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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일상성 구현

가) 기계

이제 어떻게 실천되는지를 봐야한다. 기계란, 전자의 me'canique 가 이미 존 재하는 구조의 효과에 의해 작용하는 힘을 표현한다면, 후자의 machinique 는 구조를 넘쳐흐르면서 작용하는 힘을 표현한다(백승완 외, 1999: 252). 들뢰즈는 욕망의 주체를 기계라고 부른다. 이 욕망하는 기계를 가리켜 두 사람은 신체라 고 부른다(남경태, 2007: 513). 기계란 무엇인가? 기계는 실천이다. 그 실천이 주 장은 어떠한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오이디푸스 전체가 욕망이란 기계의 합 법적 사용을 규정하고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려는 시도 외에 다른 것이 아니 다. 여기서 욕망의 비합법적 사용이란 바로, 양식을 아빠-엄마-아이라는 가족 제도의 삼각 구도 안에 가두어놓는 것을 말한다(서동욱, 2001: 277). 모든 기관 없는 신체의 집합은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만, 그것을 뒤덮고 심지어 그것을 그 려낼 수 있는 추상기계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으며, 욕망에 연결될 수 있고 효과적으로 욕망을 책임질 수 있으며 욕망의 지속적 접속과 횡단적 결합을 보 장할 수 있는 배치들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Deleuze & Guattari, 1980, 이

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74).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양태)와 들뢰즈와 가타 리의 기계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이진경, 2006: 439). 이러한 기계의 효과는 매우 다양할 수 있지만, 결코 상징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은 아니며, 언제나 이행 과 교대의 실재적(réelle)가치를 갖는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 원외 공역, 2000: 112). 분열증 분석의 과제는 욕망하는 기계를 재가동시켜 개인 의 욕망과 사회적 현실을 접속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상징계의 인식론 적 제약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치적 제약으로부터도 탈주하는 주체 즉 분열적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다(백승완 외, 1999: 265-266). 주체, 그것은 고정된 신원 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기묘한 주체이다. 그것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 헤매며 욕 망하는 기계들 곁에 늘 있으며 생산된 것에서 그것이 취하는 부분에 의하여 규 정되면서 어디서나 생성이나 변신에서 프리미엄을 따며 그가 소비하는 상태들 로부터 탄생하며 또 어느 상태에서나 다시 탄생한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5). 그렇기 때문에 자기 동일성이란 본질적으로 우연한 것이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41). 정신분열자-분석, 그것은 형이상학적 무의식 대신에 선험적 무의식을 탐구하려 한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고 질료적인 무의식, 오디디푸스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분열적 무의식, 상상적인 것이 아니고 비형상 적인 무의식, 상징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무의식, 구조적인 것이 아니고 기 계적으로 작동하는 무의식,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 혹은 군집적인 것이 아니라 분자적, 미소심리학, 미소물연구적인 무의식, 표현적인 적이 아니고 생산적인 무 의식을 탐구하려 한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치료의 방향들로서의 실천 적 원리들이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169). 그런데 특히 고려해야 할 것은, 계약은 코드화/탈코드화로 작동하기에 법이나 계약에 매이어 제한을 깨기 가 힘들고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지만, 전쟁기계는 영토화/탈영토화에 의해 작동 하므로 계약으로 전쟁기계를 포획하기에는 곤란하다(이진경, 2006: 47-478). 발 생적 권력은 포획의 추상기계들과 변형의 추상기계들간의 반복적인 대립이다 (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154). 다른 하나는 ‘추상-기계’이다. 구상적

인 소여들에 몰아닥친 대재난으로서의 디아그람은 지배적인 지각작용과 변용들 을 탈영토화하고 그 위에 순수 지각과 순수정서들을 재영토화하며 다시금 무한 한 우주를 향한 그것의 탈영토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성의 운동 이다(이지영, 2006: 144). 하나의 벡터는 영토성과 상대적인 탈영토화 및 재영토 화를 분배하는 지층들을 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탈영토화 과정을 결합하여 대지의 절대성으로 끌고가는 일관성의 구도 내지 탈지층화의 구도를 향하고 있 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53). 디아그람은 더 이상 형식화되지 않는, 하나를 다른 하나에 결합할 수 있는 비형식적 특질을 갖는 기호-입자를 추출하기 위해 기호체제나 표현 형식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 는 추상의 절정으로서, 추상이 실재화하는 계기기도 하다. 기계적인 성분은 추 상기계들이 구체적 배치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정확 하게 표현의 특질에 뚜렷한 형식을 제공하지만 또한 내용의 특질에 뚜렷한 형 식을 제공하기도 한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53-154). 언어활동이 기호체제로 소급되는 것이며, 기호체제가 추상기계로, 디 아그람적 기능으로, 그리고 모든 기호학이나 언어학 내지 논리학을 이탈한 기계 적 배치로 소급되는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55). 분자적인 무의식은 거세를 모른다, 왜냐하면, 부분적 대상들은 아무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 것들인 한에서 자유로운 다양성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435). 정신분열자 분석의 주장은 단순 하다. 욕망은 기계요, 기계들의 종합이요, 기계적 배열이다. 즉 욕망하는 기계들 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 이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436). 결론적으로 유목론은 ① 국가장치 외부에서 사유하기 ② 국가적 사유와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기 ③ 국가의 메커 니즘과 다른 방식으로 운동하기인 것이다. 이것의 방법은 ㉮ 하나의 중심이 아 닌 복수의 중심 더 나아가 너무 많은 중심 ㉯ 하나의 원리에 의해 체계화가 아 닌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묶여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기 ㉰ 하지만 다른 것들이

얼마든지 접속할 수 있고 가변화하여 자체가 변하는 것 ㉱ 전문성을 벗어난 질 문적(problematic) 횡단 ㉲ 아카데믹이 아닌 삶의 강밀한 질문 ㉳ 세속적 욕망 이 아닌 모든 방향(para-doxa)으로 흐르는 욕망이다(이진경, 2006: 463). 기계와 욕망은, 욕망하는 기계 그 차체는 생산의 생산을 나타내고 그 에너지가 바로 리 비도이다. 여기서 욕망의 플로들은 서로 고무하고 가속화하는 무한적 운동을 타 나내는데 저자들은 이를 접속적 종합(connective)이라고 표현한다(백승완 외, 1999: 253). 추상기계는 지층화에 감금된 채로 남아 있으며, 자신이 그 프로그램 혹은 성분의 통일성(추상적 동물, 추상적인 화학적 신체, 에너지 그 자체)을 결 정하고 그 상대적 탈영토화 운동들을 조절하는 어떤 특수한 지층 속에 감싸여 있다. 혹은, 그와 반대로 추상기계는 모든 지층화를 횡단하며, 그 자체가 독특하 게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 전개된다. 그것은 일관성의 구도의 디아그람을 구성한 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63). 욕망하는 기계 들에 세워지면 사회의 구석구석이 온통 폭파된다. 기계와 추상기계를 통해 들뢰 즈는 소위 ‘기술기계’를 비판한다. 한 편에 욕망하는 기계들 다른 한편에 유기체 기계들, 기술기계들, 혹은 사회기계.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에 관한 기능주의는 모두 거짓이다. 왜냐하면, 유기체기계들이나 사회기계들은 작동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자기 형성을 하지 않으며 또 기술기계들은 사용되는 것처럼 조립되 지 않고 이것들 자시의 생산 활동과 이것들 차체와는 뚜렷이 다른 이것들의 생 산물을 구별하는 일정한 조건들을 분명히 전제하기 때문이다(Deleuze, 1972, 최 명관 역, 1994: 424). 오이디푸스는 자기를 가능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공식적 조작들을 하나하나 해 나간다. 초규준화 혹은 일대일 대응관계의 수립, 적용, 주 인과 노예사이의 연쇄의 직선화, 법률을 욕망속에 끌어들이는 일과 욕망을 법률 밑에 끌어들이는 일, 그의 나중에 혹은 그의 시기를 놓치고 같은 상황으로 말미 암아 무서운 잠재성. 욕망은 국가기계의 리비도를 공급한다(Deleuze, 1972, 최명 관 역, 1994: 322-323).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만든 것은 기계들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가 기계들을 만들고 끊임없이 새로운 절단들을 도입한다

(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47). 결국 사회적 삶은 생산의 생산, 기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을 조직하는 총체적인 욕망과 운명의 체계로 간주될 수 있다 (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224). 이전의 사회기계들이 사회적 과정들의 코드화에 의해서 작동하였다면 자본주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공리화 (axiomatisation)라고 부른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형식적 연결에 의해서 작동한 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다(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235). 거세는 오 디이푸스화의 완성이다. 오이디푸스화란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거세하고 거세를 무의식에 주입하는 조작이다. 무의식에 대한 실천적 조작으로서의 거세는 전적 으로 적극적이고 전적으로 생산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수천의 흐름들-절단들 이 하나의 동일한 신화적 장소에 시니피앙의 통제구획 속에 투사할 때 성취된 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97).

이상을 정리하면, 기계는 욕망이고 생성이며 변환이고 실천이다. 기계에는 여 러 특개성이 나타나는데, 추상기계는 계약, 오이디푸스, 법, 절단을 극복하는 탈 코드, 탈영토화를 수행하지만 거꾸로 추상기계는 재영토화, 재지층화, 초코드화 를 수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쟁기계가 추상기계의 양가성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기계의 논의는 사회체의 공리/기획을 극복하여 욕망의 접촉과 반복을 위 한 시도이다.

나) 기관 없는 신체

기계와 함께 들뢰즈는 신체에 주목한다. 사유의 문제를 다루든 욕망의 문제 를 다르든 신체의 문제를 다루든 언제나 들뢰즈는 특권적인 지위를 갖는 것으 로 미리 전제된 모든 공리, 모든 기관을 거부해왔다. 즉 ① 선의지의 공리 ② 공통감각의 공리 ③ 재인식의 공리 등이다(서동욱, 2001: 219). 신체의 의미는, 들뢰즈가 인간 이전의 풍경-지각은 원초적인 신체와 세계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무매개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을 파동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파동은

파장의 변화에 따라 신체의 영역이 층위를 새기고 파동과 외적인 힘이 만나면 감각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이숙영, 2005: 33-34).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의 내재성의 장이요, 욕망에 고유한 일관성의 구도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62). 어느 층위에서는 입이던 것이 다른 층위에서는 항문이 된다(Deleuze, 1981, 하태환 역, 1994: 78). 기관 없는 신체의 목적은 유기체의 신체 비판이다. 빵과 포도주의 신체를 그리스도의 신체와 피로 변환하는 것은 신체에 귀속하는 언표의 표현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 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86).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것들 모두가 언어에 내재적이기 때문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88). 유기체란, 결코 신체가, 기관 없는 신체가 아니라 기관 없는 신체 위 의 하나의 지층이요, 다른 말로 하자면 축적, 응고, 퇴적 현상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67). 어떻게 기관 없는 신체를 구현할 것인가? 억압의 사회적, 역사적 현존 속에서 기관 없는 신체 되기는 개 별적이고 순간적으로 달성될 수 있을 뿐이다(한국비평이론학회, 2006: 288). 기 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한다기 보다는 우리가 유기체라고 부르는 기관들의 유기적 구성에 더 반대한다. 감각은 진동이다(Deleuze, 1981, 하태환 역, 1994:

75). 다른 철학자들이 유기체의 기관인 눈이 지지해주는 시각성으로부터 주체성 의 발생을 기술하려 했던 반면, 들뢰즈는 눈을 기관으로서의 발생 이전의 상태 로 돌려 잠재적으로 여러 기능을 가진 결정되지 않은 기관으로 본다(서동욱, 2001: 231). 사회체 즉 대지, 전제군주의 신체, 돈-자본은 옷을 입은 충만한 신 체들이요 기관 없는 신체는 벌거벗은 신체이다, 그러나 기관 없는 신체는 극한 에 종국에 있는 것이지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기관 없는 신 체는 모든 형태의 사회체에 눌러 붙어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공급들이 편집병적이라 혹은 정신 분열증적이라 말해 질 수 있는 것은 이 공급 들이 자본주의의 일정한 조건들 아래 편집병과 정신 분열증을 그 궁극의 산물 로서 산출하는 한에서이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426).

이상을 정리하면, 기관 없는 신체는 유기체에 반대하는 것이다. 규정적 신체 가 아닌 감각/공명에 의해 미분화된/미규정된 신체를 상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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