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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행정, 시장세, 시장금융

라. 북관개시(北關開市)

5. 시장행정, 시장세, 시장금융

조선 시대에 일찍이 경시서(京市署: 후에 平市署)가 설치되고 공 랑을 세웠으나 이는 다만 도시의 시전에 관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도량법(度量法)을 시행하고,27 국폐(國幣)를 유통시키며 물가를 조절 하여 폭리를 억제하고 상인을 보호하면서 세금과 공물을 부과하는 등 일견하여 제반 시장제도가 정비된 것같이 보이나 실상은 상업을 천히 여겨 시장 행정은 극히 불비하였고, 시설은 보잘것없었으며, 부 당히 상거래에 간섭하거나 가렴주구를 방관 방치하거나 특정 상인 단을 지나치게 비호한 나머지 상업 발달은 교각살우(矯角殺牛) 격이 되었다.

27 증보문헌비고(권지 163, 市糴孝)에 의하면 영조 45년에 특별 교시를 내 려 “시장에 상인들의 곡물을 살 때는 대두(大斗)를 사용하고 팔 때는 소 두(小斗)를 쓰는 행위를 엄금케 하다. 그리하여 관이 인정하여 낙인(烙 印)한 되와 말에 한하여 사용케 하다.”

특히 지방의 장시 중에는 지방관 또는 유력자가 공물, 기타 사세 를 징수할 목적으로 개시한 것이 적지 않았으며, 장시에 대한 행정 으로는 세금을 징수하는 일 이외에는 시설의 보수라든지 특별한 보 호 육성 조치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앞서의 사세(私稅) 또는 국세를 징수하고 시장을 감독하기 위해서는 시장 내에서의 유력자 (상인)를 장감효(場監孝: 또는 유사(有司))에 임명하고 그 지휘 아래 거래케 하였으며, 장감은 중매인처럼 출품자를 위해 원매자(願買者) 를 구하고 중개(仲介) 두량(斗量)을 해 주어 상당한 구전을 매방(賣 方)으로부터 징수하기도 했다.

어떤 지방에서는 장감(場監)을 두는 대신에 시장 소재지에 있는 객주, 여각, 심지어 주막 주인, 또는 시장 행상자(보부상)에게 출장상 인을 대표하여 장할(場割: 장감독)을 맡겼다. 그런데 장시를 순회하 는 보부상은 대개 별도로 일시일인(一市一人)의 감독자(유사)가 있 으며 다시 여러 개 장시가 연합하여 총감독자를 두었다.

요컨대 조선 말엽의 지방시장은 그 개설, 관리, 경영 등에 대하여 일정한 방침이 전혀 없었고, 지방의 관헌과 객주, 여각, 보부상, 주 막 등에 의하여 시장의 이익이 농단(壟斷)되는 불합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시장에 대한 각종 법제도나 조치도 따지고 보면 정부의 국고 충당 및 시전 객주 보부상에 대한 반대급부적 상권 보호에 집중된 감마저 없지 않다. 또한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각종 경제사범에 대한 죄형을 나열하고 있는데,28 “정치가 부패문란한 조선 시대의 시장

28 예컨대 “백주(白晝) 장시에서 화물을 약탈한 자나 여인을 겁간한 자는 똑같이 목을 점(斬)한다.” “상가에 사사로 부탁하여 당물을 사들인 자는 둘 다 장일백(杖一百), 도삼년(徒三年)에 처한다.” “시가(市價)를 속인 자, 되․말 등을 속이는 자, 쌀을 조악하게 한 자, 외상을 빙자하여 전인

경찰은 전혀 기강이 서 있지 않았고 시장 경영에 임하는 자가 상인 과 구매자로부터 가렴주구를 일삼고 장날에도 도박과 도적이 횡행 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 이외였다(善生永助 1929).” 이와 같은 상태 는 善生永助 씨가 「조선의 시장경제」를 집필할 당시(1929)에도 계속 되고 있었으니 이 같은 비방을 일제 당국자도 들어 마땅할 것이라 본다.

조선 시대의 시장 세제(稅制)는 전술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상의 요구에 의해 서울의 시전에 대하여는 국역(세금)을 부 과하고 지방장시의 상가에는 산업진흥책으로 무세주의(無稅主義)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방 장시에 대한 무세주의는 거의 시 행되지 않았다. 예컨대, 영조 당시의 군문, 관가, 지방 군영 및 군수 등이 한강 연안에서의 선세(船稅), 지방 장시에서는 시장세(市場稅) 를 거두는 폐단이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29

조선 중엽 이후 시장세는 일종의 지방세 거래세의 성격을 띠게 되 어 중앙정부(조정)의 계속적인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보급 되기에 이르렀다. 시장세에는 노부세(路浮稅)와 매매세(賣買稅) 2종 이 있었다.

노부세란 장시에 입장하는 자로부터 일정액을 징수하는 입장세 또는 시장사용료라 볼 수 있고, 매매세는 시장에서 매매되는 상품의 판매액에 대하여 보통 100분의 1을 매방(賣方)으로부터 징수하는 고 율의 세금이라 할 수 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행상에는 노인

(廛人)에게서 권매(勸買)한 자, 전안(廛案)에 등록하지 않고 난전한 자 는 모두 엄단한다.” 등.

29 “侍讀官權叔 曰 各邑場稅之幣, 有此革罷之命, 大抵場稅, 終爲聚斂之 歸.” “洪致中 曰 … 至於外方場市, 亦皆有徵稅之事, 此事雖甚微瑣, 其 爲生民之害則甚矣 ….” (증보문헌비고 권지 165, 市糴考 鄕市條).

(路引)을 급하여 수세(收稅)함”이라 적힌 것을 보면 마침내 시장 상 인에게 영업 감찰을 교부하면서까지 과세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에 이르러 지방 관리 중에는 각종 명목으로 시장 및 장내 거래자에게서 사세(私稅)를 징수한 자가 많아서 그 폐해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이 외에도 관아의 수용(需用) 과 군영의 용도를 핑계하여 물품을 강제로 징발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 같다.30 또 매매세, 노부세 외에도 통과세―관세(關稅), 진세(津 稅: 나룻세), 복세(卜稅), 양향세(糧餉稅: 수월세(手越稅)) 등―이 있 었다. 통과세는 상품이 갑지로부터 을지로 수송될 때에 매기는 것으 로서 육로 및 하도(河道: 강)를 따라 중요한 지점에 설치했던 번소 (番所)에서 징수했다. 「한국지(韓國誌)」에 의하면 구한국 말 낙동강 에는 25리 사이에 4개의 번소가 있었으며, 경상도에만 그 수가 17개 에 달했다고 하니 한 화물(상품)이 경상도를 육로나 강로를 통과하 자면 최소 3중 4중의 통과세를 내야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번소를 관리하는 자는 대개 하급 관리들로서 어느 기간을 정하여 일정 세액 을 미리 납부한 대가로 통과세의 징수권을 얻어 그 차액을 취득하는 일종의 공인계급과 같았다.

조선 시대 농공어민을 포함한 전 국민이 부담한 공물(현물 납세) 은 팔도에서 생산되는 온갖 산물을 모두 망라하였다. 때문에 그 징

30 조선 시대의 시장세가 얼마나 가렴주구했는지는 정약용의 목민심서 1절 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但市場塩稅, 必令軍校之悖 戾者爲之, 劫貨攫米, 縱盜行賊, 邑中豪商, 与之庇護, …, 喪其錢糧, …, 又有一種奸宄, 亦手入市, 自作牙僧, 專壇 市權, 栗米執升斗之權, 布帛執尺度之權, 綿絮執衡秤之權, 以至鱻薧醓醢 之肆, 棗栗梨柿之廬, 甕罌碟之列, 牛馬雉鷄之傷, 皆待此人, 以定其估, 左 右交瞬, 操縱惟意, 牧宜兼察, 執其尤無良者一二人, 嚴治勿饒, 庶平百人 知所戢矣.

수의 어려움과 번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공물을 먼저 대 납하고 그 ‘대가+차액’을 일반 국민으로부터 정부를 대신하여 징수 하는 공인계급이 발생하였고 그들의 폐해―예; 율곡의 「동호문답(東 湖問答)」에 “백물(百物)을 사비(私備)하여 관사(官司)를 우롱하고 백 성을 조당(阻當)하며 사비의 物을 납입한 후 그 100배의 가금(価金) 을 삭요(索要)하다 ….”고 함―는 실로 그 극에 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는 공용 물품을 납입하는 대가로 관사 로부터 대동미로 대가를 지불받아 그 차액을 갈취하는 과정에서 국 고를 탕진하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더욱이 대동법 실시 후에도 일반 국민의 직접적 공납제가 완전히 철폐되지는 않았다. 진상, 상납, 기 타 각종 명칭의 현물 부담은 그 전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대납제(代納制)에 의한 공인(貢人)들의 날뜀은 더욱 악질 화하였을 뿐이다.

끝으로 시장에서 금융은 유통 비용의 고하, 매매자의 이해, 거래상 의 편리 여부 면에서 대단히 중요함에도 조선 시대에는 하등의 공식 금융시설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시장금융은 ‘시변(市辺)’이라 하여 객주 및 금융업자에 의해 행해지거나 또는 거간 및 중개업자가 화물 의 중매를 하는 일방 금융의 중개를 취급하였다. 지방행상 조직이 발 달한 개성상인은 일찍이 금융의 유리한 점에 착안하여 전국 각지의 시장에 출입하면서 금융 활동을 아울러 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장에 있어 돈을 빌리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소상인 또는 지방의 농민이다. 장날을 이용하여 필요한 자금을 융통하는 이들은 대개 자산이 적은 자들로서 담보물이 없이 돈을 빌리므로 금리가 대 단히 높아 고리채에 시달리게 된다.

시장금융의 방법과 명칭은 지방에 따라 일변, 월변, 연변, 시전(市 錢), 체계(替計)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체로 장날을 기준으로 하

여 다음 어느 장날까지 원리금을 분할상환하거나 또는 일시에 상환 하는 시변 또는 장변(場邊: 장돈)이 가장 많이 쓰였다. 앞에서도 말 했지만 개성상인들은 예부터 전국의 시장을 순회 행상하면서 시장 금융에 손을 뻗쳐 그 세력이 대단했으며 특히 경기도, 황해도 및 평 안도 방면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한다. 예컨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는 ‘시변리(市辺里)’라는 市場(장)이 4․9일에 섰으 며, 이날은 개성의 금융업자가 대금업 점포를 열어 자금을 대부해 주었다. 이와 같은 개성상인에 의한 시장금융업은 조선 초기부터 행 해진 것으로 보이며, 이들이 발행하는 어음은 전국 어느 곳에서도 널리 통용되어 지방관사(地方官司)가 송금을 할 때에 이를 자주 이 용할 정도로 그 세력과 신용이 방대하였다.

정부가 주도하는 이렇다 할 금융기관이 부재하고 유통금융의 길 이 이들 사설업자 이외에는 전무하여 그 이율의 높음과 금융조건의 가혹함은 조선 시대 시장경제의 위축과 일반 산업의 쇠퇴 및 서민 가계의 압박을 촉구하는 또 하나의 큰 요소를 이루었다 하여도 과언 이 아니다. 여러 기록을 보면, 당시의 시장 금리는 한 장장(場, 5일) 에 2%(월 12%)로부터 유효 이자율 월 20%가 보통일 정도였다(善生 永助 1929, 306-307). 대부분의 경우 1원을 빌려 5일장마다 22전씩 5 회에 걸쳐 갚아 나가는 방식이었으며, 이는 유효 이자율(effective interest rate)로 따져 월 20%에 상응한다. 이와 같은 고리채의 희생

정부가 주도하는 이렇다 할 금융기관이 부재하고 유통금융의 길 이 이들 사설업자 이외에는 전무하여 그 이율의 높음과 금융조건의 가혹함은 조선 시대 시장경제의 위축과 일반 산업의 쇠퇴 및 서민 가계의 압박을 촉구하는 또 하나의 큰 요소를 이루었다 하여도 과언 이 아니다. 여러 기록을 보면, 당시의 시장 금리는 한 장장(場, 5일) 에 2%(월 12%)로부터 유효 이자율 월 20%가 보통일 정도였다(善生 永助 1929, 306-307). 대부분의 경우 1원을 빌려 5일장마다 22전씩 5 회에 걸쳐 갚아 나가는 방식이었으며, 이는 유효 이자율(effective interest rate)로 따져 월 20%에 상응한다. 이와 같은 고리채의 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