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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교육 기반으로서의 일상성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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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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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학위청구논문

사회과교육 기반으로서의 일상성 비판

- 들뢰즈의 시각을 중심으로 -

한 국 교 원 대 학 교 대 학 원

사 회 과 교 육 전 공

박 희 만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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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교육 기반으로서의 일상성 비판

- 들뢰즈의 시각을 중심으로 -

지도교수 남 상 준

이 논문을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한 국 교 원 대 학 교 대 학 원

사 회 과 교 육 전 공

박 희 만

2008년 2월

(4)

박 희 만의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심 사 위 원 장 인

사 위 원 인

사 위 원 인

한 국 교 원 대 학 교 대 학 원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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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논 문 요 약 ··· ⅳ

Ⅰ. 서론 ··· 1

1. 문제 제기 및 연구의 필요성 ··· 1

2. 연구 내용 ··· 10

3. 선행 연구 고찰 ··· 12

Ⅱ. 들뢰즈 일상성 철학과 사회과 교육 ··· 16

1. 들뢰즈 일상성의 주요 개념과 의미 ··· 16

가. 들뢰즈 이전 주요 철학의 갈래 ··· 16

나. 들뢰즈 일상성 ··· 32

1) 들뢰즈 일상성 정의 : 일관성의 구도 ··· 32

2) 들뢰즈 일상성의 관점 ··· 36

3) 들뢰즈 일상성 구현 ··· 63

4) 들뢰즈 일상성 적용 ··· 69

2. 사회과 교육에 주는 함의 ··· 91

Ⅲ. 사회과학 및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 문제 ··· 116

1. 사회과학의 일상성 ··· 116

가. 문화이데올로기의 일상성 ··· 116

나. 일상론의 일상성 ··· 133

2.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 담론 문제 ··· 143

가. 이론과 실천 ··· 143

나. 체계와 언어 ··· 158

다. 문화와 생활 ··· 173

Ⅳ. 사회과 교육의 새로운 일상성과 포개진 기제 비판 ··· 191

1. 새로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 ··· 191

가. 사회과 교육의 ‘사회화’ 일상성 비판 ··· 191

나. ‘대항 사회화’를 위한 일상의 저항 ···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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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과 교육의 포개진 기제 비판의 실제 ··· 199

가. 추상화 ··· 199

나. 공리 ··· 215

다. 전제 ··· 221

라. 과정(過程) ··· 224

Ⅴ. 결론 :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 비판 논의 ··· 231

참고 문헌 ··· 236

ABSTRACT ···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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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목 차

<표 1>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그송의 기능-잠재, 운동-시간 비교 ··· 26

<표 2> 화이트 헤드의 과정 철학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비교 ··· 55

<표 3> 들뢰즈의 포개진 기제로서의 스톡 ··· 75

<표 4> 들뢰즈 일상성 정리 ··· 83

<표 5> Elias. N.의 일상과 비일상 ··· 122

<표 6> 은유와 환유의 포개진 기제 ··· 171

<표 7>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의 공간/방향에 대한 은유 ··· 187

그 림 목 차

[그림 1] 스피노자의 변용 ··· 45

[그림 2] 스피노자의 변용과 역량의 관계 ··· 48

[그림 3] Joseph. K.의 박탈 순환 과정 ···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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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문 요 약

사회 과교육 기반으 로서의 일상성 비판

- 들뢰즈의 시각을 중심으로 -

박 희 만

한국 교원대 학교 대학 원 사회과 교육 전공 (지도교수 남 상 준)

본 연구는 사회과교육의 기반이 일상성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 회과교육이 역사와 전통, 사회과학의 지식과 연구 방법을 비로소 실현되는 장으 로 일상성에 귀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동안의 일상성은 투사 (投射)의 모습으로 비춰지거나 공공영역과 대별 되거나 개별 주체가 뜻대로 조 절할 수 있는 고유성으로 이해한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과교육의 일 상성도 그 흐름을 이어받고 있다.

들뢰즈 일상성은 일상성이 지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여 준다. 들뢰즈의 주 장은 방대한 영역에 걸쳐있지만, 한마디로 일관성의 구도로 수렴된다고 연구자 는 본다. 일관성의 구도란 양태에 주목하고 양태의 운동과 양태끼리의 순간적인 접점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사실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주장이다.

왜냐하면, 들뢰즈 일상성은 실체 및 동일성(통일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재현과 이미지를 거부하는 것이며, 전제와 이론을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욕망과 기계 및 기관 없는 신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들뢰즈 일상성은 사회과교육의 기반인 일상성에 비판적 시각을 제공하여 일상성이 포개진 기제임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동시에 비판적 사회과학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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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성 또는 문화연구나 문화이데올로기의 일상론조차 또 다른 포개진 기제임을 드러내어 준다. 그 이유는 사회과교육의 일상성이나 인문, 사회과학의 일상성이 포개진 기제를 변증법이나 합리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으로 해결하려 하나 해결이 되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찾아 사회과교육의 일상성을 다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 포개진 기제란 얹혀져 있는 또 다른 기제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곧 들뢰즈 일상성이 비판하는 것임을 드러 내고자 하였다. 가령 가족주의는 대표적인 포개진 기제이다. 즉, 인문, 사회과학 지식의 대부분은 가족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정당하고 타당하며 당연한 것으로 본다. 간혹 가족주의를 비판하면서 가족주의의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도 가족주 의의 포개진 기제를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 일상성에서는 가족주 의의 폐해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즉 가족주의는 만들어진 것임을 들뢰즈 일상성 은 주장하는 것이다. 가족주의를 만들기 위해 가족주의에서 다소 벗어난 에네르 기들이 사라지거나 배제되도록 하는 유기체적인 힘을 들뢰즈 일상성은 보여주 고 있다.

사회과교육 기반으로서의 일상성이 곧바로 들뢰즈 일상성과 합치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회과교육의 일상성이 만들어진 일상성이고 따라서 또 다른 일상성이 있을 수 있음을 사회과교육이 제시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만 들어진 일상성의 확대재생산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를 극복 하는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 이 논문은 2008년 2월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위원회에 제출된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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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1. 문제제기 및 연구의 필요성

사회과교육에서의 일상성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사회과 교육의 일상 성에 관한 논문을 검색하면, 태무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사회과학의 일상성에 관한 논문은 풍부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양적/질적 차이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가? 하나는, Engle & Ochoa의 사회화와 대항사회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 다. 민주시민 교육을 사회과의 본질로 전제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시민성의 민주주의적인 이상실현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회화는 사회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목표로 사회내의 지배적인 관습과 가치들을 보존하고 사회의 결속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회의 기준에 순응하도록 조작하게 된다. 반면 대항 사회화는 독립적인 사고와 책임 있는 사회비판을 강조하는 것으로, 사회 비판을 할 수 있도록 의도된 학습 과정이라고 주장한다(Engle & Ochoa, 1988, 정세구 역, 1991: 48-50). 즉, 사회 과 교육의 일상성이 대항사회화보다 사회화에 보다 더 무게중심을 두기 때문에, 보수적이며 지속성을 보장하는 사회과 교육을 목적으로 일상성을 소여된 대상 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는 의심을 받고 비판되어 왔다. 의심의 큰 흐름은 사회화가 누구의 기획인가 하는 것이다. 가령 미드의 사회화란 ‘ME'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사회화란 개인들이 스스로가 처해 있는 상황 및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분투 속에서 그들이 당면 하게 되는 가치관 및 신념들과 협상하고 도전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Edgar &

Sedgwick, 박명진 외역, 2002: 226). 사실 미드의 사회화도 당연함을 가장하고 있다.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사회화는 실제로 인간은 타자가 왜 그렇게 행위하는 지를 내면화하는 이해일 뿐이다(Edgar & Sedgwick, 박명진 외역, 2002: 229).

그 숨은 기제는 사회화와 일탈(낙인)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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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상호작용론은 권력관계에 대해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Edgar & Sedgwick, 박명진 외역, 2002: 231). 그런데, 사회과 교육의 사회화는 미드의 논의보다도 더 보수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Engle & Ochoa의 대항사회 화는 사회화의 이성을 똑같이 활용하기에 대항사회화가 될 수 없다. 특히 사회 과 교육 사회화와 대항 사회화에서의 일상성을 균형과 안정의 정태성으로 보기 때문에 일상성의 역동적 불균형을 논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과 교육의 목표1)에서 드러난다. 바로 환원적 추상성이다. 사회과 교육에서 무질서, 혼란, 카오스, 랜덤은 질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연 무질서는 죄악시 될 만한 것인가? 이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이 있어야 한다. 특히 일상성의 무질서는 사회 해체와 동격인가?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사회를 부정하 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를 배제시키는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회과 교육의 사회화는 일상성을 전제하고 사회과를 규정한다는 것 이다. 그럼 사회과가 전제하는 일상성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회과는 과거의 역사와 전통, 사회과학이라는 학문 또는 일상에서의 삶에 두는 입장이 큰 틀이 다(강대현, 2005: 66). 그렇다면 사회과가 전제하는 일상성은 역사/전통/사회과 학의 지식의 녹아있는 일상성을 전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상성이 과연 그 런가? 동시에 연구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항상 정체성에 대한 언표를 생 산하기에 ‘어떻게’, ‘누가’, ‘왜’, ‘어떤 것을’, ‘어디서’등으로 변환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과 교육의 사회화는 이러한 일상성의 전제에 터해 어떤 사실, 개념과 주장 및 원리를 선택하고 배제하도록 결정하는 교육과정 기획자 시각이 작용한다. 교육과정 기획자는 역사와 전통 및 사회과학에 통한 개인 중 심인지, 사회 중심 혹은 일상성을 통한 개인 중심인지, 사회 중심의 선택과 배

1) 사회과 목표는 “사회 현상에 대한 기초적 지식과 능력은 물론 지리, 역사 및 제 사회 과학의 기 본 개념과 원리를 발견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익혀, 우리 사회의 특징과 세계의 여러 모습을 종 합적으로 이해하여, 다양한 정보를 활용하여 현대 사회의 문제를 창의적이며 합리적으로 해결하 고, 공동생활에 스스로 참여하는 능력을 기른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발전은 물론 국가, 사회,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민주 시민의 자질을 기른다”(김일기 외, 1988: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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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 시각을 지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은 사회과학 에서 논의하는 마페졸리의 상대주의 입장, 르페브르의 소외 입장, 슈츠의 현상 학적 입장, 고프만과 허버트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 입장(강수택, 1998 ; 박재 환, 1994)보다도 더 보수적 선택을 하고 있다. 하물며 이들의 연구는 현대성에 서 많이 비판되는 거대담론이다. 거대담론은 실재 경험을 추상화에 환원시킬 뿐 이다. 다른 하나는 시민의 자질에 일정한 유형의 유무에 따른 구분이 작용한 것 이다. 일상성을 일반적으로 표출되는 경험론적 반복과 기능주의적 유기체 적응 으로 보는 경우와 일상성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기존 논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진 문화와 기호, 허구의 이데올로기 및 제도적 장치 효과라고 보는 경우가 있 다. 그러나 이는 현상적 분석에 머물 뿐이다. 동시에 이런 관점주의의 구별은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을 마치 자연적 태도에 기반한 당연성의 세계, 가끔 이론 적 인식이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사람들의 실천적 관심, 실용 적 동기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지금 이곳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라는(장원순, 2004: 174) 일상성에 대한 대립 및 부정을 동반하는 시각이다. 푸코가 지식이 사실(fact)과는 별개로 담론적 실천에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재구성될 뿐만 아니 라, 그 구성 양식 또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소위 과학적 지식을 표방 한 담론이 여타의 과학적. 비과학적 담론에 의해 생산된 지식을 분쇄하면서 자 신의 규범적 정체성에 정치사회적 정당성과 헤게모니를 부여한다(이상엽⋅김웅 진, 2003)는 주장은, 지배 권력이 언어, 공간, 지식, 성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현재도 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동의하기 어려운 구분이 다. 그런데 푸코적인 담론의 충격은 온전한 체계를 상대로 투쟁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사실상 온전한 체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중심 권력이라 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권력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Sarup, 1993, 전영백 역, 2005: 162). 이러한 사회화 위주, 동일성 위주, 전제, 추상성, 선택과 배제의 역사/전통, 사회과학 지식을 버무린 거대담론의 일상성에 대해, 대항사회화의 사회과 교육은 역동적 비동일성, 전제 폐기, 비추상성의 차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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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실천의 일상성으로 바뀌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과 교육의 사회화는 일상 성의 불균형을 균형으로 치환시켜 질서/안정의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대항사회화는 비판적 사고에 의해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비 판적 사고는 ‘X’에 관한 사고이고, 인정된 기준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것들 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McPeck, 1981, 박영환 역, 2003: 22). 여기서 'X'에 관한 사고는 ‘X'를 벗어난 추상적 내지 형식적 논리로 확대될 수 없음을 의미 한다. 즉, 문제적이고 실천을 포함하는 사고과정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소위 논리적 사고는 비판적 사고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차 경수는 비판적 사고의 특징을 Beyer의 주장을 빌어 사실 주장과 가치 주장 구 별, 사실과 일치하는 정확성으로 판단, 정보를 상황 및 논쟁의 관련성 여부 구 별, 뒤에 숨어 있는 가정 확인, 편견 지적, 근거 있는 주장과 근거 없는 주장 구 별, 모호한 주장 구별을 제시하고 있다(차경수, 2004: 218-219). 맥펙과 베이어 의 주장의 공유점이 사회과 교육에서의 역동적인 일상성을 표면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즉, ’X'에 대해 뒤에 숨어 있는 가정, 편견을 지적하여, 그것이 사실에 대한 지적인지 가치에 대한 지적인지 근거를 제시한 후 ‘X'에서 벗어나거나 ’X'주변 담론을 떼어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비판 적 사고력이 의사 결정력이나 문제 해결력과 유사하지만, 그 본질은 어떤 사물 이나 상황, 지식 등의 순수성이나 정확성 여부, 지식 및 정보의 허위여부, 믿을 만한 것인가 아닌지 등을 평가하는 정신적인 능력(김재형, 1996: 45)에서 차별성 이 있다. 결국 사회과교육에서 추리, 해석, 회상은 비판적 사고가 아니며, 비판 적 사고는 문제 해결학습이나 가치 판단 및 의사결정학습과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연구자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사회과 교육의 목표가 결코 일상적이지 않 다는 것과 의심스러운 일상성에 터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회과의 중요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Banks도 이미 지적하고 있다. 개념이 한 그룹의 사 물, 생각 혹은 사건을 분류하거나 범주를 정하는데 유용한 추상적인 단어나 구 로써 공통성이 있는 사물의 그룹을 분류하거나 명명하는 단어(Banks, 1977,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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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모 역, 1995: 96-97)라는 의미는 사회과 일상성에서 비판되어야 할 것이 분명 해 보인다. 왜냐하면, 개념은, 개념의 언어적 위계로부터 획득된 힘(power)이 되 기도 하는 데, 위계적이며, 분류하기를 동반하고, 복잡성을 단순화하고, 관계개 념이 중요하며, 쉐마를 형성케 하고, 언어식별에 작용하고, 특정한 관점을 제공 (Banks, 1977, 최병모 역, 1995: 97-105)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개념은 일상성 이 구체성을 상실하여 스피노자식의 다양한 양태가 곧 다양한 속성이 되지 못 하는 계서적 개념이 된다. 그리하여 ‘X'인 일상성에 대한 사고가 아닌 ’X'의 주 변부나 외곽을 훑게 되는 사회과 교육이 된다. 따라서 추상적인 단어나 구로써 분류하거나 범주를 정하는 개념은 이미 일상성이 아닌 관념론으로 변질이 되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시민성 전달 모형, 사회과학 모형, 반성적 탐구 모형에 대 한 일상성 비판도 표면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시민성 전달 모형이 지향하는 시민은 널리 수용되는 어떤 관습에 순응하고 특정의 신념을 지닌 사람, 어떤 가 치에 충실하고 어떤 활동에 참여하며 어떤 규범에 따라 행위 하는 사람을 뜻하 는 것이다. 여기서 전달은 특정의 가치를 지칭하기 보다는 특정의 의도를 나타 내는 것이다. 사회과학 모형의 학문 탐구 방법은 학문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 고 광범위하며 포괄적인 일반적 전제에서 출발하기에, 특유한 연구방법과 기법 을 익혀 이를 터득한 학생은 그들이 물려받을 사회의 흐름, 구조, 문제를 명석 하게 분석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전제가 누구의 전제인가가 비판되어야 한다.

반성적 탐구 모형은 시민성 전달이 아닌 합리적이고도 숙고된 의사 결정을 내 리는 과정으로 본다. 반성적 탐구 모형의 의미는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라 태 도. 가치. 신념이 항상 변경. 수정. 전의의 과정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 서, 반성적 탐구 모형에 의하면, 항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 다. 그럴 때, 필요한 지식은 유용한 지식으로 한정되는(Barr et al., 1978, 최충옥 외 공역, 2003: 45-53)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3가지 모형에서 배제 된 것이 과연 단점이냐는 것이고, 어떤 의미의 일상성이 모형에 녹아들어갔으며 일상성이 지속적으로 방사(放射)하는 역량을 발견할 수 있는가이다. 교육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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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개진(얹혀진) 기제도 사회과 일상성에서 고려하여야 한다. 현재의 사회과 교 육과정은 민주 시민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미지 의 각축장이라는 주장이 있다. 표준화의 SBER(Standards-Based Educational Reform)은 소수에게 다수가 보여 지는 가능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규율권력과 많 은 사람들에게 소수를 보여주는 과정에 따른 새로운 통제 양식이다. 이 둘 모두 는 이미지가 지배하게 하며, 사회통제, 정치경제적 지배, 순응의 수단이기에(사 회교육연구모임, 2005: 104-109) SBER은 비판을 받게 된다. 단순한 표준화에 대한 비판이 아닌 표준화 뒤에 포개진 기제인 규율권력의 논리에 귀착될, 적합 함으로 위장한 하나의 만들어진 이미지로서, 이미지 교육과정을 조립한다는 것 이다. 7차 사회과 교육과정의 목표에서 이런 보여주기 이미지는 드러난다. 이는 교육과정도 Debord의 시각 테크놀러지의 지각을 소비하는 구경꾼으로서의 특정 한 ‘보기’를 요구하고 그에 따라야 하는 동시에 그 시각테크놀로지의 요구 논리 에 개입하는 권력의 연장선에 놓여 있음을(Debord, 1967, 이경숙 역, 1996)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비판적 사고를 통해, 개념/수업 모형/교육과정 등에 대한 일 상성의 ‘포개진 기제’를 연구자는 드러내고자 한다. 여기서 포개진 기제란, 들뢰 즈의 포획(capture)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저장. 비축(stock)에서 발생하며 결코 비대칭적이거나 불공정한 강탈이 아닌 공정한 대칭적 과정의 외양으로 나타나 는(합리성/정당성/당연성/당위성/타당성) 이면의 기제이다. 특히 연구자가 사용 하는 ‘기제’는 프로이트의 방어 기제에서 차용한 것으로 신체적 이해나 사회문 화 환경에까지 확대된 모든 생활과 관련된 적응개념으로 인식하게(구본권, 1994: 274-275)된 의미로 활용한다. 즉 포개진 기제는 마치 정당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에 따라 대항력이나 대항행위를 하지 못하지만, 이 미 그것은 그것(it)에 정당성이나 공정성이나 합리성이 덧붙여진 즉, 하나의 몸 이 아닌 잉여성의 몸인 것이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떨어져 나와 다른 것에 붙 을 수 있고 적응개념의 기제를 통해 스스로를 왜곡하며 타협하는 것이라는 입 장이다. 이는 들뢰즈의 포개진 일상성을 통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을 표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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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어 과연 그동안 무엇이 어떻게 접속하여 일상성을 왜곡했는지 알 수 있 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을 들뢰즈의 여러 개념에 접목시 켜 그 효과를 알아보는 것으로 연계된다. 그러나 포개진은 들뢰즈의 고원적 사 고에 진입하면 선(線), 추상기계로 이해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일단 폴라니 의 묵지와 라이프니츠의 주름의 변곡이 포개진 기제와 연계됨을 알 수 있다. 즉 묵지를 통해서 우리는 신체 밖에 있는 실재나 사건의 의미를 신체 내부에 있는 단서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게 되는데, 성격상 이것은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장상호, 2003: 285). 즉, 앎에는 언어적 명제로 진술되기 보다는 개인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김명신, 2004: 28). 또한 주름 을 통해서 무한한 중첩 구조에서의 연속적인 작용, 점진적 운동(이정우, 1999:

270)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묵지와 주름이 추상기계, 선과 같지는 않다.

묵지의 연장과 주름의 동일성의 반복은 들뢰즈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 용을 정리하면, 사회과의 기반인 일상성은 사실 사회과 교육목표나 사회과의 성 격, 내용, 방법, 평가에 문자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일상성을 전제했 다는 것인데, 과연 그 전제가 타당한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 논의에서 사회과의 일상성은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며 따라서 철학적 논의를 통해 다른 선택지로 변환될 수도 있음을 연구자는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변환의 가변성으 로 들뢰즈의 일상성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가늠 하여 보고자 한다. 연구자는 들뢰즈의 일상성에 드러난 여러 개념을 중심으로 본문에서 구체적 논의를 전개하여 사회과 교육 기반으로서의 비판적 일상성 혹 은 비판적 일상성의 사회과 교육를 보이고자 한다.

잠시, 들뢰즈 일상성을 스케치하면 존재로서의 신체는 유기체에 의해서 미리 주어진 기관들로 한정되지 않는 무한한 변용능력을 생성하여야지만 자신을 재 생하고 보존할 수 있다고 본다(신승철, 2005: 149). 기관 없는 신체란 다양한 접 속을 통해 무한한 경우의 복수성을 생성하고 긍정을 강조하는 신체이다.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주체, 절대적 상대성을 극복하는 소수주체를 제시하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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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정우의 가로지르기 개념은 르페브르가 일상생활에서 가구, 물품, 시간의 활용, 잡다한 사실들, 신문의 안내 광고 등 일상적 사실들을 인식의 가치가 없 는 것으로 경멸(박재환, 1994: 66)해 버리는 시각을 비판하는 데 유용하다. 만일 현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이 일상적 사실들에 비판적 작용을 금지한다면 우리 는 일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실존. 이성. 언어와 같이 거대담론의 일상 속에 함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성적 핵 이 일상성에 자리 잡고 일상생활을 지배하면 양식은 문화로 타락하고, 그 문화 는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로 세분되며, 이러한 분리가 문화의 단편화와 해체를 야 기하게 된다(박재환, 1994: 67-77)고 주장한다. 즉, 일상성을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성이 인간을 지배하는 일상성을 강조한다. 이는 일상성이 욕망 하는 기계에 의해 절단과 채취가 이루어지는 르페브르의 관계적 일상성을 해체 하는 것이다. 한편, 일상성을 사회적 장(場)으로 설명하는 부르디외의 하비투스 이론에 의하면, 개인의 가치는 사회 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사회적 가치 또한 개인적 가치에 의해 바뀌게 된다(Bourdieu, 1979, 최종철 역, 1995: 151)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일상성에서는 제도,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 회. 문화적 구별 짓기 기능을 비가시적으로 수행하는 숨겨지고 포개진 구별 짓 기 역할로 본다. 가령 입맛, 친구 사귀기, 화용론적 언어 틀, 옷 입기, 문화활동, 스포츠 여가 활동 등에 들뢰즈의 지층에 포획된 하비투스와 그 하비투스의 고 정성을 넘어 무한한 접속과 배치가 가능한 비하비투스로 변환됨을 들뢰즈 일상 성은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들뢰즈 일상성의 언어에 대한 비판도 사회과 교육 의 비판적 일상성에 영향을 준다. 언어가 표현되는 언표의 구성요소는 개념들이 며 곧 기호이다. 기호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행위에서 의미를 운반하고 생성하는 가장 중요한 단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호의 의미는 기호의 사용 및 적 합성을 규정하는, 관습적이고 문화적인 특정한 규칙들의 약호안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위치로 결정 된다(Edger & Sedgwick, 2002, 박명진 외역, 2003: 91).

이에 관해, 로크의 기호론과 소쉬르의 기호학의 주장은 비록 다르지만, 기본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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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는 전통적인 가치 평가적 텍스트가 의미 획득과 해석적 텍스트로 전환되는 심급의 변환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소쉬르의 기호학은 문화적 차이를 정당화 하는 레비스트로스가 받아들여 그의 문화인류학적 연구에 힘을 보태었지만 소 쉬르의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으로 인해 오류가 하나씩 제기되어 규칙들의 세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롤랑 바르트의 외시의미는 기호와 대상체 사이에 있는 단순하고 분명하며 직설적인 관계를 나타내지만 그의 함축 의미는 사람이 그 기호에 덧붙이는 암시적 의미로 주관적 느낌을 나타낸다(김 태형, 2003: 8). 이는 우리가 함축의미를 외시의미인 것으로 혼동하고 마치 자연 스럽고 불변의 의미인 양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태가, 바르트가 곧 신화라 칭 한 단계이며 이 신화는 허구와 연계되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어 언어 는 다시 한번 비판받게 된다(Edger & Sedgwick, 2002, 박명진 외역, 2003: 94).

볼로쉬노프는 소쉬르 언어의 추상적 객관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소쉬르의 기호 는 언어의 역사와 언어의 체계 사이에 일종의 독특한 단절성을 가정한다는 것 이고, 그 결과 공시적인 차원에서 언어의 의미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통시 적 차원에서는 유린되고 무시된다. 그 결과 언어의 현재상태와 언어 역사는 서 로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될 수도 없다. 사실 언어의 현실은 언어의 생성과정이 다(Vološinov, N.P.N.D, 송기한 역, 2005: 93-96)고 주장한다. 이 의미는 볼로쉬 노프가 초역사적 언어 구조보다는 특정한 사회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이루어지 는 언어 의미의 실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소쉬르 비판은 퍼스의 주장으 로, 소쉬르가 경험 세계의 구조화에 언어 역할을 너무 강조했다는 것으로, 퍼스 는 개개인의 독자적인 기호 해석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또한 라캉의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김상환⋅홍준기, 2002: 98-99)라는 주장도 주체를 언 급하는데, 주체가 언어의 세계에 진입함으로써만 상징계에서 성립되기에 이런 주체는 사실상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으로, 그 구조화는 롤랑 바르트, 볼로쉬노프, 퍼스에 의한 비판처럼 곧 주체의 비판으로 전이/전환되기까지 이르 게 된다. 이리하여 소쉬르의 구조주의적 기호학을 포함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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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분석철학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며, 언어 놀이로서 의 일상어를 인정하게 된다. - 라일의 의사 존재적 명제 등(정대현, 1978) 분석 철학 보충을 통해 형이상학의 사변을 극복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세우고자 한 언어의 확실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들뢰즈 일상성의 탈언표 적 행위, 탈영토/탈코드화/탈주선으로 기표의 무한한 미끄러짐과 탈주선이 우연 적으로 생성하는 언어적 일상성으로 긍정되게 된다. 사실 들뢰즈는 이데올로기 나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유물론적 노마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들뢰즈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후의 글에서는 위에서 논의된 문제의식과 관점을 통해 들뢰즈까지의 철학의 흐름을 살펴 들뢰즈 일상 성의 문제의식의 의미와 개념이 타철학자와의 차이점을 간략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들뢰즈 일상성의 주요 개념과 의미를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에 주는 함의와 일상성의 다른 관점을 고원식으로 정리하게 된다. 이런 배경을 통해, 현대 일상성(생활)과 문화이데올로기를 비판적 사고의 입장에서 들뢰즈의 일상성 시각으로 검토하게 된다. 이를 통해 구체적인 일상성(생활)의 사례를 통해 현상이 포개진 기제임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과 교육의 기반인 일상성의 암묵적 전제로 기능하는 주요 개념을 연구자는 10개를 제시하 고 이에 대한 비판적 술어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비판적 사고력에 터해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과 교육에서의 비판적 일상성을 정리하 게 된다.

2. 연구내용

본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들뢰즈의 일상성을 통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에 주는 함의를 찾아 사회 과 교육의 일상성에 비판적 사고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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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들뢰즈 일상성을 통해 거대담론적 일상성 및 구체적 일상성을 비판적으 로 드러내어 사회과 교육 기반으로서의 일상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다. 나.의 문제를 탐색한 관점과 사유를 바탕으로 사회과 기반으로서의 일상 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력을 들뢰즈 일상성 개념으로 적용하고 그 의미 를 찾아 실행이 가능한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서구 근대 철학 흐름의 쟁점을 부각시켜 이후 그 쟁 점을 해체하는 논의를 통해 들뢰즈 일상성 연결고리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 과 정에서 플라톤, 칸트, 헤겔을 극복하고자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니체 를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들뢰즈의 비판적 일상성의 주요 개념을 살핀다. 이를 통해 사회과 교육에 주는 함의가 드러나게 된다. 연구자가 생각하는 들뢰즈 일 상성은 비판적 일상성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회과 교육의 기반으로서의 일상 성이 될 것이다.

Ⅲ장에서는 거대담론으로서의 사회과학적 일상성 논의를 살펴본다. 이 과정 에서 문화이데올로기, 비판적 일상성 논의가 전개된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들 뢰즈 일상성 시각에서 역시 극복되어야 할 주장이다. 다음은 사회과 교육의 일 상성 논의를 찾게 되는데, 현재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 논의는 태무하기에 구체 적인 일상성 사례 및 분석을 통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사례와 분석도 들뢰즈 일상성을 통해 비판된다.

Ⅳ장에서는 새로운 사회과교육의 기반인 일상성을 찾기 위한 비판 및 제안 이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화에 대한 대항사회화로서의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이 제시된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을 위해 대표적인 포개진 기제 10개를 택하여 비판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과 포개 진 기제를 확인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Ⅴ장에서는 새로운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 원리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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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행연구 고찰

장원순은 일상생활과 사회문화교육을 연계하면서 소외과정을 극복하는 방 법은 사회문화적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라며 사회문화교육의 내용이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교육 내용으로 할 것을 주장한다. 이유는 학습자에게 친근하며, 교 육과정의 주요 개념과 기능 성취에 용이하고 일상적 삶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 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상성을 그는 의사소통 행위 이론의 합리성과 관례라 고 규정하면서 더 나아가 재 일상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장원순, 2004). 그러나 임지현은 사람들이 이미 결정된 생활 방식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안정 된 재생산 구조를 유지한다면서 전통의 이름으로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아니면 민중의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일상적 파시즘을 고사 시키지 않는 한, 진정한 변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임지현 외, 2006). 또 Apple는 학교에서의 잠재된 교육과정은 갈등의 본질과 그것의 사용을 둘러싼 규칙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학생으로 하여금 내면화할 때, 정당화의 영역을 설정하는 가상의 망을 가정한다. 이 과정은 갈등의 부정적 가치를 보여주는 명 확한 실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제 영역에서 지적이고 개념 적인 갈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전반적인 부족함으로 성취되는 것이라고 주장 하고, Dreeben은 학생은 암묵적으로 매일 마주치는 것과 학급생활의 과업에 대 처함으로써 주로 특정한 동일함을 보이는 사회적 개념을 배운다고 주장한다 (Parker, 1996: 177-178). 관례화와 합리성을 가장한 의사소통이 만들어 내는 은 폐된 일상성은 새로운 일상성 추구를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

지식은 일상성에서 어떤가? 이혁규는 교과서의 지식이 다루어지는 일상생 활 세계의 원리가 무엇인지 알고자하였고 그 일환으로 교실의 구체적 상황에서 지식이 어떻게 변환되는지, 교수 경험이 누적되면서 교수법적 내용 지식이 만들 어짐을 밝힌다. 그 결과 일상성과 관련하여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교수 방 법은 없다는 것이다. 반면 각각의 교사마다 개인적인 체험과 효율성에 따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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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이혁규, 1995) 소위 교수법적 내용 지식을 강조한다. 그러나 Foucault는 담론이란 모순이 포착할 수 있는 그리고 사람들이 결국 그의 파열과 폭력 속에서 그를 되찾기 위해 그 외관적인 일관성을 파괴해 야 할 경험적인 무엇이다. 담론이란 하나의 모순에서 다른 모순으로 가는 것이 다(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212). 푸코의 담론은 일상성의 단절성을 상 정하며 그 일상성의 운동을 강조한다. 이혁규의 주장에는 고정된 관념은 제거하 려 하나, 되찾기 위한 파열과 폭력은 없다. 즉, 운동이 되기 위한 발견과 실천 중에 실천이 없는 것이다. 실천되지 않는 지식이나 지성사는 거대담론의 형상만 을 붙들고 있게 되는 자기기만이다. 자기기만은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모순을 존립 근거로 요구한다.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다른 자의 모습을 차용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자기 부정이다. 부정하는 활동이 바로 그 긍정 자체인 것이다(서동욱, 2006). 이는 부정이 바로 긍정이라는 것으로 다원성의 교 수법적 내용 지식이 결국은 교육과정의 교수 내용을 부정한 후, 개인적으로 재 해석한다는 것이 실상은 그 교육과정의 교수 내용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운동과 실천은 생산과정의 형태에 의해 주체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구조화된 사회에 놓이고 그 이해관계에 대한 확인 및 극복의 투쟁을 거치면서 생성(Thompson, 1980, 나종일 외역, 2000)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의 실천조차 푸코에 의하면, 다양한 개별적 몸들을 생산하고 분류하 고 편입하는 담론의 망뿐만이 아니라 제도적 규율장치와 실천에도 주목하여, 갖 가지 세칙과 규칙, 까다로운 검사, 신체에 가해지는 제도적 공간의 전형을 발견 하였다. 이는 결국 공간배분의 기술, 신체동작을 코드화하고 규칙화하는 활동의 통제, 신체 규율의 지속을 위해 활동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열화하는 생성의 조직, 개인의 능력을 집단 단위에 연결시키는 힘의 조합이(박선웅, 2002) 이미 포개진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들뢰즈 일상성은 더 나아가 왜 억압을 욕망 하는가? 를 제기한다. 일상의 모든 영역과 개인의 내밀한 심리에까지 고루 퍼져 있는 미시정치학적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이디푸스는 욕망을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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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죄의식을 심고 확대 재생산하여 내면화시키는 허구(이종도, 1999)가 바로 미시정치학의 일상성이다. 따라서 실천적 지식이 실상 긍정인 이유는 전방위적 감시가 잡종성으로 인해 피지배자의 존재를 허용된 것만 보이게 하여, 닮은 부 분은 보이나 닮지 않은 부분은 보이지 않게 되는 즉, 부분적 감시가 되어 이것 이 저항적 몸짓(박상기, 2000)처럼 보일 뿐인 것이다. 결국 이혁규의 교수법적 내용 지식이 자기 감시와 자기 검열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최영진은 일상성에 대해 황당한 주장을 한다.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시킨 것 이 유교적 가족주의이고 파편화된 개인의 상실감, 소외감, 사회 분열을 극복하 기 위한 자유주의와 공동체 주의가 바로 유교적 가족주의에서 가능했다(최영진, 2005)는 것이다. Hobsbawm은 근대 정치 질서는 과거 왕정 질서와는 달리 더 이상 신성한 토대위에 수립할 수 없었고, 산업화, 도시화, 계급투쟁의 격화 속에 서 근대 국민국가가 의례와 레토닉(rhetoric) 그리고 상징물을 필요로 했던 반 면, 대중은 변화의 급류 속에서 안정을 희망했다. 그 접점에 과거와 현재 사이 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전통의 발명이 위치한다(Hobsbawm, 1983, 박지향⋅방문 석 공역, 2004) 고 주장한다. 최영진의 유교적 가족주의는 만들어진 것일 뿐이 다. 하효숙은 선택된 전통의 지향성이 지배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에 초점을 맞 춘 것이며, 피지배 관계를 완화하거나 해체하는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하효숙, 2001)며 새마을 운동을 엘리트 위주의 전통 및 체계 정립의 재활용이라고 본다.

하효숙의 다음 주장이 포개진 기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소득 증대 운동은 자본 주의의 확대로 이어졌고,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은 계몽적인 지도자 육성이 되었 고, 합리성이 영농의 과학화로, 도시에서는 시간과 노동의 통제로(하효숙, 2001) 왜곡됨을 정확히 지적한다. 특히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에서 대중매체는 일상성 자체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CCCS(Centre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의 스튜어트 홀이 주장한 프로그램을 해석하기 위한 지배적 코드 해석 에 저항하는 헤게모니(Baldwin et al., 2004)를 최영진은 외면하는 것이다.

이상의 선행 연구를 통해 들뢰즈의 일상성이 위의 주장과 또 다른 것이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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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사회과 일상성에 어떤 함의를 주는지 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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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들뢰즈 일상성 철학과 사회과 교육

1. 들뢰즈 일상성의 주요 개념과 의미

가. 들뢰즈 이전 주요 철학의 갈래

들뢰즈 일상성을 알기 위해 들뢰즈가 비판하는 주요 철학의 갈래를 알아야 한다.

로크는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제1성질과 제2성질로 구분했다(남경태, 2007:

290).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를 잇는 징검다리에서 제1성질은 대상에 가까운 디 딤돌이고 제2성질은 주체에 가까운 디딤돌이었다(남경태, 2007: 290). 그러나, 인 식은 로크가 가정한 대로 백지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다. 선입견을 갖고 그것을 토대로 대상을 파악한다(장상호, 2003: 804). 이것은 곧 알튀세르의 사회계약론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목적론적으로 사회 이전의 자연 상태를 사회의 기원 으로 설정하고 거기로부터 출발하지만, 출발점인 이 기원 속에는 창조되어야 할 사회의 이상이 이미 새겨져 있다(백종현, 1998: 162). 즉, 로크, 칸트, 밀은 정치 적, 경제적,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인간주의를 해방시키기 위해 인간 존엄과 평 등권의 이름으로 자유주의를 옹호했지만 동시에 목적론적 기원으로 인해 숨거 나 포개진 기제는 존재하는 조건의 모든 비판의 발밑으로부터 카펫을 당기는 것이었다(Fink, 1981: 106). 동시에 이것이 합리적 탐구 프로젝트(Turner, 1996, 임인숙 역, 2002: 47)의 시작이 된다. 그러나 버클리는 제1성질은 허구라고 주장 한다. 설사 제1성질의 개념을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려면 제2성 질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남경태, 2007: 290). 버클리의 주장은 어떤 장치를 만 든다 해도 인간은 사물 자체를 직접 인식하지 못하고 사물에 대한 관념만을 얻 을 수 있기에(남경태, 2007: 292) 사물은 추상적이라는 것이고 이는 일반관념의 거부로 이어진다. 동시에 개별 주체 세우기이다. 흄은 개별적 상대적 주체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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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하고자 한다. 흄이 보기에 자아는 환상의 발명품이다. 우리가 가진 지각들은 서로 별개인데도 연상 작용에 의해 마치 연속성을 지닌 듯한 착각이 일어나고 그 결과 동일한 자아라는 환상이 생겨난다(남경태, 2007: 298-299)는 것이다. 이 를 그대로 확장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인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Stumpf & Fieser, 2003, 이광래 역, 2006: 416-417). 이런 점에서 자연의 질서 와 일상성의 질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구성된 질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흄 의 주장의 핵심은 실재의 세계에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 관계를 필연성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관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즉 실재의 인과관계 자체가 아니라 관념들의 관계일 뿐이다(남경태, 2007:

302-303). 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서로 별개인 사건들을 인과관계로 인 식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에 기인한다고 말한다(남경태, 2007: 304). 결국 인간 이 오랜 경험 속에서 관념들의 관계를 계속 보아왔고 그래서 인과가 객관적으 로 세계에 내재한다고 믿을 뿐이라는 것이다(이정우, 2004: 261). 연구자는 그 습관을 형성케 하는 일상성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제에 주목한다. 이러한 주장을 따라 주체가 객체를 타자로 규정하고 그 타자를 자신의 동일성 속으로 전유 및 착취하는 과정이 성립된 것이다. 타자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게 된 것 이다(윤효녕 외, 2003: 3). 스피노자는 초월 주체, 초월철학을 거부하고 내재철학 으로 간 인물이다(이정우, 2004: 108). 내재철학은 욕망과 양태의 능동 철학이며 외부가 아닌 내부를 강조한다. 스피노자는 사유하는 실체인 정신과 연장을 가 진 실체인 물체, 혹은 능동적 인간과 수동적 자연을 대립으로 규정한 데카르트 의 이원론에 함축된 인간중심적 반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도 필연적 법칙 성에 따르는 자연의 일부로 보았고 정신 혹은 사유를 인간 존재 자체와 동일시 하는 데카르트와 달리 인간을 육체와 정신의 통일체로 파악했으며 데카르트가 이성의 통제 하에 두려 한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다(전경갑, 1999: 34). 스 피노자의 이성이 자기보존 욕구의 연장선 위에서 인간의 욕망에 내재하는 것이 고 욕망이 긍정적이고 생성하는 것임에 비해, 홉스의 이성이란 계산적이고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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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이성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대상화시켜 그것을 측정하고 조정할 수 있는 것이고 자기보존욕구는 이기적이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권력전쟁을 추구하는 욕망인(신승철, 2005: 138-139)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체는 서로 다른 본성을 가 진 부분들의 조직으로, 외부의 물체와 만나는 과정에서 감응을 받아 능동적으로 변용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신승철, 2005:142). 스피노자의 내재철학은 자연의 필연적인 법을 인식하고(내재철학) 그에 따름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지 자 유로운 의지(주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서동욱, 2001: 266-268)라는 것이 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실체라고 간주한 정신, 신체, 물체는 실상 실체가 아니라 모두 양태가 되는 것이고 이 양태를 통해 운동과 변화를 도입하려는 것이다(남 경태, 2007: 272). 그러나 스피노자의 관계적 사고는 자본주의의 교환가치에 역 이용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이미 철학은 나의 철학이 아닌 항상 강자의 철학 이었을 뿐이라고 통찰하고 있다. 이런 스피노자의 내재철학처럼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를 통해 내재철학을 주장한다. 그는 뉴턴의 힘을 진정한 힘으로 보고 있 지 않다. 왜냐하면, 뉴턴의 힘은 단지 물체의 장소 이동 및 변화와 관련되는 것 이지 운동 자체의 설명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이상하, 2004:

135). 즉, 뉴턴의 힘 개념이 오늘날의 물리학적 힘 개념이라면 라이프니츠의 힘 개념은 오히려 오늘날의 에네르기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이정우, 2004: 126).

모나드는 외부에서 직접적으로 침투에 들어오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들어올 수 있는 창과 문이 없지만 물질들의 층위에는 틈이 있어 서로 다른 외부의 물 질들의 층위와 접속될 수 있고 그 접속된 힘들의 진동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 고받음으로써 모나드는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다(한국비평이론학회, 2006: 254) 고 주장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양태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의 독자성에서 도출되는 불공가능성을 흡수한다. 칸트의 전환은 정신이 대상을 구성한다고 본 것이다. 정신이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대상이 일방적으로 정신에 작용해서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대상이 마치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 듯이 쌍방향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칸트의 말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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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정신이 마음대로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안에는 대상을 인식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뜻이다(남경태, 2007: 329-330).

즉, 내부의 정신이 외부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감각을 받아들이는 감성과 그것을 개념으로 정리하는 오성은 인간의 정신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형식이 다. 경험을 감각과 동일시한 흄은 경험의 근거를 정신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 에 파국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칸트는 정신 내부에 감각을 수용하고 정 리하는 인식의 기본 기능이 있다고 보았다(남경태, 2007: 332). 그러나 이 주장 은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와 인식의 융합 그리고 인식은 궁극적으로 재인식의 한 형식이라는 가정/전제이다(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59). 그래서 헤 겔은 “칸트의 오성은 ‘그 자체 내’는 단지 ‘의식을 위한’ 그 자체 내”였을 뿐이 (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85)라고 비판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칸트도 인정하는 것이다. 물자체를 제외하고 현상만 한정하여 논한 것이다. 칸트의 순 수이성의 선험적 연역은 사실 칸트만이 아는 자신의 내부적 관념의 구성일 뿐 이다. 들뢰즈 일상성에서 칸트 비판은, 심성의 능력들은 본성상 서로 다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일치)를 이루고서 활동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능력들간의 이런 조화(일치)는 인식 가능성의 초월적 결과에 기반한 주관적 조 건일 뿐이(서동욱, 2001: 49-50)라고 질타한다. 칸트는 정신의 구조가 개인이나 사회문화적 배경, 역사적 시대와 무관하게 언제나 같다고 보았다(남경태, 2007:

350).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은 칸트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해 양 극단을 통한 생성을 본다. 즉 평형이 아닌 운동을 본 것이다. 운동은 곧 대립과 모순의 존재 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오스를 배제하기 위해 헤겔은 어딘가에서 변증법 적 발전의 논리를 정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발전이 필요가 없는 상태 그것은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철학이 이데올 로기로 변질되는 것은 바로 여기부터다(남경태, 2007: 354). 헤겔의 체계에서는 목적론적 인간주체가 삭제되고 목적론적 절대주체 혹은 궁극적인 주체가 등장 한다. 그러나 헤겔의 주장은 끊임없이 기존의 현실을 극복하여 변혁해 가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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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창조적인 발전에 부합하지 않는 사고이다(장상호, 2003: 927). 헤겔의 변증 법적 지양은 결국 내부화한다는 것이고 이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다(多)를 일 (一)로 포섭하는 과정이다. 비록 다(多)에서는 불연속과 바깥이 존재하지만 지양 될 경우 바깥과 불연속은 사라진다(이정우, 2004: 264) 헤겔적 사고방식이야 말 로 목적론과 주체주의 특히 주객일치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보 아야 하(백종현, 1998: 167)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고 들뢰즈 일상성에서 변증법 극복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칸트 의 선험적 주체, 헤겔의 정신 같은 주제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주체일 뿐이 라고 보았다.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계급에 따라 형성된 서로 상이한 존재 들이라고 보았다(이정우, 2004: 266). 마르크스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그의 경험 과 실천이 소중하다고 믿는 경험주의와 역사주의를 배격했으며 사회를 형성하 는 구조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주목했다(정재철 편저, 1999: 34). 이것의 극복 을 그는 실천으로 제시한다. 그 실천은 실천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관념적이 고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이라고(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99) 주 장한다. 그러나 들뢰즈 일상성은 마르크스의 거대담론을 문제 삼는다. 니체는 들뢰즈 일상성의 핵심인데 이성의 합리가 아닌 의지의 권력을 주장한다. 니체는 데카르트가 인식의 출발점을 찾는 이유, 칸트가 선천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믿 는 의도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다그친다. 진리란 이미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묻고 찾는 사람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를 묻는 것, 정 의를 찾는 것은 모두 위선이며 거짓이라고 본다. 진리와 정의는 고정불변의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은 그 자체로는 정상도 비정상도 아니라. 어떤 행동도 그 자체로는 선과 악도 아니다. 이른바 선한행동, 악한 행동이라는 것은 특정한 관점에 따른 해석일 뿐이다. 따라서 본래부터 도덕적인 현상이 따로 존 재하는 게 아니며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니체의 관점 이(전경갑, 1999: 90-91)라는 것이다. 이런 니체의 관점주의의 핵심은 세계는 하 나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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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최종욱, 2000: 91)인 것이다. 헤겔이나 칸트 그리고 데카르트는 원본과 복사 물, 진짜와 가짜라는 플라톤의 나눔의 철학에 반기를 들어 이데아, 신, 자연이라 는 원본이나 진짜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인간 정신이나 선험성, 세계정신을 원본 이나 진짜라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니체와 그 후계자들은 데카르트나 칸트, 헤겔등이 원본이거나 진짜라고 주장한 인간정신이나 선험성 혹은 세계정신도 플라톤의 나눔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신, 이데아, 자연과 마찬가지로 원본이거나 진짜가 아니며 더 나아가 그런 원본, 진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못 박는 다(한국비평이론학회, 2006: 269). 니체의 코페르니쿠스적 사고방식의 전환이란 한마디로 실체가 아닌 양태들(존재자들)의 반복적인 생성, 즉 영원회귀 자체를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종래에는 양태로서의 개별적인 존재자들의 생성이 동 일성의 원천으로서의 존재(실체)에 의존했다면 양태들의 생성이 실체적인 존재 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존재가 생성에 의존한다. 양태들과는 별개인 동 일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란 없다(김상환 외, 2002: 291). 니체는 차이를 긍정의 대상으로 만드는(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89)것의 영원회귀를 통찰한 것이다. 미결정, 뮤규정이 존재론적 우선이 되는 것이다. 이성/주체의 동일성을 일거에 말소한 니체의 충격에 이은 또 다른 이성/주체 동일성 말소의 충격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다. 즉, 이성보다 의지, 힘과 이익에 대한 욕망, 성욕 등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며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독특한 개 인의 실존적 결단이 더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타나 이제까지 권좌에 앉아 있던 이성의 권위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김광억 외, 1999: 50). 그러나, 프로이트는 주관적 과정을 객관적 세계로 옮겨 놓은 것을 투사를 주장하면서, 사물들의 관념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들은 사물들 그 자체에도 성립한다는 (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155-156)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 결과 프로이 트의 분석은 욕망(=힘)을 억압함으로써 그 욕망에 인격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법이(서동욱, 2003: 114)지배하여 억압 문명을 정당화하게 된다. 또 다른 비판은 성에 대한 지식을 통해 권력이 행사되는 새로운 차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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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장치의 출현(전경갑, 1999: 209)에 프로이트가 기여했다고 본다. 이것은 플 라톤이 이데아로 권력의 탄생을 정당화했고 프로이트가 무의식으로 문명의 등 장을 정당화했다. 인간 사회에 야만성(혼란, 마오스)을 몰고 올 욕망을 정화하고 길들이는 질서로서의 문명은 이렇게 생겨난다(이득재, 2001: 181). 라깡도 프로 이트의 한계를 지적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설명이 의식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식적 언어는 대타자의 무의식적 구조화인 것이다. 인식은 언제나 주체의 경험에 선행하는 담론들로부터 형성되며 주체 자체도 자율성, 통 합성, 동일성 등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 라깡의 주장이다(윤효녕 외, 2003:

68). 라깡의 주장의 핵심은 의식적인 주체가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 반 대로 언어가 주체를 규정한다(백승완 외, 1999: 14). 즉, 타자의 우위성에 따른 결여로 보는 라깡의 시각은 주체가 기표의 산물이고 그 효과라면, 기표는 다른 기표로 끊임없이 이어질 뿐 그 기의인 ‘나’를 여실히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투 명한 라깡의 주체는 투명한 주체가 아니라 불투명한 주체이다. 라깡은 주체를 삭제함으로써 주체의 불투명성을 강조하는 것이다(전경갑, 1999: 140). 그러나 프로이트의 투사를 통한 재현논리와 라깡의 욕망의 결여 주장은 들뢰즈 일상성 에서 비판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관념론 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의 토대 없는 것을 공격해대는 지점(Adorno, 1966, 홍승용 역, 2005: 92)인 것이다.

과거의 존재론적 질문들은 모든 존재를 인식의 대상으로서 가정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런데 존재에 관한 물음을 던지려는 순간 하이데거는 그 전에 해명해 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존재든 존재자든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인 간이다. 인간도 존재가의 하나인데 존재에 관한 물음을 제기할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이 대상과 완전히 분리된 채로 대상을 마주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분 화되기 이전에 이미 세계 속에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남경태, 2007:

433-434).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도 세계-내-존재인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세계를 전제한다(이승종, 2004: 40). 하이데거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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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활동을 근대성의 본질, 보다 정확히는 근대적 주체성의 본질로 내세우고 있 다. 그것은 인간이 존재자와 관계 맺는 방식을 스스로 설정한다는 것, 다시 말 해 존재자는 이제 인간의 계산아래, 인간의 측정 하에서만 나타날 수 있게 되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세계에 와서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는 말의 본질은 존재자가 자기 앞에 대상으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데 즉 표상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다는 데 있다(서동욱, 2001: 8).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현존재는 표면 적으로 모순되는 듯 보이는 두 표현 ‘안에 있음’과 ‘바깥에 있음’을 통해 동시적 으로 규정되는 것이(서동욱, 2006: 85)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석은 어느 경우 나 선이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장상호, 2003: 832).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기 존재의 모든 가능성의 확실성, 진정함과 풍부함을 보장해 주리라는 억측을 현존 재가 가지게끔 한다(서동욱, 2006: 38). 들뢰즈 일상성은 하이데거의 통시성은 수용하나 표상 및 일상성 폄하는 강력히 비판한다.

후설은 인식의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선험적 구조가 있다고 보는 칸트보다는 앞서 있다. 그는 일단 그러한 구조가 선험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야 할 것임을 전제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절차를 처방하고 있는 것이다(장상호, 2003: 797). 후설의 현상학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는 지향성이다. 모든 지향성이 의지작용을 그 구성요소로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모든 지향성이 본성상 실천적 지향성임을 밝히고자 했다(백종현, 1998: 121). 여기서 지향성이란, 표상 의 방식, 또는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대상적인 것과 관계를 맺음이라는 계기이 다(백종현, 1998: 213). 또한 후설의 지향성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누구나 주관 -객관을 논하기 이전에 자연스럽게 대상을 의식할 수 있다고 보고, 근원적인 인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선입견을 괄호치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으로 보았기에, 후설의 현상학적 자아는 결코 역사적인 사실에 영향 받지 않은 양태를 보인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의미의 현상학적 자아는 인간존재의 시간적 우연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비판한다(장상호, 2003: 806). 즉, 현상학 은 주관-객관 분리 이전의 경험(남경태, 2007: 414)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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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 사실성이며 그는 일상의 감각, 사실성, 실용성을 추상적인 인지와 합리주의의 우월성에 예속시키는 것을 거부했다(Turner, 1996, 임인숙 역, 2002:

55).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은 인식 형성의 궁극적 원천에로 되돌아가 묻는 행위 이며 그 행위가 인식하는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이고 이 성찰이 삶이고 세계를 에워싸고 전개되는 것에 관한 자기 성찰이기 때문(이성환, 2004: 186-188)에 현 상학적 환원은 절대적 주관성을 주체가 지닐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제안되고 있 고 현상학적 자아는 세계의 타당성 자체를 괄호치고 오직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주체이다. 또한 현상학은 의식에 나타난 현전이 언제나 동일하게 반복될 수 있는 형식이라는 점을 가정한다(장상호, 2003: 800-801). 한편, 후설의 보편 자가 개별자를 통해 드러났다면, 하이데거는 보편자가 어떻게 개별자를 드러내 어 주는지를 서술하고 있고, 후설의 현상학이 본질은 구성되는 것인데 반해 하 이데거는 구성을, 존재자를 구체적으로 스스로 드러냄으로 해석(이승종, 2004:

28)하지만, 그들에게서는 목적론 폐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들뢰즈 일 상성에서 볼 때, 우연성과 차이 자체를 외면하고 있다. 베르그송은 진화는 필연 적인 결과물을 낳는 과정이 아니라 우연적 창조의 과정이다. 진화는 예정된 목 적을 향해 접근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연으로 점철된 변화의 과정이며 무한한 생성의 흐름이다. 그러나 이는 지성/이성에 의해 가능하지 않다. 지성/이성은 정 지된 것을 논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생명/흐르는 시간 즉 지속(dure'e)(남경 태, 2007: 420-423)을 주장한다. 사회적 합리화에서 배제된 것을 살려야 한다.

사회적 합리화는 이성만의 기획이 될 수는 없다. 사회적 합리화는 동시에 욕구, 욕망, 주거, 음식, 성, 정신적 건강, 가족의 재구성 같은 것의 문제여야(Ryan, 1989, 이병철⋅이경훈 공역, 1996: 84)하는 것이다. 이성에 의해 밀려난 비주류 의 자연스런 복원을 통해 대상을 실체화하여 경험론이든 합리론이든 분석하면, 철학자들은 늘 대상을 관찰하면 운동이 사라지고 운동에 집중하면 대상이 희미 해지는 모순(남경태, 2007: 425)을 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베르그송은 산호적 순간과 균등적 순간(한국비평이론학회, 2006: 144)을 비판하면서, 운동은 정지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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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면이아니라 운동 그 자체가 지속의 동적인 단면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이는 지 속의 질적인 변화과정(한국비평이론학회, 2006: 148)을 강조하는 것이다. 가령 주스는 주스대로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나는 나대로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유지 한다면 내가 주스를 마시는 운동(=변화)이란 불가능하다(이정우, 2004: 188). 또 한 사물이나 상태는 우리의 마음이 생성 속에서 포착(종합)한 표상이다. 모든 사물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운동만이 존재한다(남경태, 2007: 425). 베르그송은 정신과 물질은 실재를 구성하는 두 가지 근원이 아니라 실재라는 하나의 바탕 위에서 성립된 두 가지 지속의 차이라고 설명한다(박경화, 2005: 57). 흔히 사회 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서는 모범시민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베르그송에 따르면 그것은 닫힌 사회에 안주하고자 하는 발상에 불과하다. 생명이 물질보다 우월하고 직관이 분석보다 중시되며 철학이 과학을 안내하는 창조적인 사회를 생성하기 위한 과정은 바른 생활의 시민들이 담당할 수 없고 변화를 꿈꾸는 기 존의 사회 질서에서는 일탈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몫이다(남경태, 2007:

426-427). 또한 리만과 아인슈타인의 다양체는 질서의 다양체이다. 베르그송의 다양체는 조직의 다양체이다. 조직의 다양체는 다자를 일자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닌 두 가지 유형의 다양체를 구별하는 것이다(Hardt, 1993, 김상운⋅양창렬 역, 2004: 74-75). 순수한 지속은 내부적 다양체를, 질적인 분화의 다양체를, 조 직화의 다양체를 제시한다. 존재의 본질적 속성을 실체적 통일성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를 시간에 입각하여 사고해야만 한다(Hardt, 1993, 김상운⋅

양창렬 역, 2004: 79)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 일상성의 잠재성의 현실화이다.

시간성은 그에 동반하는 기제들의 역할을, 그동안 배제되어 온 사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동시에 가능과 잠재의 구분을 통해 운동-시간을 드러내는 효 과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그송의 가능-잠재, 운동-시간의 <표 1>을 보면 이해 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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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베르그송 가능의 실현(형상인) 잠재의 현실화

질서의 다양체 조직화의 다양체

정적인 다양체 역동적 다양체

사이비 현실성에 주어지거나 미리 결정됨

분화의 과정은 현실적 존재의 독창 적 배열 또는 일관성 창조

선형성 창조성

결정적 미결정적 ‘기예’

<표 1>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그송의 기능-잠재, 운동-시간 비교(Hardt, 1993, 김상운⋅양창렬 역, 2004: 86-87)

표를 보면 알겠지만, 베르그송은 질적인 다양성이 지속의 특성이라고 주장한 다. 특히 잠재성이 가능성과 다른 이유는 가능성은 외적으로 그것이 다른 개념 들과 지니는 관계에 의한(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101-102)것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들뢰즈 일상성에 베르그송의 중요한 개념인 지속은 강밀도에 의 해 폐기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의식을 대자존재인 반성적 의식과 즉자존재인 전 반성적 의식의 두 가지로 나뉜다. 근대철학에서 자아나 이성은 반성적 의식에 해당한다면, 전반성적 의식은 반성과 성찰이 있기 전의 실존적 의식을 가리킨 다. 즉자존재는 자기 충족적으로 존재하지만 대자존재는 다른 존재를 취하지 않 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대자 존재는 결핍과 욕망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놀라운 역설이지만 바로 여기서 자유가 나온다. 즉 자유는 우연에서 비롯된다(남경태, 2007: 443-444). 사르트르에게 주장은 들뢰즈 일상성의 분열증자를 ‘나’라는 개 념 안에 가두는(서동욱, 2006: 165-166)것이다. 사르트르를 들뢰즈 일상성에서 언급하는 까닭은 주체에 대해 하나는 나는 인식과 세계의 지반으로서 미리 전 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개입을 통해 비로소 탄생하고, 다른 하나는 이 때 타자는 다른 어떤 감각 기관보다도 시각의 상관자로서 출현한다(서동욱, 2001: 214)는 것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일상성은 바로 이 시각으로 재 현되는 타자를 강하게 비판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르트르의 주장에는 힘/권력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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