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산지역의 가마터와 출토품
부산지역에서 도자기가 출토된 것으로 알려 진 유적은 그 성격상 크게 생산지인 가마터와 소비지인 성터, 봉수대, 사찰터, 분묘 등으로 나뉘어 볼 수 있다.
부산지역의 가마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 자인 아사카와 노리타가(淺川伯敎)와 코모토 후 쿠지(香本不苦治)·정양모·윤용이 등에 의해 전국에 산재한 가마터의 지명, 시대, 출토품 종 류만을 간략히 기술한 기초적인 조사에 포함되 어 일부 보고되었을 뿐 현장조사 내용을 구체적 으로 기술한 연구성과물은 정징원의「경남지방 도자기의 연구」(1968,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 문)가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장군 소재의 가마터에 대해서는 2004년 복천박물관 에서 기장군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펴낸『문화유 적분포지도 -기장군-』(2005, 부산광역시 기 장군·복천박물관)과, 2006년 12월 기장문화 원에서 개최된 <<기장의 매장문화재 조사사례 발표회>> 자료집에 비교적 구체적인 내용들이 실려 있다.
韓國의 陶磁器, 釜山의 陶磁器
부산지역에는 고려 전기에서 조선 후기에 이 르기까지 소문청자, 양각청자, 음각청자, 철화 청자, 상감청자, 흑유자, 상감분청, 인화분청, 귀얄분청, 순백자, 철화백자 등 각종 도자기를 생산하였던 여러 가마터가 있는데, 사상구 덕 포·울평요지와 동래구 온천동·회동동요지, 해운대구 반여동요지, 부산진구 전포동요지, 금정구 남산동요지, 기장군 신리요지·판곡요 지·병산리요지·용소리요지·상장안요지, 중 구 부산요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① 덕포요지
덕포요지는 현재 시가지로 변하여 완전히 사 라지고 말았으며 채집유물의 현 소장처 또한 명 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단편적으로나마 소개되어 부산지역 가마터 가 운데는 국내 도자사학계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아사카와 노리타가(淺川伯敎)는「李朝陶磁窯 跡一覽表」에서 이곳에 11세기 철회(철화)청자 가마 1기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기술하였고, 이 후 정징원은 이곳의 채집 도편이 대부분 고려 말로 추정되는 청자파편이며, 철채(철화)청자도 함께 채집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정양모는 이곳 이 철화문양이 있는 녹청자를 생산한 가마였던 것으로 소개하였으며, 윤용이는 11세기 후반 제작활동을 시작한 전국의 수많은 가마 가운데 하나로 이곳을 꼽고 있다.
철화청자는 극히 일부 태토와 유약이 잘 정제 된 上品을 제외하고는 환원번조가 아닌 산화 번 조로 표면 발색이 거의 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10세기에 이미 발생하여 11세기에는 그 수가 많 이 증가하였다. 이후 12세기에는 강진과 부안 등의 중심 요에서도 소량 제작하였는데 이중에 는 환원번조로 고운 청자색을 나타낸 것도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곳은 아사카와 노리타가
(淺川伯敎)에 의해 철화청자가 가장 널리 제작 되었던 고려 전기 11세기경에 운영되었던 가마 터로 규정된 바 있으며, 정양모 또한 본인이 10 세기 후반경부터 11세기 전반경으로 분류하고 있는 녹청자가마에 이곳을 포함시킴으로써 그 와 유사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또 윤용이의 경 우는 11세기 후반경에 제작활동을 시작한 것으 로 보고 있어 학자들간에 미미한 의견 차는 있 으나 대체로 11세기경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의 견이 모아져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정징원과 같이 채집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자파편의 제작시기가 고려 말로 추 정된다고 함으로써 이들과는 다소 견해를 달리 하고 있는 학자도 있으므로, 출토유물의 구체적 인 면모를 확인할 수 없는 지금 단계에서 덕포 요지의 운영시기를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여러 학자들이 충분한 시간을 가 지고 이 덕포요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생산품 전 체의 성격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하고, 철화청자 가 채집되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 어 철화청자 제작시기를 곧 가마운영기로 추정 함으로써 오류를 범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덕포요지의 운영시기가 고려전기 11세기경으로 국한될 가능성과 또 이 때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 되었을 가능성 등 다양한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덕포요지의 북쪽에 인접해있는 울평요지에서 는 철화청자가 채집되지는 않았으나 전반적으 로 덕포요지와 유사한 성격의 고려 말 추정 청 자파편들이 채집되었다고 보고된 바 있다.
② 온천동요지
동래 금강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온천동요 - 116 -
지의 경우 역시 아사카와 노리타가(淺川伯敎)는 전술한 덕포요지와 마찬가지로 11세기 철회(철 화)청자 가마 1기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고하 였다. 그러나 정징원에 의하면 이곳에서 녹색유 의 伊羅保3), 흑색유의 天目4), 고려청자, 화청자 (철화청자), 인화분청, 귀얄분청 등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시기의 도편들이 채집되었다 고 한다.
최근 복천박물관에서 실시한 금강공원 내 난 립 전기가공선 지중화공사에 따른 사전 매장문 화재 조사시 조사지역 인근의 금정사 좌측 구릉 사면에서 가마벽체, 청자편 등이 수습되어 이 지역이 바로 온천동요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③ 회동동요지
회동수원지 아래쪽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회동동요지는 코모토 후쿠지(香本不苦治)와 정 양모, 윤용이에 의해 서동요지로 보고되고, 윤 용이에 의해서 다시 동상동요지로 보고되었던 15세기 상감분청 가마터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 정되며, 여러 차례에 걸친 洞名의 개칭에 따라 명칭에 혼란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징원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저질 청자상감, 소문청자가 채집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 가마 운영시기에 대한 견해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 러나 제시된 도면에서 보이는 문양 종류와 형태 라든지 표면 색채가 회청색으로 발색되고 있다 고 기술한 점 등을 통해 보면 조선 초 상감분청 이 제작된 가마터일 가능성이 크다.
④ 반여동요지
반여동요지는 정징원에 의해 조사, 보고된 가 마터이다. 동래에서 수영으로 가는 길에서 동래 고등학교를 지나서 사이길로 북향해서 언덕을 올라가면 있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나 현재의 위 치가 명확하지 않으며, 다만 洞名과 방향으로 미루어 장산의 서쪽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을 것 으로 짐작된다. 상감, 양각, 음각, 소문청자 등 고려시대 도편과 함께 조선 초 생산품으로 짐작 되는 회청자 태토에 백상감한 저질의 제품, 즉 조질 상감분청사기가 채집되었다고 하는데, 이 를 통해 이곳이 고려 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운영된 가마터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 해볼 수 있다.
⑤ 전포동요지
전포동요지는 코모토 후쿠지(香本不苦治)·
정양모·윤용이 등에 의해 15세기 상감분청이 제작된 곳으로 간략히 보고된 바 있다.
⑥ 남산동요지
남산동요지는 부산대학교박물관 및 부산박물 관의 지표조사로 확인된 분청사기요지이다. 이 남산동요지에서는 극소수이긴 하나 연당초문이 나 삼원문 등이 시문된 초기 상감, 인화분청과 집단연권문이 조밀하게 시문된 전성기 인화분 청, 인화문과 귀얄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말 기 인화분청, 귀얄분청, 회청사기 등이 채집된 바 있으며, 백자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채집유 韓國의 陶磁器, 釜山의 陶磁器
3) 일본식의 명칭으로 작은 모래알이 그대로 섞여 있는 약간은 거친 듯한 태토에 철분이 함유된 유약이 균일하지 않게 시 유되어 있어 표면이 거칠고 까실까실하며 황색, 또는 갈색으로 발색된 그릇 종류이다. 양산 법기리요지, 부산 두모 포·초량왜관 등지에서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본의 다완 분류법에 의하면‘고이라보(古伊羅保)’, ‘혼떼이라보(本 手)’, ‘기이라보(黃伊羅保)’, ‘구기보리이라보(釘彫伊羅保)’, ‘고혼이라보(御本)’등으로 구분된다.
4)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소성 후의 발색이 짙은 밤색이나 짙은 갈색으로 나게 되는 유약, 즉 흑유(黑釉)를 일컫는 말로 서, 일본식 발음은 덴모쿠(Tenmoku)이다. 중국의 송(宋)나라 때 최초로 사용되었고 일본인들이 재현하여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백자나 분청사기 요지에서 많이 만들어졌으며 중기에도 제작되었으나 후기에 와서는 유약이 암갈색으로 된 석간주(石間 )라 불리는 흑유가 많이 만들어졌다.
물의 성격으로 보아 가마의 운영기간이 조선 초 기에서 중기까지로 상당히 길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런데 이 남산동요지는 睿宗 원년(1469)에 간행된『慶尙道續撰地理誌』의 동래현 토산조에 있는‘縣北救也里 中品’이라는 내용의 磁器所 기록과 연관하여 주목되는 가마터이다.
지명의 변화가 심하여 기록에 나타나는 救也 里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의 북쪽이라 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동래읍성이 위치하던 동래구 명륜동·복천동·안락동 일대의 북쪽 어느 지점으로 생각되는데, 이 남산동요지의 경 우 위치상 동래읍성지의 북쪽에 해당되므로 읍 치를 중심으로 한 방위가 일치하고 있다. 또한 채집유물들의 성격으로 볼 때 製瓷활동이 조선 초기에서 중기까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므로『慶尙道續撰地理誌』가 간행 된 1469년경에도 가마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 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장군 일대는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도시화 가 더디게 이루어짐으로써 지금까지도 상당히 많은 가마터들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는데, 복 천박물관은 2004년 기장군 지표조사를 통해 신 리요지·판곡요지·병산리요지·용소리요지 등 이 지역 내 가마터의 위치와 현상을 구체적 으로 조사한 바 있다.
⑦ 신리요지
신리요지는 기장군 장안읍 오리에 소재하고 있는 가마터로, 장안초등학교를 지나 신리마을 진입로로 약 1.4km 정도 따라가면 신리마을 입구에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뻗은 구릉과 논 과의 접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다량의 燒土가 퇴적되어 있어 가마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는데, 경작으로 인해 가마 부속시설이 상당부분 파괴 된 것으로 보이지만 잔존물이 일부 남아있을 가
능성이 있다. 도로와 접하는 구릉 말단부에서 陶枕, 다량의 청자, 분청사기, 백자 편 등과 초 벌구이한 도자기 편이 다수 채집되었는데, 채집 된 도편의 성격을 볼 때 이곳에서는 고려 말 14 세기경부터 조선 전기인 16세기경까지 약 200 여 년간 가마가 운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⑧ 판곡요지
판곡요지 또한 신리요지와 마찬가지로 기장 군 장안읍 오리에 소재하고 있는 가마터이다.
장안읍의 북서쪽 국도 14호선 동편 판곡마을에 서 신리마을로 가는 좁은 농로를 따라 가면 북 쪽으로 뻗은 구릉이 있는데, 구릉의 남쪽 사면 에 논과 접한 해발 100m에 해당되는 지점에 가 마터가 위치한다. 가마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 지만 소토가 확인되어 가마터의 존재를 알려주 고 있으며, 등고선과 나란히 마운드가 여러 개 형성되어 있어 하부에 가마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주로 분청사기와 백자편이 채집되었는데, 채집된 도편의 성격으로 보아 판 곡요지의 운영시기는 대체로 조선 전기에서 중 기경으로 판단된다.
⑨ 병산리요지
병산리요지는 기장군 정관면 병산리에 소재 하고 있는 가마터로, 병산리저수지의 동쪽, 즉 함박산의 동북쪽 방향에 있는 골짜기인 사그짐 골에 위치한다. 서남쪽으로 뻗은 야산의 매우 급한 경사면에 형성되어 있으나 요체는 보이지 않는다. 골짜기로 통하는 작은 농로에 의해 자 기퇴적층이 드러나 있으며 구릉 정상부는 삭평 되었다. 채집된 도편은 주로 밝은 회색 또는 회 녹색의 백자와 녹색조의 잡유자기이며 일부 철 화백자도 포함되어 있다. 유적의 주변에 철분성 분이 많은 백토가 산출되고 물이 풍부하여 도자 기 생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 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