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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구(裝身具)와 매장의례(埋藏儀禮)

문서에서 2007년 초등교사역사교실 시간표 (페이지 59-63)

인간이 신체에 장신구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 은 중기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유물로서도 확인 되고 있다. 당시 장신구의 목적은 오늘날과 같 은 장식裝飾이나 미美의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 는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생존의 문제와도 결부 된 호신護身, 벽사 邪와 같은 주술적인 의미 가 더 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영혼靈 魂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면서부터 사자死者의 매장풍습이 생겨나고 영혼의 세계에도 장신구 를 부장하는 것이 관습화慣習化 되었다. 더욱이 인류는 신앙생활信仰生活과 더불어 장신구를 착용하는 풍습은 더욱 발전하고 다양화되었으 며 신체의 보호나 미적인 장식의 일차적인 목적 뿐 만 아니라 권력勸力이나 신분身分의 상징물 로서도 더욱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에는 조개팔찌, 뼈연장, 잇빨, 흙구슬 등의 간단한 장신구들이 사용되었다. 이후 청동기시대가 되자 청동 장신 구의 등장, 석제나 뼈연장의 증가, 각종 주술행 위가 성행하였으며 삼한시대가 되면 벽옥, 수 정, 호박, 유리제 구슬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목걸이와 팔찌 등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가야시대에 이르러서도 지속되었는데 가야의 장신구는 신라나 백제, 고구려 등에 비하여 그 다지 발달하지 못하였다. 가야의 장신구에는 관 冠, 허리띠장식 帶金具, 귀걸이耳飾, 목걸이 頸飾, 팔찌釧 등이 있으며 금제품 보다는 금동 제나 은제, 유리제가 많으며 수정水晶, 마노瑪 瑙, 호박琥珀, 비취翡翠 등과 같은 보석광물도 장신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크게 보아 4세 기대 까지 수정, 마노, 유리 등으로 만든 구슬 류가 중심이고 금, 은, 금동 등의 귀금속계통의 장신구는 출토예가 적은 편이나 5세기후반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장신구가 만들어 지고, 형태와 구성, 재질면에서 신라에 비하여 그다지 화려하 지 않고 정제된 제품이 제작되었다.

가야 지배층의 상징적인 기물인 관은 순금제 와 금동제가 있다. 금동제는 고령 지산동32호 분, 45호분, 성주 성산리고분 출토품, 부산 복 천동1호분, 11호분 등이며 순금제 관은 호암미 술관 소장품과 일본 동경박물관의 오꾸라컬렉 션 소장품이 있다. 또한, 신라의 관과 같이 일 정한 형태와 규격을 가지고 여러 개가 같은 형 태로 제작된 것은 없고 다양한 구조로 각각 만 들어 진 것이 특징이다. 특히, 고령 지산동32호 분 금동관은 세움장식의 형태에서 가야의 독창 성을 엿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령 대가야고분 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호암미술관 소장 금 관은 관테臺輪와 세움장식立飾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움장식이 초화형草花形으로 되어 있 는 점이 신라의 금관과 큰 차이가 있다. 관테는 폭이 3.6cm로 상하에 각각 점무늬點列文와 점 열격자무늬點列格子文가 새겨져 있고 드문드문 금줄로 엮은 달개가 매달려 있다. 세움장식은 사방에 세워져 있는데 끝은 보주형이고 양쪽으 로 대칭되도록 풀잎모양의 가지가 3단으로 늘 어져 있다. 점무늬가 전면에 타출打出되어 있으 가야의 고분문화

며 꽃모양, 원모양, 펜촉모양 등의 장식용 금구 가 부속구로서 결합된다. 이 금관은 제작기법이 정교하고 화려하며 권위의 상징물로 주목된다.

복천동11호분 출토 금동관은 두께 1㎜정도의 얇은 청동판에 금박을 입힌 것으로 대륜의 정면 과 좌우 양측면에 각각 1개씩의 나뭇가지 모양 의 입식이 장식되어 있다. 정면의 입식은 나뭇 가지가 3단으로 되어 있고 꼭대기에는 금동판 을 보주모양으로 오려 형상화 하였다. 입식의 줄기와 가지, 보주부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뚫 고 둥근 모양의 달개장식을 청동실로 달아매었 다. 원형대륜은 지름이 18.7㎝이며 너비가 2.9

㎝인데, 길이 50㎝인 청동판 표면에 금을 입혀 만든 것으로 대륜의 위아래 부분에 한 줄의 물 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금동관은 영남지역에 서 현재까지 출토된 것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의 것이다. 입식의 가지가 나뭇가지 모양이지만 신라의 금관이나 금동관의 입식모양이 산山 자 인 것으로 볼 때, 복천동 11호 금동관이 시원적 始原的인 형태로 추정된다. 한편, 복천동 1호분 출토 금동관은 입식의 모양이 출出 자형으로 5 개 장식되고, 가지와 중앙의 꼭대기에 금동판을 오려 보주모양의 문양을 만들었다. 좌우 가지에 각각 2개씩의 둥근 달개를 청동실로 매달았고 대륜판의 아래위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눌러서 새긴 무늬가 있다. 이 같은 금동관은 경주를 비 롯한 신라지역의 중심권역과 대구, 창녕, 양산, 강릉 등지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형 태인데, 이들 지역은 공통적으로 가야 제 지역 중에서 가장 빨리 신라영역으로 편입되어 들어 갔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 대한 회유책으로 신라 에서 나누어진 위세품으로 제작되었으며 신라 왕실과의 구별을 위하여 금동관을 사용하도록 한 것으로 파악된다.

귀걸이는 금동제품과 금제품이 많이 제작되 었다. 가는 고리귀걸이에 여러 개의 달개장식을

단 형태가 일반적인 형태이나 신분이 낮은 계층 에서는 달개장식이 없는 민고리 형태의 귀걸이 나 작은 유리구슬을 고리에 달아매어 사용하기 도 하였다. 가는고리에 작은 둥근 모양의 중간 장식이 있고 그 아래에 금 사슬을 꼬아서 늘어 뜨리고 끝부분에 작은 고리를 매달은 형태의 귀 걸이도 있다. 옥전고분군과 고령 지산동고분군 에서 많이 나오는 것으로 가야의 전형적인 귀걸 이로 파악된다.

유리로 만든 장신구에는 목걸이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청색, 남색, 녹색의 크고 작은 유리구 슬에 곡옥, 관옥 등을 연결하여 다양한 형태의 목걸이를 만들었다. 그 외, 팔목에 여러개를 작 용하여 신분의 상징으로 사용된 팔찌는 직경 10

㎝내외의 것이 대부분으로 은제와 청동제로 제 작되었고, 합천 옥전고분군, 고성 내산리와 창 녕 교동 등지의 대형고분 에서 여러 점이 출토 되었다.

삼국시대의 제사는 국가 혹은 민간에서 이루 어졌는데, 그 중 민간에서 이루어진 제사는 주 로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고대인들은 죽어서도 현세와 같은 생활이 계속 이어진다고 하는 사상 에 따라 매장을 중시하고 장례의식도 발달하였 다. 매장의례란 죽은 자를 매납하기 전에 치르 는 의례로 다분히 관념적이며 지역간에 배타성 을 가지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분묘에 부장된 유물 매납위치와 부장품의 내용으로 매장의례 를 어느 정도 유추할 뿐이며, 구체적인 절차와 의례의 바탕을 이루는 고대의 관념적 세계에 대 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삼국지위지동 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 의하면 삼한지역은

“말과 풍습이 유사하나 귀신을 섬기는 법이 다 르다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는 내용이 있 는 것으로 보아 매장의례에 있어서 지역마다 일정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매장에 수반되는 각종 의례는 무덤을 축조하 - 68 -

는 과정에서 무덤주위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 여 이루어지며 이와 관련된 유물은 일상생활용 토기 뿐 아니라 이형토기異形土器, 작게 본뜬 철기, 의기성 투겁창, 미늘쇠有刺利器 등이 있 다. 또한 토기를 잘게 부수어 버리거나 토기 바 닥에 구멍을 뚫어 버리는 행위, 또 대형 토기 속 에 작은 토기를 넣어서 묻어두는 행위 등 의례와 관련된 자료도 확인되고 있다. 전반적인 무덤의 규모와 구조, 시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부장된 유물중에서도 오리모양토기를 부장하거나 토기 에 새를 장식하여 표현하는 유형, 갑옷의 장식 에 새의 깃털을 많이 사용하는 예 등이 있다.

또한, 가야의 매장유구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 는 장신형 철모와 유자이기 등은 지배자의 철 생산 장악을 통한 철제무기의 대량생산과 이에 따른 군사적인 무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무기의 의기화 현상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지배자들은 이념적인 수단을 통한 통치보다는 직접적인 수 단을 사용하였을 것이며 이것이 유자이기나 궐 수문철모蕨手文鐵 와 같은 의기성 철제무기로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매장의례에서도 철 소 재나 무기류를 대량 매납하는 방식으로 점차 변 화되었다.

가야의 고분문화

범어사와 통도사

신용철_ 통도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

Ⅰ. 사찰의 성립과 발전

Ⅱ. 범어사 梵魚寺

Ⅲ. 통도사 通度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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