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들뢰즈 일상성의 관점

가) 존재론

(1) 일의성의 존재론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이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106). 데카르트에 맞서 스피노자는 실체, 속성, 양태들을 할당

하는 놀라운 방법을 개척해 간다. 에티카의 첫머리에서 그는 실재적 구별이 수 적 구별이 아니라 단지 형상적 구별일 뿐임을, 다시 말해서 질적이거나 본질적 인 구별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거꾸로 수적 구별은 결코 실재적 구별이 아니며 단지 양태적 구별일 뿐임을 강조한다. 실체가 모든 속성들에 의해 동등하게 지 칭되기 때문이며, 실체가 모든 양태들에 의해 동등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111-112). 존재는 생성을 통해, 동일성은 차이 나는 것을 통해, 일자는 다자를 통해 자신을 언명한다는 것이다. 동일성이 일차 적이지 않다는 것, 동일성은 원리로서 현존하지만 이차적 원리로서, 생성을 마 친 원리로서 현존한다는 것, 동일성은 차이 나는 것의 둘레를 회전하다는 것이 라는(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112-114)점이다. 일의성은 숫자적으로 하 나가 아니라 존재로서 하나이다. 따라서 수목적 하나에 종속되는 다수가 아니라 비수목적 각각이 존재할 수 있는 존재론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존재가 말해지 는 대상은 다의적인 반면 존재 자체는 일의적이다(서동욱, 2003: 119-120). 이것 이 일의성이다. 존재론적으로 일자이며 형식적으로 다수라는 것, 이것이 속성들 의 지위이다. 속성들은 질적으로 여럿이고 양태들은 수적으로 여럿이지만 그 존 재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인 것이다(김상환 외, 2002: 288-289). 스피노자의 존재 의 일의성은 존재의 일의성이 손상되더라도 양태들이 존재하고 그와 별도로 양 태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실체가 존재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들뢰 즈의 일의성의 철학은 존재가 오로지 양태들에 대해서만 말해질 수 있어야 한 다고 다시 말해 그 자체로 고려된 실체로서의 존재란 한낱 환영에 불과해야 한 다고 스피노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김상환 외, 2002: 290-291). 결국, 양태들의 반복되는 생성이 바로 존재이고, 영원회귀 자체가 존재로 이해되는 것이다(서동 욱, 2003: 123). 회귀하는 것이 존재이긴 하지만, 오직 생성이라는 존재이다. 양 태들의 생성이 실체적인 존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양태들의 생성에 의존한다. 존재란 이 생성이 계속되는 동일한 상태를 일컫는다. 생성의 계속됨 이 반복이며 이런 반복이 곧 동일자이고 존재이다. 영원회귀에서의 반복이 존재

이다. 생성의 반복이 존재이며 생성과 별도로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 다(서동욱, 2003: 124).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동일성은 순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존재의 일의성은 생성하는 반복의 양태가 곧 존재인 것이다.

(2) 잠재성

들뢰즈의 사건은 곧 잠재성의 현실화이다. 그 잠재성은 곧 욕망이다. 들뢰즈 는 육체에 ‘기계’라는 개념을 부여해 탈코드화하며 욕망에 따라 단절되고 채취 하는 접속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능동적 육체의 잠재성을 상정한다. 즉, 푸코는 육체의 권력 예속성을, 들뢰즈는 지배체제에서 벗어나는 욕망의 잠재성을 주장 한다(오생근, 2005). 또한 강밀도의 연속체를 어떠한 양태로도 될 수 있는 순수 잠재성 또는 그 자체라는 의미에서 일관성의 구도라고 부른다(이진경, 2006:

42). 여기서의 잠재성은 예를 들어, x2-1=0이라는 구조는 두 개의 특이점을 잠 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만약 일정한 조건(x>0)이 주어지면, 하나의 해가 현실 화되는 것이다(Deleuze, 1969, 이정우 역, 1999: 30).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잠재 성의 의미를 봐야 한다. 조건에 따라 1이나 -1이 선택되지만, 그것은 조건이 변 하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즉, 1이나 -1은 선택이 주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립하는 잠재성의 공간(para-doxa의 양방향 벡터 강조)인 것이 다. 더 나아가 -1=0의 해는 1, -1, i, -i의 잠재 공간이기에 선택이 우선 이 아니고, 잠재가 우선인 것이다. 결국, 들뢰즈 잠재성 주장의 핵심은 disjonction인 것이다. 미분들은 분명 이미 태어난 그 어떤 양에도 상응하지 않 는다. 만일 미분적 차이들이 결과 안에서 사라진다면, 이는 문제의 심급과 해의 심급 사이에 본성상의 차이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소멸은 해들에 의해, 문제가 필연적으로 은폐되는 운동 속에서 일어난다. 미분적 요소는 결코 재현에 의해 매개되거나 개념의 동일성에 종속되는 일이 없는 본연의 차이가 벌이는 유희이 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388-391).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참됨을 그

것의 해결 가능성을 통해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393). 본성상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 한 것은 언제나 물음이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13). 사회과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큰 학습 즉, 배운다는 것은 이념 안으로 그 이념의 변이상과 특 이점들 안으로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인 식능력을 초월적이고 탈구적인 사용으로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고 그 능력을 다른 능력들과 소통하고 있는 마주침과 폭력(=칸트의 숭고)으로까지 끌어올린 다는 것이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16-421). 운동은 가설적인 것에서 필증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제기적인 것에서 물음으 로 나아간다. 대립에 의존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서로 대립한다고 간주되는 것들 의 본성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44). 우리는 결코 보편적 자아가 아니며 하물며 이러저러한 보편적 대상 앞에 있는 것은 더 욱 아니다. 공통감은 잡다의 질적 종합이자 질적 잡다성의 정태적 종합이다. 이 칸트의 종합은 똑같은 한 주체의 모든 인식 능력들에 대해 언제나 똑같은 것으 로 가정되는 어떤 임의의 대상에 관계한다. 이 종합은 차이를 객관적으로는 물 론이고 주관적으로도 소멸되는 어떤 체계에 관계한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80).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스스로 소멸된다는 것이고 자신을 구성하 는 비동등성을 추방한다는 것이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88-489). 강 도는 도식에 해당하는 외연의 원천, 외연적 크기에 해당하는 연장의 원칙, 연장 을 차지하는 질료인 물리학적 질의 원천, 대상의 지칭에 해당하는 감각적 질의 원천이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96). 무지개의 색깔을 하나의 수렴 렌즈를 통해 통과시키면 순수한 흰 빛을 얻는다. 이 흰빛은 색조들 사이의 차이 를 일곱 색깔이 아니라 비결정성 다양성을 가진 복수적 색체의 광선으로 나타 낸다. 이 예에서 색깔들은 이념 아래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념 자체의 복 수적 다양의 뉘앙스들이고 정도들이다. 무지개의 색은 일곱 가지가 아니라 무한 한 복수성으로 이루어지며 이때 색과 흰빛의 관계는 참여와 내적 차이의 관계

이다. 들뢰즈의 이념 ‘흰빛’은 차이들의 이념이 됨을 보여준다. 이런 사유가 가 능하려면 차이의 이념은 플라톤의 이념과는 달리 시간 속에 놓여져야 한다(한 국비평이론학회, 2006: 170). 즉, 잠재성은 기관없는 신체, 비특권화된 잠재성, 무전제에서 출발하는 철학이 가능하지 않은지, 무전제에서 출발하는 일상성(일 상생활)이 가능하지 않은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가령, 눈이 특권적인 지위를 누 리도록 미리 질서가 잡힌 유기체를 전제하고서 현상학자들은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정해놓았단 말인가?(서동욱, 2001: 232) 잠재성과 가능성을 볼 때, 가능한 것의 결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결함을 통해 볼 때 가능한 것은 사후적으로 생산된 것, 그 자체가 자신과 유사한 것의 이미지를 따 라 소급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반면 잠재적인 것은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 화를 통해 현실화된다. 잠재력을 띤 어떤 것 또는 잠재적인 것에 대하여 현실화 된다는 것은 언제나 발산하는 선(線)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 안의 차이와 반복은 현실화의 운동, 창조로서의 분화의 운동을 근거 짓고 마침내 가 능한 것의 동일성과 유사성을 대체한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56-457).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 도식의 위력은 대단하다. 바로 이 도식을 통해 개념은 비로소 어떤 유형학에 따라 나뉘고 종별화될 수 있다. 그러나 도식이 계 산에서 빼놓고 있는 것은 딱 하나인데, 그것은 역량이다(Deleuze, 1968, 김상환 역, 2004: 467).

이상을 정리하면, 결국 잠재성은 잠재성을 유사성으로 환원시키는 권력/시각 중심/유적 사고/결과위주의 해석/윤리적 강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상 잠재성 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기 전에 그것이 가진 강밀도를 사건으로 드러내고 있 음에도 일정 방향만을 강요하는 추상기계의 작용과 계속 싸우는 기계이다. 그래 서 잠재성은 욕망이다.

(3) 강밀도

강밀도란? 이것이 가능한 것은 강밀도와 비평형이 거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자리바꿈을 통해 고정과 우월성을 바꾸는 에네르기가 바로 강밀도이 다. 비평형만의 거리가 에네르기의 자리바꿈을 가능하게 한다. 한번 던짐은 하 나의 혼돈이며, 각 수는 이 혼돈의 조각들이다. 각 수는 특이점들의 배분이다.

이러한 배분은 곧 정주적인 배분이 아니라 유목적인/노마드적 배분이다 (Deleuze, 1969, 이정우 역, 1999: 132-134). 본질적인 것은 형식과 질료에 있는 것도, 주체에 있는 것도 아니며, 힘과 밀도, 강밀도에 있는 것이다. 포개짐도, 지 배-피지배의 갈등도 여기에서 발생하고, 사이-배치도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22). 스피노자의 감 응(affect)이나 니체의 역능에 대한 느낌에 상응하는 들뢰즈의 욕망 개념의 성분 이 바로 강밀도 개념이다(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193). 예컨대 물건 을 잡을 수 있는 손은 앞발의 움직일 수 있는 손의 상대적인 절대적 탈영토화 를 의미한다. 막대기는 절대적 탈영토화된 나뭇가지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80). 강밀도와 무의식을 볼 때, 무의식이 고아인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하나의 부재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 사상의 이름들이 현전하는 강도들을 가리키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무의식 이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이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456).

강밀도와 리좀/다양성은 리좀, 그들의 관계는 거리들이고, 그들의 운동은 브라 운 운동이며, 그들의 양은 강도들이요, 강도의 차이들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39). 다양성은 그 외연을 구성하는 요소들 이나 내포를 구성하는 특성들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강도로서 지니고 있는 선들과 차원들에 의해 정의된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

⋅권혜원외 공역, 2000: 18).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양태에 해당하는 독신기계라 는 주체를 강도적 양들로 규정한다(서동욱, 2003: 183). 칸트와 달리 들뢰즈는 강밀도를 질적 차이(기온, 색깔, 소음의 정도)와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질들 간의 불연속성을 고착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진은영, 2005:

74-75). 기관없는 신체는 강밀도들에 의해서만 서식되고 점유되는 그런 방식으

로 이루어진다. 오직 강밀도들만이 통과하고 순환한다. 그것은 공간을 이러저러 한 정도로 점유하게 될 질료다. 그것은 비지층화되고, 미형태화된 강밀도를 갖 는 질료요, 강밀도의 모태(matrix)며, 강밀도=0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60). 그러나 강밀도는 양가적으로 작용한다. 기 계적인 배치는 분명 일종의 유기체를 혹은 기표적인 총체성을 혹은 주체로 귀 속될 수 있는 결정성을 만드는 지층들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하며 비기표적인 입자들과 순수한 강밀도들을 통과시키 고 순환시키는 기관 없는 신체를 향해, 강밀도의 흔적인 이름만을 남길 뿐인 주 체들을 스스로에 귀속시키는 기관 없는 신체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강밀도를 통해 들뢰즈는 가령 피카소처럼 재현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림을 그리 려 했던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그렸는가 여부를 따져서 평가하다면 그것은 내 재적 평가가 아닌 것이다. 그가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외재적, 초월적 평가가 된다. 즉 그가 하고자 하는 것에 의해 그가 실제로 행한 것을 평가하는 것이 바로 내재적 평가이다(이진경, 2006:

198).

이상을 정리하면, 강밀도는 벗어나고자 하는 브라운 운동이다. 이 브라운 운 동을 통해 불균형은 옹호되는 것이다. 불균형을 균형으로 통제하는 행위는 실재 를 배제하는 정주적 시각이다.

(4) 역능

역능/의지는 니체의 계보학의 내재적 비판으로 1) 어떤 외적인 기준도 존재하 지 않고 2) 가치들과 사유의 내적인 발생의 원리로서의 역능에의 의지만이 존 재한다(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67)는 것으로 이때 역능은 어떤 사법 적이고 도덕적인 전제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권력개념이다(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133). 역능/의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마르크스는 본질적인 재화와 용역의 생산양식이 각 시기의 사회의 본성을 설명해준다고 보

았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과 역능의 추상기계들이 주어진 사회의 본성을 정의 내린다고 보았다(Patton, N.P.N.D, 백민정 역, 2005: 223). 들뢰즈는 권력의 지를 삶을 극복하는 긍정적인 힘, 불변의 상수로 존재하는 동일자에 맞서 무한 한 생성과 차이를 긍정하는 가치 평가의 기분으로 본다(김겸섭, 2002: 218). 요 컨대 기독교의 종교적 생활윤리는 투쟁하고 정복하는 권력의지를 약화시켰다 (전경갑, 1999: 91). 왜 의지가 힘의 본모습을 부정하는 일이 생기는가?(반응적 힘이 되는가?) 힘에 대해서 외부적인 ‘법’이 힘의 의지를 억압하기 때문이다(서 동욱, 2003: 113). 기독교 세계관처럼, 세계관이란 변화무쌍한 세계에 던져진 인 간이 세계를 고정된 이론적 체계 안에 편입시켜 자신의 지속적인 안전을 확보 하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은 그야말로 세계 전체를 자신의 체계 안에서 포섭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세계관이 자신 곁에 대등한 것으로 존 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세계관의 투쟁이란 그것들이 내세우는 것처럼 진 리나 민족이나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한 투쟁에 불과하다(김상환 외, 2002: 256). 동일적인 것(이데아)에 대한 개별 자의 종속은 무엇을 통해서 보장받는가? 바로 유사성이다. 이성적 사유의 대상 이 되는 개별자는 이데아를 나눠받음(分有)으로써 어떻게든 이데아와 유사한 면 모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김상환 외, 2002: 276). 들뢰즈에게 있어서 사유 활 동이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주체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 호의 폭력이 상처를 입혔을 때(트라우마) 그 기호가 숨기고 있는 진실을 해독해 내기 위해 비로소 수동적으로 시작하는 활동이다(서동욱, 2001: 104). 따라서 힘 이 문제다. 즉 문제는 언제나 힘의 문제다. 그것이 카오스의 힘이든, 대지의 힘 이든 간에.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러저러한 배치로 나타나는 지각(知覺)의 문턱, 식별가능성의 문턱이다. 힘이 그 자체로 분자적인 것으로 떠오르는 것은, 다만 우주에 귀속될 뿐인 순수한 힘으로 떠오르는 것은 질료가 충분히 탈영토화되었 을 때뿐이다(Deleuze & Guattari, 1980, 이진경⋅권혜원외 공역, 2000: 127). 우 리가 말하는 ‘대상’이란, 그 자체 외관이 아니라 힘의 출현이다(서동욱, 2003:

116). 시뮬라크르는 이 막강한 힘, 신을 인간의 의식에서 지워버리는 기능, 시뮬 라크르가 문득 보게 한 파괴적이고 말살적인 진리이다(Baudrillard, 1981, 하태 환 역, 1996: 23).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힘인가? 결국 신이란 본질적으로 없었 기 때문이고 오직 시뮬라크르만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신 자체도 시뮬 라크르였기 때문이다. 이런 신의 이미지 뒤에 아무것도 숨기도 있지 않기 때문 에 이미지를 벗긴다는 것이 사회체에서 위험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Baudrillard, 1981, 하태환 역, 1996: 24). 그러나 힘은 추상기계이기에 양가성을 지니고 있다.

탈토지화가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그 현상만 보면 안 된다. 다음의 초규준 화를 통해 잉여성을 극대화하는 전술일 뿐이다. 하나는 더욱더 탈규준화해 가는 사회적인 힘들의 장 속에 국가를 내면화시켜 하나의 자연 체계를 형성하는 양 식이다. 다른 하나는 더욱더 초규준화하는 초지상적인 장 속에 국가를 정신화하 여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형성하는 양상이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33). 예를 들어, 자본론의 핵심부분에서 마르크스는 두 주요한 요소들의 만남을 밝히고 있다. 한편에는 탈토지화한 노동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탈규준 화한 돈이 있다(Deleuze, 1972, 최명관 역, 1994: 337).

이상을 정리하면, 역능은 사회체에 벗어나는 의지와 욕망이다. 사회체의 코드 와 규준과 기준을 벗어나는 것이다. 역능은 내재적 발생이다. 그러나 이 역능을 모서리쳐서 다듬는 모든 작용은 역능을 반응적 힘으로 길들이는 것에 다름 아 니다.

나) 감각론

(1) 욕망

의지와 함께 욕망의 철학이 들뢰즈에게는 에너르기로 작용한다. 들뢰즈의 유 물론적 욕망이론은 3가지로 요약된다. ① 욕망을 결핍이나 결여로 개념화하는 모든 전통적 관점을 거부하고 무의식적 에너지(리비도)의 본능적 흐름으로 본

능동적 변용들 수동적 변용들

공통개념들

기쁘고 수동적인 변용들

다. 그러나 욕망을 현실적 대상의 결여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결핍된 어떤 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심적 역동으로 규정하는 기존의 욕망이론은 그 논리 속 에 이미 현실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초월적 세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② 욕 망은 무의식적 리비도의 흐름이고 본질적으로 기계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다. 욕 망이 기계적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 욕망 개념과 또 다른 차원의 개념이기 때문에 마치 니체가 의지의 복수성을 역설한 것처럼 들뢰즈도 욕망의 복수성을 강조한다. 욕망을 기계적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한 이유는 욕망개념에 전통적으 로 따라다니는 인격적 주체 개념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③ 욕망은 고정된 표 상체계에 구속될 수 없는 역동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다(전경갑, 1999: 231-232).

이런 욕망에 대한 세 가지 오류는 결여, 법률, 시니피앙이다(Deleuze, 1972, 최 명관 역, 1994: 117). 신체에 대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자기보존의 욕 구,conatus)는 역량의 존재론적 원리가 물리적으로 예시화한 것이다. 이 신체는 욕망이 투입되어 있는 신체이다(Hardt, 1993, 김상운⋅양창렬 역, 2004: 268). 이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림 1] 이다.

[그림 1] 스피노자의 변용(Hardt, 1993, 김상운⋅양창렬 역, 2004: 268)

라깡에게선 기본적으로 충동의 운동은 대상 a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돌아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자기 성애적 형태를 띤다. 그러나 들뢰즈는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이 실재로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서동욱, 2003:

198). 스피노자 철학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의한 생산력의 매개가 생산력의 본 성에서 필연적으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폭로하는 작업이라면, 들뢰즈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