719년 통신사 때부터는 8명을 선발하여 에도(江戶)에 서 활쏘기를 하였다. 8명 가운데 마상재 2명도 - 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