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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특수시장

3.1. 약령시

약령시(藥令市)는 한방의(韓方醫)에서 사용하는 각종 약재의 매매 거래를 행하는 장시를 말한다. 약령시는 일 년에 2회―한약재가 채 취되는 봄가을 2회에 걸쳐, 대개 음력 2월과 10월에― 주요 도읍지 에서 큰 장이 열렸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한방의용의 약재 일종만을 거래 품목으로 하는 약령시가 우리나라에 고래로부터 성립하여 수 백 년간 계속되고 발달한 것은 다음과 같다.12

1) 예부터 우리나라는 약재의 생산이 풍부하여 영약(靈藥)의 산지 로 유명하고 따라서 약재의 거래가 왕성했기 때문이다. 현재

12 ‘약령시(藥令市)'라는 말은 조정에서 명령하여 개시한 시(市)라는 설과, 약초의 종류에 따라 그 채취시기가 다름으로 약재 매매의 월령(月齡)이 다르다는 데서 영시(令市)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이 있다.

한국의 약초 생산은 야생 약 200종, 재배용 약 100종, 계 300종 으로 그 중에도 인삼과 수삼 등 영효(靈效)하다고 이름난 약재 가 많고, 구전에 의하면 중국의 진시황 때 이미 서시가 인솔하 는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여 명이 불로장생초를 채취하기 위 해 파견된 삼신산(三神山)이라 하는 영약의 산지가 한국에 있 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13

2) 우리나라는 고래로 한방의학 및 한방의가 아주 잘 발달하였다.

조선의 한방의학은 상고 중국에서 전래되고 다시 약 1,600년 전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이 한방의학은 고려조 및 조선조에 극도로 발달하여 윤회가 저술한 「채집월령」, 조정에서 명하여 편찬한 「향약본초 팔십오권」, 허준 등이 저술한 「동의보감」 기 타 한방의학상의 명저가 많고 따라서 또 한방의 및 동 약종상 (藥種商)의 발달이 현저하여 한방의가 양의에 밀려 그 수가 상 대적으로 현저히 감소된 오늘날에 있어서도 한방의 및 이에 준 하는 한약종상의 이용자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3) 한방의약 전문가 외에 양반 유생 및 일반 대중도 한의학을 단 편적으로나마 체득하여 가정에서 의약용으로 강장용으로 한약 을 널리 사용한 점도 약령시가 발달한 요건이었다. 즉 한문에 능통한 양반 유생 계급은 한방의학을 쉽게 배울 수 있었고, 일 반 대중도 정부의 홍보에 덕을 보아 상식으로 한의학을 대략 체득하고 있어서 예부터 ‘가가의(家家醫: 의역하면 가정상비 의)’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4) 예부터 조정은 의료행정과 이에 관한 시설에 주력하여 의학 및

13 일설에는 제주도 서귀포가 당시 진나라 채약대(採藥隊)가 머문 곳이었 다는 족적을 더듬고 있다.

의약이 현저하게 발달했다. 즉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인 신 라 효소왕(孝昭王) 때 도중(都中)에 의학박사를 두어서 약초에 의한 의료의학(醫療醫學)을 교육하였다.14

고려 때에는 건국 초부터 각 군현에 의사를 두어 지방에 있 는 일반 민중의 시료에 주력하였는데, 충선왕(忠宣王) 3년 개경 에 동서 대비원(大悲院)을 설립하여 일반 서민을 치료하였으며, 또 목종(穆宗) 때부터 태의감(太醫監) 또는 전의(典醫) 등을 두 어서 시료․의료 행정 및 검약(檢藥) 등의 직무를 맡게 했다.15 조선 시대에는 태종(太宗) 원년에 전의감(典醫監)을 두고 의 료 및 의약(醫藥)의 검사 등에 관한 사항을 관장케 하였고, 세 조(世祖) 3년에는 의학고(醫學考)를 세워서 의학서의 수집 편 찬을 행하게 하였다.16

5) 우리나라는 고래로 중국과의 무역이 왕성하여, 중국에 수출하는 한약재는 주로 인삼, 수입했던 품목은 당귀, 천궁(川芎), 택석(澤 潟), 복령(伏苓), 향부자(香付子) 등 수십 종이었다. 그런데 고려 초기의 국내 교역은 주로 물물교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재의 매매에 관해서는 필히 금전을 사용했다는 등 역대 조정이 이의 교육에 관해 상당히 특별한 중요성을 인정했던 것 같다.

상술한 여러 가지 사실에 미루어보아 우리나라 약재 전문시장은

14 신라 효소왕 원년, 初置医學博士, 以本草甲乙, 経針, 経脈, 経牽, 問明 堂, 経難, 経敎 受學士(증보문헌비고 제223권 典醫監修).

15 충의왕 3년 삼월 傳旨, 東西大悲院, 本爲医理疾病而, 設令開城府. (고려 사 제80권)

高麗穆宗置太醫監, 掌医藥療治之事, 有監少, 監承, 박사, 의생(醫生),

…, 後改典医寺(증보문헌비고 제223권; 고려사 제76권 百官一典醫寺條)

16 태종 원년, 置典医監), 掌医藥, 세조 3년, 立医學考講法, 以申叔舟爲學 都堤調(증보문헌비고 제223권;)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발생된 것이라 생각하나, 그 기원에 대하여는 일제 때 경상북도 산업과 및 대구부의 조사 등17에는 “대구약령시의 사정에 밝은 양익순(梁翼淳)의 설에 의하면 약령시는 조선 효종 때 경남, 전남, 강원, 각 도의 감찰관이 그 도내 생산의 약재를 매상하여 이를 조정에 바치고자 각지 감찰사의 소재지인 대구, 전주, 원주에 명 령으로 약시를 설치케 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주된 약령시는 약재의 생산과 출회가 가장 많은 경상 도의 대구, 전라도의 전주, 강원도의 원주 시장이었고,18 이 세 시장 은 약초의 채취와 출회 시기의 이르고 늦음에 따라 원주에서 시작하 여 대구를 경유하여 전주에서 끝나고, 또 각 약령시의 거래방법 관부 와의 관계 등은 대체로 다음 대구 약령시의 사례와 같았다.

즉 조선 시대에, 대구 약령시는 음력 2월과 10월, 곧 봄가을 2회에 열렸고, 이 시를 열고자 할 때는 상인업자 중에서 선출된 대표자가 대구부사에 계출(屆出)하고, 부사가 감찰사에게, 그리하여 감찰사가 중앙 정부에 보고하고, 중앙 정부는 각 도에 영시 개시의 뜻을 통첩 하였다.

이 시장에 등장되는 약재―한국산과 중국산―는 수백 종에 이르 렀다. 출시자로서 공급자 측은 국내 각지의 약초 재배자, 채취자 및 상인 등이었고, 수요자 측은 국내 각지에서 모여든 의생(醫生) 및 가 정(家庭) 수요자 등이었다. 거래는 상인과 의생 간에는 도매적 대량 매매가 행해졌고, 생산자와 수요자 간에는 일반적으로 소량이 거래 되었다. 그러나 일반 가정 수요자라라도 그 중에는 가족 및 근친의

17 이 장의 자료는 주로 文定昌(1941, 19-33)을 이차 인용.

18 이 밖에 공주, 진주, 청주, 충주 등지에도 약령시가 섰으나 오래 지속되 지 못했다.

일 년간 소요량의 의제 및 건강제를 한꺼번에 매입하기 때문에 1회 의 거래액이 상당액에 달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약령시에서 중국에 조공할 것과 조정에서 쓸 것을 사들였 다. 그 매상 방법은, 인삼은 관찰사가 영시에 모여든 상인 중에서 선 택된 이름 있는 경삼상(京蔘商) 6인과 향삼상(鄕蔘商) 6인, 계 12인의 상인에게 인삼을 납품케 하고, 심약역(審藥役)으로 하여금 이를 검사 케 하여 수매하였다. 복령(茯笭), 복신(茯神) 등은 관찰사가 의생 중 에서 복령접장(茯笭接長)을 선임하여 시장에 나온 것 중에서 심사 수매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의 수매 행위가 종료되기 이전에는 일반의 거 래가 허용되지 않았다.

약령시에는 조정의 매상 등과도 관계가 있으므로 가장 정선된 약 재를 출시하였기 때문에 신약(新藥)으로서 세상의 신용이 극히 두터 웠고, 약령시의 권위도 높았다.

약령시는 관찰사의 관리에 속하였고, 감영(監營)은 약령시에 관한 시설, 경찰, 청원(請願) 및 재판 등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약령시는 조선 말 갑오개혁 때 중국에 조공하던 것을 폐지하면서 조정의 매상량이 크게 감소하였고 또 국내 행정의 개혁, 대동법 폐 지 등에 의한 지방관의 조공을 위한 매상이 전폐(全廢)되었으므로 따라서 공시(貢市)의 기능을 상실하고 보통의 민간시장으로만 머무 르게 되었다.

3.2. 가축시장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가축은 소이다. 소는 그

기원이 극히 오래이고, 이미 삼한 시대부터 보급 발달되어 역용(役 用), 식용 외에 승용에도 널리 사용되고 특히 가인(嫁人) 및 가취(嫁 娶)에는 소를 탄 행렬이 성했다 한다.19

신라 이래 역대 조정은 소의 증식, 치병(治病), 도살의 제한 및 우 계의 설치 등, 소의 증식 장려에 힘쓴 사례가 많으며, 농가로서도 한 두 마리의 소를 소유하지 않는 자는 농가의 축에 끼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소의 매매교역에 관해서도 예부터 우시장이란 제도가 발 달하여 가축시장이 일반 정기(보통)시장과 마찬가지로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의 우시장은 전문적으로 특설된 것은 거의 없 고 보통시장(장시)에 부설된 것으로서 요즘이나 마찬가지로 보통시 장에서 몇 마장 떨어진 별도로 구획된 장소에서 개설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가축시장은 앞 장의 장시 부분에 이미 포함되어 다루어졌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3. 국제교역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