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가야(加耶)의 무덤은 말한다

문서에서 2007년 초등교사역사교실 시간표 (페이지 52-55)

록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위서동이전한 조), 고자국古自國(삼국사기), 구차국久嗟國·

고차국古嵯國(일본서기)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보면 고성지역에 있었 던 당시 가야의 이름은 고자국古自國이었을 가 능성이 가장 높다. 고성군은 경남 남부해안지역 에 위치한 곳으로 동으로는 마산, 서는 사천, 북은 함안과 서로접하고 있고 지리적으로 바다 를 쉽게 이용할 수 있으며 내륙으로 연결되는 비교적 넓은 경작지도 갖추고 있다. 따라서 고 자국 발전의 원동력은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물 품을 해로海路를 이용하여 주변의 여러 지역으 로 나누어 공급하였던 활발한 교역일 것으로 보 인다.

고성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확인되고 고자국 시대의 유적으로는 고성 동외동 패총유적의 주 거지 및 제사유적, 송학동, 내산리, 율대리, 연 당리 등의 중대형고분군 등이 있다. 분묘는 대 부분이 지상식의 수혈식석곽묘로서 하나의 봉 토에 여러 기의 석곽이 안치되는 다곽식이다.

이들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출토되는 삼각투창 및 일단투창고배, 수평구연호, 발형기대 등은 함안, 고령 등지의 토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적인 토기로서 사천·고성식, 진주식, 소 가야식토기라고 불리고 있다. 이들 토기의 분포 범위는 사천, 진주, 산청, 의령 등지로 넓은 분 포권을 가지고 있는데 고자국은 이들 지역과 활 발한 교류를 통하여 소가야연맹체를 형성하였 던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특히, 고성 송학 동고분군과 내산리고분군에서는 신라, 대가야.

및 왜의 유물이 빈번하게 발견되고 있어 소가야 의 대외 교섭 및 가야세력권의 변화추이를 파악 할 수 있게 한다.

인 풍화에 의한 삭평 뿐이어서 미미한 편이다.

그러나 가야지역의 국가성립기인 4세기대에는 내부주체가 나무로 된 목곽묘木槨墓가 유행하 였다. 따라서 지하에 있던 대형 목곽이 부폐하 면 고분 조성당시에 만들어졌던 큰 봉토의 대부

분은 지하에 있던 목곽이 차지하였던 공간으로 함몰되어 버리고 지상의 봉토는 남아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고분들은 발굴조사 당 시 토층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구분 된다.

때문에 비록 현재 지상에 고분의 봉토가 남아 있지 않더라고 고분을 만들 당시에는 대형 봉토 를 만들었던 것이 명백한 신라 가야의 초기 대 형목곽묘들은 고분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고분이라는 개념은 일반대중을 압도하는 묘 역에서의 우월성과 경제력의 집중을 보여주는 매장주체부의 대규모화, 그리고 정치적 군사적 성격을 보이는 무기의 개인 집중화, 인간과 인 간의 지배와 피지배를 그대로 보여주는 순장殉 葬의 증거 등을 갖춘 목곽묘를 말한다.

가야지역에서 초기고분으로는 김해 대성동 29호분이 있다. 초기고분의 출현 이후 가야의 고분은 복천동고분군, 대성동고분군 등의 4세 기대 고분으로 이어지며. 함안, 고령, 합천 등 지의 대형고분군은 5세기 후반대가 되어야 나 타나고 있다. 가야의 고분은 매장주체부의 구조 에 따라서 덧널무덤木槨墓, 구덩식덧널무덤竪 穴式石槨墓,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 굴 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각형식의 무덤은 가야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 하며 4세기 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가야의 각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덧널무덤木槨墓은 지하에 직사각형의 묘광을 파고 그 속에 통나무나 판재의 나무를 사용하여 짜 맞춘 나무곽이 설치되며 내부에 관과 부장품 을 안치하는 무덤양식이다. 가야의 덧널무덤은 대체로 폭이 넓은 직사각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 어 이전의 널무덤木棺墓에 비하여 훨씬 많은 부 장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야 초 기, 전기지배세력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으로 무 덤의 규모가 점점 대형화되고 피장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회적 에너지가 많이 투입되는 것 가야의 고분문화

<그림 2> 가야의 묘제

을 보여주고 있어 정치권력의 강화를 상징하기 도 한다.

이러한 구조의 무덤은 가야와 교역을 맺고 있 었던 낙랑의 귀틀무덤 등의 영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야사 회의 발전에 따른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대 략 AD2세기 중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4세 기가 되면 전성기가 되어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 롯한 전기가야세력의 중심지에서 표식적인 유 적 역할을 한다. 이후 5세기까지 조성되다 점차 쇠퇴하여 사라지게 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해 양동리고분군과 대성 동고분군 그리고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 확인된 덧널무덤을 들 수 있는데, 양동리 162호 덧널무 덤은 삼한시대 무덤으로 널무덤에서 덧널무덤으 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며 대성동 29호 덧널무 덤은 가야지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분으로 금관국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덧널무덤의 구조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조 금씩 변화되고 있다. 묘광의 형태는 평면이 말 각장방형인 것과 세장방형인 것으로 크게 나누 어지며 장축의 방향은 대체로 등고선의 방향과 나란하게 축조되어 있다. 묘광 안쪽의 목곽은 벽선을 따라 만들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별도의 기둥을 세워 곽을 만든 상태로서 묘광바닥에 기 둥구멍이 설치되어 있는 것도 있다. 3세기 후반 이후부터 보이는 장축길이 5m에 이르는 대형 덧널무덤은 대부분 당시 유력자의 유구로서 구 릉의 정상부를 따라 설치되고 있으며 길이 3m 전후의 소형유구는 구릉의 경사면에 배치되어 있다. 덧널무덤이 발전해가는 동안 새로운 요소 들이 첨가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4세기 전반에 이르러 부곽과 순장의 등장이 대표적인 것이다.

부곽은 주곽과 일렬로 설치되며 형태는 정사각 형에 가까운데, 토기와 철기를 비롯한 많은 부 장품과 여러 구의 순장인골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피장자가 사후에도 다른 생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필요한 물건과 시종들을 함께 넣어 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구덩식돌덧무덤竪穴式石槨墓은 직사각형의 묘광을 파고 구덩이의 벽을 따라 안쪽으로 돌을 쌓아서 네벽을 설치한 것으로 내부에 관과 부장 품을 넣은 후 천정돌을 덮고 그 위에 봉분을 구 축한 무덤이다. 덧널무덤에서 자체적으로 발전 한 것으로 파악되며 초기의 것은 돌로 된 네벽 의 석곽안에 다시 목곽을 만든 이중 곽의 구조 와 천정에는 통나무를 걸쳐 만든 것도 발견되고 있다. 가야의 전성시기인 5세기대에 가야의 전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복천동고분군, 도항 리고분군, 옥전고분군, 지산동고분군 등의 대 형봉토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천정도 큰 판석을 다듬어 여러 매로 덮고 부곽으로 돌덧널 무덤을 갖춘 것이 나타나고 있다. 이후 5세기 후반대에 이르면 묘광은 반지상화하면서 세장 방형으로 변하며 규모도 점차 축소화되고, 부장 유물도 적어진다. 가야의 대표적인 무덤형식으 로 각 지역에 따라 규모와 형태에 있어서 특징 을 가지고 있다.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은 피장자 한 사람을 위한 무덤구조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 가 족 구성원이 죽을 때마다 추가로 안치하는 추가 장追加葬 무덤이다. 구조적으로 구덩식돌방무 덤에 앞트기의 아이디어가 채용된 방식으로 네 벽면 중 한쪽 단벽을 입구로 사용하였다. 초기 에는 수혈식석곽과 유사하나 점차 매장주체부 가 지상화, 대형화되면서 평면형태는 정사각형 이고 천장은 아치형으로 발전되어 갔다. 또한 석실을 중심으로 원형의 둘레돌을 돌려 축조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은 묘도墓道와 널 길, 널방 및 원형의 둘레돌과 봉분을 갖춘 형태 를 말한다.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발전한 형태로 - 62 -

삼국시대 지배층의 무덤은 이 무덤으로 최종 통 일되는 경향을 보인다. 지역에 따라서 평면구조 와 널길의 형태에 있어서 차이가 다른데, 낙동 강 하류지역에서는 직사각형 널방에 좌편수식 널길과 아치형 천장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하며 경남 의령과 고성 등지의 것은 평면 직사각형의 널방에 중앙으로 널길이 나있는 형태이다. 시기 적으로는 6세기 후반경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뒤를 이어 등장하면서 앞트기식 돌방무덤과 함 께 고분내에 조영되다가, 7세기에는 독립된 무 덤형태로 발전되어 간다.

김해 유하리 전왕릉은 단독무덤 양식으로 대 표적이며, 다호리유적에서는 죽은 이를 안치하 는 과정에서 치러진 의례의 흔적이 잘남아 있어 주목된다. 대체로 제사유구祭祀遺構로 불리우는 이러한 유구는 장례의 순서에 따라 행해진 장송 의례를 복원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으 며 무덤방 안의 유물과 달리 고의로 파손한 듯한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Ⅲ. 가야토기(加耶土器)의

문서에서 2007년 초등교사역사교실 시간표 (페이지 5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