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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체제

문서에서 2007년 초등교사역사교실 시간표 (페이지 131-136)

3. 조선전기의 관방체제

1397년 동래를 일본과 대처하는 군방의 요새 로 인정하여 부산진이 설치되자, 동래는 행정적 인 위치 외에 군사적인 거점이 되었다. 임진왜 란 직전의 경우도의 군사제도는 전국의 변화 추 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방어체계는 진관체제(鎭 管體制)에서 을묘왜변 이후 제승방략체제(制勝 方略體制)로 전환되었다. 우선 지역거점방위를 중시하였던 진관체제하의 경상도의 방어체계는

<표>와 같다.

조선 전기의 진관체제는 세조 연간에 정비되 었다. 경상도의 경우 낙동강의 좌도와 우도의 지리적 조건을 중시하여 군사체제가 마련되었 으며, 경상좌도 안에서도 지리적 조건에 따라 생활권역을 중심으로 진관이 설정되었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방어체계는 생활권역을 중심 으로 설정되었다.

그런데 진관체제는 제승방략체제로 변경되었 다. 그것은 군역제의 변동으로 인한 군사수의 감소를 반영한 것이었다. 종래에 경상도는 김

해, 대구, 상주, 안동, 진주 6개의 진관이 적과 대치하고 있어 한 진이 무너지면 다른 진이 대 신하여 싸움으로써 일시적인 붕괴의 위험이 적 었다. 그러나 군역의 포납화(布納化)와 지방 수 령들의 부패로 방군수포(放軍收布)와 대역납포 (代役納布) 현상이 일반화되자, 포의 불법적인 징수와 피역(避役)이 나타나 선조(宣祖) 연간에 이르면 군사는 편제상에만 존재하고 실제 병력 은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를 대체하기 위 해서 제승방략체제가 도입되었다.

다음으로 조선전기 부산은 나라의 관문이었 기 때문에 국방상으로도 중시되어 각종의 국방 시설들이 다수 설치되었다. 첫째, 육군의 경우 조선전기에 동래에는 동래현이 있었다. 동래현 은 울주군 등과 함께 울산에 있었던 경상좌병영 관할하의 경주 진관에 속하는 여러 진 가운데 하나로 동래현령이 절제도위(節制都尉)의 군직 을 겸하고 있었다. 이는 행정과 군사가 분리되 지 않은 지방행정 체계상의 미숙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1547년 동래현이 도호부로 승격하자 동래부사가 첨절제사(僉節制使)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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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조선전기 경상도의 진관체제

직책 관할 구역 소재지 관할 진관 관할 지역 관찰사 경상도 상주

좌병사 경상좌도 울산 경주진관 울산 양산 영천 흥해 청하 영일 장기 기장 동래 언양 안동진관 영해 청송 예천 영천 풍기 의성 봉화 진보 군위 비안

예안 영덕 용궁

대구진관 밀양 청도 경산 하양 인동 현풍 의흥 신녕 영산 창녕 우병사 경상우도 창원 상주진관 성주 선산 김산 개령 지례 고령 문경 함창

진주진관 합천 초계 함양 곤양 거창 사천 남해 삼가 의령 하동 산음 안음 단성

김해진관 창원 함안 거제 칠원 고성 웅천

좌수사 경상좌도 동래 부산포진관 두모포 감포 해운포 칠포 포이포 오포 서생포 다대포 염포 축산포

우수사 경상우도 거제 제포진관 옥포 평산포 지세포 영등포 사량 당포 구조라 적량 안골포

직을 가지고 동래부 일원의 육군을 지휘하였다.

동래부사의 휘하에는 유방(留防) 3려(旅)의 370 명의 군인이 있었다. 이는 수성군(守城軍) 80 명, 영진군(營鎭軍) 300명으로 되어 있었다. 또 조선전기의 성곽은『신증동국여지승람』성곽조 에 읍성, 부산포진성, 해운포영, 다대포영이 있 었다.

둘째, 수군의 경우 경상좌도에는 동평현 부산 포에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으며, 그 관할 하에 부산진관이 설치되고, 그 밑에 두모포 등 10개의 만호영이 있었다. 이 중에서 동래현 관 내에는 부산포진과 해운포영, 다대포영이 있었 다. 그 후 임진왜란 직전 해운포영이 없어지고 다대포영이 첨사영으로 승격되었으며,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겨졌던 좌수영이 다시 동래 남 촌면 수영으로 옮겨졌다. 경상좌수영 관내에는 2개의 첨사영과 8개의 만호영이 있었다. 또 성 종 연간에는 부산포와 다대포성에 축성이 이루 어졌다. 이후 중종 39년 이전에 진관체제의 변 경이 있었다. 이에 가덕도에 진관이 신설되었으 며, 천성포가 신설되었다.

좌수영에는 무관 3품의 좌수사와 부관으로 우 후(虞侯)가 있었다. 수영의 사무는 6방에서 집 행하였다. 좌수영 관할에는 무기고인 병고(兵 庫) 27곳과 원목 조달처인 7곳의 봉산(封山)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525명의 수성군과 23척의 병선이 있었다. 첨사영에는 각각 9척의 병선과 2,200여 명의 군사가 있었다. 특히 성종 이후 부산포첨절제사는 정3품 당상관이 부임하였다.

만호영에는 4척의 병선과 1,101명의 군사가 주 둔하고 있었다.

4. 조선후기의 관방체제

임진왜란을 겪은 후 부산지방은 국방의 요새 로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부산

이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일본군의 침입로 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부산에는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 하여 많은 군사시설이 갖추어지고 방비태세가 한층 더 심화되었다. 특히 지방군제는 속오군의 편성, 영장제(營將제)의 실시, 관방의 강화가 진행되었다.

먼저 육군의 경우이다. 첫째, 군사조직과 체 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조선후기 지방군은 속 오군(束伍軍)이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양란 이 후 동래부의 군사적인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효종 때 독립진으로 승격되었다. 즉 1655년 동 래진을 경주진관에서 떼내어 독진(獨鎭)으로 승 격시켜 인근의 양산군과 기장현 소속의 군사까 지도 통합하여 지휘하게 하였다. 이때 동래부사 는 무관직인 첨절제사직을 겸직하면서 경주부 윤으로부터 군사지휘권을 인수하였다. 이 제도 는 진관이 해체되는 1895년까지 지속되었다.

둘째,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국방도시로서의 중요성이 인식되었으며, 이런 면모는 군사시설 의 확충과 군기의 저장·보관을 통해 알 수 있 다. 조선시기의 군사시설의 대종을 이룬 것은 성곽이었다. 조선후기 동래부의 관방시설은 왜 구의 주접근로가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라는 것 을 감안하여 계획되었다. 관방 제1선은 수영에 서 다대포에 연하는 해안선을 방어하는 것으로 서 경상좌수영은 좌수영성, 부산포진은 부산진 성지성, 다대포진은 다대포성이 중심이 되어 각 진보를 방어하였다. 관방 제2선은 동래부를 방 어하기 위한 것으로 동래읍성과 금정산성이 있 었다. 이들 두 성은 천연적인 장애물과 지리적 인 이점을 이용한 석성(石城)으로서 동래부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관방의 제 3선은 내지를 방어하는 것으로 동래 금정산성, 성주 독용산성, 문경 조령산성, 선산 금오산성, 칠곡 가산산성, 진주 촉성산성 등 6개의 산성으 부산의 관방체제와 유적

로 구성되는 방어체계이다.

조선후기 동래부의 군사시설의 강화는 구체적 으로 동래읍성과 금정산성의 수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읍성의 수축은 방위개념이 유성전 수(留城戰守)의 방위개념의 도입과 관련이 있다.

이는 종래의 산성 중심의 방위에서 민간 자위를 위한 방위개념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군역자원의 확보이다. 임진왜란을 이후 훈련도감의 설치와 함께 용병제의 급료병 제로 전환하였으며, 군역은 양인에게만 부과되 는 양역(良役)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군자를 마련하기 위해서 양정(良丁)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군포를 징수하였는데, 이러한 양역은 각종 폐단을 야기하였다.

우선 육군의 군액은 동래부의 군액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군사시설의 확충은 군액을 크게 증가시 켰다는 점이다. 영조 16년 동래부의 군총은 장 관 장교 군졸을 합하여 7,401명이었다. 즉 1,345명의 무부(武夫)와 속오군 등의 각종 군사 6,154명이었다. 이에 기타 신역(身役) 부담자를 합치면 모두 10,275명이 되었다. 당시 지방군 의 핵심은 속오군, 아병, 수군보(水軍保)였다.

둘째, 병역의무가 신분제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장교 계층인 군관들과 일 반병인 군사로 이원화되고 있었다.

셋째, 동래부의 많은 군액은 각종의 무청의 설치를 초래하였다. 동래독진의 설치 이후 진관 체제에 따라 많은 상비군이 설치되었으며, 이를 이끌어 나가는 무임층이 많아졌다. 이 중에서 중군을 제외한 무관들은 모두 지방민으로 충원 되었다. 한편 지방 속오군의 습진(習陣)과 조련 을 위해 무장 위주의 영장제도(營將制度)가 생 겨났으나, 지방수령들과의 대립 등으로 많은 문 제를 낳았다. 효종 사망 후 영장제는 수령의 겸 직으로 전국에 확대되었다. 이에 조선후기에는

각 지방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작청(作廳)과 함께 무청이 있었으며, 동래에는 동래독진의 설치시 기와 비슷한 시기에 무청의 청사가 설립되었다.

이 무청들이 군사업무를 나누어 시행하였다.

다음은 수군은 경상좌수영과 그 관할하의 각 진을 통해서 방어체계를 갖추어 나갔으며, 이에 경상도 수군의 집중화로 나타났다.

경상좌수영성은 경상좌도 수군의 총사령부라 할 수 있는 주진이다. 원래 좌수영은 동래 감만 이포에 있었는데,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 다가 1592년에 다시 동래 남촌으로 옮겼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그 후 1635년에 사천의 홍수로 말미암아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 어 뱃길이 통하지 않게 되어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지만, 이곳은 왜관과 가까운 곳이라서 군사 상의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1652년 에 다시 동래 남촌으로 옮겼다. 그ㅤ후 좌수영 은 군역법 시행 후 수군 군량미의 부족으로 10 진에서 7진으로 줄어들어 1895년 7월에 군제 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한편 경상좌수영의 편제는 주장으로서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가 있었다. 경상좌수사는 정3 품의 무관으로서 첨사, 만호, 권관을 두고 해방 (海防)을 지휘하였다. 그의 임기는 2주년 교체 를 원칙으로 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좌수영의 소재지가 동래부의 관할지역에 있었 기 때문에 동래부사(문관 정3품)와 세력을 겨루 어 비협조적이거나 불화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수사의 부관으로는 무관 정4품의 우후 (虞侯)가 있었으며, 그 밖에 대솔군관(帶率軍官) 6, 화사(畵師) 1, 사자(寫字) 1, 영리(營吏) 30, 진무(鎭撫) 37, 통인(通引) 25, 관노비(官奴婢) 10, 사령(使令) 26, 군솔(軍率) 23명이 있어 좌 수사의 공사생활에 사역되었다.

좌수영성은 1692년(숙종 18)에 좌수사 문효 성(文肴星)의 중수를 거쳐 왕조의 말기에 이르 -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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