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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북관개시(北關開市)

5. 정기시장의 상인과 출시자

5.2. 이동상인

재래시장에서 상인의 중심 세력을 이루는 자는 전기 상설점포 외 에 각 시장의 개시일을 따라서 시장을 순회하는 시장행상인이 있었 다. 당시 시장행상인 중에는 보부상, 떠돌이 매출상인, 수집상인 및 시장대금업자 등이 있다.

보부상은 일제 지배와 더불어 왕년의 행상대(行商隊) 또는 길드 (guild) 같은 단결력과 정치적 세력이 꺾이었다.17 지방시장에서는 권력의 비호 아래 일인의 상설점포가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그 수가 줄어들었고, 각종 단속과 취체(取締)로 인해 세력이 쇠퇴하였다. 그 러나 지방에서는 자연발생적인 보부상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이들은 몇 명 또는 몇십 명이 서로 무리지어 시장을 돌아다니어서 마치 조 선 때의 보부상대(褓負商隊)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 은 지방시장의 불가결한 구성 요소로서 시장과 시장 간의 연락을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소규모 시장은 이 보부상의 순회 여부로 그 번영 이 좌우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방에 시장이 신설될 경우 그 시장의 번영회는 시장의 유지 번영책으로 이들 이동상인의 출시 유치에 상당히 주력하였다.

보부상은 일제의 갖가지 탄압에도 불구하고 일반 민중이 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역설적 과도기적 상태에 있었으며 일제 말기에

17 일제 지배자들은 보부상의 조직과 단결력을 대단히 두려워했으며 경계 했다. 첫째는 그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무서워했으며, 둘째 경제적으 로 전국 곳곳에 일인 상업자를 침투시키는 데 있어 가장 큰 저해요인으 로 보부상의 존재를 들었다. 따라서 직접 간접적인 이들에 대한 탄압은 식민지 정책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그 결과 보부상 조직은 점차 와해되 었다.

는 전국에 1만 내지 1만 5천 명 정도가 존재하였다.

시장에서 ‘떠돌이 매출상(賣出商)’은 주로 농가, 농민, 어민에게서 직접 곡물․과실․채소․닭․달걀․신탄 그리고 선어․염어(鹽 魚)․건어 등을 조금씩 사들여 이를 시장에 판매하는 자로서, 이들 상인은 지난날의 보부상과는 달리 그 규모가 아주 작고 개인 단독적 이며 보부상 조직이 몰락하기 시작한 일제 중기에 현저히 발달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농가의 뜰 앞까지 들어가 벼, 보리 등을 조금씩 사들여 시 장의 정미소 또는 곡물상에게 파는 자; 농원에 가서 배, 사과, 무, 배 추 따위와 과실, 소채 등을 사들여 이를 시장에서 파는 자, 농가를 순회하며 닭, 달걀 등을 사들여 시장에서 수요자 또는 상인에게 다 시 파는 자, 어촌 이곳저곳에서 선어를 매입하여 시장에서 판매하는 부녀자 ‘머리짐장수(戴商)’ 등을 말한다.

이들 매출상인은 촌락과 장을 찾아 돌아다니므로 보부상과 같이

“장돌림”이라고도 칭했으며, 지방에서 출하기관 즉 물자의 수집․

반출자로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시장의 수집상인에는

- 벼의 매입을 하는 개항지 등의 큰 정미소의 출장원(出張員) - 농가의 부녀자나 농부가 이고 지고 하여 운반하여 오는 소량의

쌀과 보리, 기타의 곡물을 매집(買集)하여 다시 파는 부녀자 백 미상(白米商)

- 한지와 직물 등의 지방 특산물을 매집키 위해 내집(來集)하는 독 립된 상인

- 서울, 부산, 대구, 기타 도회지의 대상인의 출장원

- 군 농회의 알선에 의하여 판매하는 잠견, 면화 등을 매수하러 나 온 제사공장 및 조면공장의 출장원

- 시장에 집합된 과실, 채소, 닭, 달걀 등을 매집하여 이를 도회지 에 운반 판매하는 잡화상 등이 있었다.

이들 수집상인은 매출상보다 한 단계 상위에 있어서 시장에서 집 합되는 물자를 처리하고 도시와 농촌시장을 연결하는 중요한 기관 이다.

시장상인을 서술하면서, 場에서 중국인 세력의 소장(消長)을 아울 러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은 예부터 지리적, 정치적 관계 등에 의해 우리나라와의 통상 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870년대 한국에서 일․중․러․영․불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열국쟁패시대에는 우리나라에 내무하는 중국인 이 점차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일청전쟁의 관계 등에 의하여 일시 그 세력의 좌절을 보게 되었다. 그러던 차, 중국인들―근면하고 생활비를 적게 쓴다고 알려졌다―이 1912년부터 다시 한국에 진출하여 1922년 말경에는 3만여 인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 중국인은 인천, 부산 등을 중심 근거지로 하여 풍부한 자금과 본국에서 수입하는 견포, 마포, 기타의 풍부한 상품을 가지고 그 경제 규모가 대단히 커서 단연 국내 포목상의 상위에 군림하였다. 이들의 독특한 요리점도 한몫을 하였다. 중국인 직물상 및 요리점 등이 발달, 전국의 각 주요 시장에 깊이 뿌리를 내려 한국인 직물상 등이 감히 경 쟁을 시도해 보지 못하도록 우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또 중국 상인 이 조선에서 특이하게 발달한 것이 ‘야채팔이’였다. 처음엔 지방의 시 장 또는 농가에서 야채를 매수하여 이를 시가지의 가정에 팔고 다녔 으나 후에 스스로 도시 부근에 전지(田地)를 소유하고 야채를 경작하 여 시가지에 행상하고, 한때 그 수가 약 2천 명이 되어서 국내의 야채 상 중 단연 우세를 차지하며 거의 독점 상태에 들어갔을 정도였다. 그

러던 것이 1930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1931년 만주사변(滿洲 事變)의 영향으로 중국인의 세력이 모두 퇴거하여, 근근이 음식점 등 에 그 잔영을 남기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시장에서 주된 음식점은 일부 일본식 여관․요리점, 중국요 리옥, 한식은 ‘여관 겸 음식점 영업(주막)’,18 순 음식점, 병점(餠店:

떡집) 등이 있었다.