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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의 일상성

들뢰즈 일상성의 시각으로 사회과 교육에 주는 함의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 런 문제의식을 사회과 교육에 적용하기 위해 사회과학의 일상성을 보자.

가. 문화이데올로기의 일상성

이데올로기는 고정된 것이 아님을 들뢰즈 일상성은 드러낸다. 신역사주의는 의미의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효과, 그것의 구성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주로 문학 텍스트들을 해독하며 전통적인 비평이 갖는 비역사적인 텍스트에 기 반한 접근 방식과는 반대로 역사적 방법론을 통해 텍스트 생산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문학적 텍스트들을 해석하고자 한다(Edgar & Sedgwick, 박명진 외역, 2002: 288). 그러나 지금까지의 비판에서 드러나듯이 맥락은 인위적으로 흐름을 절단하여 포획한 것이기에 무엇을 맥락으로 선택하는가에 따라 배제는 필연적 으로 발생하는 것이기에 신역사주 자체가 또 다른 문화이데올로기 요소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사실적 상황을 당위적으로 기초된 것으로 제시하고 전통적 특권 을 자연적 위치로 제시하는 론이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란 특수한 혹은 상 대적인 담론이 보편적 혹은 절대적으로 간주되려고 노력함을 의미한다 (Descombes, 1979, 박성창 역, 1990: 170). 이데올로기는 공적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어 작용 즉 달래서 잠재우지 않으면 사회를 내부에서 부터 분열시킬 여러 요소들에 대한 반응이다(Ryan, 1989, 이병철⋅이경훈 공역, 1996: 190). 이것이 욕망/의지/권력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데올로기는 실제적 관계와 상상적 관계의 중층 규정된 합일체인 것 이다. 이데올로기의 실제적 관계와 달리 상상적 관계 의지나 희망, 염원을 표현

하게 된다. 결국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적인 구조가 된다. 알튀세르는 무의식적 구조로 왜 개인이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ISAS이고 호명이다. 근대 서양 사상의 근간인 주체의 주체성 역사를 전면 부인 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를 비판하면서, 프로이트의 분석심리학은 이 데올로기 논거로 사용되었고 의식을 속이고 위협하는 실천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 이유는 다른 목적을 위해 확립된 개념들로 자신의 발견을 사유할 수밖에 없 었기(Althusser, 1975, 김동수, 2000: 17-18)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낳은 작은 동물을 작은 인간의 어린애로 변화시키는 사건의 결과이 다.(Althusser, 1975, 김동수, 2000: 30).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아버지는 없어 도 아버지(법), 기표의 질서, 문화의 법칙의 현실적인 존재라는 것이 시작되고 언제나 이미 시작되어왔다(Althusser, 1975, 김동수, 2000: 36-37). 그 속에서 프 롤레타리아가 노동력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필수적이다.

특히 교육의 효과를 언급하면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그 자격의 재생산만이 아니 라 동시에 세워진 질서의 규칙들에 대한 복종과 재생산을, 한편 착취와 억압의 대리자들(중간관리자, critical infra structure, 교육자등)에게 있어서는 지배 이 데올로기를 잘 다루는 능력의 재생산을 요구한다(Althusser, 1975, 김동수, 2000:

80). 반면,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통해 알튀세르와는 달리 개인의 자발적 순응으 로 이데올로기 수용을 설명한다(윤효녕 외, 2003: 144-145). 이데올로기는 현실 을 지배하는 통념들이라기보다 질문들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문 제 틀이고, 문제 틀이란 역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대답을 통제하는 질문들의 체계이기 때문이다(윤효녕 외, 2003: 129). 그람시는 힘(지역 기반한 노동 계층 의 노동조합을 파괴)과 설득(높은 임금, 다양한 사회적 혜택, 과도하게 미묘한 이데올로기 및 정치적 선전)과 그리하여, 국민의 전체 삶이 생산 주위로 계속해 서 회전하게 만드는 능숙한 결합으로 합리화된 생산과 노동이 상대적으로 용이 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Baldwin et al, 2004: 107). 그러나 알튀세르와 그람시의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의 ‘구조’를 공통감각으로 편집증적 배치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계열은 닫힌 계열이다. 들뢰즈는 무의식의 재현을 거부하며, 알튀세 르의 구조적 사고는 탈주와 기계/기관 없는 신체가 드러날 틈을 원천적으로 제 거하고 있다. 즉 틈이나 균열을 보여주기 못한다. 알튀세르는 영화 ‘매트릭스’의 시민만 보여주고 있으나 들뢰즈는 네로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람시는 헤 게모니를 통해 대중의 적극성을 부각시키고 실천 지식인을 중심에 두려하나 들 뢰즈 시각에서 보면, 포개진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버밍엄 학파의 문화 연구도 마찬가지 한계이다. 동시에 동일성의 차이를 볼 뿐, 차이자체를 발견하 지 못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효과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규정하고 이 해자체를 왜곡되게 형성함으로써 현존 권력에 도전 및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념과 개념이다(Edgar & Sedgwick, 박명진 외역, 2002: 341). 그 방법 은 자연화이다. 자연화를 통해, 사생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제는 더 이 상 그 누구도 박탈을 생각하지 않는다(Arendt, 1958, 이진우⋅태정오, 2000: 91).

사회적, 문화적 관계와 사건이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면, 거기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연화 방법은 통해, 이데올로기는 인간 주 체의 산물이나 정치권력의 행사로 여겨지지 않게 되며 거기에 도전하는 것은 마치 중력의 법칙이나 비가 온다는 사실에 도전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한 것이 된다. 루카치는 이런 자연화의 합리화 작용을 제2의 자연이라는 구문을 사용한 다(Edgar & Sedgwick, 박명진 외역, 2002: 341-342). 또 은폐/위장이다. 상식의 신비화, 은폐하고 위장을 통해 그것이 유발하는 효과를 실재화하는 것이다. 그 것은 드러나지 않는 특수한 이해나 이기적인 사고와 동기를 은폐한다(장상호, 2003: 315). 또한 재현이다. 재현의 문제는 들뢰즈도 비판하는 것이다. 다만 들 뢰즈의 재현비판과 타 학자의 재현비판에서 가장 다른 것은 들뢰즈는 비인격적 기계/기관 없는 신체를 제시하는데, 타 학자들은 인격적, 의식적, 기획적인 소위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보며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대단한 천재의 설계도에 의 해 움직여지는 게임 속 캐릭터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이데올로기는 왜/누 가 만드는가? 중심세력은 중심이 되려고 하는 세력의 문화와 충돌하지 않고 중

심세력의 중심을 보호하고자 한다. 즉,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요구 하나, 이 시각의 문제는 기존 질서 내부에서만 통합을 이룬다는 난점이 있다(한 국철학회, 1996: 333). 그러나 이 주장은 실제의 이데올로기는 탈주선을 의도적 으로 용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방의 의도를 제대로 보 지 못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의 효과는 사회적 갈등과 정치 적 대립을 상상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 이론의 문제는 사회적 갈등 및 그 내부의 모순들을 의도적으로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영화 의 상상적 해소는 숨겨진 기존질서 유지 기제로 작동함을 망각하게 한다(Ryan, 1989, 이병철⋅이경훈 공역, 1996: 189). 또한, 창의성을 요구하는 기업에서 권위 주의적인 경영을 포기하고 자율적 경영의 방식을 채택하는 숨거나 포개진 기제 는, 기업의 궁극적 목적인 생산 효율, 이윤 극대화를 위한 것이지(한국철학회, 1996: 369). 자율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 극복 가능성은 어떤가?

그것은 일상성 변혁과 그 변혁을 가능케 하는 비판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동시 에 비인격성, 유물론적 노마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그 이 유는 여러 가지이다. 하나의 구부러진 사고를 정정하기 위해서는 단지 올바른 사고가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합리주의적 전통과는 반대로 마르크스 주의는 사고들이 사회적 관계라는 물질성 속에 포함되고 편입되지 않는 한 아 무런 역사적 존재를 가질 수 없다고 간주(백승완 외, 1999: 66)하는 것도 결국 강밀도가 아닌 주종의 사고이기 때문이다. 이 주종의 사고는 근대 인간중심주의 가 이미 전체주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 중심주의는 우리가 만든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작위성의 이데올로기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근대인은 자신과 이 지구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즉 작위성의 실 험장으로 만들었다(Arendt, 1958, 이진우⋅태정오, 2000: 31-32). 그 인간중심주 의 그간에 비코가 있다. 비코가 주장하는, 만든 것=진리와 같다는 주장의 의미 는 ① 문화적 산물이란 인간의식의 창조물이며 ② 과거의 인간정신은 현재의 인간정신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며 ③ 인간은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불가능한 방식을 통해 인간적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조한 욱,1998: 237). 아도르노는 유기적이라는 형식으로 인해 전체로서의 세계라는 환 상이 촉진되고, 루카치는 추상성을 통해 저항의 역사적 시각을 강조하고, 벤야 민은 예술 작품의 사회적 효과는 작품이 기능하는 제도에 의해 예술은 중립화 되어 실제적 변화를 담지 할 수 없다고(Sarup, 1993, 전영백 역, 2005: 243)주장 한다. 벤야민의 바로크 알레고리는 표현의 관습이 아니라 관습의 표현이다(이홍 섭, 2003: 219). 표현이 관습에 맞추어져서 이루어지는 전통적 표현형식에 대한 틀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대안으로 관습을 나타내는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그 표현의 다양성, 담론을 벗어난 차이성 추구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루카치의 추상성, 벤야민의 제도 밑에 운동하는, 포개진 기제는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이 시점에서 이데올로기의 꾸며진 역사와 드러내는 반항을 살펴볼 필 요가 있다. 허위의식의 모든 근대적 이론들은 주체, 객체 그 두 극단 사이를 중 개하는 재현 매체 사이의 삼각관계의 불균형에 의해 허위의식이 생겨난다고 주 장한다(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20). 허위의식의 논의는 이분법적 양 극 단을 전제하고 그 극단을 매개하는 ‘체’의 왜곡으로 보고 있다. 전제한 이분법 자체가 허구이다. 이분법을 통해 ‘체’의 왜곡을 시도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논의를 전개할 경우, 우리는 영원히 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들뢰즈나 데리다나 이분법의 마법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이데올로 기의 목적은 계속 연기되며 대리보충되면서 탈주한다. 가령, 지속적인 논증을 통해 루터는 이 물신화가 교회의 시장 경제의 목적에 봉사한다는 논점을 천착 한다(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35-36). 그러나 이 또한 환원메커니즘이 되는 이유가 대리보충을 붙잡아 두려하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에 봉사 -> 시민 의 목적적 형성 -> 교육의 필요성 등으로 계속 탈주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버 크의 주장도 마찬가치이다. 추상적으로 인간이 평등하다는 단순한 주장은 실제 로 인간을 평등하게 하려는 시도가 수반되는데, 이 시도가 오히려 버크에 의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밝혀졌다. 부자들의 이익은 그 자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

해 이러한 형식적 평등을 필요로 하지만, 교활하게 보편적 원리를 따르고 사회 를 자연 상태로 복원할 것을 주장하기(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59-60) 때문이다. 또한 칸트의 종합은 마치 내가 이 객관적인 연필심과 나뭇조각을 이 상적인, 일반적인 연필의 카테고리에 포함시킬 때 나는 물질적 대상에 인간적 개념을 부과한 것(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72)일 뿐이다. 또한 마르크스 에게 허위의식 문제는 재현의 문제이다. 이데올로기는 재현의 매개 기능을 인식 하지 못하는 데에 존재하며 그것은 자율적인 영역이라 가정하고 그래서 외관을 사물 그 자체로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사물 그 자체를 보는 것 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에 부여해 온 상품 형태-우리 자신의 관념 또는 개념-만을 본다(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109)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 스의 오류는 대립의 한쪽 면이 다른 쪽을 반드시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오류임을 시사한다(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115).

들뢰즈의 유물론은 물화가 아니고 강밀도이다. 정해진 물화가 아니고 정해지지 않고 정해질 수 없는 카오스이다. 이제, 재현을 넘는 것은 탈주이다. 니체는 힘 의 양은 충동, 의지, 영향의 양과 같은 것이다. 자율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은 니 체가 경멸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예를들어 이데올로 기가 물적 토대의 반영이라는 시사, 또는 물질적 세계가 관념적 형태의 명시라 는 생각이 니체에게는 저주인 것이다(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170). 푸 코의 담론 내에서 푸코의 담론이 역설적으로 주장하는 탈주는 어디에나 있는 권력에 의해 불가능하다. 그러나 들뢰즈는 담론의 몰적 집합이 아닌 담론의 주 름과 선분을 본다. 그런데 담론에서 지식의 명확화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양창 섭, 1999: 31). 이미지들의 역사적 참조는 그것들이 특정 시간에 속한다고만 하 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특정시간에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양창 섭, 1999: 32). 흔히, 나의 지식은 지금의 지식이라는 말은 내가 특정 시간에 속 해서가 아니라 특정 시간에만 읽을 수 있도록, 특정 방식으로 읽도록 틀 지워졌 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와 바로크 알레고리를 구분하는 벤야민의 알레고리론에

일상 비일상 통상적인 사회 영역 특별한, 비통상적인 사회영역

민중의 생활 왕, 대통령, 행정부 관리처럼 고위직에 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 매일 생활이 이루어지는 영역 즉 역사에서 중요한 국가적인 행위 사생활(가족, 사랑, 어린이) 공적인 혹은 직업적인 생활 지연적인, 자발적인, 성찰되지 않은 참

된 체험과 가유의 영역

성찰된, 인위적인, 비자발적인 그리고 특히 학문적인 체험과 사유의 영역 따르면, 언어가 판단의 언어로 타락하면서 주관과 객관은 분리되고 이들 사이를 인공적으로 일치시키는 지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세속적인 세계에서는 사물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를 멈추고 오로지 다른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김미애, 2004:

22). 즉 세속세계에서 이미 언어적 의사소통은 알레고리인 것이다(김미애, 2004:

23). 지젝이 직면한 끔찍한 전망은 이러한 실천적 조직 양식이 자기 성취적인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관념과 재현을 물질로 환원한다. 그 리고 관념과 재현이 이론상 명백히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발생할 수 있고 발생한다(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193). 지젝의 오류는 관념/물질의 이분법이다. 관념과 물질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어느 것으로 환원되는 것은 문제지만, 이런 환원에 대한 비판은 마치 블랙 홀이 모두 빨아들이기에 모든 우주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화이트홀이 있어 괜찮을 것이라는 주장처럼 전체적 사고이다. 소수적 생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모래 해변에 모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래는 없고 모래 알 각각이 모여 있는 것이다. 사회과 교육의 사회에 포개진 기제를 아렌트는 보여 준다. 즉, 사 회에 숨은 의미는 자신의 것과 공동의 것 사이의 예리한 구분을 의미한다. 그러 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더 깊게 숨거나 포개진 기제는 공론영역이 가정과 가계 라는 사적 영역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Arendt, 1958, 이진우⋅태정 오, 2000: 81). <표 5>를 보자. 밑줄을 특히 보라.

<표 5> Elias. N.의 일상과 비일상(최종욱, 2000: 172)

가정은 자연적 공동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필연성의 산물이며, 누군가의 필연 성의 지배를 받는다(Arendt, 1958, 이진우⋅태정오, 2000: 82-83). 결정적으로 중 요한 사실은 사회가 모든 발전 단계에서 행위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근대세계의 평등의 승리는 사회가 공론영역을 정복했으며 그 특성과 차이는 이 제 개인의 사적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만 정치적 법적으로 인식시켜주는 사태일 뿐이다(Arendt, 1958, 이진우⋅태정오, 2000: 93). 아렌트의 주장에 동감 하면서도 들뢰즈 일상성의 절단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외에 다른 것을 찾을 수 없다. 상징이 유기체의 미학 공간을 활동케 하는 헤겔의 미학, 헤겔의 상징 예술은 감각적 직관과 개념적 이해를 묶는다는 것을 유지한다(이홍섭, 2003: 220)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교환 과정이 실제 물질적으로 상이한 대상들 에 허위의 관념적 등가치를 정신적으로 부여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교 환이 경제 조직의 지배적 형태인 사회에서는 교환의 원칙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허위의 양상은 사물 그 자체를 지배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대상 이 본질적인 효용성보다는 교환가치로 평가되고 재현은 결과적으로 자율적이 되기 때문이다(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147). 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 이머에게는 재현의 왜곡 효과(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149)가 초점이 된다. 그것은 재현은 대체물로 교환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물신들은 등가의 법 칙에 속했었다. 이제 등가 그 자체가 하나의 물신이 되었다(Hawkes, 1996, 고길 환 역, 2003: 149)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위생적인 공장의 작업 공간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 폭스바겐이나 운동 경기장이 형이상학을 무자비하게 해체시켜 버 린다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될지 모르나 이것들 자체가 형이상학이 되는 사회 전반에서 실제적인 악이 집중되어 있는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의 장막은 문제 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Hawkes, 1996, 고길환 역, 2003: 150). 그러나 아도르노 나 프로이트나 환원적이다. 만하임은 이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의 위험 은 우리의 세계가 만드는 정신 과정의 항상적 재구성화의 결과라는 실제의 이 해를 막는다(Mannheim, 1972: 84)고 지적한다. 알튀세르도 이를 알고 있었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 아니고 의식도 아닌 무의식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주 체가 대상 세계에 대해서 만들어 낸 의식이나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방향 에서 하나의 주체에게 세계를 부여하는 것. 오인인 동시에 승인으로 세계에 대 한 체험된 관계를 부여하는 것이다(백승완 외, 1999: 110-111). 알튀세르가 이데 올로기 장치를 물질적 관습이라고 부르는 의미는 뒤르켐적-라깡적 전통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힘,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기표의 물질성 으로 파악하고 사회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 힘을 지닌다는 분석에 머무는 접근 이다. 반면, 니체적 이데올로기론이 던져 주는 함의는 사회에 존재하는 경쟁적, 상호 투쟁적 해석들 사이에서 특정한 해석들이 지배하게 되고 사회적인 물질적 힘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백승완 외, 1999:

114). 여기에서 들뢰즈는 실상 이데올로기의 비질료성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욕 망과 구별하기 어렵다고 토로하다. 연구자가 보기에 욕망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실토한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 논의에 따르면, 욕망의 양가성 중에 한 방향이 이데올로기이고 다른 방향은 리비도인 것이다. 문제는 한 방향이 다른 한 방향 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양가성의 생성을 봐야 한다. 착취 당하는 자와 착취하는 자는 다같이 교육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생산된다. 이 점에서 학교는 복종을 재생산함과 동시에 착취당하는 능력과 착취하는 능력을 재생산한다(도정일, 1992: 126).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대립각에 서 있는 엘리트론은 이데올로기론과 진정 양가성인지 양가성인 척 하는 것인지 구분하 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일깨운다. 양가성 논의가 변증법적 합이 아닌 생성/기계 /되기가 되지 않는다면, 결국 동어반복일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엘리트 이 론은 물질 자원이 경제에서 빗나가게 분배되었기에 인간 자원도 사회에서 그렇 게 된다고 본다(Cox et al, 1985: 81-82). 권력은 개인이나 단체가 특정한 사회 적, 경제적 지위의 활동을 통해 자동적으로 하거나 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 다. 권력은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Cox et al, 1985: 112). 그러나 엘리트 이론은, 권력은 목적적 행위에 따라 오기도 하지만, 사회. 경제적 지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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