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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개국과 동시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김에 따라 신도시 건설계획의 일환으로 시장을 개 설하는 것은 당면한 문제가 되었음은 족히 상상할 수 있다. 그리하 여 조정은 전조의 시장제도를 모방하여 태조 원년(1392)에 우선 경 시서(京市署: 후에 평시서(平市署))를 설치하여 시전의 관리, 도량형 기의 단속, 물가의 억제 등에 관한 행정사무를 관장케 하고, 정종(定 宗) 원년(1399)에는 서울의 종로가에 관설의 공랑 즉 시장옥(市場 屋)을 설치하고, 시장시설을 정비하여 상인을 수용함으로써 시장의 발달과 국도의 발전을 꾀하였다.1 이 시전은 그 규모가 비교적 커서

1 “太祖元年, 因麗制, 置京市署, 掌句檢市廛, 平斗解丈尺, 低抑物貨等事, 定宗元年, 始置市廛, 左右行廊八百餘間, 自惠僑至于昌德宮洞口”(증보 문헌비고 제163권). 영조 때 평시서의 직원은 영(令) 1명, 직장(直長) 1 명, 주부(主簿) 6명, 서원(書員) 5명, 고직(庫直) 1명, 사령 11명, 합계 25 명에 달하였다. 한편 공랑(公廊)은 每間(一座)을 20척으로 나누어 번호 를 전포마다 매겼으며 사용자는 봄가을 2회에 걸쳐 저화(楮貨: 종이 돈) 20장씩을 사용료로 냈다. 공랑의 사용자는 이를 세업(世業)으로 하거나

현재의 종로1가에서 창덕궁 입구까지에 이르러 왕도의 상업 중심을 이루었다. 「태종실록」에는 “시전을 정하다. 大市는 장통방 이상, 미 곡잡물은 동부 연화동 입구에서 남부 훈도방, 서부 혜정교, 북부 안 국방, 중부 광통교까지, 우마는 장통방 하천변, 그리고 여항소시(閭 港小市)는 각각 소거(所居)의 문전에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 당시 이 공랑은 수많은 전포로 구분되어 각종의 상품을 판매한 것 이 명백하나, 이와 같은 관설 전포를 설치한 주목적이 왕실 및 지배 층의 수요를 충족할 공물 상납의 필요에서 온 것인 데다가 가격 또 한 매우 높아 일반 백성은 종로 공랑 밖의 다른 시장에서 일상필수 품을 공급받으려 한 것 같다.

한편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 인구의 팽창과 시가지의 확장으로 종 로 시전만으로는 좁고 복잡하여, 후에 한양에는 정기적으로 한낮에 다수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모여 상품의 매매교환을 행하다가는 점 차 상설 시전이 되었다. 이현(梨峴: 동대문시장), 소의문(昭義門: 서 소문) 밖, 마포, 동대문, 남대문(칠패(七牌)) 시장 등이 생겨 동부는 과채, 남부는 해산물이 거래되었고 속칭 ‘남은 술, 북은 떡(南酒北 餠)’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만큼 발전하였다.3 18세기 초, 이 지역의 시전이 종로의 관상도고(官商都賈)에 대한 사상도고(私商都賈)의 중 심 거점으로 대규모 난전의 총본산이 되었다.

처음 공랑이 설치된 초기의 각 시전은 1間(1座)당 가로 20척 세로

또는 자유로이 그 사용권을 매매할 수 있었다.

2 태종실록 권19, 태종 십년 이월 갑진조.

3 「京鄕雜誌」 제13집, 1910, p. 353. 시포조(市舖條)에 쓰이기를 “緞紬紙 布諸大舖, 狹鍾街而居, 餘皆敬處, 凡趨市者, 晨集于梨峴及昭義門外, 午 集于鍾街, 一城三所需者, 東部菜七牌魚爲盛, 南山下善釀酒北部多賣餠 家, 俗稱南酒北餠.”

12척으로 그 경영규모도 대동소이하여 우세의 차이가 거의 없었으 나 왕도(王都)의 번영과 상업이 점차 번영하게 되자 자연 시전 간에 는 영업겸병(營業兼倂), 자본 편재(偏在) 등에 의하여 그 실력의 차 이가 생겼다. 특히 조정(왕실과 육조)의 용달을 독점적으로 맡게 된 시전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즉 조정은 각 시전 중에서 실력 있는 자를 선택하여 유분전(有分廛) 이라 하여 국역(세금)을 부과하되 능력에 따라 1푼(分)에서 10푼의 10등급으로 하고 국가 전안록(廛案錄)에 등록시키는 대신 금난전권 (禁亂廛權)―난전(亂廛: 오늘날의 무허가 유사 상인)을 금하는 권한

―을 부여했다.

즉 이와 같이 등록된 시전이 아니고는 그 시전이 취급하는 물품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긴 난전에 대하여는 국역전(國役廛) 관계자로 하여금 이를 포착하여 관에 인도 또는 물품을 압수하게 하 거나 또는 관이 직접 포착하여 매매한 물건을 압수하는 것은 물론 일정률의 벌금에 처하되 그 물건의 평가액이 이에 미달할 때는 벌금 대신 태형(80장)을 가하였다.4

당초 공랑이 설치될 무렵에는 시전에 대하여 봄가을 2회에 저화 (楮貨) 20장씩(일반 상가에는 4장씩)만 거둬들이고 그 외의 국역은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인조(仁祖) 15년 (1638) 국가재정의 핍박함을 해결하고자 시전 및 일반 상가에 대하 여 정식으로 국역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다.5 그러나 이때만 해도 국

4 “不係廛案而亂廛者竝禁斷, 京兆主管, 凡亂廛, 使市人捉告推治, 亂廛之 物折価, 不及贖錢則除贖杖八十, 諸廛旣有分役, 旦是都民恆業之所係 故 各廛物種之非廛人而私自賣買者, 許令廛人捉納法司, 謂之亂廛”(萬機要 覽 財政篇 用五各廛場)

5 “大典日)雖有公廊定說而, 今則(仁祖 임금 때) 市賈公廊皆無常稅, 勅使

역이란 것이 상시적 정액의 것이 아니고 중국의 칙사가 올 때라든지 또는 궁중의 제사, 장빙(藏氷), 관아 수리 등 임시로 국역이 필요할 때에 한하여 수시로 일반 상인과 공랑에 부과하였다. 곧, 그 무렵에 는 종래의 실물 징수가 폐지되고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나 대동미의 수입이 부족한 데에다 불의의 전란으로 국고는 바닥이 나 있었다.

그 후 시전에 대한 국역제도는 상시 부과의 방향으로 고착되기에 이 르고 유력한 시전에 대해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정률의 국역(세금)에 응하게 하는 대가로 금난전권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난전에 관한 금압특권(禁壓特權)은 처음에는 큰 시전(즉 육의전) 에 한하였으나 점차 국역이 가중되고 일반화됨에 이르러 작은 시전 에까지 이를 부여하여 영조(英祖) 때에는 한양에 그 수가 6푼(分) 이 상의 국역에 응하는 육의전이 6軒, 5푼 이하의 국역에 응하는 비전 (比廛)이 31廛―합해서 37개 유분전― 그리고 여느 때는 부과되지 않으나 임시로 국역이 발생할 때 이에 응하는 보충역 격인 10개 무 분전(無分廛) 등 합계 47전 외에도 기타 무분전(其他無分廛 49개)과 소소전(小小廛 28개)이 77개소이었다. 바꿔 말해 상시적 유분전은 37廛, 임시로 국역에 응하는 무분전이 10廛, 기타 무분전과 소소전 이 77廛인 것으로 분류된다.6 곧, 정부는 유분전이 납부한 물자만으

及祭祀, 藏氷及凡修理等, 雜役隨事支役苦歇, 無復無有定云(유성원, 磻溪 隧錄).”

* 참고로 저화에는 2종이 있었는데 저화 1장은 쌀 한 되에 준하였으며 20장은 상포 1필에 준하였다(증보문헌비고 권159, 財用考, 錢貨條).

6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攷)는 정조 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만기요람 (萬機要覽)보다 20~30년 전에 출간되었는바 이 책에는 조선 시대의 한양 (漢陽) 시전의 종류, 명칭, 전수(廛數), 응역액(應役額), 지명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善生永助 1929).

로는 필요한 물자를 채우기 위하여 영세 전포인 기타 무분전과 소소 전에게 강제로 그 비용을 부담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소전까지 금난전권을 갖게 되자, 각 전은 사람을 한성 안팎에 보내어 자기가 취급하는 상품을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작고 보잘것없는(至微至賤) 물건이라도 ‘난전'이라며 이를 포착(捕捉) 처벌했다. 정부는 이러한 폐단을 억제하고자 영조 38년 ‘난전폐절목(亂廛弊節目)’을 발포(發 布)하여 난전 금지의 특권을 17廛에 한정하였으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즉 금난전권의 지나친 행사 때문에 상품의 원 활한 유통이 저해되어 서울의 물가는 5배나 뛰고 품귀해지는 등 유 통경제의 혼란이 극심하므로 이 특권을 육의전에게만 한정하고 가 급적 사상인(私商人)의 도소매영업 행위를 허용하자는 의견이 제시 되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7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시장정책은 조선 정부가 처음으 로 유통 기능의 어용화(御用化)를 반성했던 정책이었다. 그러나 난 전절목과 신해통공에 따라 최대율의 국역 부담자인 육의전에만 이 특권을 부여했던 정부의 의도는 ‘일전다방(一廛多房)’이라는 교묘한 상략(商略)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그 효험이 무산되었다.8 일전다방

7 “正宗 辛亥(1791년) 蔡濟恭啓曰, 近來遊手之輩, 自作廛號, 人生日用物 種無不都庫, 凡物之貴, 五倍於昔, 請零瑣新設之廛號, 一竝革罷, 六矣廛 外, 物許亂廛(萬機要覽 各廛條).”

8 육의전(六矣廛)의 어원에 대하여는 의논이 다기하나 대체로 육조(이, 호, 예, 병, 형, 공의 각 부)의 용달을 맡은 어용상인들로서 시대에 따라 용달 상품이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보통 주단(紬緞), 포목, 저마포(苧麻布), 지 물, 육어류(肉魚類), 기타(모자, 혜류(鞋類), 銀器)의 6개 전문전을 두고 말한다(善生永助 1929, 15-17). 원래 육주비전(六注比廛)은 “準(比) 六矣 廛”이라는 뜻으로서 31전의 유분전(有分廛)을 지칭했으나 정조 시대에 이르러 6개의 육의전과 혼용되기 시작하여 萬機要覽이나 增補文獻備考

은 다수의 동업자가 육의전의 한 간판 한 처마 밑에 여러 헌(軒) 내 지 수십 헌의 부분점 또는 전문점을 형성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어 물을 파는 어물전에는 다수의 각종 어물 전문점이 육의전이라는 하 나의 간판 아래 다점(多占)경영의 복합체를 이루었다―독과점업체 의 카르텔화와 비대화를 촉진하였다.

이처럼 조선 말 카르텔화한 육의전의 조직 내용을 文定昌(1941, 39) 씨에 의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육의전의 건물은 대헌(大軒)을 이루고 이를 여러 방(房)으로 나 누고, 방을 다시 여러 칸[間]으로 갈라 매 한 칸마다 한 영업자 가 전포를 경영하였다.

2) 그리하여 이들 각 독립한 영업 전주들을 그가 속하는 육의전에 도중(都中: 조합의 일종)을 조직하고, 도가(都家: 조합사무소) 를 설치하여 다음 각종 사무를 처리케 하였다.

3) 즉 관에서 육의전이 부담할 국역을 도가에 명하면, 도가는 이 를 각 房 각 廛의 도원(都員)에게 균일하게 분배 징수하여 상납 하였다.

4) 육의전의 금난전 특권은 도중에 의하여 행사되고, 도중은 난전 자를 발견했을 때 이를 붙잡아 평시서(平市署)에 넘겼다.

5) 도원(都員)은 도중에 대하여 회비를 납부하고, 도중의 규약을 준수하는 외에, 영업의 수행에 관해서는 도중으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신규 도원으로는 도원의 자식 또는 사위 이외에 가입함을 허락지 않으나, 단 특례로서 도중

5) 도원(都員)은 도중에 대하여 회비를 납부하고, 도중의 규약을 준수하는 외에, 영업의 수행에 관해서는 도중으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신규 도원으로는 도원의 자식 또는 사위 이외에 가입함을 허락지 않으나, 단 특례로서 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