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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 교육의 일상성 담론 문제

가. 이론과 실천

1) 이항대립

이것은 많이 거론했기에 간단하게 언급한다. 형이상학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제시하듯 세계를 둘로 나눈다.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육체와 정신 등. 철 학적 경험주의는 결국 고전적 대항 속에서 플라톤주의를 전복시키고 지성적인 것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생겨나며 사유는 육체의 기능이라고 강조한다. 데리

다가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이중적 과학’은 일찍이 없었던 작동에 의해 형 이상학적 텍스트 자체를 둘로 이루어졌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잠재적 텍스트를 향한 현시적 텍스트의 위반 혹은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텍스트의 이중성 이다(Descombes, 1979, 박성창 역, 1990: 188). 이항대립은 불공가능성의 긍정을 인정하지 않고 이항대립을 통해 선택과 배제를 작동시키는 환원 구조이다. 이항 대립이라는 지식 자체의 근원이 없는 것임은 이미 드러났다. 다원주의는 이항 대립의 하부구조, 그 하부구조의 하부구조일 뿐이다. 이항대립은 척도와 정도를 통해 계서화를 추진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나, 그 척도나 정도는 인간 지식이 필 요한 목적에 따라 인위적으로 나누어 문화적으로 강요한 것일 뿐 그 어디에도 왜 그래야 하는지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들뢰즈 일상성은 이런 이항대립이, 성 립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전제의 사유임을 드러내고 있다.

2) 담론

리오따르의 언어의 물질성과 생산성은 매우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인 의미의 결과를 발생시키는 잠재력을 내포한다고 본다. 권력적 담론의 해체가, 무엇을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말하는가에 즉, 담론이 전개되고 배열되는 방식에 관계하 는 것처럼 전통적 정치학의 해체는 거대조직을 제쳐두고 일상적인 사회적 실천 의 장소와 제도에 주목함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정치적 담론의 내용의 견지에서 보지 말고 지금 이곳의 시간과 장소에서 살펴보면 그 담론의 체계 속에 억압이 숨어 있음이 드러난다(Ryan, 1989, 이병철⋅이경훈 공역, 1996: 152). 현재라는 시간을 들뢰즈는 전형적인 절단으로 보고 있다. 흐름을 절단하여 현재로 본다는 것은 움직임이 아닌 정지를 의미하여 정지된 죽은 시간은 흐르는 시간을 따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 또 다른 재현일 뿐이다. 흐르는 것은 이성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신체가 감응하는 것 으로 바꿔야 한다. 흐르는 것에는 신체가 절단/분석의 이성보다 빠르고 덜 오염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생체 권력 개념이 대두되지만 이성이 아니라면, 의식이 아니라면, 지식이 아니라면, 신체말고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지식 그 차제가 목 적이었던 시절은 이미 막을 내리고 있다. 그것은 팔리기 위해 생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 나아가 권력과 지식은 하나의 질문에 두 가지 측면일 뿐이라고 한다. 즉, 지식이 무엇인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결정되 어야 하는지 누가 알고 있는가이다(Sarup, 1993, 전영백 역, 2005: 218). 짐멜은 순수하게 집단의 절대적인 구심점과 조화는 실제가 아니고 실제 삶의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회는 확실한 형태에 이르기 위해 조화와 부조 화, 연합과 경쟁, 우호와 비우호적 경향의 몇 가지 양적인 비율이 필요하 다.(Bottomore, 1975: 164). 그러나 양적인 비율은 추상일 뿐이다. Dahrendorf는 갈등은 모든 불가결한 동등 연합에서 필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Bottomore, 1975: 171). 짐멜은 갈등이 없는 사회적 단체는 진정한 생활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Bottomore, 1975: 173) 그러나 이 주장은 양으로 전환이 되 어야만 비교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들뢰즈 일상성은 질 조차 비교된 것임을 주장한다. 노동은 더 이상 창조적인 자기표현의 기회를 제 공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노동은 노동자에게 외부이다. 노동자는 그의 여가 시간 동안만 집에 있다고 느끼고 반면 작업을 할 때는 집이 없음을 느낀다는 것은 필요적 만족이 아니라 다른 필요를 만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것이 생산 기술이고 자본가의 경제 체제이다(Faunce, 1981: 132) 프롬은 사람은 그의 세계의 중심으로서 스스로를 경험하지 않고 그의 행동의 창조자로 경험하지 않 고 그의 행동은 그의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힘에 의해 분리됨을 강제당한다고 주장한다(Faunce, 1981: 133). 진정 각자가 중심에 선다는 것은 수목적 의미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각자가 중심에 선다는 것은 각자가 각자의 생성이 비 교값으로 치환되지 않고 계서화되지 않는 그 색깔로 전체에 섞이는 것이다. 이 것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계서화된 담론이 지배하고 있다는 반증 이다. 포퍼의 진정한 의미는 반증을 통해 무수한 위장과 은폐를 일거에 소거하

는 것이다. 비담론은 중심화된 당보다는 비중심화되고 자율적이고 풀뿌리 운동 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Fink, 1981: 97). 케인즈식 처방은 소비문화의 시작을 알 리는 것이고, 이제 욕망을 자본의 논리에 포개는 조치임이 드러났다. 포스트논 의에 대한 진정한 문제는, 나는 사회의 이 형태를 좋아하고 너는 다른 형태를 좋아한다. 따라서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고, 이런 접근은 사회에 대한 어떤 갈 등도 논리적 허구와 너무 쉽게 속아서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요구하는 비합리적이고 비관용적으로 열광하여 그것을 믿는 것을 거부 하는 인간 규정을 통해 줄이려는 것이다(Fink, 1981: 106). 즉, 인간주의적 논리 이기에 이미 허구인 것이다. 담론은 담론만으로 보기보다는 담론이 흐르면서 어 디를 적시고 어떤 싹을 틔우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담론은 언어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단의 우발사건들을 추적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19). 역사에 의해 어떤 폭력을 가 해 인간중심적 관심에서 나오는 목적론에 종속시키는 것이 문제이다(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26). 이 목적론적 종속의 진정한 원인은 이는 오직 그들 사이의 비교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29). 이것의 포개진 기제는 개념차이는 또 다른 개념차이만을 낳을 뿐이라는 것 이다. 하나의 랑그는 그 집합이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더라도 아무리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희박한 단편들 위에서 복구되었다 하 더라도 언제나 가능한 언표들을 위한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53). 사회과 교육의 일상성에서 체계로 작용하는 랑그는 어떻 게 작용하는가? 존재로부터 한 담론의 개별화의 원리를 찾는 것은 오류일 것이 다. 담론은 들뢰즈 일상성은 그 분산된 개별화 방식을 알게 되더라도 그것에는 포개진 것이 있고, 그 밑에서는 욕망을 통한 생성이 계속 이루어지지에 에너지 의 흐름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담론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많지만, 설 명할 수 없는 것은 그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의 재현이 문제라는 것일 뿐 더 나 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있어서의 정신병리학적 담론은 특권적인 대상

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산된 대상들을 형성한 방식에 의해 특권화 된다 (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77). 들뢰즈 일상성의 배치의 힘은 사실 여기 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가령 민들레 씨앗이 사방에 퍼져 어떤 배치에 놓일지라 도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담론 의미소들이 일상성에 퍼져 각각의 상황에 적응 하여 하나의 전체적인 디아그람을 형성하는 이 분산 배치의 위력은 그것이 언 어이기에 더욱 폐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언어 더듬거리기는 사실은 폐기를 목 적으로 하기보다는 그 언어의 씨앗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작업일 것이다. 담론 들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말들과 사물들의 순수하고 단순한 얽힘이 아 니라는 것을 가리키고자 한다고 말할 것이다. 푸코의 담론도 이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담론이란 사유하는, 인식하는, 말하는 주체의 현시가 아니다. 반대로 담 론이란 주체의 분산 및 스스로와의 불연속이 그 안에서 규정될 수 있는 집합인 것이다(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89). 문제는 이 전략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배분되는가를 아는 것이다(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100). 또한 푸코의 담론의 강한 물질성은 들뢰즈 일상성의 차이/반복을 잘 지적하고 있다.

‘언표행위’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언표’는 그의 물 질성에도 불구하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147-149). 그들(=공리를 만든 사람, 공리계)에게 있어 성긴 것, 잊혀진 것, 오류 인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잘 숙고된 그리고 방법적인 배제인 것이다 (Foucault, 1969, 이정우 역, 2003: 222).

3) 문화정치

권력의 중심은 흐름이 선분으로 변환되는 지점에서 행사된다. 즉 그것은 교환 자요 변환자며 진동자인 것이다. 지배적 선분과 지배되는 선분의 기능을 통해 끊임없이 대중과 흐름을 경직된 선분에 적합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배치다. 안전 이란 우리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몰적 조직이며,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수목상

(樹木狀)이며, 우리에게 명확히 정의된 규칙을 제공하는 이항적 기계며, 우리를 포괄하는 공명이며, 우리를 지배하는 초코드화 체계로서,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욕망한다. 우리의 자만심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자기만족이 스스로 부여하 는 바 가치, 도덕, 조국, 종교, 사적인 확실성 등은, 안정된 사물 가운데 서 있으 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이 제공하는 거처인 셈 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나아가고 있는 거대한 파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 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237-238). 헌법에서 는 사회형식의 체계를 이루는 환유적으로 연결된 두 요소(노동, 자본)가, 은유적 동일성에 융합되며, 그 은유적 동일성 속에서 노동은 자본으로 대체되고 자본의 활동과 해석의 용어 속에 통합된다. 실제로 그러한 통합과 예속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법문화 내부에서 수사학을 논리학에 그리고 대중적 민주주의를 공 화파적 권위에 종속시키는 사회적 실행이다(Ryan, 1989, 이병철⋅이경훈 공역, 1996: 111). 해체론의 입장에서 은유와 여성은 데리다가 남근중심주의라고 부른 것의 두 희생자인 것이다(Ryan, 1989, 이병철⋅이경훈 공역, 1996: 124). 예술과 과학이 자연력에 대한 통제뿐 아니라 세계와 자아에 대한 이해, 도덕적 진보, 제도의 정의, 그리고 인간 존재의 행복까지도 촉진시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 나 현실은 계몽사상의 기대 및 이상과 대조적으로 진행되었다. 각 영역은 점점 제도화되었고 과학과 도덕, 예술은 생활세계와 분리된 자율적 영역이 되어 갔 다. 인지적- 도구적 합리성, 도덕적- 실용적 합리성 그리고 미적- 표현적 합리 성의 구조들은 특별한 전문가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은 정 신의 변증법, 의미의 해석학, 이성적인 것의 해방, 노동하는 주체의 해방 또는 부의 창조와 같은 몇몇 대서사에 명백하게 호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리오 따르의 주장이 자본주의적 우익 이론가의 주장에 악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 의 논리를 보면 교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오따르의 주장을 인용하며, 하 이에크 같은 우익 이론가는 미시사건에서는 사회가 훨씬 잘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의도적으로 계획된 사회보다는 시장의 힘에 맡겨진 사회가 더 낫다

는 것으로 역이용되기도 한다(Sarup, 1993, 전영백 역, 2005: 234-237). 이것을 연구자는 문화정치로 보고자 한다. 문화정치는 워낙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것 이 특징이면서 동시에 특징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개념 차이를 이용한 차이 생산과 차이 소멸의 순환 기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더 보자. 교회는 유럽최대의 지주로 군림했으며 그 정상에서의 교황의 권위는 왕권 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권력은 물론 국왕 및 봉건영주와 공유하는 것이지만 그 권력의 대부분은 신학적 기원이 아니라 교회의 광대한 토지소유, 군대, 더 나아가서는 종교재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이우정, 1997:

39). 기존의 권력이 법칙들을 당연한 것으로 고착시킬 뿐 아니라 자기 권력의 근원을 기존의 법에 두고 있는 권력자에 유리하도록 법적 타당성을 궁극적 정 당성으로 대체해 버린다(이우정, 1997: 41). 결국 정당화로 작용하는 차등의 원 리란, 치자와 피치자를 구분하여 사회적으로 긴요한 특정의 자원, 활동 및 지위 에 보다 접근할 기회를 많은 자와 그로부터 배제되는 자를 원칙적으로 구별해 줌으로써 사회적 분업체계를 정당화하고 그에 대하여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동시에 진행되는 공동선의 원리는 치자와 피치자를 사회적으로 일체화시키고 권력의 법칙들을 통하여 치자와 피치자가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거짓 믿음 을 갖게 된다(이우정,1997: 53-54).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의하면, 디즈니 랜드가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처럼 유치한 세계라는 사실 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듯이, 감옥이,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듯이(이진경 편저, 2007: 16)라고 문화정치의 교묘함을 정확히 지적 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기호가치의 소비사회, 그것은 또한 소비를 학습하는 사회, 소비에 대해 사회적 훈련을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이진경 편저, 2007: 27).

이런 사회적 훈련은 소위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 사회화는 변화된 다. 그러나 그 변화는 또 다른 속임수에 의해서만이다. 가령 1920년대는 포드주 의적인 대량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다. 금주법으로 금욕과 절제를 강 제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대 공항이 발생한다. 이런 사태의 문제를 포착한 부

르주아는 이제 욕망의 배치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된다. 소비를 창출하기 위 한 조치가 다양하게 취해진다. 뉴딜정책과 케인즈주의는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이진경 편저, 2007: 29). 즉, 케인즈주의의 파장은 이후 욕망에 대한 통 제/조절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는 이전처럼(베버의 프 로테스탄티즘처럼)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자극하는 방식 으로 전환된다(이진경 편저, 2007: 65). 추상기계의 양가성은 기관 없는 신체의 비유기성을 통해서만 극복되는 것이다. 진정 없는 복도를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재현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면 그것은 진리를 구현한 것인가 아니면 거짓을 구현한 것인가? 재현은 정확하게 이루어질수록 진리 아닌 거짓을 만들어낸다 (이진경 편저, 2007: 36). 포스트모더니즘은, 총체화되지 않는 자율성과 다양성의 가능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절대화하며, 그것을 다시 착취의 대상으 로 총체화하는 자본의 적대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이진경 편저, 2007: 56). 우리 가 흔히 판단하는 일상성은 소비의 일상화 혹은 일상적 소비가 가능하려면 무 엇보다도 일상생활의 재조직이 필요하다. 노동하지 않는 시간 전체가 소비를 위 한 시간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불화의 힘 은 상실되고 노동계급의 정치성은 박탈되는(이진경 편저, 2007: 81)일상성이다.

그러나 들뢰즈 일상성은 다음의 일화의 일상성이다. 합리적이라는 서구인이 원 시부족에게 그들은 높은 생산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어 도구(전기톱)를 부족 민에게 주었다. 적은 노동량을 투여해 이전보다 몇 배의 생산성을 높여야 마땅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경제관념을 갖고 있지 않던 부족민들은 이전 과 똑같은 양의 나무만 베어내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이진경 편 저, 2007: 85). 이것이 왜 사회과 교육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인터넷은 어떤 가? 인터넷이 제공하는 공간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유저는 알려진 정보, 기존의 사이트, 확립된 코드와만 접속한다. 이는 진보에 대한 맹목적 신화이다. 왜냐하 면, 목적론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용인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폭력과 배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이진경 편저, 2007: 91). 연구자는 미디어를 비판하지만 동시

에 사람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존재라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화 연구식의 ‘즐거움’은 아니다. 동시에 상호작용도 아니다. 즉, 미디어가 지배력을 행사하나 미디어의 대상이 사람이기에 그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끌려간다는 느 낌을 갖지 않도록 미디어는 능수능란해야 한다. 따라서 미디어의 양면성의 능수 능란해서 사람들은 비판적 시각으로 그 능수능란의 고리를 인지하고 깨야 한다.

그래야 미디어는 그 속임수가 아닌 다른 속임수를 구상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 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속임수를 파악한다면, 그 속임수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결과 속임수가 사라지는 미디어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다 큐멘터리이다. 그런 비판력을 사회과교육이 해야 된다는 것이다. 공권력이 미치 지 못하는 미시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탈법적 상황들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고발하고 비판함으로써 스스로가 권력자의 시선을 내면화한다.

(homo-movence) 우리의 신체는 이제 유기체이길 그치고 하나의 거대한 일인 미디어, 걸어다니는 숨쉬는 미디어가 되어버렸다(이진경 편저, 2007: 106-107).

이런 현대성의 시간은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일방향으로 흐르고 동일한 길 이로 무한히 나누어져 있고 우리의 활동들로 채워지는 빈 공간의 연속이다. 너 의 1분이 나의 1분과 다르지 않고 모두 동일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믿음 만일 시간 단위가 각자에게 다르고 사회마다 다르다면 자본주의 세계가 역설하 는 전 지구적인 자유 경쟁의 논리가 어떻게 타당성을 갖겠는가?(이진경 편저, 2007: 169) 문화정치의 공간은 어떤가? 근대 공간의 배치가 갖는 특징 중 하나 는 전 사회가 교육의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인데, 임의의 어떤 장소에서나 우리 는 그 공간에 적합한 사고와 행동을 실행하도록 강제되어 있다(장례식장 등)(이 진경 편저, 2007: 207). 즉, 재현되는 대상은 언제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특정한 척도를 만족시키고 이미지화한다.(이진경 편저, 2007: 215). 지도는 어떤가? 지도 의 세계는 보이는 세계의 묘사가 아니라 믿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이기 때문이 다. 그 시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세계를 어떻게 믿고 표상했는지를 드 러내는 선험성이다. 보이는 것을 믿은 게 아니라 믿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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