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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일상성 적용

이상을 정리하면, 기관 없는 신체는 유기체에 반대하는 것이다. 규정적 신체 가 아닌 감각/공명에 의해 미분화된/미규정된 신체를 상정한다.

로 광범위하게 적용한다. 문자표기는 신체에 생기를 주길 그치고 판이나 돌이나 책에 적혀 굳어진다. 눈은 읽기 시작한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08).

신체에 등기되었던 문자표기가 음성에 포개지는 데 따라 신체의 표상은 낱말의 표상에 종속하게 된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14). 따라서 그림은 일 종의 약속에 의거한 기호와 암호를 의미하며 종교적 복음 전달이 목적이다. 상 징적 그림을 경험함으로써 말보다는 그림으로 인해 어떤 다른 더 높은 지식이 감상자에게 전달된다고 본다(Kaemmerling, 1979, 이한순외 역, 2001: 23)는 주 장은 폐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의 사용(빵과 포도주)은 그것이 나타내는 대상에 관여하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난 대상의 느낌과 그것이 함축하는 이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Kaemmerling, 1979, 이한순외 역, 2001: 83). 어느 것을 선택 하든, 재현이 지닌 고정성에 복속되게 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무덤을 열어 제치고 날아오른다는 서술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다. 이에는 평면과 공간, 인물 과 환경, 정체성과 역동성 등에 관한 보편적이면서도 난해한 문제에 대한 해결 을 미리 깔고 난 다음에 진행하는 서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Kaemmerling, 1979, 이한순외 역, 2001: 121). 예술가는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다고 주장한다(Kaemmerling, 1979, 이한순외 역, 2001: 133). 들뢰즈에게 재현이란 서 로 차이를 지니는 잡다한 나타난 것들을 다시 거머쥐어서 동일한 하나의 지평 에 귀속된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활동으로 본다. 차이 나는 다양을 동일적인 것 의 개념적 형식에 종속시키는 의식의 표상활동이고 이는 칸트에서 비롯된다(서 동욱, 2001: 10). 시간의식 속에서 비로소 대상의 동일성의 획득, 곧 대상의 객 관화가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의식의 시간화는 대상 세계의 객 관적 구성의 과정이다(서동욱, 2001: 15).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차이의 차이는 거짓된 운반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차이가 본성을 바꾸는 것을 결코 볼 수 없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93). 사실 반성적 대립 안에서 매개되는 차이는 지극히 당연하게 개념의 동일성, 술어들의 대립, 판단의 유비, 지각의 유

사성에 복종한다. 차이는 파국적 성격을 띠는 한에서만 반성적이기를 그칠 수 있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100). 칸트의 인식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 한 다양을 종합하는 활동이 아니라 표상된 다양을 하나의 대상과 관계 맺게 하 는 활동이다(Deleuze, 1983, 서동욱 역, 2006: 39-40). 무의식의 모든 연쇄는 일 대일로 대응시켜지고 직선화되고 전제 군주인 시니피앙에 매달린다. 모든 욕망 하는 생산이 짓눌리고 표상의 요구들에 굴복하고 표상 속의 표상하는 것과 표 상되는 것의 음침한 놀이들에 굴복한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87-88).

인식의 논리의 관점에서 재현이론의 결점은 명석과 판명 사이에 어떤 정비례 관계를 설정한 나머지 이 두 가지 논리적 가치를 묶어주는 반비례 관계를 무시 했다는 데 있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536). 헤겔을 비판하는 것은 그 가 거짓 운동, 추상적인 논리적 운동, 다시 말해서 매개에 머물러 있다는 점 때 문이다. 재현은 이미 매개이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3-46). 이는 데 리다의 주장과 연계되는 주장이다. 자기 촉발이 ‘스스로’라면, 이질적인 것으로 부터의 자기 촉발과는 모순이 된다. 따라서, 데리다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벗어 나지 못하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해석할 꿈이라는 원본이 없는데 해석하는 모양이 된다(서동욱, 2001: 147). 들뢰즈는 얼굴성에 갇혀버릴 수 없는 주름들의 역동적인 접힙과 펼침의 운동에 주목한다(한국비평이론학회, 2006: 260). 이것에 우선하는 검은 구멍/흰 벽 체계는 이미 얼굴이 아닌 셈이며, 그 장치의 변화하 는 조합에 따라 얼굴을 생산하는 추상기계인 셈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76-177). 나의 눈은 쓸모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알려진 것의 이마주 만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더우기 안면성에 고유한 이 추상기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게 될 주 체로 회귀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79). 결국 차이는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내지 간-개인적인 것)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상 -그것이 집합적이든 개인적이든- 의 몰적인 영역과 믿음과 욕망의 분자적 영역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230). 그렇다면 비재현은 어떤 것인가? 레 비나스처럼 표상활동을 통해 타자를 자기의 지평위에 종속시키는 제국주의적인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도래를 통해 비로소 탄생하는 주체를 그려 보이 는 것이다(서동욱, 2001: 23). 이것이 디아그람이다. 디아그람은 영토적 기호인 지표와 구별되어야 할 뿐 아니라 재영토화의 기호인 아이콘과, 또 상대적 내지 부정적 탈영토화의 기호인 상징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이처럼 디아그람화 (diagrammatisme)에 의해 정의되는 추상기계는 최종심급에 있는 어떤 하부구조 가 아니며 최고심급에 있는 초월적 이데아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말뚝과 같 은 역할을 한다. 추상기계 혹은 디아그람적 기계는 표상하기(représenter)를 통 해 기능하지 않으며, 실재적인 어떤 것이고, 도래할 어떤 실재를 구성한다는 점 에서 새로운 유형의 실재성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50). 들뢰즈의 철학에 드러나는 재현의 반대 개념은 표현이다(김영 희, 2006). 베이컨이 실제로 그린 것은 감각 자체가 아니라 감각과 분리되지 않 는 신체일 뿐이다(김영희, 2006). 재현이 시뮬라시옹을 그릇된 재현으로 해석하 고 이를 흡수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시뮬라시옹은 재현의 축조물 자체를 송두리 째 시뮬라크르로서 감싸버린다.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기호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고 있는 기호로의 이전은 결정적인 전환점이다(Baudrillard, 1981, 하태환 역, 1996: 27). 의식을 추론하는 일은 매우 무모한 시도가 될 것이며 의 식은 사실상 필연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를 설정하면서 우리는 이미지의 총 체를 제시하기 때문이다(Bergson, 1970, 홍경실 역, 1991: 40). 따라서 당신이 설 명해야만 하는 것은 지각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가 아니라 지각이 어떻게 해 서 한정되는가이다(Bergson, 1970, 홍경실 역, 1991: 46). 가령, 한겨례 2007년 9 월 14일자 신문에 독일 봄테시에는 신호등이 없다는 기사를 보면, 안전하지 않 은 것이 안전하다는 역설을 제시하고 있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차도와 인도 의 구별이 안전을 위한 합리적이고 약속의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런 도구들을 제거함으로써 교통사고가 줄어드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추상화.

합리화로 쪼개어 만든 분리술(術)이 교통사고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지 각과 감각들이 운전자와 보행자에 경각심을 더 높여 사고를 줄이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근대성의 합리, 이성, 과학, 사회계약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보 여주는 것이며, 이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체현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물질에 관한 철학이 무엇보다도 의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기억의 증여를 지각 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다(Bergson, 1970, 홍경실 역, 1991: 81-82). 이 말은 경 험론의 오류는 경험을 너무 소중하게 평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그 대상의 직접적인 접촉으로부터 비롯되는 진정한 경험을 분해되어진, 그 결과 변 질되어진 경험으로 대체하는데 있다(Bergson, 1970, 홍경실 역, 1991: 203). 즉, 운동은 전체적이다(Bergson, 1970, 홍경실 역, 1991: 213). 소위 동질적인 시간이 란 언어의 우상이며 그 기원을 쉽게 발견하는 하나의 허구이다(Bergson, 1970, 홍경실 역, 1991: 227).

이상을 정리하면, 재현은 의식에 종속되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의식에 종속되 는 것은 분리와 정지만을 취하는 것이다. 의식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운동 의 전체성을 통한 디아그람과 신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2) 정신분열증

자본주의는 시니피앙-시니피에의 종속관계를 표현-내용의 상호적 전제관계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 속에서는 더 이상 시니피앙의 효과들이 아니 고 분열들, 기호-점들, 혹은 흐름의 절단들인 형상들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60). 이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정신분열증 의 절대적 극한을 자본주의 자체의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들로써 대체하고 이 극한들을 확대한 규모로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탈규준화 시키는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계화한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65).

분자적 현상이란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이요 이것은 집합들과 인물들에 대립하 는 것이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415). 정리하면, 정신분열증은 마이크

로 흐름이다.

(3) 법

언어는 정보적이지도 소통적이지도 않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

권혜원외 공역, 2000: 84). 왜냐하면, 명령-어의 잉여성이 오히려 일차적이며 정 보란 단지 명령-어의 전달을 위한 최소 조건이라고 생각한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07). 충만과 공허의 주름적 배분 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이진법이다. 이진법 산술은 십진법 체계 그 리고 자연 자체가 외형적인 공허 안에 감춰둔 주름들을 꺼내어 중첩시킨다 (Deleuze, 1988, 이찬웅 역, 2004: 72). 나는 자신 내부에 있는 것, 그리고 자신에 의해 파악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는데,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Hardt, 1993, 김상운⋅양창렬 역, 2004:

189). 반응적 힘들의 승리는 세계사의 원리와 의미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의 미로 오이디푸스 개념은 실로 세계사의 결과이며 이는 자본주의가 이미 세계사 의 결과하고 하는 특정한 의미에서이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이 있기 전에 자 본주의는 이미 세계사적 산물로서의 오이디푸스를 알고 있었으며(오이디푸스 삼각형) 자본주의적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서동욱, 2003: 133). 정리하면, 법은 반응적 힘을 통해 기능한다. 반 응적 힘은 언어의 포개진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4) 포획

그러나 탈주선에는 마술이 걸려 있다. 탈주하도록 하면서, 다시 제자리에 놓 이게 하는 마술, 그것이 지층을 통한 포획이다. 포획이란, 포획이라는 수단을 통 해서 국가는 내부성의 환경을 설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포획 메커니즘은 토지 또는 그것의 산물, 노동력 또는 화폐에 가해졌던 것이 다.(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245) 지층은 포획이다(Deleuze &

포획의 방식 직접적 비교와 독점적 영유 스톡의 세측면 토지, 연장, 화폐

포획의 세 양상 지대, 이윤, 과세

권력의 세측면(세가지 자본화) 지주, 자본가, 조세 및 물가 통제권자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47). 한마디로 이중분절이다. 농부 용 낫과 무사용 검을 함께 함의하고 있다. 유기체 전체가 이중분절과의 관계 속 에서, 그리고 상이한 수준에서 고려되어야 한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 경⋅권혜원외 공역, 2000: 48). 포획의 메커니즘은 지표(영토적 기호), 상징(탈영 토화된 기호), 아이콘(재영토화의 기호), 이는 해석자라는 기능에 의존하여 언어 의 제국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정지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71). 사람들은 자주 본 것을 말하 지만, 본 것은 결코 말한 것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지층화된 것이다. 기 호는 어떤 지층이라는 조건에서만 거론될 수 있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73). 스톡의 <표 3>을 보자.

<표 3> 들뢰즈의 포개진 기제로서의 스톡(이진경, 2006: 510-511)

세상은 합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로 움직이는 세상이다(이진경, 2006: 555). 사실 원래 집합의 수보다 부분집합의 수가 더 크다(이진경, 2006:

577). 뒤메질에 따르면 국가 장치는 마법사-황제와 재판관-성직자라는 쌍두를 갖는데, 이것은 모든 국가장치(정치적 주권)의 두 극이다. 전자는 마법적 포획 혹은 속박으로 작동하고 후자는 협정. 계약으로 작동하는데, 이 두 가지 작동은 서로 다른 양상을 갖지만 역할면에서는 동일하다. 그 역할이란 외부의 내재화이 다(백승완 외, 1999: 286). 포획을 당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포획 장치의 권력 은 억압적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자발적으로 동의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공간적으로 앞서서 미리 포획된 권리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백승완 외, 1999: 291).

이상을 정리하면, 포획은 당연함을 가장한 자연스러움이다. 이 포획의 폐기는 포획의 양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양가성이 바로 포개진 기제이다.

(5) 전제

우리가 끊임없이 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개방된 채 남 겨두어야 한다는 것이고, 어떠한 선 전제된 가정도 거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02). 데카르트의 방 법(명석-판명한 것에 대한 탐구)은 주어진 것으로 가정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지 결코 문제들 자체를 구성하고 물음들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어떤 발견의 방법이 아니다. 독단적 이미지에 사로잡혀 문제들의 진리가 해들의 가능 성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345-346). 들뢰즈 의 사유에서 개념은 미리 규정된 전제에 의해 구획되는 특수한 것들의 집합이 아니라 고정된 전체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체를 구성할 수 있는 이질적 인 요소들의 진동에 의한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한국비평이론학회, 2006:

241). 정리하면, 전제된 결과 짜맞추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6) 기원

원천으로서의 의미란 에크리튀르(=글)의 대리보충에 의해 사후적으로 첨가된 기원일 뿐이다. 에크리튀르가 기원이라는 것은 사실상 기원은 부재한다는 뜻이 다. 실제로 흔적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기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의미 일반 의 절대적 기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달리 텍스트란 문자의 대리보충 그 자체 또는 이 대리보충을 통해 생산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서동욱, 2006:

301). 그러나 대상 일반이 아니라, 우리는 조건을 모든 가능한 경험의 조건으로 서가 아니라 실재 경험의 조건으로서 세워야 한다(서동욱, 2003: 34).

(7) 포개진

일대일 대응, 즉 두 음절 사이의 상징적 관계를 위하여 다의적인 현실을 파괴 하는 대응을 잘 나타내는 마술적 정식, 출발 집합점에서는 사회조직체, 아닌 복 수의 사회조직체가 있다. 인종들, 계급들, 대륙들, 부족들, 왕국들, 주권들이 있 다. 쟌 다르크와 저 위대한 몽고인, 루터와 아즈테그인의 뱀이 있다. 도달 집합 점에는 아빠, 엄마 그리고 나만이 있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157).

나) 실재론

(1) 리좀/되기

되기는 반-기억이다. 기억된 것을 새로운 배치로 탈영토화시키고 변형시키는 가이기 때문이다(이진경, 2006: 47). 데리다가 두 항이 섞이는 사례를 통해 이항 적 구별을 비판하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혹은 이것인 동시에 저것인 경 우의 존재를 통해 사이를 정의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항적인 것 사이에서 두 점 사이를 지나가는 생성의 선을 통해 현실로 존재하는 이항성의 지배를 깨 고 뒤엎으려고 하기 때문이다(이진경, 2006: 87). 되기를 통한 차이는 a와 b의 차이를 b에겐 없는 a의 것이라고 정의하거나 너의 개성을 인정 한다 그리니 나 의 개성을 인정해라, 너의 차이를 인정 한다 그리니 나의 차이도 인정하라는 식 의 a-b의 감산의, 차이의 정치학이 아니다. 즉 a는 a와 다른 b의 고유성을 인정 하고 보존하는 차이의 정치학이 아니다. a+b의 합산, 만남, 접속, 종합에 의한 차이이다. 즉 a-b가 아닌 a와 b의 접속에 의한 a/b를 합산한 a+a/b가 차이가 된다. 즉 a가 b와 접속하거나 b-되기를 통해 변이, 변환, 변혁의 정치학이다(이 진경, 2006: 176-177). 동물-되기는 가족, 종교, 국가의 배치와는 다른 배치들 속 에 정교화 된다. 그것은 외부적인 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집단들, 한마디로 아노 미적 집단들인, 소수 집단들, 혹은 억압되거나 금지된 집단들, 반란을 일으키는 집단들, 혹은 언제나 승인된 제도들의 가장자리에 있는 집단들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20). 되기는 하나의 대항-기억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70). 되기는 리좀이다. 즉, 구성되고 있는 다양성으로부터 유일자를 빼는 것, 이 를 n-1로 이라고 쓰자. 이러한 체계를 리좀(rhizome)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 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1). 리좀을 통해 중요한 문제는 끊임없이 세워지고 부숴지는 모델에 관한 것이며, 끊임없이 연장 되고 파괴되며 다시 세워지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26). 리좀은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27). 모든 생성은 소수적이다. 바 로 이 생성/되기가 곧 창조인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 외 공역, 2000: 112).

이상을 정리하면, 되기는 대항기억이고 동물 되기이며, 리좀이며 선이고 소수 적인 창조이다.

(2) 매끄러운 공간

우리는 매끄러운 공간과 홈패인 공간의 상징을 구분해야 한다. 매끄러운 공간 과 홈패인 공간, 유목민의 공간과 장착민의 공간, 전쟁기계가 전개하는 공간과 국가기구에 의해 설정된 공간은 같은 성질이 아니다. 두 공간은 사실상 뒤섞여 야만 한다. 매끄러운 공간은 홈 패인 공간에 의해 번역되며 그것에 의해 횡단되 고 있다. 홈패인 공간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항상 반전되며 회귀하고 있다(이진 경, 2006: 641). 매끄러운 공간은 무한하게 열려있고 모든 방향으로 무제한적이 다. 앞면, 뒷면, 중심을 갖고 있지 않다. 고정되고 움직이는 요소들을 지정하지 않고 배정하지 않으며 연속적인 변이를 분포시킨다(이진경, 2006: 619). 가령 풍 수지리적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공간이란 양적이고 동질적이고 척도적인 다양 체가 아니라 질적이고 이질적이고 비척도적인 다양체일 것이다(이진경, 2006:

633). 번역하는 것은 ① 매끄러운 공간을 종속시키고 ② 초코드화하고 ③ 척도

화하는 조작이고 ④ 매끄러운 공간을 비중성화하는 조작이며 ⑤ 매끄러운 공간 에 번식. 확장. 재생. 자극의 환경을 부여하는 조작이다. 평균적인 것에 기초해 서 표준적인 힘, 표준적인 노동 강도, 표준적인 숙련도등을 가정할 수 있을 때 에만 노동 시간은 환원될 수 있다(이진경, 2006: 639-640). 정리하면, 매끄러운 공간은 홈패인 공간이 아니라는 부정이 아니라 매끄러운 공간은 홈패인 공간이 되고 그 역도 된다. 단 불공가능성이다.

(3) 패러독스

패러독스는 자본주의가 그 재토지화들을 위하여 원국가를 이용하는 데 있다 (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87). 결연과 부자관계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을 경유하지 않고 돈을 경유한다. 이렇게 되면 가족은 자기가 더 이상 지배하지도 못하고 것을 표현하기가 일쑤인 소우주가 된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92).

20은 다른 수를 떠올릴 것도 없이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1과 비교된 수이 고 1이라는 척도에 의해 셈해진 수, 세어진 수이다. 유목민에게는 세는 수지 세 어진 수가 아니다(이진경, 2006: 399). 풀이파리가 소멸되는 것은 하나의 배치에 서 다른 배치로 이행의 성분으로서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 원외 공역, 2000: 103). 칸트의 비판적 이성은 기성의 가치들을 강화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가치들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기능을 한다(Hardt, 1993, 김상운⋅

양창렬 역, 2004: 112-113). 이는 ‘참이란 무엇인가?’가 아니고 ‘누가 참을 원하 는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많이?’의 질문이다(Hardt, 1993, 김상 운⋅양창렬 역, 2004: 116). 저지하고자 하는 것은 시스템 속에서 사건을 만들어 시스템의 균형을 깨뜨릴 모든 가능성, 모든 실제 사건의 가능성이다. 공포의 균 형이란 균형의 공포이다(Baudrillard, 1981, 하태환 역, 1996: 81). 근거의 불충분 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거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 상대적이고, 자신이 근거 짓은 것에서 특성을 빌어오며, 그 빌려온 특성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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