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지배층의 무덤은 이 무덤으로 최종 통 일되는 경향을 보인다. 지역에 따라서 평면구조 와 널길의 형태에 있어서 차이가 다른데, 낙동 강 하류지역에서는 직사각형 널방에 좌편수식 널길과 아치형 천장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하며 경남 의령과 고성 등지의 것은 평면 직사각형의 널방에 중앙으로 널길이 나있는 형태이다. 시기 적으로는 6세기 후반경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뒤를 이어 등장하면서 앞트기식 돌방무덤과 함 께 고분내에 조영되다가, 7세기에는 독립된 무 덤형태로 발전되어 간다.
김해 유하리 전왕릉은 단독무덤 양식으로 대 표적이며, 다호리유적에서는 죽은 이를 안치하 는 과정에서 치러진 의례의 흔적이 잘남아 있어 주목된다. 대체로 제사유구祭祀遺構로 불리우는 이러한 유구는 장례의 순서에 따라 행해진 장송 의례를 복원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으 며 무덤방 안의 유물과 달리 고의로 파손한 듯한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Ⅲ. 가야토기(加耶土器)의
은 후 물레에 걸어 그릇의 형태를 다듬은 것이 다. 그늘에서 잘 말린 후 노천요에서 700℃ ~ 800℃의 낮은 온도에서 구워 낸 것이다. 산소 가 충분히 공급되는 노천요에서 구워졌기 때문 에 그 색깔은 적갈색赤褐色으로 나타난다. 토기 의 질감은 무문토기보다 표면이 매끈한 편이며 흡수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주로 시루, 소형 발 등 실생활과 관련된 용기로 많이 제작되었으 며, 중대형의 장란형 옹은 옹관甕棺 등 매장용 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도 있다.
경질제의 도질토기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 되는 것이 가장 많으며 주거지와 패총 등 생활유 적에서도 일부 출토되고 있다. 후기와질토기의
전통위에 새로이 전래된 제도기술製陶技術의 영 향으로 그릇의 형태는 주로 윤적법輪積法으로 성형하며 타봉打棒으로 기벽을 두드려 단단하게 하면서 형태를 잡아나간다. 그런 다음 물레를 사 용하여 물손질을 해서 표면을 잘 다듬고 문양을 새긴 다음 그늘에서 말린 후 등요登窯에서 1,000℃ ~ 1,200℃가량의 높은 온도로 소성燒 成하여 완성한다. 등요에서 소성 도중 가마의 입 구를 막아버리기 때문에 산소공급이 차단되어 요내의 소성분위기가 환원분위기로 바뀌게 되며 이에 따라 토기내의 산화제이철(Fe2O3)이 산화 제일철(FeO)로 환원되면서 회청색灰靑色의 도 질토기로 구워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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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가야의 지역별 토기양식
도질토기는 가야토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만큼 그 종류도 다양한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배高杯, 장경호長頸壺, 단경호短頸壺, 기대 器臺, 소형원저광구호小形圓底廣口壺 등이 있 고, 동물모양이나 집, 배모양 등으로 형상화시 킨 상형토기象形土器가 많이 발견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 고 있다. 도질토기는 3세기 후엽이후 김해를 중 심으로 한 금관국金官國에서 처음 출현하였고, 4세기중엽이후 가야의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었 다. 일상의 생활용기이자 당시대의 예술품이며 무덤에 묻는 부장용이기도 한 가야토기는 초기 에는 둥근밑항아리, 귀달린항아리 등의 크고 작 은 항아리壺가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5세기대 에 이르러 점차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생산되면 서 이단二段 굽구멍에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 이는 고배와 같이 세련된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 는 가야토기로 발전하였다. 토기 중에서 가야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고배류와 장경호, 발형기대, 통형기대이다. 고배는 비교 적 얕은 배신에 나팔형으로 벌어지는 긴 대각에 2단의 투창을 상하 일치되게 뚫어 범가야 양식 을 대변하는 토기기형이다. 장경호는 긴 목이 가 운데가 부드럽게 좁아들며 목부분과 동체부가 유연한 S자형곡선을 이루며, 목에는 세밀하고 정치한 여러줄의 밀집파상문密集波狀紋이 시문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발형기대는 또한 넓고 깊은 기신에 고배와 같이 벌어지는 대각, 상하로 일치되어 있는 투창을 가진 형태로 발부 외면에 여러줄의 파상문과 세선삼각문대를 돌리고 있 다. 통형기대는 원통이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것 이 아니라 대각부는 넓게 퍼지고 서서히 오므라 들면서 기신이 직선으로 올라가고 배신부에서 다시 동그랗게 벌어져 신비감과 세련미를 더하 고 외연에는 세로로 뱀머리와 몸통을 장식한 형 태로 의례용기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가야의 토기제작 기술은 5세기전반 무 렵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고분시대古墳時代의 대표적인 토기인 쓰에끼須惠器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일본의 토기제작 기 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가야토기의 변천은 가야사加耶史의 발전과정 과 맥락을 같이하며 크게 전기前期(3세기 중반
~4세기말), 중기中期(5세기초 ~ 5세기말), 후 기後期(6세기초 ~ 562년)의 3시기로 나누어진 다. 전기는 회청색도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의 발생과 더불어 낙동강 동서안에서 양식적樣式 的으로 공통적인 요소가 보이고 있는 고식도질 토기古式陶質土器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중기 는 지역적으로 분화된 가야 여러나라의 독특한 토기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기로 김해식金 海式(金官加耶), 함안식咸安式(阿羅加耶), 창령 식昌寧式(非火加耶), 고령식高靈式(大加耶), 고 성식固城式(小加耶) 등의 특징적인 지역양식地 域樣式 토기문화가 크게 발전을 이룬 전성기이 다. 한편, 후기는 정치적인 세력위축에 따라 가 야의 토기문화에 서서히 신라토기新羅土器 또 는 백제토기百濟土器 문화의 수용이 점차적으 로 나타나고 있다.
가야토기의 출현은 김해 대성동 29호와 양동 리 235호묘 출토품으로 보아 3세기 후반을 전 후한 시기로 추정되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한漢 의 회유도灰油陶說, 자체발생설, 인문도설印文 陶說, 고월주요설古越州窯說등 여러 가지가 있 다. 가야토기는 제작기술면에서 이전시기의 토 기들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점토의 선택이나 제 작기술 등에서 선사시대의 토기와는 달리 전업 적인 생산체계에서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 다. 주로 5세기 이후 가야토기는 영남지역을 관 통하는 낙동강이라는 자연지리적 경계와 일치 하여 신라토기와 그 양식적 차이가 뚜렷해진다.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양식토기加耶樣式土器 가야의 고분문화
가 분포하고, 그 이동지역은 신라양식토기新羅 樣式土器가 분포한다. 이와 같이 가야와 신라토 기는 영남지방을 가야권加耶圈과 신라권新羅圈 으로 구분해주는 기준이 되며 또한, 가야권내에 서도 여러 세력권을 구분하는 주요기준이 되고 있다.
가야토기는 가야 각국의 중심지역에 따라 그 릇의 모양과 무늬 등의 세부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인정되며 몇 개의 소지역군小地域群으 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경계는 대체로 가야 각국의 지배 범위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으로 해 석된다. 즉, 금관가야駕洛國가 있었던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낙동강하류역, 아라가야 安羅國의 옛 지역인 함안지역, 대가야加羅國의 옛터인 고령과 그 주변지역 및 소가야古自國로 비정되는 고성·사천·진주지역 등으로 나누어 진다. 이처럼 가야의 각국이 존재하던 지역마다 독특한 토기문화가 성립되어 있었으나, 6세기 중반이후 신라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면서 가야토기는 독자적인 원형을 잃어버리고 신라 토기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통일양식統一樣式 토기문화로 변화되어 낮은 굽다리접시短脚高 杯, 꺾인 목항아리附加口緣長頸壺 등과 같은 형 태의 토기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